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처럼 9세기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를 중심으로 세워진 '루우시'가 러시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옥한 농목지에 둘러싸인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곡창 지대'라고 불리우며 또, 동부의 도네츠나 드네프르 강 유역에는 광공업이 발달해 농산물 광공업 생산 모두가 발달해 농산물 광공업이 소비에트 연방 전체 생산고의 각각 1/4을 차지할 만큼 풍요한 나라이다. 오랜 역사와 고유의 언어, 종교와 같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민족의식이 높아 옛부터 러시아에게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국가의 국기는 위는 청색, 아래는 황색의 두 가지 색으로 물들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데, 이는 아래서 곡식밭을 나타내는 하늘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두개의 동일한 수평한 끈을 나타낸다.
유럽권 러시아 남서부에 있는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약 60만 3,700㎢이고, 인구 5,400만 명 정도에 달한다. 수도는 인구 약 2백 6십3만명에 이르는 키예프로서, 천년의 역사를 갖은 도시이자, 구 소련의 여러 도시중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나무가 많은 도시이다. 이 나라는 면적 면에서만 보더러도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국가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여자가 0.86% 높은 편이며, 평균 수명은 66.8세다. 이곳의 여성은 72.32세이고, 남성은 61.54세의 평균 수명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남한의 6배 정도 되는 땅은 산이 없고 대부분 평지이며 흑토이다. 이 나라의 종업면만 보다라도, 수박의 무게는 6킬로가 넘으며, 한국의 배추씨앗을 심었을때 보통 4-5킬로는 보통이다. 지하자원으로 철과 천연가스,원유,석탄이 있으며, 구소련때 소련 전체의 50% 이상 농작물을 생산하였다. 감자, 옥수수, 양파, 당근, 가지, 토마토, 사탕무우, 고기, 우유 등이 대부분의 농축산업이며, 최근 고려인의 진출 이후 더 활기를 띄고 있다. 경제면을 보면, 러시아 이후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다음 순위 공화국 산출의 약 4배를 생산하는 이전 소련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구성원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는 소련 농업 생산량의 50%이상 생산했고 그 농장은 고기, 우유,곡물, 야채와 같은 기본재들을 다른 공화국에 공급했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중공업은 이전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 산업.광업지역에 설비와 다른 원료를 공급했다. 92년초 정부는 대부분의 가격을 자율화 했고, 개인주의를 위한 법적 토대를 세웠다. 그러나 정부와 입법기관 내에서 개혁을 하는 것에 대한 폭넓은 저항은 곧 개혁 노력을 저지했고 이로 인해 늦어진 개혁정책으로 93년말 높은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94년 6월 선거 이후로 당선된 구츠마 대통령의 새로운 경제개혁 프로그램으로 인해 현재 우크라이나 의 경제는 안정세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겠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구 소련에서 분리 되어 온 나라로서 유럽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으로나, 문명적으로 중심지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동서유럽의 중간적 위치에 있어서 종교의 혼합양식을 보여준다. 키예프의 그리스도 원조인 수도로서 신 콘스탄티노플은 키예프 성 소피아 성당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살아있는 성 소피아으로 설계되었고, 988년에 성 블라디미르 침례교도로 후에 지역적으로 복음을 전파 함으로써 11세기에 창설되었다. 키예프 페쯔르스크 라보라의 정신적, 지적영향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서 러시아 세계에 있어서 정교의 사상과 신념을 퍼지게하는데 공헌하였다. 정치 역시 대통령 중심의 의원제를 택하고 있다. 지난 95년에는 유럽공동체의회에 들어 갔다. 국민들중 상당수가 경제의 고통으로 공산체제를 그리워하고 있다. 지난 96년 구츠마 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한국과의 교류가 깊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여러 나라와의 싸움이 계속되었다가 17세기부터 독립을 선언, 19년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22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가 실패한 뒤 바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그 해 12월 독립을 확정하였고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풍부한 철과 석탄, 수력이 결합한 드네프르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공업이 활발하며, 예로부터 밀, 감자가 많이 나는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국민총생산은 995억 8,900만 달러(1992), 1인당 국민소득은 1,910달러(1992)이다. 우리나라와는 92년 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북한과는 같은 해 1월 수교하였다.
항공
주요공항은 키예프 근처의 보리스폴 공항과 오데사·리보프·하리코프에 있는 공항이다.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국제공항인 볼리스폴 공항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유럽 각국에서 항공기를 이용하여 입국할 수 있다. 비행편은 주로 CIS국가 및 동유럽 국가에서의 비행편이 많은 편이며 비록 비행기 운항 회수는 적지만 서유럽의 파리, 뒤셀도르프, 잘츠부르크, 빈, 취리히 등지와도 항공편이 연결되어 있다.
