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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7 라오스 [DEM REP OF LAO] - 동남아

라오스 [DEM REP OF LAO]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라오스,LAO P.D.R)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유일하게 4면이 육지로 갇혀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중국과 미얀마,서쪽에는 태국,동쪽으로는 베트남,그리고 남쪽에는 캄보디아로 둘러싸여 있는 내륙국가이다. 이것이 이들 인접 나라들과 전 역사를 통하여 국경분쟁이 있게 한 소지가 되었다. 라오스의 면적은 236,800㎢ 으로 우리 나라 남한의 약 3배가 넘으나 인구는 남한의 1/10에도 미치지 않는다. 70년대 중반에 라오스는 북베트남과 군사적 동맹을 맺고 남베트남을 침공함으로,세계의 관심을 모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계기로 말미암아 라오스에 공산화가 시작되었고,세계의 자유물결에도 불구하고 문을 단단히 잠그고 인권을 억압하고 경제를 장악하며 정치적 독재를 강행하는 공산주의의 노선을 고집해 왔다. 이 결과 라오스는 모든 분야에서 부인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 왔다. 그 동안 여러 개혁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직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가 여전하다.

국민,언어 문화를 지칭할 때는 '라오(Lao)' 라고 쓰고 나라적인 개념으로는 라오스(Laos)라고 한다. 라오스 주요 거주민들은 동남아시아의 타이계통에서 온 라오족이다. 라오룸족인 이들 피플그룹이 사용하는 언어를 '라오어'라고 한다. 각도의 이름은 퐁싸리,우돔싸이,루앙프라방,싸이냐부리,씨앙쾅,위양짠,싸완나켓,싸라완,쌔껑,아따쁘,버깨오,보리캄사이,짬빠삭,후와판,캅무안,루앙남타,위앙짠시,특별구로 싸이쏟분이 있다. 각 도에는 도지사가 있으며 도마다 자치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96년 한해 동안에 라오스를 방문한 관광객 수는 총 403,000명으로 집계되었고 98년에는 50만을 돌파한 것으로 정부는 밝히고 있다. 라오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 1990년도와 1996년의 통계 수치를 비교해 보면 놀랄만한 증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에 불과 14,40O명이던 것이 1996년에는 403,000명까지 증가하여 관광객 증가율은 매년 100%이고 그 중에 69%가 태국을 경유하여 입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도에 관광 수입은 $2400만 달러로 라오스 외화 수입원의 4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라오정부는 1999-2000년을 라오스 방문의 해로 정하고 대대적 홍보를 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100만명을 예상하고 있다. 1998년에 라오스에 온 관광객 50만중의 60%는 태국인이며 베트남이 15% 그리고 미국.중국.프랑스순이다. 또한 루왕파방을 찾는 관광객도 증가추세여서 95년 2만명에서 98년에는 4.4만명으로 늘었다. 한편,1997년 통계에 의하면 육군이 3만 3천명이며,공군력은 전투기 30기가 있지만,일반적으로 라오인은 군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는 수준 이하의 사람이나,할 일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오인은 천성적으로 전쟁이나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이들을 아프게 한 몇 번의 식민지와 수많은 내전 그리고 피로 얼룩진 유혈역사가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면적 : 23만 6800㎢


수도 : 비엔티안

인구 : 563만 6000명

정치형태 : 공화제

종교 : 헌법에는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다. 가르침이나 전파하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는 전제이다. 따라서 개인으로 무슨 종교를 가질 수 있으나 모여서 교리를 가르치거나 전도를 해서는 안된다. 오직 집회가 가능한 곳은 정부가 허락한 일정한 장소 또는 교회에 국한한다.

