우동에도 1천 가지 맛이 있을까? 간장국물에 면뿐인 우동이 ‘거기서 거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재료가 단순할수록 맛의 차이는 오히려 큰 법이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쯤이면 늘 일본의 가가와(香川)현이 떠오른다. 우동 때문이다. 물론 일본 정원, 단풍도 아름답다. 한국에서 수많은 우동집을 다녀봤지만 아직 사누키에서 먹어본 우동맛과 비교할 순 없다

원조란 이렇게 무섭다. 수백 년 노하우가 우동 장인들에게 DNA로 대물림됐는지도 모른다. 사누키 사람들은 밥알을 씹기 전 우동국물을 마셨고, 밥처럼 우동을 먹으면서 자랐다. 그게 대를 이어 내려왔으니 그들의 우동에 깊은 맛이 날 수밖에 없다.

우동에 죽고 우동에 사는, 가가와현
가가와는 일본에서도 깡촌이다. 일본은 크게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쿠 크게 4개 섬으로 나뉘어 있다. 가가와는 시코쿠 섬에 있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가 세토내해(세토나이카이).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이곳에 일본이 30년에 걸쳐 다리를 놓았는데 혼슈의 오카야마에서 가가와의 사카이데를 연결한 세토대교다(세토대교를 일본 교량기술의 상징이라고 한다).

가가와의 옛 이름은 사누키(讚岐). 사누키 우동은 바로 옛 지명에서 나온 것이다. 가가와가 일본 우동의 메카가 된 것은 일본에서도 좋은 밀가루를 생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누키 우동의 역사는 1천2백 년이나 됐다. 서기 806년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승려가 일본에 돌아오면서 밀가루 국수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 사누키 우동의 시초다. 당시에는 수제비처럼 손으로 뚝뚝 뜯어서 삶은 뒤 소금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가가와현 주민들에게 사누키 우동은 자부심이다. 가가와현의 대표 상품이기도 하다. 가가와현의 어느 식당에서도 우동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우동 전문점도 셀 수 없이 많다. 논바닥 한가운데도 우동집이 있고, 수백 년 된 적산가옥 우동집도 있다. 거리에는 우동집을 안내하는 우동택시도 있다. 가가와 지방에는 `‘우동 먹는 배는 따로 있다’는 속담까지 있다. 가가와현의 현청소재지인 다카마츠에만 20여 개의 우동학교가 있다. 가가와현의 밀가루 소비량은 일본 평균의 7배나 되는데 다 우동 때문이라고 한다.

우동맛은 일본 어느 곳보다 뛰어나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는 해외 순방을 할 때에도 전용기에서 사누키 우동을 먹었다고 한다. 가가와 출신의 오호히라 전 총리는 고향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사누키 우동집으로 달려갔을 만큼 우동에 죽고 우동에 사는 곳이 가가와다.

쫄깃한 면발은 ‘후루룩’ 소리가 나게 먹어야
가가와현의 관광코스 중 하나는 우동학교다. 커리큘럼이 있는 정규학교가 아니라 우동 만드는 법을 배우는 가게다. 고토히라의 나가노 우동학교를 들렀더니 벽에는 이 학교를 다녀간 명사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만화 ‘철완 아톰’으로 유명한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와 사진도 붙어 있다. 14세 때부터 우동을 만들었다는 교장 마쓰나가 스미코(松永登子)는 “사누키 우동의 가장 큰 특징은 쫄깃한 면발”이라고 한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갈까? 천만에. 밀가루와 소금물 외에는 다른 것을 섞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전분을 집어넣으면 쫄깃하긴 하지만 뒤끝이 담백하지 않다.

소금을 넣은 물과 밀가루를 섞는다. 밀가루로 반죽한 뒤 비닐로 싸서 발로 밟는데 오래 밟을수록 좋다. 이때 기포가 없어지면서 면발이 쫄깃해진다. 즉시 먹어도 되지만 숙성하면 맛이 깊어진다. 겨울에는 상온에 3시간 이상 놓아둔다. 밀대로 밀어 칼국수처럼 썬 뒤 맹물에 삶는다. 다시마와 멸치, 카츠오부시를 넣어 미리 끓여둔 국물에 담아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게 전부다. 너무 쉽지만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손의 기운, 발의 기운, 반죽시의 리듬감…. 이런 미묘한 것들 때문에 맛이 달라진다.