키예프에서 런던까지는 3시간 30분, 모스코바까지는 1시간 15분 비엔나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우크라이나 국제 항공사의 전화는 012-93-553-767이다. 국제공항에서 키예프 까지의 거리는 34Km이며, 24시간 운영하는 은행과 면세점, 식당, 어린이를 위한 공간, 24시간 영업하는 우체국, 수화물 보관소, 약국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공항에서의 교통편은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비용은 미화 $20이다.
훼리
약 80여 개에 달하는 국제 항구를 갖춘 우크라이나는 유명한 항으로 오데사항, 헤르손항, 이리체프스크항, 마리우폴항 등이 있는 데, 1991년 말경 3,900㎞에 달하는 총연장 길이를 자랑하는 수로가 만들어 졌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이 내륙과 흑해를 연결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가고 있다.
면적 : 604,000km2
수도 : 키예프
인구 : 1995년 53,770,000명
종교 :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우크라이나 카톨릭과 그리스 카톨릭 등 종교적인 내부적 갈등이 심하며, 유럽에서 들어온 개신교와 카톨릭은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곳의 개신교의 대표적인 교파는 70년간 지하교회에서 박해를 이겨온 침례교단이다. 오순절(카리스마 교회)과 안식교,루터란교회,여호와의 증인들도 있다. 최근 통일교 또한 선교사를 파송 포교중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중요한 국가로 동부와 서부를 영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키에프는 러시아 정교가 1000년 전에 탄생했던 곳이다. 수세기 동안 서부의 카톨릭과 동부의 정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충성심을 구하거나 요구했다. 대다수의 우크라이인은 러시아 정교의 신앙을 갖고 있고, 소수만이 로마 카톨릭 신앙을 갖고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교황의 지도력을 인정하면서 정교 고유의 의식과 구조를 따르는 합동 동방 카톨릭교의 신앙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 아래서 합동 동방 카톨릭교는 정교회에 가입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지하에서 활동해야 했으나 현재 더욱 더 자유로워졌다.
교회는 공산 치하에서 심한 핍박을 받았다. 1990년부터 종교의 자유가 생겨난 셈이다. 종교적인 분포를 보면, 무종교/기타는 25.5%이고, 유대교는 0.94%, 많은 수가 이스라엘과 서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회교의 경우는 0.47%, 주로 투르크 종족들이 이 종교에 속한다. 샤머니즘/정령숭배는 0.1%이며, 기독교의 경우는 73%, 개신교 3.2%, 로마 카톨릭교는 15%에 이른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정교를 신봉하고 있긴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선교 활동에 대해서 제한을 가하지 않으나 주재국 법에 위반되는 노상 대중 집회나 고성 장치를 동원한 요란한 전도 활동은 완전 금지된다. 따라서, 가급적 봉사 활동을 위주로 한 전도 또는 선교 활동이 바람직하다
주요민족 : 4~6세기에는 동슬라브족이 살았으나, 12~13세기에 몽골 등의 침입으로 민족이 나뉘었고, 그 중 우크라이나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인도-유럽인은 97.8%를 차지하며, 슬라브인은 96.3%, 우크라이나인은 37,419,000명에 달한다. 러시아인은 11,355,000명이고, 벨로루시인은 440,000명, 불가리아인은 234,000명, 폴란드인은 219,000명에 달한다. 기타 종족으로는 1.5%, 몰다비아/루마니아인은 460,000명 정도이며, 그리이스인은 99,000명, 아르메니아인은 54,000명, 집시들은 약 48,000명이고, 독일인은 38,000명, 그루지아인은 24,000명이다. 또한, 투르크/알타이족은 0.8%의 구성률을 보이며, 타타르족은 87,000명, 크리미안 타타르는 46,000명, 기타 종족으로는 1.4%. 유대인의 경우는 487,000명, 헝가리아인은 187,000명, 몰다비아인은 19,000명 정도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이루고 있는 주요 종족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크게 7개의 종족으로 나눌 수 있다. '발칸 집시'(Balkan Gypsies)족은 '롬'(Rom)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몰도바, 터키, 이란, 우크라이나 등의 동부 유럽과 서남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모든 집시들이 검은 머리와 검은 얼굴빛,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발칸 집시들 중에 밝은 피부와 금발 머리, 푸른 눈을 가진 집시들도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유럽인들과의 혼혈족이라고 여겨진다. 인도에 남아 있는 집시들과는 달리, 많은 발칸 집시들은 정착하여 생활하며, 도시 근처의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포장마차, 트럭, 트레일러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집시들도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아제르바이잔인'(Azerbaijani)은 아제르로도 알려져 있는 데, 이 종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상 수많은 침입을 당해 왔다.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후에 서기 7세기에는 이슬람이 이 지역에 소개되어 그 이후 지금까지 신앙이 지켜지고 있다. 11세기까지 터키의 영향이 페르시아보다 강했다. 결국 13세기에 아시아의 이 지역은 징기스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침입들이 이 종족의 성격과 결부되어 아제르인이 중앙아시아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중요한 아제르인의 공동체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란, 그리고 이라크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약 37,000명의 아제르인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살고 있다. 일부는 농사를 짓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공장에서 일한다. 그들은 기술 수준이 낮아서 외국인 관리자 아래서 일한다. 또한,'우즈벡'(Uzbek)인들은 2천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우즈벡인들은 투르크 종족의 하나로 주로 중앙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약 1천5백만명이 고국인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다우즈벡의 최초의 조상인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은 1300년대에 징기스칸을 도와 동부 유럽을 정복했다. 마침내, 투르크족과 몽골족 간의 동맹이 깨어지면서, 많은 전쟁국가들이 생겨났다. 우즈벡이 계통을 이어받은 것도 이러한 왕국들 중 몇몇 나라였다.1800년대 중반에 우즈벡족의 대부분은 러시아에 정복당했다. 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당이 권력을 얻기 까지 짜르의 통치 아래 있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는 많은 우즈벡 유목민과 농부들을 집단 농장에 강제 정착시켰다. 