2000년 3월 라오불교협회(Lao Buddhism Fellowship Organigation)가 밝힌 바에 의하면,라오스내에 2823개의 왇(사찰)이 있으며 42개의 불교계학교가 있고 19,779명의 수도승 및 쿠바(스님)들이 있다 한다. 라오스는 불교국가이다. 모든 삶이 불교와 연결되어 있다.
이곳 남자들은 10샅 정도가 되면삭발을 하고 수도승으로 불교에 입교하여 불교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절에서 일정 기간 거주해야 하는 전통이 있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미 어릴 때부터 불교와 연합을 이루게 된다.
음식에 대한 절제도 없어서 고기나 담배 등 일반 사람들이 먹는 대부분을 승려들도 먹는다. 뿐만아니라 라오 불교는 온갖 우상숭배와 샤미니즘,그리고 귀신문화와 혼합된 불교로 온 국민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승려들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그들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수학 및 역사,지리 등을 그들이 알고 있는 불교적 도덕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마을마다 있는 절에는 초등교육을 위한 학교가 마련되어 있다.


주요민족 : 라오 정부는 전체 종족을 68개 그룹으로 밝히고 있으나,다른 정보기구들은 전체 117개의 다른 언어 집단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라오스 정부는 인구조사 때 베트남인이나 중국인들 그리고 깊은 산 속에 사는 종족은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기관인 The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는 라오스에 전체 종족은 93그룹으로 분류한다. 정부자료에 의하면 룸족이 52.5%인 240만명,카무족이 11%인 50만명,푸타이족이 10%인 47만명,몽족이 7%인 32만명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종족들은 3가지 큰 종족인 라오텅,라오쑹,라오룸족에 모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주요언어 : 라오스에는 전체 약 92개의 방언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라오어가 표준어로 전체인구의 2/3가 사용하는 있는 국가 공식어이다. 라오어는 저지대에 거주하는 라오룸족의 언어이나 이들이 주요 종족으로 정부의 주요 요직과 정치를 장악하고 있기에 라오스 전지역에서 통용되고 있으며,모든 학교도 이 언어로 가르치고 있다. 6성조를 가지고 있는 이 언어는 같은 낱말이 많으나 낱말의 높낮이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자음으로 34개,모음이 28개가 있다. 문서에 로마 알파벳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경제
지난 1986년 수상이었던 까이손 폼위한이 새로운 외국인 투자법을 공포하며 시장개방정책을 실시했다. 이른바 "신사고"(New thinking)개혁 이였다. 이 개혁은 구소련의 "그라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사회전반에 큰 변화가 있었고,분위기는 한층 자유로와 졌다. 사유 재산이 인정되었고,시장 경제를 허락했으며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이중 가격제도를 폐지,환율 단일화 및 자율 변동제,비중앙 경제정책,은행개혁,무역자유,조세합리화 등 조처를 취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개혁의 초기에는 큰 성과를 이루었으나 여전히 넘어야 할 험한 산이 첩첩이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아직 라오스는 경제,정치,사회 전반이 전적으로 외부 의존적이다. 정치는 베트남의 이데올로기에,경제는 태국의 힘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태국은 현재 라오스에 가장 큰 투자국이다. 라오스에 공산주의가 탄생하면서 라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의 한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된 여러 요인 중,그 첫째는 외국 원조의 감소이다. 라오스는 1950년부터 외국자본에 의존해 왔다. 1980년까지 국가 예산의 78%가 자본에 의해 충당되었다. 외자의 대부분은 구소련 이었으나,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라오스는 큰 외자원을 잃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외자원이 태국,미국,오스트레일리아,일본 등으로 바뀌게 되었다. 두 번째는,1988년까지 외국인 투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태국이 투자국 1위로 13억 달러,미국이 12억달러를 기록하였다. 이 외국 투자 역시 시간이 흐르자 라오스의 경제성 약화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외국인투자액이 95년 8억불,96년 9.7억불 투자에 그쳤다. 셋째는 1986년과 1989년 사이에 있었던 경제개혁은 국민 경제를 상당히 향상시켰다. 새 경제개혁은 많은 기업을 낳게 되었고,도시가 활기를 되찾았다. 그 결과 세계은행 발표에 의하면 1989년 국민소득 $135였던 것이 1996년에는 $230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장개혁은 제한적 이여서 태국,베트남,중국등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자유롭게 외국상품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으나,그 외 딴지역 주민을 여전히 개혁의 영향을 받지못하여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더군다나 최근 IMF영향이 이곳도 강타하여 99년 라오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90로 감소하였다.


