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연방은 '유고슬라비아('남(南)슬라브족의 땅'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3번째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29년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유지되었는데 247,542㎢의 면적을 차지했다. 전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되었는데 1991년 당시 면적은 255,804㎢, 인구는 2,400만 명 정도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현재의 연방을 이루고 있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포함해 지금은 독립한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6개의 공화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3번째 유고슬라비아'는 1992년 4월 27일 수립되었는데 이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인구의 약 45%와 면적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 형태는 민주 공화국을 지향하고 있으며, 입법부는 인민 의원(135석), 공화국 의원(각 공화국 20석, 합계 40석)으로 구성된 의회(Skup午tina)가 담당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은 1992년 12월에 재당선된 밀로셰비치이며 수상직은 바소비치(S. Vasovic)가 맡고 있다. 한편 1996년 11월에 있었던 연방 의회 선거 결과를 보면, 세르비아에서는 세르비아 사회당(SPS), 유고 좌파 연합(JUL), 신민주당(NM) 등의 좌파 연합이 45.7%의 득표율을 확보함으로써 세르비아에 배정되어 있는 연방 의회 의석 118석 중 64석을 차지하였다. 몬테네그로에서는 밀로셰비치 현 대통령과 연합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사회 민주당(DPS)이 연방 의회 선거뿐만 아니라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도 5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 지방 의회 선거에서는 야당이 상당히 선전하자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무효화했으며 이로 인해 베오그라드에서는 18일 동안 대규모 시위 사태가 벌어져 왔다. 결과적으로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이 국내외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정부의 지방 선거 무효화 선언에 항의, 시위를 주도해 온 야당에 일단 승리를 안겨 주게 되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농업 수준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비교할 때 낙후되어 있다. 1989년 2000%에 달하는 고인플레로 인해 자주 관리 제도는 효용성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고, 개혁가들은 결국 사유 재산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초 정부는 베오그라드 조폐국의 화폐 발행 금지와 임금 동결로 인플레를 잡으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에 더해 유고 내전의 발발과 UN(국제 연합)의 경제 제재 조치는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구유고 연방의 5개 공화국과의 무역은 단절되었으며, 한 달에 250%씩 뛰는 인플레, 기업 파산, 천문학적인 군사비 지출로 경제는 대재난을 맞이하였다. 1993년에 수입은 10분의 1로 감소하였고, 공업 생산량은 전년과 대비하여 40%가 떨어졌다. 또한 공장 노동자의 60%가 실업자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1995년 12월 보스니아 평화 협정의 조인으로 인한 평화 무드 조성과 사유화의 추진 및 외국인 투자 관련 규정의 개정 등을 계기로 최근 제조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직접 투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유고 연방은 향후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유고슬라비아는 한때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였으나 지금은 점차 사유화와 협력경제 체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경제의 대부분이 경공업과 중공업, 서비스업과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저성장이긴 했지만 1990년대까지는 국민총생산(GNP)의 성장이 인구 성장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전쟁과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농업의 경우 소규모 개인농장이 대부분이다. 사회주의 정권 치하의 구 정부에서 전폭적인 경제지원과 기술지원을 받은 공동소유 농장의 농부는 전체 농업 인구에서 적은 부분을 차지 하지만, 개인농장보다 상당히 생산성이 높은 편이다. 개인농장은 대개 건지농업 위주이고 코소보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관개 시설은 아직 미비한 상태이다. 주요 작물은 옥수수·사탕무·밀·감자·과일 등이다. 농장에서는 대개 돼지, 양, 가금류를 함께 기른다. 원유가 생산되기는 하지만 국내 수요에 미치지는 못해 많은 양을 수입한다. 공급시설 부족으로 천연 가스 생산량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국내 에너지 공급의 상당량을 석탄이 차지하고 있다.구 중앙계획경제 아래서 원자재와 기계류의 비효울적인 분배로 산업발전이 방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에서 광업·제조업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금속제품, 펄프와 종이, 유리, 플라스틱과 합성수지, 섬유, 화학제품, 자동차 등이 주요 생산품이다. 크로아티아의 달마치야 해안과 슬로베니아의 줄리안알프스 산맥 등 옛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시절에는 관광업이 중요한 산업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한정되어 있다. 무역수지는 만성적으로 좋지 않으며, 외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유고슬라비아인의 송금으로 부분적인 상쇄가 이루어지고 있다. 도로망과 철도망은 잘 갖추어져 있다. 내륙의 수로는 도나우·사바·티소 강의 일부분을 포함한다. 베오그라드에는 국제 공항이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 코소보 자치주, 보이보디나 자치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으로서, 새 헌법에 따라 1992년 4월 27일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결성을 공포했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집단적 지도체제는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결성 이후 연방의회의 선출을 통해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대통령제로 발전했다. 연방의회는 40명으로 구성된 상원인 공화국원(Chamber of Republics)과 하원인 연방원(Chamber of Citizines)으로 구성된다.

무역수지는 만성적으로 좋지 않으며, 외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유고슬라비아인의 송금으로 부분적인 상쇄가 이루어지고 있다. 도로망과 철도망은 잘 갖추어져 있다. 내륙의 수로는 도나우·사바·티소 강의 일부분을 포함한다. 베오그라드에는 국제 공항이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 코소보 자치주, 보이보디나 자치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으로서, 새 헌법에 따라 1992년 4월 27일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결성을 공포했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집단적 지도체제는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결성 이후 연방의회의 선출을 통해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대통령제로 발전했다. 연방의회는 40명으로 구성된 상원인 공화국원(Chamber of Republics)과 하원인 연방원(Chamber of Citizines)으로 구성된다. 이 날의 대표적인 자연 자원인 코토르(Kotor)만은 피요르드(높은 절벽 사이에 깊숙이 들어간 협만)이며, 몬테네그로의 두르미토르(Durmitor) 국립 공원은 구유고 연방 가운데 가장 큰 협곡이다. 울치니(Ulcinj)와 알바니아 사이의 지역은 아드리아 해 동부에서 가장 긴 해변이기도 하다.

항공
국영 항공사인 유고슬라비아항공(JAT)이 해안과 내륙공항사이를 운행한다. 험준한 지형이나 도러상태를 고려해볼때 효과적인 여행을 위해 비행을 선택할 수 있다.

