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제국을 떠올리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고,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 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로마가 될 만큼 위대했고 강성했다. 아주 오래 전에 멸망했을지언정 그날의 영광들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로마에는 물론이고, 유럽 곳곳에, 터키에, 그림 속에, 건물들 사이에, 신화 속에, 그리고 책 속에 말이다. 강성했던 로마 제국은 도시 로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안타깝지만 여기 저기 부서진 로마의 유적 속에. 하지만 그 흔적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세월이고, 이것이 역사라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하루 아침에 사라지진 않는다고 말이다.
경기장의 원형을 가다, 콜로세움
영화에서처럼 콜로세움은 경기장이자 극장이고, 회합의 장소였다. 최대 지름이 180m, 3층 높이, 지하 공간, 관객석과 그늘을 만들어 주는 천막, 게다가 이 천막은 접었다 폈다가 가능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둥근 구조와 이를 둘러 싼 관중석, 내부의 선수대기실 등은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 도시들이 갖고 있는 경기장 형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닮아있다.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을 비롯한 로마 역사, 건축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는데 바로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콜로세움은 3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시대를 거치면서 무너지고,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운동장이 아닌 미로를 보게 된다. 지하에 있었던 공간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이 곳에 검투사와 싸우게 될 맹수와 검투사 본인도 갖혀 있었다. 안에는 감옥도 있었다고 하는데 죄수를 상대로 잔인한 일이 벌어졌던 것은 상상하는 대로다. 후엔 기독교인들의 박해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콜로세움
폐허가 된 민주주의 포로로마노
포로로마노는 냉정하게 얘기하면 폐허다. 온전한 모습보다는 허물어지고 파묻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세월에 허물어지는 대로 그대로 둔 탓이다. 하지만 쓰러진 담장, 기둥만 남은 신전, 터만 남은 건물자리 등을 걷다 보면 오히려 이것이 더 자연스럽다. 무너지지 않게, 쓰러지지 않게 보존 하는 것과 보수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너무나 말끔하게 콘크리트가 발라져 있다면 오랜 세월의 흔적과 역사보다는 이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도 땅을 파고 비에 젖은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비닐로 덮어가며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로마는 도시 위상에 비해 전철 노선이 단순한 편인데, 어디에 있을지 모를 발굴되지 않은 유적을 고려해 더 이상 연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회정 이었던 자리, 승전장군의 이름이 새겨진 또 하나의 개선문, 카이사르의 화장이 치러진 곳, 무언지 모를 터…이리저리 걸으며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자주 들렀다는 시오노 나나미를 떠올린다. 그녀는 여기에서 그 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폐허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포로로마노지만 무궁무진한, 우주보다 깊고 큰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포로로마노
제국, 엠마누엘레
엠마누엘레 기념당은 크고 높은데다 흰 색이라 로마 시내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전쟁 중에 죽은 군사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불꽃이 1년 365일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시원한 기둥들로 이루어진 기념당은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하얀 대리석이다. 하늘로 솟은 기둥들이 줄지어 있고, 양쪽 정상으로는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이 장식하고 있다. 끝 없이 이어질 듯한 계단을 따라 올라 가면 그만큼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시원한 전망. 아마도 로마에서 입장료 없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 아닐까 한다. 기념당에서 내려다 본 로마는 아름다운 고도 그 자체다. 조각으로 장식된 둥근 돔의 지붕이 곳곳에 보이고, 스러지다 만 유적, 기울어진 기둥, 진한 황토 빛의 이름 모를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분위기를 망치는 현대적인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천년 고도다. 늦은 저녁 파란 하늘이 점점 검은 빛을 띄어 가고, 구름마저 내일 날씨를 말해주는 듯, 점점 검은 빛을 띄어 간다. 한 켠으로 작은 카페가 자리한다. 인위적으로 만든 카페라기 보다는 오고 갔던 사람들의 필요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들어 앉은 듯 하다. 난간에 앉아 로마를 자세히 내려다 보고, 카페에 앉아 하늘 아래 로마를 본다. 로마인의 자존심은 아직도 유효하다. 세계적인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국을 만들었고, 그 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로마의 법, 건축, 예술과 정치와 사상… 비록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치부될 지 언정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제국은 역사 속에서 아직 영원하고 강건하다.