기후
연중 평균기온은 26도이며(최저 15도,최고 45도)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열대성으로 건기와 우기로 구분한다. 건기철은 10월부터 그 다음해인 5월까지이고,우기철은 6월부터 9월까지 이다. 우기철 약 5개월 동안은 매일 비가 내려서 그리 덥지 않으나,습도가 약 90%이상을 유지한다. 그리고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철은 다시 조금 서늘한 11월-2월까지와 가장 더운 3월 - 5월로 세분된다. 강우량은 지역에 따라서 큰 차이가 나는데 연간 약 2000mm정도이다.


사회문화
사회

라오스의 학제는 11학년제로 초등교육 5년,중·고등교육 6년이며 초등 5년은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취학률은 72.4%,수료율은 41%이다. 종래 중등 이상의 교육은 프랑스의 원조에 크게 의존해 왔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교육의 문호가 넓지 못했고,국민의 교육열도 일반적으로 높지 않았다. 1975년 이후 정부는 학교증설·교사양성 등 교육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학교는 종합대학,의과대학,공과대학이 1개교씩 있다. 15세 이상 문맹률은 43%이다(1999).

2000년 인구증가율은 2.5%,출생률은 1,000명당 38.29명,사망률은 13.35명,영아사망률은 94.8명이다. 평균수명은 59세이다. 의료면에서는 인구 1,510명당 의사 1인,633명당 병상 1개가 있고 비위생적인 생활습관으로 발병률이 높은 편이다. 국영 TV방송국 2개,라디오방송국(국영) 1개가 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타이 방송을 많이 시청한다.


문화

라오스는 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도 그들 국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남부에서는 캄보디아,북부에서는 미얀마·타이의 영향을 받아 불교사찰의 건축양식 등에 남아 있다. 또 소승불교는 14세기에 캄보디아에서 전래되었는데,불교는 오늘날의 라오스인의 생활을 강력히 지배하고 있다. 연중 많은 종교의식이나 제사가 있어서,그때마다 사람들은 마을의 사찰 경내에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전통적인 윤무(輪舞)를 춘다.

음악은 악보 없이 기억에 의해 연주되며,음악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라오스의 여러 악기 중 대나무 관악기인 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무용은 오락의 형태라기보다 직업이 되고 있어 직업적인 무용단은 종교의식이나 경축행사 때 전국을 순회하면서 공연한다. 이 직업적인 무용가들은 모두 남자들이고 여자 역(役)은 젊은 남자나 어린 소년들이 분장을 해서 담당한다. 무용의 주요 주제는 인도의 서사시에서 따온 것들이다. 라오스의 문학 역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불교 전설에 관한 것을 많이 다루고,대중적인 시나 노래는 풍자적이다. 직조,바구니짜기,나무와 상아조각,금·은세공 같은 다양한 민속예술이 있다.

라오스에는 몇 개 신문이 있는데 집권당의 기관지인 《시앙 파사송(민중의 소리)》이 1만 8000부로 가장 많이 발행된다. 국립 라디오방송국은 라오어 외에 프랑스어·영어·캄보디아어·타이어·베트남어 방송도 한다. TV 방송국은 주로 뉴스,다큐멘터리 등을 다루며 오후 7시부터 3시간만 방영한다. 방송국은 정부가 감독·운영한다.