면적 : 102,173km2

수도 : 베오그라드

인구 : 1998년 기준 23,300,000명

종교 :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은 대부분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세르비아 정교회가 두 공화국 내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크며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은 영적인 것보다는 민족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세르비아인 중에 복음주의 신자는 거의 없고, 교회는 작고 흩어져 있으며 종종 영적인 연약함, 인격적인 마찰, 사소한 율법주의와 경쟁의 모습을 띄고 있다. 베오그라드에는 단지 7개의 소규모 교회가 있으며, 도시 남부에는 거의 없다. 현재는 공개적인 전도집회와 전도의 자유가 제한받고 있다. 그리고, 몬테니그로인은 대부분 전통적이며 매우 독자적인 그리스 정교인이다. 그곳에는 하나의 작은 침례교 집단과 시작 단계인 오순절 집단에 소수의 복음주의자가 있다. 이밖에도, 코소보는 90%가 알바니아인이며 거의 대부분이 회교도이다. 기독교인은 2%정도의 카톨릭 교인이 전부이며, 수도인 프리아티나에 소규모 오순절 교회가 하나 있다.

주요민족 : 일반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이 차지하는 종족에는 세르비아인이 있다. 몬테네그로에는 몬테네그로인이 가장 많으며, 이슬람교도와 알바니아인도 상당수 있다. 이러한 세르비아인은 정열적이고 다혈질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몬테네그로인은 세르비아인과 연관이 많은 민족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동방정교를 신봉한다. 1100만의 인구 가운데 세르비아인이 62.3%, 알바니아인이 16.6%, 몬테네그로인이 5%, 헝가리인이 3.3%, 슬라브계 무슬림이 3.1%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외의 소수 민족으로는 크로아티아인, 집시, 슬로바키아인, 마케도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우크라이나인 등이 있다. 몬테네그로인은 공식적으로는 세르비아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1년 기준으로 17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유고에 살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10만 명이 코소보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50만 명에 이르는 전쟁 피난민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6만 명은 몬테네그로에 머물고 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인구 가운데서 4분의 1이 헝가리인이며 코소보 자치주의 인구 가운데 90%가 알바니아인이다. 현재 유고 전역에는 약 200만 명의 알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알바니아 국가의 총인구를 320만 명이라 볼 때 매우 큰 수의 이민족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주요언어 : 세르비아어가 신유고 연방의 공용어지만 코소보에서는 인종 구성상의 특징으로 알바니아어가 주로 쓰인다.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거의 같은 언어지만 세르비아어는 키릴 문자로 표기하고 크로아티아어는 라틴 문자로 쓴다. 한편 평범한 유고인들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가장 배우고자 원한다고 한다.
세르비아어로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어와 거의 유사하고, 구 유고 때 가장 널리 쓰이던 언어였으므로 지금도 구 유고 지역에서는 모두 통한다. 구 유고 연방이 해체된 이후부터 크로아티어와 따로 분리되었으나 문자만 서로 다르게 쓰고 있다.

