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질수록 뜨끈한 국물이, 바람이 거세어 질수록 따뜻한 온천이 그리워진다. 온천도 그냥 온천이 아니라 노천온천이 탐이 난다. 나이 탓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끌리는 것을. 온천과 화산, 과거와 미래가 혼재 된 큐슈는 겨울 일본 여행에 딱 맞는 곳이다.
- 첫날_ 난생 처음 노천탕!
- 겨우 한 시간 조금 넘는 비행시간, 타자 마자 내리는 듯한 안타까움으로 공항을 나와 시골길을 달려간다. 맨 처음은 가는 곳은 ‘다자이후 덴만구’ 라는 신사. 일본에서 신사란 크기에 상관없이 발에 채일 만큼 많지만, 이곳은 학문의 신을 섬기고 있어 입시지옥 일본에서 그 유난함이 더하다. 신사는 돌이 평평하게 깔린 길 위로 선 커다란 도리를 통과해서 가는데 좌우로 늘어선 전통 상점들 덕에 구경하며 심심하지 않게 걸어간다. 토실한 잉어들이 바글거리는 연못을 지나 신사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나무 판이 주렁주렁 풍년이다. 곳곳의 기원들을 보면서 입시 열기를 실감한다. 물론 한글도 눈에 띄는데 효과는 어떨지 모르겠다. 다자이후 덴만구는 일본의 여느 신사와 마찬가지로 벚꽃이 만발한 봄철, 단풍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이면 더욱 아름답다. 신사를 나와 상점가로 접어 들기 전, 전통의 분위기가 풍기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시간 여유가 되면 한적하게 산책 해 본다. 운이 좋으면 작은 정원을 둘러 싼 쪽마루에 앉아 평화로운 명상에 잠길 만한 곳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벳부로 가는 길, 겨우내 쉬고 있는 일본의 농촌 풍경이 익숙하고 평화롭지만 마음만은 설렌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노천 온천! 한 밤중에 몰래 계곡에서 목욕하고 올라가는 선녀가 아닌 이상, 우리네 문화로는 벌거벗은 채 오픈 된 공간에 있을 일은 없어 노천 온천은 상상만으로도 은밀하다. 게다가 오늘 밤 묵을 호텔은 그 이름도 유명한 스기노이(杉の井). 시설이나 규모 면에서 근방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침대가 있는 객실과 다다미로 만들어진 거실은 충분히 고급스럽다. 여러 종류의 온천탕과 아쿠아 비트라 불리는 물놀이 시설까지 스기노이 호텔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닌 벳부의 가장 큰 관광지인 것이다.
호기심 당당하게 왔지만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이용객이 적은 이른 아침에 노천 온천탕에 들어 가 본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밖에서 보이는 곳은 없다. 위치도 그렇고 교묘히 정원수나 장식들로 가려져 있어 하늘 아래 완벽한 공간이다. 탕으로 들어가 목만 내놓고 앉으면, 온 몸의 혈관을 타고 온천수가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코 끝에 불고 노천 온천의 은밀한 유혹은 달콤하기만 하다.
- 둘째 날_ 하루에 두 번 넘나드는 행복한 지옥여행
- 뜨끈뜨끈 열기가 신발을 뚫고 발바닥을 타고 올라 오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벳부가 자랑하는 지옥온천 순례를 시작한다. 너무 뜨거워 온천욕은 할 수 없고, 농사 짓기에 토질도 맞지 않고, 여기에 눈 앞에 드러난 온천수가 피처럼 붉다면 주민들이 지옥을 떠 올리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래 저래 만들어진 지옥온천은 10여 개, 그래서 지옥온천 순례다. 철 성분이 담긴 새빨간 피 지옥은 코스 중 가장 충격적이고, 바다 보다 파란 바다 지옥에서는 계란을 삶고 있다. 악어가 사는 악어 지옥, 뜨거운 흙탕물이 보글거리는 것이 삭발승의 머리 같다 하여 스님지옥, 흰색의 연못이 부글거리는 하얀 연못 지옥,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높이 20m의 간헐천이 있는 용지옥… 흥미로운 테마와 이름이 붙은 벳부의 지옥 구경은 지옥이지만 결코 고통스럽지 않다.
구마모토로 가는 길, 아소(阿蘇)의 활화산을 들른다. 일본이란 나라가 화산과 지진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으나 큐슈는 유난하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별 걱정 없는데 반해 겨우 며칠 다녀가는 여행객만 불안에 떤다는 것이다. 아소 활화산은 아직도 연기를 뿜는다. 분화구를 등 뒤에 놓고 사진을 찍다 보면 유황 냄새 실려 불어오는 바람에 잠깐 숨이 막혀 깜짝 놀란다. 화산 연기가 스멀거리며 피어 오르고 얕은 공포감이 이는 아소 역시 지옥. 하루에 두 번이나 지옥을 여행하는 특별한 날이다.