산업
라오인은 아직 인구의 85.5%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한다. 농업은 GDP의 51.5%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이 21.1%,서비스업이 25.5% 차지,관세수입이 1.9%) 이중에 90%이상이 쌀 농사를 하고 있다. 트랙터와 탈곡기 같은 현대 농기계는 거의 없고,경운기는 적은 량이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 힘들 일은 물소(buffalo)가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벼수확은 아직 낫을 사용한다. 면적당 수확량은 침수,거름부족,관개수로 미약 등으로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97년에 2.77톤/핵타 이며 총생산량은 1,660,000톤이다) 라오스는 3모작도 가능한 기후이지만 관개수로가 되어있지 않아 대부분 지역이 우기철을 이용한 1모작만을 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쌀 생산이 충분하지 않아서 태국 등 이웃나라에서 상당량을 수입하고 있다. 라오스는 쌀 외에도 커피,설탕,아편 등이 생산되고 있다. 아편은 주로 높은 산에서 사는 산족들에 의해 재배되고 있으나 이것이 국제 시장에 판매됨으로 라오스의 큰 수입원이 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라오스는 아편 생산량에 있어서 세계의 3번째로 알려지고 있으며 커피는 97년 12,300톤이 생산하여 6,600톤을 수출하였다. 농업 및 어업외의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12%이고,군인이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무역은 아직 주변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태국,캄보디아,말레이시아,베트남,러시아,싱가폴,중국,일본 등이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수력을 이용한 전기와 (발전설비용량은 약 50만 Kwh정도이며 총 생산량의 65%를 태국으로 수출),목재,귀금속,면화 등이 있다. 주요 외화수입원으로는 전기,목재,관광,영공통과권,커피 등이다.


정부
라오스는 1975년 라오스 인민혁명당이 유일하게 창설된 이래 그 집권하에 있으며,당의장 카이손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가 유지되어왔다. 1989년 총선거 후 최고인민의회는 1991년 8월의 신헌법 제정을 포함한 법 체계의 정비에 전념하였고 1992년 11월 카이손이 사망하자 당의장 캄타이 시판돈(Khamtay Siphandone),전대통령 누학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로 바뀌었다. 신헌법에 근거하여 1997년 12월에 제2회 국민의회 총선거를 실시하였고 1998년 2월 캄타이 시판돈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신헌법에 따르면 라오스의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이자 최고인민평의회 의장이다. 의회(국민의회)는 단원제로 임기 5년의 의원 99명으로 이루어지고,라오스 인민혁명당의 서기장이 총리직을 맡는다. 라오스 인민혁명당은 정치국에 의해 통솔되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조직·운영된다.

각 지방행정 단위에는 라오스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받는 인민혁명위원회가 있다. 옛 우파의 왕국 군대는 왕제 폐지와 더불어 해체되고,파테트라오군(軍)을 모체로 하는 인민해방군이 구성되었다. 행정부의 주요 장관 등이 현역계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병역은 형식상 지원제이나 사실상 징병제이며,복무연령은 17~26세이고 기간은 18개월이다. 병력은 5만 5150명이며,정규군·지방군·민병·게릴라 부대로 구성된 지상병력이 주병력이고 5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외교는 비동맹을 원칙으로 하며,베트남과 유대가 밀접하고 중국과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었으나 최근에는 긴밀해지고 있다.