기후
유고슬라비아는 온화한 대륙성 기후 지역이다. 1월 평균기온은 도나우 평원의 0℃에서 산악지대의 -3℃에 이르며, 7월은 17∼21℃ 정도이다. 연평균강수량은 북부평원지대의 838mm에서 몬테네그로 산악지방의 2,540mm에 이른다.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이 바뀌는 것은 한국과 유사한 편이다. 한국보다 여름이 더욱 덥고, 겨울도 더욱 춥다. 그러나, 아드리아해 연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일조량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리
유고슬라비아는 크게 산악지대와 내륙평원으로 구분된다. 전반적으로 산악지대가 우세한 세르비아의 경우 서쪽에 디나르알프스 산맥, 남서쪽에 북알바니아알프스 산맥과 샤르 산맥, 동쪽에 발칸 산맥이 뻗어 있으며, 비교적 저지인 세르비아 북부와 보이보디나 자치주에는 도나우 강 및 그 지류들인 사바·티사 강 유역의 평야가 있다. 몬테네그로 남서부에는 건조한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카르스트 지형이 있으며, 비교적 비옥한 동부지역에는 디나르알프스 산맥의 일부가 뻗어 있고 넓은 숲과 고지들이 있다. 유고슬라비아를 흐르는 대부분의 강들은 흑해로 들어가며, 그밖에 아드리아 해나 에게 해로 유입되기도 한다. 도나우 강은 세르비아 중북부를 남동방향으로 흐르다가 루마니아와의 국경을 이룬다. 세르비아를 흐르는 그밖의 강으로는 도나우 강의 지류들인 사바 강과 티소 강이 있고, 세르비아 남부의 주요강인 모라바 강은 북쪽으로 흘러 베오그라드 동쪽에서 도나우 강에 유입된다. 한편 몬테네그로의 주요 수계는 북쪽으로 흐르는 피바·타라·림 강과 남쪽으로 흐르는 모라차·제타 강이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일리리아(Illyria)인이 처음으로 이 지역에 정착한 이래 그리스가 아드리아 해 연안에 무역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뫼시아 수페리오르(Moesia Superior:현재 세르비아 지역)의 로마 통치는 B.C.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다뉴브 강 유역의신기두눔(Singidunum), 지금의 베오그라드까지 미쳤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395년에 로마 제국이 분할되자 현재의 세르비아 공화국 지역은 비잔틴 제국에 넘어갔고 크로아티아 공화국 지역은 서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원래 유고슬라비(Jugoslavija)는 `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인데, 6세기 중엽 슬라브 민족들(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의 여러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왔다. 이들 가운데 유고의 북부 지방(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역)에 정착한 남슬라브족은 프랑크 왕국(독일과 프랑스의 전신)의 지배하에 들어가 카톨릭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고, 남동부 지방에 위치한 세르비아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동방 교회를 받아들였다.
879년에 세르비아인은 키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에 의해 정교로 개종하였으며, 969년에는 비잔틴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였다. 11세기에 비잔틴 제국이 다시 권위를 되찾기도 하였으나 독립 국가의 면모를 갖춘 세르비아 왕국이 1217년 다시 탄생하였다. 슈테판 두샨(Stefan Dusan:1346~1355)의 통치 시기에는 세르비아가 현재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북부 지역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수많은 프레스코 장식을 한 정교 사원들이 세르비아의 `황금 시대' 기간 동안에 세워졌다.
그러나 슈테판 두샨이 죽은 뒤 세르비아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389년 6월 28일 코소보(Kosovo) 전투에서 터키 제국에 패함으로써 세르비아는 약 500년 동안의 이슬람 통치를 예고 받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치 구조를 이 지역에 정착시키기 위해 이슬람교로의 개종과 터키어의 사용을 강요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은 이슬람 교도들에게 역사적인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의 불씨를 갖게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각국에서 민족주의 정신이 고취되고 터키세력이 약화되자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들을 범슬라브주의 민족 운동으로 통합해 대(大)세르비아 제국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종과 종교적으로 반세르비아적이며 동방 정책을 추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발칸 반도에서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고, 이 때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후원하고 있었다. 1차 발칸 전쟁(1912)에서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의 해방을 위해 터키에 대항하였으며, 2차 발칸 전쟁(1913) 때는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연합해 마케도니아 영토를 요구하는 불가리아와 싸웠다. 이 때 세르비아는 서구 열강들의 후원으로 알바니아로부터 코소보의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 출신의 한 청년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했는데, 이 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와 프랑스는 세르비아를 후원하고 나섰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이보디나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와 연합했고, 세르비아 왕의 주도하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 후 1929년에 그 이름은 유고슬라비아로 바뀌게 되었다. 1921년의 비도브단(Vidovdan) 헌법은 세르비아에 의해 주도되는 중앙 정부 창설을 유도하였는데, 이에 대해 크로아티아인과 다른 소수 민족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세르비아 출신의 왕이 개인 독재를 선언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1934년,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자에게 알렉산더 왕이 암살당하자 섭정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독재 정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부패는 더욱 만연했고, 정부는 나치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는 독일로부터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와 테살로니키(Thessaloniki)를 약속받은 후 파시스트 협정인 삼국 동맹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대중들은 반대 시위를 펼쳤으며 국내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군부가 파시스트 옹호 정권을 전복시키고 피터 2세가 왕으로 임명되자 유고슬라비아는 삼국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즉각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침공을 명령했고,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에 분할되고 말았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이끄는 공산당은 무장 봉기를 선언하였으며, 거기에는 또한 군국주의자 레지스탕스 그룹인 체트니크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티토의 빨치산보다 적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43년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위원회(AVNOJ)'는 앞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유고슬라비아를 이끌어 나갈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빨치산 대원들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 군대에 저항하느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세르비아의 작가인 코쵸비치(Ko&#21304;ovi )는 이 때에 약 48만 7000명의 세르비아인, 20만 7000명의 크로아티아인, 8만 6000명의 무슬림, 6만 명의 유태인, 5만 명의 몬테네그로인, 6000명의 알바니아인이 전쟁에서 사망했다고 말한다. 1945년에 공산당은 국민 의회의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세르비아의 실제 국토 면적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가 연방의 일원으로 포함되자 크게 감소되었다. 티토의 슬로건인 `형제애와 단결(bratstva i jedinstva)' 아래서 각 민족들의 민족주의 경향은 수그러졌다. 티토는 1948년 소련의 스탈린과 절교한 후 그 보상으로써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20억 달러의 경제적·군사적인 원조를 받았다. 이러한 보조금과 미국, 서유럽의 후원은 유고의 개혁 노선을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오늘날의 경제에도 기여하였다. 소련과의 단절 후 유고슬라비아는 연방 체제와 자주 관리 제도, 개인의 자유, 비동맹 외교 노선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 불리는 독자 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951년 시작된 지방 분권화는 국가의 기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나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았으며, 비동맹 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각 공화국 사이에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는 연방 내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티토는 당 개혁론자들의 숙청과 크로아티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레닌주의로의 복귀'로 응수하였다. 재능 있는 지도부 인사들이 사라짐에 따라 유고슬라비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체기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의 헌법 개정으로 연방 정부는 외교 정책, 국방, 무역, 경제 및 인권 문제에 대해 6개 공화국(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과 2개의 세르비아 자치주(코소보와 보이보디나)에 부여된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연방 대통령직은 6개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 그리고 국민 의회에 의해 4년마다 선출된 9명의 임원이 통치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유고슬라비아의 뿌리깊은 경제 문제와 공화국간의 반목을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 말 동유럽에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유고슬라비아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자치권을 폐기해 버렸으며 연방군을 파견시켜 수십 명의 민간인을..

유용한전화번호
경찰을 호출하고자 할 때에는 92번을, 구급차는 94번, 전화 번호 안내의 경우는 988을 누르면 된다. 보통 유고슬라비아의 영업시간은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점심시간은 16:00 까지 문을 닫는 곳도 많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어 20:00 까지 영업을 한다. 그러나 가게마다 차이가 있고 주요 관광지에서는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는 곳도 많다. 토요일은 14:00 까지이다.

전압 및 주파수
전기는 220V, 50 Hz (한국은 60 Hz임)만 있어서 110 V 제품을 쓰려면 변압기가 필요하다.

통화
1 디나르 DINAR = 100 파라(PARA)이고, 1 USD = 약 12 디나르이며, 1디나르는 한화로 약 92원 정도이다.

한국으로 전화
동전을 이용한 공중전화로도 장거리 전화가 가능하긴 하지만 미리 많은 양의 동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따르므로, 해외전화를 할 때는 우체국에서 하는 방법이 가장 편리하다.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도시 고유 번호는 011이고, 국제환율 안내는 901번이다.

주의사항
<국내 비자발급처>
기 관 명 : 주한 유고슬라비아
주 소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2동 258-13
전화번호 : 02-790-0803
근무시간 : 월~금요일 09:00~16:00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유고의 경우는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한다. 비자의 종류에는 관광 비자와 상용 비자, 그리고 유학 비자가 있으므로 그 종류에 따라 구비 사류가 다르다.
관광 비자는 소요 기간이 1박 2일 걸린다. 단, 1명이 신청할 때에는 당일 발급이 가능하다. 이 비자의 유효 기간은 1달간이며, 체류 기간도 1달을 준다. 또한, 상용 비자의 경우도 유효 기간과 체류 기관도 관광 비자와 상동하다. 유학 비자라는 것은 굳이 따라 있는 것은 아니지만, 1달 단수 비자를 받고 나가서 연장하면 된다.