소련이 1991년 붕괴되면서, 우즈베키스탄은 독립국이 되었다. 유럽의 '유태인'(Jews)들은 적어도 2000년 이전, 로마 제국 초기에 유럽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 이들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오늘날 "유태인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상당한 부분이 유럽 유태인들 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유럽 유태인중에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아시케나지(Ashkenazic) 유태인과 세파디(Sephardic) 유태인 간의 차이이다. 아시케나지(Ashkenaz)란 말은 유럽의 광범위한 게르만지역을 뜻하는 성경에서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아시케나지 유태인들이란 그 지역과 관련된 조상을 갖는 유태인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히브리어와 슬라브어의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는 독일계 방언인 이디시어(Yiddish)를 사용한다. 세파디(Sephard)란 말은 중세에 유태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가리켜 사용했던 이름이다.
그 외에도, '자트족'(Jats)은 주로 인도의 북서부, 파키스탄의 남부에서 살며, 몰디브,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혈통, 역사 그리고 현재의 분포지역 등은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은 무슬림 정복자들과 더불어 이집트까지 진출하였고, 무슬림보다 먼저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었으며, 몽고의 군대와 함께 중국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한 페르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티무르인들에게도 위협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혈통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의견이 있지만 대부분 그들을 인도-아리안계 혈통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이 집시의 선조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혈통이 어떻든간에 18세기에 자트족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의 삶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자트족은 매우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잘 알려진 자트족의 속담 중에 "사람들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지만, 나는 영원히 계속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용감하며, 열심히 일하며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능력을 가진 민족이다. 자트족은 지배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안 타타르'(Crimean Tatar)족의 경우는 구 소련의 거의 모든 공화국에서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던 투르크 종족의 일족이다. 주요 인구는 볼가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공화국에도 거주한다. 타타르족은 10세기 이후로 강력한 문명을 이루어왔으며, 그들은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16세기 러시아의 정복에서도 살아남았다. 19세기에 타타르의 도시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위대한 문화 중심지 중 순위가 매겨질 정도이다. 타타르족은 몇 개의 러시아 도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에 30% 이상이 러시아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구사하고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타타르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타타르 민족의 신체적 특징은 푸른 눈의 금발 머리을 가진 사람들에서, 보다 몽골의 특징을 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얼굴에는 털이 거의 없으며 계란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타타르'(Tartar)족은 구 소련의 거의 모든 공화국에서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던 투르크 종족의 일족이다. 주요 인구는 볼가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공화국에도 거주한다. 이들은 10세기 이후로 강력한 문명을 이루어왔으며, 그들은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16세기 러시아의 정복에서도 살아남았다. 19세기에 타타르의 도시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위대한 문화 중심지 중 순위가 매겨질 정도이다. 타타르족은 몇 개의 러시아 도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에 30% 이상이 러시아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구사하고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타타르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타타르 민족의 신체적 특징은 푸른 눈의 금발 머리을 가진 사람들에서, 보다 몽골의 특징을 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얼굴에는 털이 거의 없으며 계란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삶의 모습을 보면,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타타르의 88%가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현재 러시아 사람들의 삶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서 일부 사람들은 혁명 이전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외딴 지역에서, 3세대에 이르기까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사회제도는 강한 가부장적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가족 내에서 법적으로 가장이 되며, 모든 가정문제에 있어서 최종 결정자임을 의미한다. 남자들은 가족의 소득과 어떻게 지출할 것인가에 대해 책임을 지
주요언어 : 우크라이나의 공식언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러시아어의 경우는 공식 언어는 아니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어는 끼릴문자를 사용하며, 러시아어와 벨라루시어와 함께 동슬라브어에 속하고, 광범위하게는 인도유럽어계에 속한다. 다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어 이외에 러시아어, 폴란드어등 소수민족언어의 사용도 허용한다. 특히 러시아어는 동부지역에서 교육과 비즈니스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일부 국민들 특히 동부지방에서는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까지 제기하기도 한다.