엠마누엘레 2세 기념당...
캄피돌리오 언덕의 비밀
포로로마노와 바로 연결되는 캄피돌리오는 얼핏 지나칠 수 있는 곳이다. 옆에 거대하고 하얀 엠마누엘레 기념당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포로로마노 만큼 유명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캄피돌리오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다. 그 첫 번째는 포로로마노의 전망이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뒤로 돌아가면 나오는 전망대다. 딱히 전망대라고 할 것도 없지만 난간에 기대어 많은 사람들이 벌써 포로로마노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높이도 있고 주변이 훤하게 뚫려 있어 눈에 걸리는 것 없이 시원한 전망이다. 그 두 번째 비밀은 로마 탄생에 관한 것이다. 크지 않지만 두 명의 아이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동상이 높이 솟아 있는데, 바로 이 두 아이가 로마의 시조인 쌍둥이 형인 로물루스와 동생인 레무스다. 로물루스는 전쟁의 신인 마르스와 한 왕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테레베 강에 버려졌고 이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도시 이름이 로마인 것도 형인 로물루스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 번째 비밀은 광장에 있다. 광장은 계단을 올라오면 중앙과 좌우에 건물이 총 3개가 자리한다. 하지만 좌우의 건물이 입구를 향해 벌어진 모양이라 가운데 광장은 자연스럽게 사다리꼴 형태가 되었다. 이곳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광장이 사다리꼴이 된 것은 마주하는 좌우의 두 건물을 바티칸을 향하게 하여 중앙의 궁을 중심으로 90도가 넘는 각도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직각이 아닌 건물의 배치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 정형을 깬 것이다. 이로 인해 광장은 성스러운 바티칸을 향했고, 또 같은 공간에 비해 훨씬 더 넓어 보이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 기하학적으로 그려진 바닥의 선들 역시 광장을 넓어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를 준다. 좌우의 건물은 현재 미술관, 박물관의 용도로 사용된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보다 광장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이 더 많지만.
캄피돌리오로 가는 계단...

광장과 분수의 도시
 
로마에서 가장 쉽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안내판은 아마도 ‘Piazza’ 일 것이다. ‘광장’을 뜻하는 말로 로마는 어디에나 크고 작은 광장이 있고, 주변엔 분수와 그리고 노천카페가 있다. 이런 시스템이니 자연스럽게 예로부터 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이리라. 로마 곳곳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광장과 분수들, 로마를 만드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애써 크지 않아도 좋다. 번듯한 시설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 몇 명이 모일만한 공간, 걸터 앉을 계단, 그늘을 만들어 줄 나무나 파라솔만 있으면 된다. 이런 광장들은 로마에서 의외로 자주 만나게 된다. 다른 유적지로 가던 골목길 어귀에서, 분수대를 찾아가는 길에서 그리고 뜻 밖에 쇼핑을 하던 바로 그 옆 골목에서 말이다.
전차 경주장, 나보나 광장
긴 타원형의 형태로 생긴 나보나 광장은 베드로 성당 앞의 광장을 제외하면 가장 크지 아닐까 싶다. 광장의 중심과 양쪽으로는 분수대가 있고 주변은 건물이 둘러 싸고 있어서 광장에 들어오지 않으면 밖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인지라, 로마의 다른 유적지들처럼 지나치기 쉽다. 광장이 타원형인 것은 이 곳의 용도가 전차 경주장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쉽게도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후두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오는 광장만큼 썰렁한 곳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니 광장은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주변의 카페와 그림과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광장에서 북적거려줘야 할 주인공들은 하나 둘 파라솔 아래 카페로 찾아 들었다. 잘 생긴 청년들이 커피를 나르고 한적한 시간을 갖는다. 책을 읽고, 얘기를 하는 사이 파란 하늘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고, 비가 그친 사이 활기를 전해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루루 단체 여행객도 있고, 재잘거리는 아이들 무리도 있었다. 역시 광장은 사람이 많아야 제 맛이다.