<비자신청시 구비서류>
'관광 비자'를 원할 시에는 신청서와 기간이 6개월 이상 남은 여권, 여권용 사진 3장, 초청장이 있어야 되고, '상용 비자'는 신청서, 6개월 이상 남은 여권 그리고 여권용 사진 3장, 초청장이 필요하다. 관광비자는 비자 수수료가 40,000이며, 상용비자는 싱글이 40,000원, 미화로 $22이며, 2인이 사용 가능한 더블은 80,000원, $45을 받고, 멀티플인 경우에는 117,000원, 미화 $65의 요금이 든다. 단, 이 멀리플의 용도시에는 엔트리 할 수 있는 사유와 서류가 지참되어져야 한다. 유학 비자는 사진 1장을 꼭 지침해야 한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입국한 외국인은 반드시 관계 당국에 신고해야 하며 체류 기간이 사증 기간 이내이더라도 입국 3일 이내에 관계 기관에서 체류 허가(현지어: 보라박)를 받아야 하고(사증은 단순히 입국을 위한 허가로만 인정됨) 만일 위반시 벌금 부과가 원칙이나 유학생들과 같은 장기간 체류가 아닌 이상 특별한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현재까지 없었음. (2) 취재 목적 입국시 공보처의 사전 취재 허가를 받아야 함. TV 방송 카메라의 경우 사진 촬영 제한 구역이 있으니 특정 지역 촬영시 사전에 담당 책임자를 만나 협의해야 됨(위반시 취재 장비 몰수 및 구금 가능).

<환전관련 사항>
이곳에서의 환율은 은행이나 우체국의 환율이 가장 좋은 편이다. 따라서, 한번에 많은 돈을 환전하는 것보다도 필요할 때마다 소요액 만큼 하는 것이 유리하다. 고정적이지 모한 환율 시세로 인해 은행까지 갈 필요는 구지 없다. 또한, 이곳에서 남은 디나르화는 다시 외환으로 환전할 수 없으므로, 요령껏 잔돈을 사용하는 것도 지혜일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온화한 대륙성 기후 지역이다. 1월 평균기온은 도나우 평원의 0℃에서 산악지대의 -3℃에 이르며, 7월은 17∼21℃ 정도이다. 연평균강수량은 북부평원지대의 838mm에서 몬테네그로 산악지방의 2,540mm에 이른다.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이 바뀌는 것은 한국과 유사한 편이다. 한국보다 여름이 더욱 덥고, 겨울도 더욱 춥다. 그러나, 아드리아해 연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일조량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시차 : -8시간



▶ 베오그라드 [Belgrade]

유고슬라비아를 흐르는 대부분의 강들은 흑해로 들어가며, 그밖에 아드리아 해나 에게 해로 유입되기도 한다. 도나우 강은 세르비아 중북부를 남동방향으로 흐르다가 루마니아와의 국경을 이룬다. 세르비아를 흐르는 그 밖의 강으로는 도나우 강의 지류들인 사바 강과 티소 강이 있고, 세르비아 남부의 주요강인 모라바 강은 북쪽으로 흘러 베오그라드 동쪽에서 도나우 강에 유입된다. 수도인 이 도시의 총 인구는 약 150만명에 달한다.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 공화국의 수도이자 더불어 신유고 연방의 수도이다. '베오그라드'란 말은 세르비아 어로 '하얀 도시'라는 뜻으로서, 과거 로마인들이 만든 '하얀 색의 성벽'에서 유래된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유고를 여행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곳이다. 이곳은 그리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왕래하는 모든 열차들의 정차역일 뿐 아니라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로 향하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다. 베오그라드는 다른 동유럽의 도시들과는 달리 화려한 거리와 넉넉한 사람들의 표정이 서방의 도시들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차역의 부랑아들과 지저분한 분위기에서 유고슬라비아의 현재를 볼 수 있게 된다. 내전 이후 길거리에 유난히 많은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만 여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 도시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 다뉴브강과 사바강의 합류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천연의 요새였다. 다시 말해,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신기두놈'이라 불리는 도시였는데, 그 당시 로마인에 의해 축성된 흰 벽돌의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말기 남 슬라브족이 침입하여 강 저편에서 이쪽의 흰 성벽을 바라보며 베오그라드fk고 부른 것이 현재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곳이 점점 좁아지자 사바 강 건너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습지에 토사를 대량으로 쓸어 넣어 대지조성 공사를 한 후, 아파트를 비롯 호텔, 회의장, 각종 스포츠 시설, 박물관 등 주거 및 공익 시설을 건축하여 신 시가지를 조성한 까닭에 구 시가지는 과거부터 내려 온 유럽의 전형적인 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비동맹 노선을 택하고 특유의 자주관리 사회주의 정책을 펴고 있는 이 나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매우 개방적이며 재미있는 나라에 속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곳에 베오그라드 근교에 가 보면, 누드 수영장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베오그라드 국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광활한 밀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간혹 눈에 띄는 나무가 마치 우리나라의 소나무와 유사해서,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매우 친근감을 갖게 하는 분위기를 줄 것이다. 시내는 다뉴브강을 옆에 끼고 다뉴브의 지류인 사바강을 경계로 하여 구 시가와 신 시가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명한 타계한 건축가 故 최창규 선생이 놀라움을 아끼지 않았다는 베오그라드의 시 시가지 현대 건축물들은 기대했던 만큼 다양하게 만들어진 조형성 그리고 그들의 건축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최근에 서구의 자본으로 건축된 호텔류의 건물들은 서방사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들이지만, 그곳의 대부분 현대 건축물들은 조형력과 포스트 모더니즘적닝 요소가 결합된 현대 건축들이다. 시내 인근의 아파트들은 지어진지 20년 내지 30년 가량 되어 보이는 것으로서 건물은 마당의 지하에 주차장을 둔 중앙복도형을 이루고 있다. 건축 당시에는 주차 사정이 괜찮았는지 아파트의 마당에는 주차가 아예 불가능하도록 바닥을 1m정도 높여서 계단을 몇 단 밟고 진입하도록 하였고, 마당에 화단과 벤치를 많이 두어 주거 환경의 쾌적성을 높여 놓았는데 최근에 지은 아파트는 마당에 까지 주차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되어 있다. 마치 성냥통을 연상케 하는 우리네 아파트 단지와는 비교하기가 곤란할 정도의 조형미를 갖춘 이곳의 아파트들은 경제성만 노린 획일적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정서적 욕구를 추구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가볼 만한 곳은 테라지예 광장(Trg Terazije), 국립 박물관(Narodni Muzej), 프레스코화 갤러리(Gallerija freska), 인민 혁명 및 유고슬라비아 국민 박물관(Muzej Revolucije naroda i narodnosti Jugoslavije), 티토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티토 기념 센터, 빨간 벽돌 건물의 성 마르코 교회(Crkva svetog Marko), 세르비아 대성당(Saborna Crkva), 국립 극장(Narodno pozoriSHte), 알라바(Alava) 산 등이 있다.
여행안내소는 기차역 왼쪽 입구와 베오그라드 공항에 위치해 있다. 중앙 여행안내소는 알바니아 빌딩에 있으며,(영업시간:08:00~20:00) 베오그라드에 대한 각종 정보와 숙소, 교통 서비스, 여행지 안내, 문화와 스포트 행사들을 안내해준다. 또한 시내지도와 호텔 안내지도 등을 무료로 제공해 주기도 한다. 베오그라드 지역번호는 011번이다.