기후
우크라이나는 한국과 같이 뚜렷한 사계절을 갖는다. 전체적으로는 대륙성 기후를 띠나, 크림반도가 위치한 남부지역은 아열대와 지중해성 기후를 띤다. 겨울철 기온은 -8°C와 2°C 사이이며, 여름철에는 17°C에서 25°C사이의 기온을 보인다. 강수량은 북에서 남으로 갈수록 감소하는 경향이다.강수량은 고르지 않은 편으로 추운 계절보다는 더운 계절에 2∼3배 더 많이 내리며 우크라이나 남부의 스텝지대는 불충분한 강수량으로 인해 가뭄 피해를 겪는 경우도 있다.
즉, 대륙성 기후에 속하고, 남부 크림반도는 아열대성 기후 우크라이나의 내륙은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7월이 가장 덮고 온도는 평균 23도이며, 가장 추운 1월에는 영하의 기온을 유지한다. 동부지역은 차가운 시베리아 풍의 영향을 받지만 서부는 따듯한 지중해 풍의 영향을 받아 해안도시인 얄타(Yalta)와 오데사(Odessa)는 내륙도시보다 따뜻하다. 내륙은 6-7월이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이고 해안은 12-1월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국가의 북부는 우량도 많고 습지인 삼림지대, 중부는 기후가 온난한 흑토와 삼림의 스텝 지대, 남부는 건조한 스텝 지대를 이룬다.
지리
우크라이나는 북위 49도, 동경 32도로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서 흑해를 접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교차하는 지점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북쪽으로 벨로루시, 북쪽·북동쪽·동쪽으로 러시아 연방, 남쪽으로 아조프 해, 흑해, 남서쪽으로 몰도바·루마니아, 서쪽으로 헝가리·슬로바키아·폴란드와 접해 있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도브리 덴
의 미 : 안녕하세요?
현지어 : 쯔까이테 붇들라스카
의 미 : 기다려 주세요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우크라이나는 역사는 기원전 7-4세기 스키티아인(Scythias)에 의해 스텝지대부터 흑해 북부지역을 지배받으며 시작됐다. 스키티아 문화의 흔적은 동물과 인간을 자세히 묘사한 뛰어난 금 세공품이 남아있는 키에브의 동굴 수도원(Cave Monastry)에서 찾을 수 있다. 스키티아인에 이어 오스트로고스(Ostrogoths), 훈(Huns), 투르크-이란 카자(Turko-Iranian Khazars)의 지배를 받는다. 스칸디나비아인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장기간 지배했는데, 키에브는 기원전 882년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후 10세기까지 다뉴브강 서쪽의 볼가(Volga)에서 발틱해의 남부에 이르는 영토였던 키에브인 러시아(Kievan Rus)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키에브인 러시아의 지도자인 볼로드미르(Volodmir)는 988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의 이스탄불)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문화적으로 비잔틴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9∼ 12세기에 키예프시를 형성. 13세기 몽고의 침입에 의해 최종적으로 붕괴. 14세기에는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Lithuania 대공국, 일부는 폴란드의 지배하. 1569년, 양국이 합병하고 단일의 폴란드국을 만들면서 우크라이나는 같은 나라 영토가 되었다. 152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해안지역을 통제했다. 15세기에 전쟁과 전염병의 많은 인구가 사망했으며, 인접 국가의 카작인(kazaks, 코삭 인Cossacks) 농노와 정교도 피난민들의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왔다. 우크라이나인 코삭(Ukrainian Cossacks)은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 국가를 만들어 자치를 했으나 20년 후 폴란드와 러시아로 분리됐다.