지리
라오스는 남북의 길이가 2069Km에 달하며 전체 면적의 약 70%가 산악지대이며 정글로 둘러 싸여있는 산맥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험한 산지와 고원이 펼쳐져 있고,그 사이를 메콩강과 그지류가 흐른다. 산높이가 2000m 이상인 산이 9개나 되며 최고 높은 산은 비아산으로 2850m에 이른다. 이들 산은 남북으로 펼쳐져 있어 베트남과 중국과의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중국 티벧에서부터 라오스를 따라 줄곧 흐르는 메콩강 주변은 아주 비옥한 땅으로 대부분의 농작물들이 이곳에서 재배되고 있으며,또한 풍부한 야생식물과 아름다운 경관 그리고 훌릉한 삶의 터전으로 지역 주민들과 라오정부에게 큰 기대를 가지게 한다. 이 메콩강의 혜택이야말로 라오스의 가장 유일한 희망이요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메콩강은 북쪽 중국에서부터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면서 인도차이나 6개 나라를 통과하는 그 야말로 거대한 강으로 지역에 따라 미시시피강 만큼 넓은 곳도 있다.
라오스를 통과하는 메콩강의 총 길이는 1898Km로 인접한 나라중 가장 길게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메콩강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염이 덜된 강으로 알려져 세계인들로부터 주목이 되고 있으며,동시에 인도차이나 6개 나라의 젖줄로 큰 사랑을 받으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외에도 메콩강은 무역 및 모든 면에서 라오스의 주요 교통 요충지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이 강을 중심으로 태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강을 통한 두나라의 왕래는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사이에 협정을 통하여 지역에 따라 8개의 국경 사무소가 설치 운영되고 있으며,이곳을 통하여 각종 무역 및 인적 교류가 별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란쌍왕국이전시대(BC2000~AD 14C)에서 라오스 땅에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라오스 남쪽지역에서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고,북쪽에서는 유사이전에 사용하던 돌도끼,항아리,매장지 등을 포함한 증거물이 새로이 발견되었다. 북쪽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라오 부족들은 대부분 세기초에 중국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소작인으로 특정 농산물을 재배하며 바깥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살아오다 AD 757년 쿰러왕이 지금의 루왕파방을 정복하고 그 도시의 이름을 '므앙쑤아'에서 '시양텅'으로 바꾸었던 일도 있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란쌍왕국시대(1353~1890)에는 최초 라오왕국이 팡움왕에 의해 1353년에 세워졌다. 그는 크메르(캄보디아)왕국의 원조를 받아 작고 많은 왕조 세력들을 통합하므로 루앙프라방에서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이 왕국이 바로 란쌍왕국으로 그 의미는 "백만의 코끼리"를 상징한다. 이 시대의 왕중에서 셑타티랃왕은 지금의 수도인 위엥짠으로 수도를 옮겼고 영토확장에 크게 공헌하였고 라오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탇루왕을 만들기도 하였다. 란쌍왕국은 약 200년 동안 존속하다가 1603년 버어마(지금의 미얀마)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 왕국은 1637년에 술리나옹싸왕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서 약 반세기 동안 황금기를 누리다가 1713년 다시 3왕국으로 분리됨으로 루앙프라방과 위양잔과 짬빠삭에 다른 왕국이 세워졌다. 3왕조로 말미암아 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통합과 발전메 큰 장애가 되었으며 인구성장 또 한 둔화되었다. 이것은 지역간의 왕래와 행정력 결핍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713년부터 1893년,프랑스가 들어와 지배하기까지 라오 왕국은 이웃나라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때로는 태국,버어마,베트남의 영향 아래 있기도 했다. 1827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아누왕이 태국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나고,오히려 태국의 보복으로 태국은 북쪽 경계선 넓은 지역과 북동쪽에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강제이주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 살게된 약 170만 사람들이 라오계 타이족인 ISAN족(이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890년부터 1974년 까지는 식민지시대로 프랑스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성공적으로 정복하자 이어서 라오스에도 들어왔다. 라오스왕은 태국군 공격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하여 오히려 프랑스를 택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메콩강까지 올라와서 태국으로부터 메콩강 동편 모두는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의 경제적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판단하고 많은 관료들을 라오스에 파견시키지도 않았고,단지 베트남에 상주하는 관리 몇명이 라오스를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프랑스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는 철도공사나 대학 등을 세웠으나 라오스에는 별다른 관심이나 투자를 하지 않았다. 나치군의 패전으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의 지배는 일본군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치군에 대한 연합군의 잇따른 승리는 라오스에서도 라오이사라(the Lao Issara)라 불리는 민족운동이 조직되었다. 라오 이사라의 목적은 일본 군대를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1945년 10월 12일,라오 새정부를 주도해왔던 Phethsarath 왕자가 독립을 선언했다. 1946년 초에는 프랑스군이 자신의 세력을 재확장하기 위해 라오스로 향했으나 라오-베트낭 군대와 메콩강에서 충돌하게 되었고,3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라오스 처항군의 주요 인물들이 태국에 피난하였다 이들은 수파누옹 왕자와 함께 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태국 정부로부터 지지를 얻어낸다. 프랑스는 라오 왕가와의 협의에서 1949년에 라오스에 더 많은 자치권을 허용한다는 합의에 이른다. 이에 따라 많은 Issara지도자들이 라오 왕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1950년,Vietminh (베트남 독립동맹)도움으로 라오스 동북쪽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또 다른 Issara가 프랑스에 저항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수파누옹 왕자가 이 저항군을 이끌고 있었다. 1954년에 비로소 Dien Bien산에서의 베트남 승리는 프랑스 통치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같은 해 제네바 협상에 따라 모든 외국 군대의 완전한 철수가 채택되었다.