산업
이 지역에는 석탄·납·아연·구리·몰리브덴 등의 광물이 상당량 매장되어 있으며, 석유, 천연 가스, 안티몬, 보크사이트, 망간 등도 생산된다. 또한, 농업면에서의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사탕무·밀·감자·과일 등이 있다. 농장에서는 대개 돼지, 양, 가금류를 함께 기른다.
경제의 대부분이 경공업과 중공업, 서비스업과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쟁과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속제품, 펄프와 종이, 유리, 플라스틱과 합성수지, 섬유, 화학제품, 자동차 등이 주요 생산품에 속한다.

베오그라드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다. 사계절이 바뀌는 것은 한국과 유사하며 봄,가을은 아주 짧고 여름은 한국보다 더우며 겨울의 추위는 혹독하다.그러나 여름철에는 습도가 낮아 견딜만하며 저녁나절은 꽤 선선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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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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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동유럽 또는 유라시아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흑해의 북쪽 해안에 접해있다. 이 나라는 비옥하고 산림이 많은 평원으로 자연적인 경계는 없다. 우크라이나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는데, 석유, 석탄, 철광석, 천연가스 등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프랑스, 독일에 지배를 받거나 저항해왔다. 70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공화국이었다가 1991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많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들이 이어지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지로 ‘비옥한 흑토지대’. 구소련 당시 ‘소련의 곡창’이라고 불리움. 석탄, 철광, 석유 등 천연 자원이 풍부하여 유럽 경제의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도는 인구 260만 명의 키예프이며, 우크라이나는 프랑스보다 조금 큰 크기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이 나라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정부 아래서, 모든 지역들이 잔혹하게 탄압받았다. 1990년 이후로 우크라이나는 종교적 자유를 획득했고, 교회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누리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처럼 9세기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를 중심으로 세워진 '루우시'가 러시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옥한 농목지에 둘러싸인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곡창 지대'라고 불리우며 또, 동부의 도네츠나 드네프르 강 유역에는 광공업이 발달해 농산물 광공업 생산 모두가 발달해 농산물 광공업이 소비에트 연방 전체 생산고의 각각 1/4을 차지할 만큼 풍요한 나라이다. 오랜 역사와 고유의 언어, 종교와 같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민족의식이 높아 옛부터 러시아에게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국가의 국기는 위는 청색, 아래는 황색의 두 가지 색으로 물들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데, 이는 아래서 곡식밭을 나타내는 하늘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두개의 동일한 수평한 끈을 나타낸다.
유럽권 러시아 남서부에 있는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약 60만 3,700㎢이고, 인구 5,400만 명 정도에 달한다. 수도는 인구 약 2백 6십3만명에 이르는 키예프로서, 천년의 역사를 갖은 도시이자, 구 소련의 여러 도시중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나무가 많은 도시이다. 이 나라는 면적 면에서만 보더러도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국가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여자가 0.86% 높은 편이며, 평균 수명은 66.8세다. 이곳의 여성은 72.32세이고, 남성은 61.54세의 평균 수명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남한의 6배 정도 되는 땅은 산이 없고 대부분 평지이며 흑토이다. 이 나라의 종업면만 보다라도, 수박의 무게는 6킬로가 넘으며, 한국의 배추씨앗을 심었을때 보통 4-5킬로는 보통이다. 지하자원으로 철과 천연가스,원유,석탄이 있으며, 구소련때 소련 전체의 50% 이상 농작물을 생산하였다. 감자, 옥수수, 양파, 당근, 가지, 토마토, 사탕무우, 고기, 우유 등이 대부분의 농축산업이며, 최근 고려인의 진출 이후 더 활기를 띄고 있다. 경제면을 보면, 러시아 이후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다음 순위 공화국 산출의 약 4배를 생산하는 이전 소련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구성원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는 소련 농업 생산량의 50%이상 생산했고 그 농장은 고기, 우유,곡물, 야채와 같은 기본재들을 다른 공화국에 공급했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중공업은 이전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 산업.광업지역에 설비와 다른 원료를 공급했다. 92년초 정부는 대부분의 가격을 자율화 했고, 개인주의를 위한 법적 토대를 세웠다. 그러나 정부와 입법기관 내에서 개혁을 하는 것에 대한 폭넓은 저항은 곧 개혁 노력을 저지했고 이로 인해 늦어진 개혁정책으로 93년말 높은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94년 6월 선거 이후로 당선된 구츠마 대통령의 새로운 경제개혁 프로그램으로 인해 현재 우크라이나 의 경제는 안정세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겠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구 소련에서 분리 되어 온 나라로서 유럽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으로나, 문명적으로 중심지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동서유럽의 중간적 위치에 있어서 종교의 혼합양식을 보여준다. 키예프의 그리스도 원조인 수도로서 신 콘스탄티노플은 키예프 성 소피아 성당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살아있는 성 소피아으로 설계되었고, 988년에 성 블라디미르 침례교도로 후에 지역적으로 복음을 전파 함으로써 11세기에 창설되었다. 키예프 페쯔르스크 라보라의 정신적, 지적영향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서 러시아 세계에 있어서 정교의 사상과 신념을 퍼지게하는데 공헌하였다. 정치 역시 대통령 중심의 의원제를 택하고 있다. 지난 95년에는 유럽공동체의회에 들어 갔다. 국민들중 상당수가 경제의 고통으로 공산체제를 그리워하고 있다. 지난 96년 구츠마 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한국과의 교류가 깊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여러 나라와의 싸움이 계속되었다가 17세기부터 독립을 선언, 19년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22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가 실패한 뒤 바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그 해 12월 독립을 확정하였고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풍부한 철과 석탄, 수력이 결합한 드네프르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공업이 활발하며, 예로부터 밀, 감자가 많이 나는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국민총생산은 995억 8,900만 달러(1992), 1인당 국민소득은 1,910달러(1992)이다. 우리나라와는 92년 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북한과는 같은 해 1월 수교하였다.