평원이 펼쳐지는 쿠사센리를 지나 구마모토로 간다. 구마모토에서 묵는 호텔은 히젠야(大自然). 자연의 일부인 듯 만들어 놓은 전망대 노천탕에서 계곡을 내려다 보며 즐기는 온천욕은 히젠야가 아니면 힘들다. 발을 위한 온천 족탕, 힘차게 뿜어 내는 온천수가 설치된 탕 등 호텔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온천을 경험하고 일본 전통의 가이세키 요리를 맛 본다. 가이세키 요리에는 회와 조림, 면류, 국물류 등이 개인 별로 작은 상에 마련된다. 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일본의 회는 풍성함을 느낄 만큼 넉넉하고 입안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온천과 건강한 먹거리, 실로 웰빙의 여정인 셈이다.
▲ 아소 활하산
- 아기자기한 온천 마을 유후인
- 벳부에서 조금 여유로운 일정이라면 유후인에 가 보는 것도 좋다. 유후인은 벳부에서 차로 40분 가량 걸리는 작고 푸근한 온천마을로 도착하는 순간 혹시 토토로라도 살지 않을까 하는 환상이 생길 만큼 동화스럽다. 다분히 여성 취향적인 면이 있지만 이 작은 동네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소박한 건물들 사이사이의 작은 온천들, 갤러리 같은 커피숍,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액세서리 가게, 토토로가 망을 보고 있는 토토로 전문점,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분이 안가는 꽃가게를 기웃거리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 본다.
- 셋째 날_ 과거와 미래의 기묘한 조우
-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역사 속에서 성(城)은 성주의 권위를 나타냄과 함께 완벽한 요새로 공격과 방어가 가능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구마모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성을 지은 성주는 임진왜란에 우리에게 큰 타격을 준 가토 기요마사. 승승장구하던 그가 패전으로 돌아가면서 우리의 기술자를 데려 갔고, 또 본인의 전투 경험을 살려 요새화 했다. 때문에 면이 이어진 모서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끄러운 성벽은 위로 올라 갈수록 뒤집어져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성 안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는 비상식량이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우물은 성 안에 갇혔을 경우를 대비함이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성에 들어서면 시야를 턱턱 가로막는 성곽들은 성이 단순히 주거용이나 과시용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구마모토 성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달려 후쿠오카의 캐널 시티(Canal City)로 간다. 말 그대로 운하도시. 건물 사이로 물이 흐르고 두 개의 건물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유럽의 노천시장을 연상시키는 광장에서는 볼을 빨갛게 칠한 광대가 공을 던지며 춤을 추고, 마술사는 비둘기를 날려보낸다. 날이 춥지 않으면 음악에 맞춰 땅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분수도 볼 수 있다. 캐널 시티 내부는 일본 특유의 장식적인 가게들과 오락실, 극장, 레스토랑, 커피숍, 음반 가게들이 들어 차 있다. 기운만 있다면 반나절 정도는 혼자 구경하면서도 거뜬히 보낼 수 있다.
후쿠오카는 구마모토에 비하면 다분히 현대적이다. 캐널시티가 그렇고, 마징가라도 나올 듯 지붕이 열리는 후쿠오카 돔이 그렇다. 그 옆으로 유연하게 서 있는 씨 호크(Sea Hawk)호텔은 오늘 밤 묵을 숙소. 범선을 흉내 낸 씨 호크 호텔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등 대륙을 이미지화 해 객실을 만들었다. 호텔과 이어지는 하와이 풍의 Hawks Town Mall은 상점, 카페와 레스토랑, 오락실, 극장등의 시설이 있는 쇼핑타운. 때문에 씨 호크 호텔 하나로도 놀거리, 볼거리 충분한 작은 도시가 된다.
- 후쿠오카에서 마지막 밤을 알차게
- 양 많으면 뺄 것!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는 밤, 1분 1초가 새삼스레 아깝다. 일본만큼 안전한 곳도 드무니 하루 정도는 밤 마실을 다녀 볼 만도 하다. 포장마차가 늘어선 나카스에서 따뜻한 정종과 어묵 한 꼬치, 아니면 진한 국물에 끓여주는 일본식 라면도 좋다. 다만 김치나 단무지는 우리처럼 무제한 제공되는 공짜가 아님을 명심하자. 쇼핑을 좋아하면 지상과 지하가 미로처럼 이어지는 텐진도 볼 만하다. 리버레인은 명품이 즐비한 비싼 쇼핑센터로 구경하는데 돈이 들진 않으니 다행이다. 후쿠오카가 현대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시다 신사를 비롯한 기온은 크고 작은 신사와 절이 곳곳에 있고, 기모노를 입은 채 종종걸음을 치는 일본 아줌마들도 눈에 띄는 전통의 거리다. 후쿠오카는 제 나라 수도인 동경보다 부산이 가깝다. 부산과 3시간 걸리는 쾌속선이 운행하고 있으니 경제적인 여행을 원하거나, 서울 보다 부산이 가까운 지역에선 배 편도 권할 만 하다.
- 제4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젠 현실로
- 돌아 갈 길이니 짐을 완벽하게 꾸리고 소풍 삼아 아사히 맥주공장을 간다. 일본인들만큼 맥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일본 요리에 맥주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영화에서나 아니면 식당에서도 맥주를 반주 삼아 마시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가 일본의 맥주는 우리보다 다양한 듯 하다. 아사히 공장에서 맥주가 나오는 과정을 보고 갓 뽑아 낸 신선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자, 여행은 끝나고 모든 것은 현실이 되었다.
출처 :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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