나보나 광장
트래비, 사람만큼 동전이 더 많은 곳
나보나 광장을 나와 차가 다니는 작은 도로를 건너고 기념품과 선명한 색깔의 그림을 파는 작은 골목을 지나면 트래비 분수다. 로마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트래비 분수는 의외로 이렇게 골목 안쪽에 있고, 또 건물의 한 벽을 이용해 만든, 생각 보다 작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풍선처럼 부푼 꿈을 안고 로마에 와, 혼자만의 상상으로 꿈을 키웠다가 푹 하고 꺼지는 곳 중의 하나가 트래비 분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로마에 다시 오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동전을 던지는 것은 잊지 않는다. 바닥엔 이미 소원을 담은 동전들이 빼곡하다. 비록 트래비 분수가 있는 공간은 작지만 그것에 비하면 분수는 크고 웅장하다. 건물의 한 쪽 벽면을 완벽하게 장식한 분수의 중앙에 넵튠이 서 있고 힘차게 물이 솟는다. 1730년대에 황제가 실시한 분수공모전에서 당선된 것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 분수가 유명해진 것은 영화 로마의 휴일 때문. 영화의 낭만과 그녀를 잊지 못하는 여행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에 왔음을 실감하는 여행객들은 분수 앞의 알록달록한 베네통 매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트래비 분수
스페인 계단, 드디어 그곳에 서다
스페인 계단은 트래비 분수에서 골목을 걷고, 도로를 몇 번 인가 건너면 된다. 스페인 계단에 다다르기 전에 눈길을 끄는 것은 명품 샵 들, 최소한 한 두 번은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유리창 사이로 보는 옷, 가방, 신발들이 유적지를 찾은 여행자를 유혹한다. 패션의 도시답게 개성적인 옷들, 디자인 감각이 살아 있는 것들, 손대기도 무서운 세계적인 명품들이다. 상점 앞을 두리번 거리다 갑자기 스페인 계단의 방향을 잃었다. 골목이 많은 로마에서는 흔한 일, 당황할 것은 없다. Piazza라 쓰인 작은 표지판을 금방 볼 수 있으니. 드디어 도착한 그녀의 계단. 퐁당퐁당 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공간이 그렇게 로맨틱한 곳이 되었을까. 이 작은 계단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안타깝게도 앞 도로가 공사중인지라 귀엽고 예쁜 분수를 볼 수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고, 이야기에 열중이다. 17세기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던 이유로 스페인 계단이란 이름이 붙었고, 로마 여행을 자주했던 영국인들을 통해 알려졌지만 가장 큰 공신은 오드리 햅번이었다. 그녀를 추억하며 계단에 앉는다.