항공
주요공항은 키예프 근처의 보리스폴 공항과 오데사·리보프·하리코프에 있는 공항이다.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국제공항인 볼리스폴 공항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유럽 각국에서 항공기를 이용하여 입국할 수 있다. 비행편은 주로 CIS국가 및 동유럽 국가에서의 비행편이 많은 편이며 비록 비행기 운항 회수는 적지만 서유럽의 파리, 뒤셀도르프, 잘츠부르크, 빈, 취리히 등지와도 항공편이 연결되어 있다.
키예프에서 런던까지는 3시간 30분, 모스코바까지는 1시간 15분 비엔나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우크라이나 국제 항공사의 전화는 012-93-553-767이다. 국제공항에서 키예프 까지의 거리는 34Km이며, 24시간 운영하는 은행과 면세점, 식당, 어린이를 위한 공간, 24시간 영업하는 우체국, 수화물 보관소, 약국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공항에서의 교통편은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비용은 미화 $20이다.

훼리
약 80여 개에 달하는 국제 항구를 갖춘 우크라이나는 유명한 항으로 오데사항, 헤르손항, 이리체프스크항, 마리우폴항 등이 있는 데, 1991년 말경 3,900㎞에 달하는 총연장 길이를 자랑하는 수로가 만들어 졌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이 내륙과 흑해를 연결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가고 있다.


면적 : 604,000km2

수도 : 키예프

인구 : 1995년 53,770,000명

종교 :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우크라이나 카톨릭과 그리스 카톨릭 등 종교적인 내부적 갈등이 심하며, 유럽에서 들어온 개신교와 카톨릭은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곳의 개신교의 대표적인 교파는 70년간 지하교회에서 박해를 이겨온 침례교단이다. 오순절(카리스마 교회)과 안식교,루터란교회,여호와의 증인들도 있다. 최근 통일교 또한 선교사를 파송 포교중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중요한 국가로 동부와 서부를 영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키에프는 러시아 정교가 1000년 전에 탄생했던 곳이다. 수세기 동안 서부의 카톨릭과 동부의 정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충성심을 구하거나 요구했다. 대다수의 우크라이인은 러시아 정교의 신앙을 갖고 있고, 소수만이 로마 카톨릭 신앙을 갖고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교황의 지도력을 인정하면서 정교 고유의 의식과 구조를 따르는 합동 동방 카톨릭교의 신앙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 아래서 합동 동방 카톨릭교는 정교회에 가입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지하에서 활동해야 했으나 현재 더욱 더 자유로워졌다.
교회는 공산 치하에서 심한 핍박을 받았다. 1990년부터 종교의 자유가 생겨난 셈이다. 종교적인 분포를 보면, 무종교/기타는 25.5%이고, 유대교는 0.94%, 많은 수가 이스라엘과 서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회교의 경우는 0.47%, 주로 투르크 종족들이 이 종교에 속한다. 샤머니즘/정령숭배는 0.1%이며, 기독교의 경우는 73%, 개신교 3.2%, 로마 카톨릭교는 15%에 이른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정교를 신봉하고 있긴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선교 활동에 대해서 제한을 가하지 않으나 주재국 법에 위반되는 노상 대중 집회나 고성 장치를 동원한 요란한 전도 활동은 완전 금지된다. 따라서, 가급적 봉사 활동을 위주로 한 전도 또는 선교 활동이 바람직하다