폴란드의 압제에 대항해 1654년 독립 운동의 지도자 보그단 후메리닛키는 러시아 황제에게 폴란드로부터의 보호와 러시아로의 합병을 신청. 러시아는 폴란드와 싸우고, 키예프의 영유를 승인했다. 처음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인정했지만 18세기 후반에 완전하게 러시아에 합병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17년의 혁명 후 한때 완전 독립을 선언하는 정권이 성립. 그러나 동시에 소비에트 정부도 탄생하고, 이후 3년간에 걸친 내전에 돌입. 1919년 우크라이나 사회 주의 공화국 성립을 선언.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군사 동맹 체결. 1922년 12월 소련연방 형성에 참가. 194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대두로 러시아는 학교에서 우크라이나 언어 교육, 언론과 책을 금지시켰다. 1차대전 후 전제군주제가 붕괴돼 우크라이나는 독립의 기회를 얻었으나 당파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고 6개의 군대가 키에브를 일년동안 다섯 번이나 바꿔 통제하는 무정부상태를 야기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개입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인종적 당파간의 연속적인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서부를 러시아가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게됐고 1922년에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됐다. 스탈린이 권력은 잡은 1927년 우크라이나에 억압을 가했고 1932-33년의 기근으로 7백만명이 사망했다. 지식인에 대한 사형과 강제출국은 인구감소를 심화시켰고, 스탈린은 종교정책으로 250개의 교회와 성당이 파괴됐다. 1937-39년의 숙청기간동안 백만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2차 대전동안 소련과 독일군의 전쟁으로 6백만명이 추가로 사망하거나 강제출국 당했다
20세기 초반 50년 동안의 전쟁, 기근, 숙청은 우크라이나 남자의 50%, 여자의 25%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 대가를 치뤘다. 1989년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소련의 느린 보상으로 인해 광범위한 반소련 감정이 일어났다. 키에브의 지식인과 작가가 중심이 되 일어나 재건설을 위한 우크라니아 민족운동은 1990년 선거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게 했다. 7월에 국회는 자치권을 선포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91년 8월에 발생한 소련 쿠테타의 실패로 우크라이나 공산당(Commist Party of Ukraine, CPU)의 활동이 금지됐고 12월에 국민의 지지를 얻어 독립해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의장이었던 레오니드 크라브훅(Leonid Kravchuk)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0년 7월 16일 공화국 주권 선언. 1991년 8월 24일 독립선언(투표 참가자의 90% 이상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지지) 국명을 현재의 「우크라이나」라고 변경. 1991년 12월 1일에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소련연방붕괴의 계기가 된다. 당파주의로 인해 92년 9월 정부는 사임을 하게되고 러시아의 핵무기와 흑해 함대(크림 반도의 항구인 세바스토폴Sevastopol) 문제로 인해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됐고, 높은 인플레이션과 기름 부족, 구매력 감소로 경제 위축과 더불어 지역간, 인종간 격차가 더욱 심화됐다. 친 러시아 인사인 러오니드 쿠차마(Reonid Kuchma)가 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다수당이 됐다. 9년대 후반은 우크라이나와 NATO의 외교관계로 인해 러시아와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96년에는 신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이 명확하게 되고, 정권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쿠치마 대통령과 보수 세력이 우세한 의회와의 사이에는 아직 개혁을 둘러싼 알력이 있어서 개혁 템포는 늦다. 98년 3월에는 총선거가 있어 보수 세력이 강한 신의회가 탄생했다.
유용한전화번호
관공서나 일반 사무실은 1일 8시간, 월-금요일간 09:00-17:00까지 근무(점심시간 13:00-14:00)하나 회사에 따라 일정치는 않다. 보리스폴 국제공항의 전화번호는 295-2252이며, 줄리아니 공항은 242-2308, 열차정보는 005번, 택시 서비스를 원할 시에는 058을 이용하면 된다. 또한, 긴급 연락처로는 경찰서가 02, 병원 앰블런스 호출이 03이며, 소방서는 01이다.
전압 및 주파수
전기는 220V, 50 Hz (한국은 60 Hz임)만 있어서 110 V 제품을 쓰려면 변압기가 필요하다.
치안
우크라이나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으나 치안상태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다만, 시장 경제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느슨해진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소규모 범죄 조직을 중심으로 여행자등 외국인 대상 금품 강탈 범행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공공장소인 호텔이나, 시장, 버스 터미널, 지하도, 지하철역 등에서 소매치기가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늦은 밤에 단독 외출은 삼갈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러나, 조직 범죄 및 마약은 성행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정부는 마약퇴치에 강력히 대처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관광객들 중에서도 마약밀매 또는 마약복용등 마약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해야 한다.
Kuchma 대통령은 조직적 범죄의 근절을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바 있을 정도로 치안 상태는 CIS국가중 양호한 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내선 열차는 비교적 안전하나 모스크바-키예프 국제선 열차에서는 최면성 약품 또는 개스 등을 이용한 강도사건이 발생한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통화
독립 이후 부터 임시 화폐Karbovanets를 사용해 오다가 96년 9월에 가서야 화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나라의 화페 단위는 '우크라이나 그리브니아'(Ukraine Hryvnia)를 사용하는 데, 2000년 6월을 기준으로 한 1$ = 5.45 그리브나에 해당된다. 즉, 1 USD = 5.52 Ukraine Hryvnia 이고, 1UH = 200.66원(2000.6) 정도이다.
한국으로 전화
한국 통신 교환원 서비스번호는 8(2차 발신음 확인 후)-100-82를 누르면 된다.