올리브 공원 풍차
가가와 야마다야(山田家)는 대를 이어온 우동집이다. 당시 주인은 한국인 제자도 있다고 했다. 이 한국인 제자는 나중에 분당에 문을 열었다. 우동 종류는 많다. 가케우동도 있고, 날계란을 풀어먹는 가마타마우동도 있다.

세상 모든 음식은 먹는 데도 단계가 있다. 고기도 처음엔 양념 맛으로 먹다가 다시 구이로 먹고, 나중에는 육회로 먹는다. 우동도 처음엔 간장우동으로 시작해서, 계란우동으로 넘어가다 마지막 단계에는 가마우동에 꽂힌다.
가마우동은 나무통에 우동 면발을 삶은 물에 담아내는 우동이다. 우동 삶은 물에 담가 먹는 우동이다. 국물의 비릿한 냄새와 담백함이 좋다. 간을 맞추기 위해 쯔유라는 일본 간장에 한 가닥 찍어 먹는다.

먹을 때는 후루룩 소리를 내야 한다. 우동가락이 목청을 쳐야 된다는 게 사누키 사람들의 우동 먹는 법이다.

일본의 이상향, 리츠린 정원의 아름다움
우동을 먹었으면 다카마츠 시내에 있는 리츠린(栗林) 정원에 가야 한다.
정원을 보면 일본과 한국의 세계관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정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오카야마의 고라쿠엔이지만 일본 사람 중에는 리츠린 정원이 더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보려면 2시간 이상 걸린다. 75만㎡나 되는 정원에는 7개의 큼지막한 호수와 13개의 자그마한 전망대가 있다. 17세기 중반 사토시 영주가 짓기 시작했다.

우동집 거리(사진 위), 세토내해(사진 아래).
1백여 년에 걸쳐 완성된 리츠린 정원에서 가장 희한한 것은 소나무다. 정원 내 1천4백 그루의 소나무 가운데 1천 그루는 특별 관리한다. 마치 분재를 연상시킬 정도로 이리저리 가지가 휘어 있다. 소나무가 높이 자라지 못하게 가지를 붙들어 매서 만든 것이다. 호수에는 형형색색의 비단잉어가 뛰놀고, 왜가리나 까마귀 같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깨끗하고 아기자기하다.

일본 사람들은 정원을 이상향으로 본다. 그래서 일본 정원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딴 세상으로 꾸며놓는다. 일본 민족학박물관장을 지낸 민속학자 이시게 나오미치는 “일본의 모든 정원은 이상향이나 현존하는 명소를 압축시킨 것”이라고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 속에 인간이 동화되도록 꾸민 우리와는 딴판이다. 담양의 소쇄원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자연에 손을 대지 않고 정과 누와 각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정원이 무척 자연적이라면 일본의 리츠린은 드라마 세트장처럼 정교하다.

소도시마 협곡의 웅장함과 이국적인 풍광

가가와 민속 마을 단풍
단풍 구경을 하려면 소도시마(小豆島)를 찾아가는 게 좋다. 소도시마는 세토나이카이(세토내해)의 작은 섬이다. 세토내해 일대에는 1천여 개의 섬이 떠 있다. 우리로 따지면 다도해해상공원쯤 되는 곳으로 풍광이 아름답다. 세토내해에서 두 번째로 큰 소도시마의 면적은 153㎢. 강화도의 절반 정도다. 127㎞의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도는 데 2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크기에 비해 제법 명승지가 많다. 간카케이 협곡도 아름답고 올리브 공원도 좋다. 마치 잘 꾸며놓은 세트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간카케이(寒霞溪)는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코스라고 보면 된다. 흑산도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올망졸망한 섬이 떠 있는 다도해가 보이는 고갯길. 바다는 우리의 남해안과 비슷하다. 굽이진 고갯길을 타고 30분 정도 가다 보면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암봉을 둘러싸고 단풍이 든 활엽수와 파란 침엽수가 적당히 섞여 있는 산줄기는 자그마한 섬에 이렇게 산이 날카로울까 싶을 정도로 웅장하다. 비바람 때문에 단풍이 많이 지긴 했지만 협곡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설악산의 공룡능선이나 천불동 계곡을 한 토막 잘라온 것 같은 느낌이다.