주요민족 : 4~6세기에는 동슬라브족이 살았으나, 12~13세기에 몽골 등의 침입으로 민족이 나뉘었고, 그 중 우크라이나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인도-유럽인은 97.8%를 차지하며, 슬라브인은 96.3%, 우크라이나인은 37,419,000명에 달한다. 러시아인은 11,355,000명이고, 벨로루시인은 440,000명, 불가리아인은 234,000명, 폴란드인은 219,000명에 달한다. 기타 종족으로는 1.5%, 몰다비아/루마니아인은 460,000명 정도이며, 그리이스인은 99,000명, 아르메니아인은 54,000명, 집시들은 약 48,000명이고, 독일인은 38,000명, 그루지아인은 24,000명이다. 또한, 투르크/알타이족은 0.8%의 구성률을 보이며, 타타르족은 87,000명, 크리미안 타타르는 46,000명, 기타 종족으로는 1.4%. 유대인의 경우는 487,000명, 헝가리아인은 187,000명, 몰다비아인은 19,000명 정도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이루고 있는 주요 종족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크게 7개의 종족으로 나눌 수 있다. '발칸 집시'(Balkan Gypsies)족은 '롬'(Rom)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몰도바, 터키, 이란, 우크라이나 등의 동부 유럽과 서남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모든 집시들이 검은 머리와 검은 얼굴빛,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발칸 집시들 중에 밝은 피부와 금발 머리, 푸른 눈을 가진 집시들도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유럽인들과의 혼혈족이라고 여겨진다. 인도에 남아 있는 집시들과는 달리, 많은 발칸 집시들은 정착하여 생활하며, 도시 근처의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포장마차, 트럭, 트레일러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집시들도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아제르바이잔인'(Azerbaijani)은 아제르로도 알려져 있는 데, 이 종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상 수많은 침입을 당해 왔다.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후에 서기 7세기에는 이슬람이 이 지역에 소개되어 그 이후 지금까지 신앙이 지켜지고 있다. 11세기까지 터키의 영향이 페르시아보다 강했다. 결국 13세기에 아시아의 이 지역은 징기스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침입들이 이 종족의 성격과 결부되어 아제르인이 중앙아시아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중요한 아제르인의 공동체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란, 그리고 이라크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약 37,000명의 아제르인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살고 있다. 일부는 농사를 짓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공장에서 일한다. 그들은 기술 수준이 낮아서 외국인 관리자 아래서 일한다. 또한,'우즈벡'(Uzbek)인들은 2천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우즈벡인들은 투르크 종족의 하나로 주로 중앙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약 1천5백만명이 고국인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다우즈벡의 최초의 조상인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은 1300년대에 징기스칸을 도와 동부 유럽을 정복했다. 마침내, 투르크족과 몽골족 간의 동맹이 깨어지면서, 많은 전쟁국가들이 생겨났다. 우즈벡이 계통을 이어받은 것도 이러한 왕국들 중 몇몇 나라였다.1800년대 중반에 우즈벡족의 대부분은 러시아에 정복당했다. 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당이 권력을 얻기 까지 짜르의 통치 아래 있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는 많은 우즈벡 유목민과 농부들을 집단 농장에 강제 정착시켰다. 소련이 1991년 붕괴되면서, 우즈베키스탄은 독립국이 되었다. 유럽의 '유태인'(Jews)들은 적어도 2000년 이전, 로마 제국 초기에 유럽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 이들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오늘날 "유태인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상당한 부분이 유럽 유태인들 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유럽 유태인중에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아시케나지(Ashkenazic) 유태인과 세파디(Sephardic) 유태인 간의 차이이다. 아시케나지(Ashkenaz)란 말은 유럽의 광범위한 게르만지역을 뜻하는 성경에서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아시케나지 유태인들이란 그 지역과 관련된 조상을 갖는 유태인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히브리어와 슬라브어의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는 독일계 방언인 이디시어(Yiddish)를 사용한다. 세파디(Sephard)란 말은 중세에 유태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가리켜 사용했던 이름이다.
그 외에도, '자트족'(Jats)은 주로 인도의 북서부, 파키스탄의 남부에서 살며, 몰디브,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혈통, 역사 그리고 현재의 분포지역 등은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은 무슬림 정복자들과 더불어 이집트까지 진출하였고, 무슬림보다 먼저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었으며, 몽고의 군대와 함께 중국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한 페르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티무르인들에게도 위협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혈통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의견이 있지만 대부분 그들을 인도-아리안계 혈통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이 집시의 선조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혈통이 어떻든간에 18세기에 자트족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의 삶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자트족은 매우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잘 알려진 자트족의 속담 중에 "사람들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지만, 나는 영원히 계속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용감하며, 열심히 일하며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능력을 가진 민족이다. 자트족은 지배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안 타타르'(Crimean Tatar)족의 경우는 구 소련의 거의 모든 공화국에서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던 투르크 종족의 일족이다. 주요 인구는 볼가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공화국에도 거주한다. 타타르족은 10세기 이후로 강력한 문명을 이루어왔으며, 그들은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16세기 러시아의 정복에서도 살아남았다. 19세기에 타타르의 도시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위대한 문화 중심지 중 순위가 매겨질 정도이다. 타타르족은 몇 개의 러시아 도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에 30% 이상이 러시아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구사하고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타타르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타타르 민족의 신체적 특징은 푸른 눈의 금발 머리을 가진 사람들에서, 보다 몽골의 특징을 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얼굴에는 털이 거의 없으며 계란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타타르'(Tartar)족은 구 소련의 거의 모든 공화국에서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던 투르크 종족의 일족이다. 주요 인구는 볼가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공화국에도 거주한다. 이들은 10세기 이후로 강력한 문명을 이루어왔으며, 그들은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16세기 러시아의 정복에서도 살아남았다. 19세기에 타타르의 도시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위대한 문화 중심지 중 순위가 매겨질 정도이다. 타타르족은 몇 개의 러시아 도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에 30% 이상이 러시아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구사하고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타타르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타타르 민족의 신체적 특징은 푸른 눈의 금발 머리을 가진 사람들에서, 보다 몽골의 특징을 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얼굴에는 털이 거의 없으며 계란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삶의 모습을 보면,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타타르의 88%가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현재 러시아 사람들의 삶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서 일부 사람들은 혁명 이전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외딴 지역에서, 3세대에 이르기까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사회제도는 강한 가부장적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가족 내에서 법적으로 가장이 되며, 모든 가정문제에 있어서 최종 결정자임을 의미한다. 남자들은 가족의 소득과 어떻게 지출할 것인가에 대해 책임을 지

주요언어 : 우크라이나의 공식언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러시아어의 경우는 공식 언어는 아니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어는 끼릴문자를 사용하며, 러시아어와 벨라루시어와 함께 동슬라브어에 속하고, 광범위하게는 인도유럽어계에 속한다. 다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어 이외에 러시아어, 폴란드어등 소수민족언어의 사용도 허용한다. 특히 러시아어는 동부지역에서 교육과 비즈니스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일부 국민들 특히 동부지방에서는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까지 제기하기도 한다.

기후
우크라이나는 한국과 같이 뚜렷한 사계절을 갖는다. 전체적으로는 대륙성 기후를 띠나, 크림반도가 위치한 남부지역은 아열대와 지중해성 기후를 띤다. 겨울철 기온은 -8°C와 2°C 사이이며, 여름철에는 17°C에서 25°C사이의 기온을 보인다. 강수량은 북에서 남으로 갈수록 감소하는 경향이다.강수량은 고르지 않은 편으로 추운 계절보다는 더운 계절에 2∼3배 더 많이 내리며 우크라이나 남부의 스텝지대는 불충분한 강수량으로 인해 가뭄 피해를 겪는 경우도 있다.
즉, 대륙성 기후에 속하고, 남부 크림반도는 아열대성 기후 우크라이나의 내륙은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7월이 가장 덮고 온도는 평균 23도이며, 가장 추운 1월에는 영하의 기온을 유지한다. 동부지역은 차가운 시베리아 풍의 영향을 받지만 서부는 따듯한 지중해 풍의 영향을 받아 해안도시인 얄타(Yalta)와 오데사(Odessa)는 내륙도시보다 따뜻하다. 내륙은 6-7월이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이고 해안은 12-1월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국가의 북부는 우량도 많고 습지인 삼림지대, 중부는 기후가 온난한 흑토와 삼림의 스텝 지대, 남부는 건조한 스텝 지대를 이룬다.

지리
우크라이나는 북위 49도, 동경 32도로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서 흑해를 접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교차하는 지점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북쪽으로 벨로루시, 북쪽·북동쪽·동쪽으로 러시아 연방, 남쪽으로 아조프 해, 흑해, 남서쪽으로 몰도바·루마니아, 서쪽으로 헝가리·슬로바키아·폴란드와 접해 있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도브리 덴
의 미 : 안녕하세요?