우크라이나의 통신시설은 사업용과 개인용 모두 부적당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1991년 기준 인구 1,000명당 886,000대의 전화가 있다. 다른 CIS 국가로의 통신은 전선이나 단파를 이용하고 있으며 CIS 국가를 제외한 약 167개국가로의 통신은 위성을 이용하고 있다. 국제전화는 직통으로 가능하며 키예프, 오데사 등지에 전자우편서비스(Electronic Mail Services)를 위한 시설이 설립되었다. 지상위성기지는 INTELSAT, INMARSAT를 포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970년대 이 대폭적인 전화회선 증설을 추진하여 상당한 실적을 기록하였으나 인구대비 전화회선 수는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또한 전화회선 수보다는 전화기의 보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온 결과 전화기 1대당 통화건수에 비해 총 통화량이 증가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1991년말 현재 도시간(都市間) 총 통화건수는 68억 9천만 건을 기록하였고, 인구 1인당 도시간 통화건수는 13.2건을 기록하였다. 기업에 대한 통신시설의 보급 또한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편이 그 중에서도 팩시밀리 및 텔렉스의 보급이 부진한 상황이다. 더욱이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의 송수신설비는 일부 전략연구소나 주요 공단에 국한되어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점은 이러한 통신시설의 자동화율이 극히 저조하다는 데 있다. 각 지역을 연결하는 통신의 1/2 이상이 수동식 중계(中繼)에 의지하고 있다.
현지로 전화
국제 전화는 전화국에서 신청하며, 수도인 키예프에서의 한국 통화시에는 1분에 미화 3불의 요금이 든다.
주의사항
<국내 비자발급처>
기 관 명 : 주 우크라이나 대사관
주 소 : 43, Volodymyrska St., 01034, Kyiv, Ukraine
전화번호 : 380-44- 246-3759/61
팩스번호 : 380-44- 246-3757
근무시간 : 월요일-금요일 09:00-17:30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과거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미개설시에는 주재국 키예프 보리스플 공항 영사처에서 입국 사증을 발급하였으나 현재에는 공항에서 아국인에 대해 입국사증을 발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입국시 입국 사증이 없으면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하므로 입국전 반드시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또는 인근국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입국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연고가 있으면 연락하여 초청장을 받는 경우가 있다. 팩스나 서신으로 초청장을 받으면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으면 된다. 종교비자는 6개월짜리가 있고, 일반 비자는 보통 1개월이다. 비자의 접수 시간은 오전 9:30-12:00, 오후 15:00-17:00이며, 비자 발급 시간은 15:00-17:00이고, 비자 수수료로는 US $ 30(단수비자), US $ 120(복수비자)가 든다. 비자 수수료는 외교 센터 빌딩 맞은편 하나은행에 입금시켜야 한다. 또한, 사증 발급의 신청의 경우, 우크라이나 입국사증은 해외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발급받아야 한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전화는 578-6910, 팩스 578-5514 입국사증 발급서류는 초청장(원본), 신청서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비치), 사진 2매가 필요하다. 통상 사증 발급의 소요기간은 1주일이며, 사증 발급 수수료는 미화 30불이다. 단, 급행료는 미화 60불, 사증발급 소요기간은 2-3일 걸린다.
1992년 4월 20일 우크라이나 국경통제소의 비자등록 서비스 절차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외국인 또는 무국적자는 우크라이나 출입국비자를 발급 받기 위하여 미화 $50 또는 이에 상응하는 경화를 지불해야 하며, 통과비자를 발급 받기 위해서는 $15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단체여행단의 일원으로 입국하는 자와 우크라이나 기업 및 조직과의 사업관계 수립을 위해 입국하는 사람들이 비자발급을 신청할 경우에는 그 비용은 정액의 50%인 $25로 규정하고 있다. 기타 CIS 국가 여행을 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1인당 $5를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외국인 및 무국적자가 비자연기를 요구할 경우에는 30일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내에서 허용되며, 이때 $20의 서비스 비용이 소요된다. 비자발급은 해외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담당하고 있다. 사전에 초청장을 받아야 하며 초청장은 정부부처, 외국인비자 등록 사무국이 인정하는 기관으로부터 입수할 수 있다.
<비자신청시 구비서류>
입국 사증 발급 서류는 초청장(원본), 신청서(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비치), 사진 2매, 주민등록등본, 여권복사본, AIDS 검사증(또는 건강진단서)이 필요하다.