스페인 계단

꽃처럼 피어난, 피렌체
 
피렌체의 좁다란 페도날레(보행자 전용 도로)는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어깨를 부딪혀가며 오가는 사람들 뒤로 언제나 보이는 건 색채감이 돋보이는 두오모(대성당). 온전히 자리한 거대한 꽃봉오리 피렌체 두오모는 전 세계 사람들을 이 작은 도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피렌체 곳곳에서 고귀한 문화의 기풍이 흐른다. 그 배경을 훑어보면, 모든 키워드는 ‘메디치(Medici)’와 통한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문화예술가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피렌체의 금융 가문이다. 피렌체가 부흥했던 시기와 메디치 가문이 활발한 활동을 벌인 시기가 맞아 떨어지는데, 메디치 가문의 역할은 피렌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이어진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다. 은행업으로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이 교황청의 재정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단번에 유럽의 갑부로 도약한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은행은 이탈리아 주요 도시는 물론, 네덜란드까지 지점이 퍼졌다고 한다.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애정과 그 안목은 피렌체라는 도시를 꽃피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 역사적 조명을 받은 첫 인물은 ‘코시모 일 베키오’이다. ‘피렌체의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당시 피렌체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코시모가 가장 신경을 쓴 건축예술은 지금까지 피렌체를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명성을 떨치도록 만들었다. 성 로렌초 교회, 성 마르코 수도원, 메디치 궁이 대표작이다. 세 건물 모두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대표하며 오늘날에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르네상스 중심에 선 피렌체의 흔적들
피렌체가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1400~1600년 사이 현재 볼 수 있는 피렌체 구시가의 모습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건축물 건립에 신경을 썼던 터라 구시가를 수놓는 종교건축과 궁전건축은 피렌체 관광의 핵심이다. 두오모와 전형성을 띄는 코폴라(두오모의 돔 지붕)는 크기도 중하지만, 색깔의 조화가 그 크기에 앞선다. 흰색, 붉은색, 녹색이 절묘하게 섞여 당대의 예술적 감각을 짐작하게 하는 걸작이다. 두오모 내부는 프레스코화로 뒤덮혀 있는데, 바자리가 그린 <최후의 심판>을 꼭 찾아보자. 정교한 묘사와 화려한 색깔이 압권이다. 단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팔각형의 건물, 산 조반니 세례당은 두오모 바로 앞에 있는데, 외관은 두오모의 그늘에 가려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지만 내부의 빛나는 모자이크는 한눈에 반할만한 걸작이다. 세례당 정면의 청동제 동문 ‘천국의 문’은 기베르티가 설계한 것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두오모에서 아르노 강 쪽으로 내려오면 강을 마주하고 있는 우피치 미물관을 찾을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을 전시한 곳으로 유럽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꼽는 소위 ‘알짜 미술관’ 중 하나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바티칸 박물관처럼 규모가 대단히 크진 않지만, 보티첼리의 보석 같은 작품들, 루벤스의 역동적인 회화, 렘브란트의 따사로운 색깔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다. 1일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관람실이 붐비는 것을 막기 위해 시간대별로 일정 인원 이상을 들여보내지 않아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우피치 박물강에서 아르노 강이나 두오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로멘티시즘에 빠질 것만 같다.
피렌체 전경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문화의 향기
아르노 강을 연결하는 베키오 다리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름의 다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금붙이 가게들. 커다란 간판과 그 간판 속에 계통 없이 자리잡은 큼지막한 글자들-'금은 소도매 전문' '14K 18K 24K 순금 매입' '오래된 디자인 바꿔드립니다'-은 찾아볼 수 없는 질박한 금방이 줄지어 있다. 사진을 찍어두면 황금색 빛깔이 사진에 베어 나올 것만 같다. 막상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보석류를 판매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베키오 다리의 황금빛을 구경하려고 오랜 다리 위를 가득 채운다. 다리를 통과하고 나면 베키오 다리의 외형을 꼭 한번 돌아보자. 빨강, 주황, 초록 알록달록한 집들이 빼곡히 이어져 다리를 이루고 있다. 내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풋풋한 집들과 ‘다리 위의 집’으로 다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게 된다. 피렌체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떨어지는 해를 고요히 바라보기’. <냉정과 열정 사이>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피렌체의 낙조는 말이 필요 없는,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 벅찬 경험이다. 잠시 카메라는 놔 두고, 두 눈으로 가만히 그 시간을 느껴보고만 싶은, 아름다운 붉은 빛이 피렌체에 내려 앉는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신들의 도시
 
로마에는 신이 많다. 신이 사람만큼 많았고 사람과의 구분이 모호했던 시절, 아니 사람은 신을 질투하고, 신은 인간을 질투하던 그 때를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신들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였던 사람들에 의해 신화 속에서 나와 로마를 장식했다. 로마에서 신을 만나는 일은 무척이나 쉽다. 분수대 안에서 물을 뿜거나 계단을 장식하고 있거나 건물을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오랜 역사에서부터 사람과 신을 크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들의 도시 로마에서도 특별한 곳은 신화와는 조금 다르지만 바티칸과 모든 신들을 위해 지은 판테온 신전이 아닐까.