협곡 사이에는 날이 선 암봉이 기기묘묘하다. 마치 산을 뚝 쪼개놓은 것처럼 갈라져 있다. 한쪽은 호시가조산(817m)과 다른 쪽은 시보자시산(777m)이다. 대부분이 경사가 급한 절벽 지대라 등산로가 따로 없다. 협곡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케이블카로 20분 정도면 협곡을 건널 수 있다.

소도시마의 또 다른 명소는 올리브 공원이다. 소도시마는 1905년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올리브를 최초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심은 백 년이 조금 안 된 올리브 나무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공원 내 2만4천 평에 심어놓은 천 그루의 올리브로 향료와 오일 등 다양한 관광 상품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공원은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풍차 같은 건축물과 올리브 농장, 온천 등으로 꾸며져 있다. 사진만 보면 여기가 그리스인지 일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훈훈한 옛 드라마가 살아 있는 곳
인근에는 영화 ‘24개의 눈동자’ 촬영지가 있다. 1954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영화화된 ‘24개의 눈동자’는 일본 최대 히트 영화 가운데 하나. 문부성이 추천하는 권장 영화로 지정돼 일본 학생들은 물론 일본인 대부분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소도시마가 일본에서 이름난 관광지가 된 것도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1925년 소도시마 노마진조 소학교 나노우라 분교에 부임해온 여교사와 12명의 제자의 학교 생활을 그린 것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팔려가는 아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학생의 이야기 등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섬마을 선생님과 순진무구한 학생들과의 훈훈한 이야기가 소재다.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를 배경으로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일본판 ‘사운드 오브 뮤직’ 쯤으로 보면 된다. 87년 리바이벌 때에는 `‘오싱’으로 유명한 다나카 유코가 주인공을 맡았고, ‘노란 손수건’ ‘남자는 괴로워’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낸 극작가 아사마요 요시다카가 극본을 썼다.

1만 평이나 되는 세트장은 일본의 옛 시골마을을 연상시킬 정도로 예쁘다. 나무로 지은 교사에는 당시의 교실 모습이 그대로 복원돼 있다. 1954년과 1987년의 영화 스틸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교실에 들어선 일본 관광객들은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다. 세트장 내 17동의 건물 중에는 ‘24개의 눈동자’를 상영하는 영화관도 있다. 영화관에서는 때마침 다리를 다쳐 할 수 없이 본교로 떠나야 하는 오오이시 선생을 두고 아이들이 배를 태워 직접 출퇴근을 시키겠다고 울먹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어촌 선생님의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99년에는 오부치 총리가 직접 찾아와 코스모스밭 가운데 있는 청동판에 ‘선생님 놀아요’라는 글씨를 써놓았다. 모델이 된 나노우라 분교는 1902년 설립됐다가 1972년 폐교됐다.

소도시마에는 폭 9.93m, 길이 2.5㎞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부치 해협, 기코만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백 년 역사의 마루킨 간장공장 등 볼거리가 많다.

‘24개의 눈동자’ 세트장(사진 위), 우동학교(사진 아래).
여행 길잡이
가가와현은 일본 47개현 가운데 가장 작은 현 중 하나다. 위도는 제주도와 비슷하며 연중 눈이 내리지 않을 정도로 포근한 편이다. 서울-다카마츠 항공편은 아시아나항공이 매주 3편 출발한다. 다카마츠 항에서는 소도시마까지 들어가는 쾌속선이 있다. 4시간 코스의 우동학교에선 우동 만드는 법을 배운다. 간장에 찍어 먹는 간장우동부터 국물이 맛있는 가케우동 등 우동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에 달한다. 현지에서 우동집을 고르려면 우동 전문 책자를 사면 된다. 안내 책자는 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우동값은 싸다. 1천1백 엔짜리도 있으며 우리 돈으로 5천원이면 맛있는 우동을 먹을 수 있다.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출처 :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10&artid=10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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