연립정부 형성을 위한 최소의 연립정부가 1957년에 세워졌고,여기의 지도자로서 수파누옹의 형제인 슈바나 푸마(Souvanna Phouma)왕자가 지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두 진영(하나는 VietMinh이 지원하는 진영,다른 하나는 미국이 지원하는 진영)의 정치적 책동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CIA는 우익정부를 지원하면서 수파누응 왕자체포와 다른 15명의 Pathet Lao(P.L)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는데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L은 게릴라 전투와 정치적 책략 등으로 동북쪽에 머물던 것이 메콩강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Royal Lao Government(RLG)를 지원하고 있었던 미국의 일련의 노력은 베트남 공격에 대한 비난등으로 고전을 맞게 된다. 1960년 베트남에서의 쿠데타 성공은 수바나 푸마가 이끄는 중립정부 형성에 큰 힘을 얻게 되고 P.L과 민족적 일치 정책을 택한다. 1960년 12월 13일 미국의 베트남 공격은 연합정부로 하여금 수도를 포기하고 P.L과 동맹관계를 맺게 했다. 1962년 제네바협상은 내키지 않는 또다른 연립정부를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라오스는 계속 베트남과 관계를 증진시키자,미국은 1964년 10월 라오스를 폭격하기에 이른다. 이 침공에 곧이어 베트남의 호치민을 향하여 공격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라오스는 본격적으로 정부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하나는 미국의 후원을 받으며 위앙짠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R.L.G와,다른 하나는 북베트남,소련 그리고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삼느아를 거점으로 형성된 P.L단체이다. 이후로 약 8년 동안 군 동향이 천천히 변하여 P.L은 꾸준히 그들의 지역을 확대해 갔으나,R.L.G는 1972년까지 오직 메콩강 유역을 따라 국토의 약 1/4에 불과한 좁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점점 어려워지자 미국과 북 베트남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1973년 2월에 라오스의 침공을 중단한다는 협상이 이루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1974년에 수바나 푸마가 이끄는 P.L조직을 중심으로 민족 단일 정부가 조직된다. 그로부터 우익파의 영향은 점차 쇠퇴하고 주변국가의 연속 좌익파 승리로 1975년 말 마침내 라오스의 우익파는 종말을 맞게 된다. P.L단체는 1975년 12월 I일과 2일 양일간 위양짠에서 인민대표회의를 열고 여기에서 라오스왕정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른바 "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을 정식출범시켰다.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는 라오정부가 출벙한지 지금까지 1대 수파누옹대통령 2대 까이선대통령 3대 누학대통령 4대 현대통령인 캄따이가 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신정부체제 출범후 약 25년이 지난 지금 라오스는 심각한 국민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큰 원조국이었던 구 소련이 붕괴되었고,경제성 약화로 서방 원조 역시 대부분 철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 기초 생필품조차 수입을 억제하던 것을 1989년부터 수입의 문을 확대 개방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무역적자와 Kip(라오스 화폐 단위)의 가치 하락은 계속되었다. 또한 새정부는 인구의 약 10% (약 30만명)나 되는 대부분의 고급 인력이 가난과 억압을 피해 탈출 등으로 처음부터 큰 분담을 져야했다. 탈출국은 미국,캐나다,프랑스,호주,태국 등이다. 탈출 그룹에는 국가 공무원,숙련공,교수,경제 전문가,농민까지 다양하다. 도망하려다가 잡힌 약 4만 여명이 재교육 캠프에 보내졌고,약 3만명 정도가 정치범으로 체포되었다. 태국에는 1992년까지 약 53,000여명의 라오인이 피난민 캠프에 있었고,1996년 10월까지 5000명이 그 캠프에 남아 있었으나 최근에 이들 모두를 라오스에 송환함으로 태국과 난민 문제는 해결되었다. 귀환한 라오 난민들은 유엔의 도움으로 거처가 제공되어서 다시 라오인으로 재적응을 하고 있다.