바티칸
쉽게 바티칸이라고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성 베드로 성당 말고도 바티칸 박물관과 교황청 등이 있다. 물론 성 베드로 성당만 보고도 바티칸이구나 싶게 크고 웅장하다. 비가 추적 거려 베드로 성당의 외관은 나중으로 미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귀여운 복장을 한 근위병들을 거처. 거대한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니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은 관람객이 별로 없다. 관광지보다 성당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 섰다. 죽은 예수를 뒤에서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피에타라고 하는데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약간은 어두운 실내에서 하얗게 빛나는 피에타 상은 대리석이지만 옷감의 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냉정하게 예술성은 모르겠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젊다는 딴지도 떠 올랐다. 하지만 금방 빨아서 바스락거릴 것 같은 옷감의 주름들은 대리석으로 어찌 만들어 냈는지 자못 궁금하다. 발자국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할 만큼 성당 안은 고요했다. 멀리 중앙에 제단이 보이고 중앙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작은 구석 공간에 기도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가 너무나 민망할 정도로 성당의 아침은 고요했다. 바티칸 박물관의 위엄과 가치는 세계적이다. 그런 만큼 관람객도 많아 항상 대기 줄이 긴데, 이번에도 그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그 옆의 작은 시장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저것 파는 것은 우리나라와 별 다르지 않지만, 오전 중인데도 사람이 많아 이탈리아 사람들이 놀기만 좋아하고 게으른 민족이라는 것이 혹시나 선입견이 아니었나 싶다.
바티칸 성당
신들을 위하여, 판테온 신전
판테온이란 말은 모든 신을 뜻하는 것으로 로마의 모든 신들을 위해 지어진 신전으로 기원전 25년경 세워진 아주 오래된, 그리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한 곳이다. 물론 긴 역사를 사는 동안 강의 범람과 전쟁 등으로 훼손되고 다시 보수되었지만 원형의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겉에서 보이는 신전은 수수하다. 그리스, 로마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힘찬 기둥과 나뭇잎의 기둥 장식, 문자가 새겨진 지붕. 안으로 들어가면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들지 모르겠지만 판테온을 유명하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의 수학과 로마의 건축 기술이 만난 판테온은 내부의 거대한 돔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탱하는 기둥이 하나도 없다. 기둥은 오로지 입구에만 있으며, 둥근 돔을 지탱하기 위해 다른 건축물처럼 옆으로 다시 작은 돔을 연결시키는 기술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큰 돔 하나만으로 공간을 만들었고 정 중앙에는 채광을 위한 구멍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돔으로 인해 내부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하게 43.2m로 15층 건물의 높이와 동일하다. 이 거대한 돔은 이후 베드로 성당을 지을 때 질투의 대상이 되어 무조건 판테온의 돔보다 크게 지으라고 명령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1.3m 가량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 내부는 대리석 장식이 눈에 띄일 만큼 많다. 가장 자리를 채우는 것은 조각상과 작은 기둥들인데, 성인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소설 천사와 악마에서도 주인공이 이곳을 다녀가게 된다. 물론 이곳이 정답은 아니었지만. 돔을 올려다 보면 15층의 높이가 실감 난다. 둥근 돔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고 네모가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그 정점에 채광을 위한 둥근 창이 하나 있고, 비가 갠 뒤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판테온 신전

출처 :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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