'관광비자'의 경우는 신청서, 6개월 이상 남은 여권, 여권 사본, 여권용 사진 1장, 그리고 주민등록 등본과 초청장 원본이 필요하며, '상용비자'는 신청서와 6개월 이상 남은 여권, 여권사본, 여권용 사진 1장, 그리고 사업자 등록증 및 초청장이 요구된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입국시에는 일단, 외국인 여행자 보험에 가입 해야 한다. 가입하지 않으면 입국 심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여객기가 몰리지 않는 오전 또는 오후 늦은 시각에는 입국 심사에는 약 10-20분 정도면 되지만, 여객기가 몰리는 오후 1시-5시까지는 30분-1시간 가량이 소요된다. 입국 절차는 안전보험 가입, 입국 심사, 수화물 회수, 세관 순서로 이우어 진다. ) 입국시 :외국인 여행자 보험에 가입 해야 함. 가입하지 않으면 입국 심사 불가능. 여객기가 몰리지 않는 오전 또는 오후 늦은 시각에는 입국 심사에 약 10-20분 소요 여객기가 몰리는 오후 1시-5시까지는 30분-1시간 가량 소요. 입국 절차는 안전보험가입, 입국 심사, 수화물 회수, 세관 순서로 이루어 진다.
출국시 출국 심사에는 세관 신고 등 약 30분 가량이 걸리는 데, 비행기 출발 1시간 전 공항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함은 기본이다. 출국 절차는 세관 신고, 수화물 발송 및 탑승권 발급, 출국심사 순으로 행해지며, 출국 세관 신고시, 입국시 확인받은 세관 신고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검역관련 사항>
입국시 외국인에 대한 예방 접종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간염예방 접종을 못한다. 겨울이 꾀 추우므로 독감 예방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세관관련 사항(면세범위 등)>
면세품목에는 일반적으로, 담배 200g, 2리터 술한병, 1400달러 정도 가치의 선물로 한정된다. 입국시에는 반입 가능 품목으로, 세관 신고시 불필요한 종목으로는 양주 1병, 담배 10갑, 기타 $500이하의 선물용품 등이 있다. 그러나, 반입 금지 품목으로는 총기류, 무전기, 마약, 위해 약품 등, 카메라 및 귀금속, 보석류(반출전제)가 해당된다. 여행을 마치고 출국시 반출 편의를 위해 반드시 신고 요망한다. 만일 신고 하지 않으면 반출 불가되므로 조심하자. 출국시에는 규정상으로는 미화 $100 이상의 물품을 구입하여 반출할 경우, 외화 환전증명서 및 영수증을 소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초과 금액의 50% 과세를 문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물용품나 고가품이 아니면 비과세 또는 소액의 과세 징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을 포함한 골동품의 경우는 시청 문화국의 허가 취득후 반출이 가능한 데,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감정전문가 위원회(연락처229-5647,229-5340)로부터의 감정이 필요하며 1945년 이전 골동품은 반출이 불가하다.
휴대하고 있는 외국 통화는 모두 세관신고서에 기입하여 신고한다. 신고용지는 세관 검사대 가까이에 있다. 신고서에 기입할때 주의할 점은 외화수지 제한이 없으므로 소지외화, 트레블래스 체크전액을 기입할 것, 세관의 인증을 받은 신고서는 루블로 환전할 때마다 제출하여야 한다. 또한, 현금 1000불 이하를 소지하고 입국할 경우, 소지금액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없고 세관신고서만 제출하면 되지만, 현금 미화 1000불 이상일 경우에는 돈을 꺼내어 세관원 면전에서 세관신고서와 대조하여 소지 금액을 정확히 확인한다. 따라서, 미화 10,000불 이상 반입할 경우 특별 신고서 추가 작성이 필요하다. 1회 입국시 미화 50,000불 이상은 반입 불가하다. 그리고, 출국시 세관신고 없이 반출할 수 있는 금액은 미화 1,000불 이하 또는 동 상당액의 기타 화폐이다. 이는 입국시 미화 1000불 이하 소지하여 세관 신고가 면제된 경우이며, 입국시 반입한 외화 금액 이상의 외환 반출은 불가하다. 입국시 미화 3,000불을 신고하고 출국시 미화 5,000불을 소지하고 출국할 경우 반출가능 금액은 미화 3,000불이고 잔여액 미화 2,000불은 반출이 불가하다. 만일 출국시 세관신고서에 입국시 소지한 외화금액만을 신고하고 실제로는 그이상의 외화금액을 반출하려다 적발될 경우 주재국 법에 따라 사법처리 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신고금액과 입출국시 소지 외화금액이 일치하도록 하여야 한다.
<환전관련 사항>
거리에 있는 환전소나 은행을 이용해야 한다. 암시장 상인과는 상당히 위험하므로 거래하지 말아야 한다.
<외국인 금기사항>
이곳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누출된 방사능 오염으로 체르노빌과 북부 쥐따미르 일부 지역은 여행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핵미사일과 관련된 시설이나, 흑해 함대가 위치한 세바스토폴 등 크리미아 지역의 군사 시설 지역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제한 되므로 주의하자. 따라서, 입국 전 사증 발급 신청시 방문하고자 하는 지역명을 신청서에 기입해야 희망하는 지역을 여행할 수 있다.