유용한전화번호
항공사 -Lao Air Booking:21-6761,3197 -Thai Airways:22-2527,28,29 한인회 사무실 -회장(김한열):020-51-9005(H.P) -총무(전영섭):020-51-7358(H.P) 한인회 선교회(L.M.C):31-5701 -담임목사(김정인):020-519-078(H.P) 화재시 : 190 경 찰 : 191 구급차 : 195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와 미터법 사용한다.


통화
통화 단위는 KIP으로서 US $1=7500KIP (2000.4월)이며 공무원 월급은 10만-20만 KIP정도이며,환전은 은행이나 큰 상가,호텔에서 할 수 있다. 라오스의 물가는 아직 안정되어 있지 않아 환율변동도 매우 유동적이다. 라오스에서는 달러와 함께 태국의 바트가 통용되고 있다.

현지로 전화
우리나라에서 현지로의 전화방법
001(002 등)-856(국가번호)-지역번호-상대방 번호


주의사항
외국인 금기사항
여권은 신분을 증명하는 것으로 늘 휴대해야 하며,정부시설,공항 등에서는 촬영이 금지된다. 또한 야간 11시 이후의 외출을 피하도록 하며,절이나 라오스인의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다.
라오스인들은 대부분 불교신자로서 불상을 신성시한다. 불상 앞에서 사진찍는 행위,불상을 발끝으로 지적하는 행위,불상에 걸터앉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며,절에 갈 때 지나치게 짧거나 야한 복장은 삼가야 함. 여성은 승려와 접촉해서는 안된다. 즉 악수를 해서는 안된다. 승려가 여성과 접촉하는 것은 엄한 계율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물건을 직접 승려에게 건네줘서는 안된다. 반드시 쟁반에 담아주어야 한다. 발을 책상 위에 내던지는 것,발뒤를 타인에게 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리를 꼬는 경우에 주의를 해야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모욕적인 행위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머리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머리는 발과 반대로 부처가 머무는 몸의 제일 신성한 부분이라고 되어있다. 특히 여성은 절대로 남자의 머리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상품구입시 유의사항
라오스에서는 외국 여행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자
▣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라오스입국을 위한 비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일반 여행자 비자, 사업비자, NGO비자, 학생비자가 있다. 사업비자나 NGO 비자는 라오스 내에 거주하며 그에 상응하는 사업을 진행해야 하며, 허가 얻기가 그리 쉽지는 않아 1년 정도의 기간이 일요하다. 학생비자는 아직까지 많이 시도되지 않는 상태이며 그리 쉬운편도 아니다. 반면에 여행자 비자는 97년도부터 훨씬 간소화되어 라오스에 집적 들어와 공항이나 기타 국경에서 간편하게 바로 받을 수 있다. 여행자 비자의 기간은 15일이며, 발급비는 $30이다.
방콕주재 라오스대사관에서는 당일발급에 950B, 3일정도는 600B 정도가 소요된다. 라오스 대사관으로 가는 방법은 카오산 부근 라차담넌 거리에서 에어컨 12번 버스를 타고 랑캄헹거리 59번 골목에서 내리면 된다. 내려서 약 3KM 일직선으로 걸어야 하는데 오토바이를 이용해도 된다.


연중 평균기온은 26도이며(최저 15도,최고 45도)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열대성으로 건기와 우기로 구분한다. 건기철은 10월부터 그 다음해인 5월까지이고,우기철은 6월부터 9월까지 이다. 우기철 약 5개월 동안은 매일 비가 내려서 그리 덥지 않으나,습도가 약 90%이상을 유지한다. 그리고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철은 다시 조금 서늘한 11월-2월까지와 가장 더운 3월 - 5월로 세분된다. 강우량은 지역에 따라서 큰 차이가 나는데 연간 약 2000mm정도이다.