시차 : -7시간
▶ 키예프
구 소련에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다. 전체 구 소련의 도시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나무가 많아 숲이 울창하기로 소문난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의 원조이자 최초의 보급지라고도 할 수 있는 키예프는 문화 역사적으로나 문명적으로도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며, 17세기 부터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페쯔르스크 라보라의 정신적, 지적 영향이야 말로 러시아 세계에 서, 정교의 사상과 신념을 넓게 유포시키고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라고도 불리우는 키예프는 소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던 모스크바 시절에, 상당히 큰 규모의 이국적인 도시였다. 이곳은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도시의 우상을 포기하고, 자신의 왕국을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선언한 이후부터, 키예프루스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에도 13세기에 몽고족의 침입을 받은 후, 이 나라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옮겨지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경제적 중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이다.
문화예술적인 면에서도 키예프 챔버 오케스트라, 키예프 국립 필 하모니와 키예프 아이스 발레단 등이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키예프 국립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로서, 키예프의 가장 중요한 연주홀인 M.V.Lysenko의 전용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한명 한명 모두가 유명한 음악가로서 예술적으로 완벽한 앙상블을 보여 주고 있다. 1990년 이후 지휘자인 Roman Kofman이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였는 데, 그는 키예프 오케스트라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지휘자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현악기로만 구성된 키예프 챔버 오케스트라는 최고 수준의 음악을 목표로 음악 애호가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드나이퍼 강이 유유히 도시의 중심에 흐르고 있는 키예프는 고고학자들이 키 도시의 역사를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깊은 도시에 속한다. 지중해 동부로 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철도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며, 잘 짜인 간선 도로망을 통해 모든 지역과 대도시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키예프의 볼만한 곳은 다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걸어서 돌아볼 수가 있다. 키예프 제일의 번화가는 시내를 남북으로 달리는 흐레샤티크 거리이며, 이 거리의 북쪽 변두리 강가에 있는 독립광장에서 남쪽의 큰 시장이 있는 주변까지가 특히 번화한 곳이다. 이 흐레샤티크 거리에서 북쪽에 있는 블라디미르 거리에 걸쳐서는 블라디미르 언덕, 성소피아 사원, 성 안드레이 사원, 역사 박물관 등의 관광 명소가 모여 있다. 이 두 거리가 교차하며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것이 타라스 세브첸코이다.
교육
셰프첸코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학생수가 약 2만 2천 여명이나 되는 '키예프 국립 대학'이 나온다. 이 대학은 주창자인 'Taras Shevchenko'의 이름을 따서, 'Taras Shevchenko 대학'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대학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32년 키예프의 몰리아 아카데미가 이곳의 전신이다. 이 대학은 건물이 온통 붉은색이라서 붉은 대학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건물은 짜르 치하에서 학생들의 봉기가 실패한 후 검붉게 칠해진 주요 건물들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밝은 색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한다.
이 키예프 대학은 최초로 마르크스 경제론을 보급한 지베르 교수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 대학의 건물 맞은 편에는 세프첸코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세브첸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학교 주위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비롯해서 세브첸코 박물관, 우크라이나 문학 박물관, 서양미술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어 강의가 끝나고 관람할 수 도 있다. 또한, 이 키예프 대학교는 우리나라의 고려 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으며, 이 학교에 곧 한국어학과가 개설될 예정이다.
산업
유럽 최고의 곡창 지대를 자랑할 정도로 구소련 당시 전체 농작물의 50%이상을 생산해 냈고, 천연가스와 원유, 철강석, 마그네슘, 수은, 목재 등의 천연자원과 화학 비료가 생산된다. 하지만, 1992년 독립과 개방화 이후 계속 되어지는 인플레이션으로 모든 국민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실정이다.
키예프 주는 농업이 발달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부에서는 아마(亞麻)·감자 재배 및 낙농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곡물과 사탕무가 주로 재배되는 남부에는 소규모 제당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다. 키예프 시 주변에서는 시장출하용 근교농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농업이 활발하지만 이 주의 경제는 무엇보다도 키예프 시의 대(大)자본과 공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특히, 키예프는 기계와 직물, 건축자재 등의 공장이 있으며, 금속과 기계 및 조선, 촬영기 등의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해외여행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 이탈리아 [ITALY] (0) | 2008.07.12 |
---|---|
유럽 유고 [YUGOSLAVIA] (0) | 2008.07.12 |
유럽 오스트리아 [AUSTRIA] (0) | 2008.07.12 |
유럽 영국 [UNITED KINGDOM] (0) | 2008.07.11 |
유럽 알바니아 [ALBANIA] (0) | 2008.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