▶ 루앙프라방

라오스에서 가장 좋은 방문지는 많은 역사적·예술적 유산을 가진 루앙프라방(Luang Prabauh)이다. 옛 왕도였던 루앙프라방은 옛날의 왕궁과 수많은 불상으로 가득한 동굴, 사원 등을 그대로 간직한 문화와 역사의 도시이다.
1353년 라오스의 수도가 된 이후에 약600년간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만큼 문화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1995년12월 루앙프라방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사원, 왕궁, 전통민가,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의상과 풍습은 물론 30∼40년대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 등을 후세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종합 평가한 결과였다.




▶ 방비엥

비엔티엥 지방의 풍경이 수려한 지역으로 곳곳의 암석들과 석회암산들(Pha Tang,Phatto
Nokham)과 동굴 그리고 쏭강에 돌출되어 있는 동굴과 바위를 쾌적한 날씨 속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의 중심에서 3km 이내에
탐찬(Tham Chanh),탐프라(Tham Phra) 그리고 탐바트(Tham Baat),탐뤄시(Tham Leusi ) 등의 동굴을
바위투성이의 창산(Chang)에서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의 주요 볼거리는 쏭강을 따라 늘어선 석회석 카르스트로 벌집처럼 지어진
동굴과 터널 그리고 폭포들이다. 방비엥은 비엔티안에서 북쪽으로 160km 지점에 있으며,만족(蠻,Hmong)과 묘족(苗,Yao)의
근거지이다.(중국인들은 예전에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비엔티안에서 버스를 타고 루앙프라방쪽으로 가면 여행자들이 자주 들리는 버스정류장에 길을
물어 내리면 된다.




▶ 비엔티안

메콩강(江) 하구에서 1,584 km 상류의 좌안,해발고도 300 m 지점에 위치하며,메콩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남바사크강에 의해서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로 라오스에서 가장 화려하고 오래된 도시이다.

비엔티안에서는 메콩강 주변의 오래된 마을이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비엔티안은 프랑스에 의해 건설된 다른 아시아의 도시들처럼 웅장하거나 거대한 규모의 대로는 없으며,현대적인 도시이면서도 진흙이라든가,외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성벽 주위나 성을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와 고사원은 도시속의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메콩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구시 가지의 드넓은 사로수 길과 고색 창연한 사원들은 관광객의 시선을 끌만큼 매력적이다. 거리에는 약간이 교통체증이 있긴 하지만 아주 조용한 도시라는 인상을 풍긴다.

주요 유적지나 번화가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어 걸어서 관람할 수 있다. 불교가 생활과 밀접해 있는 지역이라 사원이 시내에 밀집해 있다. 특히 옛 라오족(族) 왕조 이래의 고도(古都)로 왕궁과 파고다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사원이 80개나 있었다고 하나,1827년 타이인(人)에게 점령되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20여 개만이 남아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각료의 선서식이 거행되는 와트시사게트,석가의 머리카락이 보존되어 있는 타트루앙,고고박물관이 있는 와트프라케오 등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비엔티안을 비엔짱이라고 부른다.

최대의 충적평야인 비엔티안 평야를 끼고 있는 비엔티안은 쌀과 야채 재배가 성하며,건기에는 사탕수수와 잎담배를 산출한다. 그 외에 암염이 산출되며,은공세품·견직물 등의 제조가 활발하다.


교육
비엔티안에는 농학·예술·교육·임학·관개·의학 등 여러 학부를 둔 시사방봉대학교가 있으며 부속기구로 파응굼대학·리세비엔티엔·공과대학과 팔리어 연구소,산스크리트 연구소 등이 있다.


산업
공업으로 양조업·목재가공업을 비롯해서 벽돌,타일,직물,담배,성냥,합성세제,플라스틱 가방,고무 샌들,철,강철제조업 등을 하고 있다. 라오스에서 가장 비옥한 저지대에 속하는 비엔티안 주변지역에 사는 라오족 농부들은 쌀·옥수수를 재배하며 가축을 기르고 있다. 1975년까지 비엔티안은 가축의 선적·도살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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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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