현지어 : 쯔까이테 붇들라스카
의 미 : 기다려 주세요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우크라이나는 역사는 기원전 7-4세기 스키티아인(Scythias)에 의해 스텝지대부터 흑해 북부지역을 지배받으며 시작됐다. 스키티아 문화의 흔적은 동물과 인간을 자세히 묘사한 뛰어난 금 세공품이 남아있는 키에브의 동굴 수도원(Cave Monastry)에서 찾을 수 있다. 스키티아인에 이어 오스트로고스(Ostrogoths), 훈(Huns), 투르크-이란 카자(Turko-Iranian Khazars)의 지배를 받는다. 스칸디나비아인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장기간 지배했는데, 키에브는 기원전 882년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후 10세기까지 다뉴브강 서쪽의 볼가(Volga)에서 발틱해의 남부에 이르는 영토였던 키에브인 러시아(Kievan Rus)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키에브인 러시아의 지도자인 볼로드미르(Volodmir)는 988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의 이스탄불)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문화적으로 비잔틴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9∼ 12세기에 키예프시를 형성. 13세기 몽고의 침입에 의해 최종적으로 붕괴.   14세기에는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Lithuania 대공국, 일부는 폴란드의 지배하. 1569년, 양국이 합병하고 단일의 폴란드국을 만들면서 우크라이나는 같은 나라 영토가 되었다. 152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해안지역을 통제했다. 15세기에 전쟁과 전염병의 많은 인구가 사망했으며, 인접 국가의 카작인(kazaks, 코삭 인Cossacks) 농노와 정교도 피난민들의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왔다. 우크라이나인 코삭(Ukrainian Cossacks)은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 국가를 만들어 자치를 했으나 20년 후 폴란드와 러시아로 분리됐다.
폴란드의 압제에 대항해 1654년 독립 운동의 지도자 보그단 후메리닛키는 러시아 황제에게 폴란드로부터의 보호와 러시아로의 합병을 신청. 러시아는 폴란드와 싸우고, 키예프의 영유를 승인했다. 처음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인정했지만 18세기 후반에 완전하게 러시아에 합병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17년의 혁명 후 한때 완전 독립을 선언하는 정권이 성립. 그러나 동시에 소비에트 정부도 탄생하고, 이후 3년간에 걸친 내전에 돌입. 1919년 우크라이나 사회 주의 공화국 성립을 선언.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군사 동맹 체결. 1922년 12월 소련연방 형성에 참가. 194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대두로 러시아는 학교에서 우크라이나 언어 교육, 언론과 책을 금지시켰다. 1차대전 후 전제군주제가 붕괴돼 우크라이나는 독립의 기회를 얻었으나 당파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고 6개의 군대가 키에브를 일년동안 다섯 번이나 바꿔 통제하는 무정부상태를 야기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개입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인종적 당파간의 연속적인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서부를 러시아가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게됐고 1922년에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됐다. 스탈린이 권력은 잡은 1927년 우크라이나에 억압을 가했고 1932-33년의 기근으로 7백만명이 사망했다. 지식인에 대한 사형과 강제출국은 인구감소를 심화시켰고, 스탈린은 종교정책으로 250개의 교회와 성당이 파괴됐다. 1937-39년의 숙청기간동안 백만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2차 대전동안 소련과 독일군의 전쟁으로 6백만명이 추가로 사망하거나 강제출국 당했다
20세기 초반 50년 동안의 전쟁, 기근, 숙청은 우크라이나 남자의 50%, 여자의 25%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 대가를 치뤘다. 1989년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소련의 느린 보상으로 인해 광범위한 반소련 감정이 일어났다. 키에브의 지식인과 작가가 중심이 되 일어나 재건설을 위한 우크라니아 민족운동은 1990년 선거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게 했다. 7월에 국회는 자치권을 선포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91년 8월에 발생한 소련 쿠테타의 실패로 우크라이나 공산당(Commist Party of Ukraine, CPU)의 활동이 금지됐고 12월에 국민의 지지를 얻어 독립해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의장이었던 레오니드 크라브훅(Leonid Kravchuk)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0년 7월 16일 공화국 주권 선언. 1991년 8월 24일 독립선언(투표 참가자의 90% 이상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지지) 국명을 현재의 「우크라이나」라고 변경. 1991년 12월 1일에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소련연방붕괴의 계기가 된다. 당파주의로 인해 92년 9월 정부는 사임을 하게되고 러시아의 핵무기와 흑해 함대(크림 반도의 항구인 세바스토폴Sevastopol) 문제로 인해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됐고, 높은 인플레이션과 기름 부족, 구매력 감소로 경제 위축과 더불어 지역간, 인종간 격차가 더욱 심화됐다. 친 러시아 인사인 러오니드 쿠차마(Reonid Kuchma)가 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다수당이 됐다. 9년대 후반은 우크라이나와 NATO의 외교관계로 인해 러시아와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96년에는 신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이 명확하게 되고, 정권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쿠치마 대통령과 보수 세력이 우세한 의회와의 사이에는 아직 개혁을 둘러싼 알력이 있어서 개혁 템포는 늦다. 98년 3월에는 총선거가 있어 보수 세력이 강한 신의회가 탄생했다.


유용한전화번호
관공서나 일반 사무실은 1일 8시간, 월-금요일간 09:00-17:00까지 근무(점심시간 13:00-14:00)하나 회사에 따라 일정치는 않다. 보리스폴 국제공항의 전화번호는 295-2252이며, 줄리아니 공항은 242-2308, 열차정보는 005번, 택시 서비스를 원할 시에는 058을 이용하면 된다. 또한, 긴급 연락처로는 경찰서가 02, 병원 앰블런스 호출이 03이며, 소방서는 01이다.

전압 및 주파수
전기는 220V, 50 Hz (한국은 60 Hz임)만 있어서 110 V 제품을 쓰려면 변압기가 필요하다.

치안
우크라이나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으나 치안상태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다만, 시장 경제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느슨해진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소규모 범죄 조직을 중심으로 여행자등 외국인 대상 금품 강탈 범행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공공장소인 호텔이나, 시장, 버스 터미널, 지하도, 지하철역 등에서 소매치기가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늦은 밤에 단독 외출은 삼갈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러나, 조직 범죄 및 마약은 성행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정부는 마약퇴치에 강력히 대처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관광객들 중에서도 마약밀매 또는 마약복용등 마약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해야 한다.
Kuchma 대통령은 조직적 범죄의 근절을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바 있을 정도로 치안 상태는 CIS국가중 양호한 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내선 열차는 비교적 안전하나 모스크바-키예프 국제선 열차에서는 최면성 약품 또는 개스 등을 이용한 강도사건이 발생한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통화
독립 이후 부터 임시 화폐Karbovanets를 사용해 오다가 96년 9월에 가서야 화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나라의 화페 단위는 '우크라이나 그리브니아'(Ukraine Hryvnia)를 사용하는 데, 2000년 6월을 기준으로 한 1$ = 5.45 그리브나에 해당된다. 즉, 1 USD = 5.52 Ukraine Hryvnia 이고, 1UH = 200.66원(2000.6) 정도이다.

한국으로 전화
한국 통신 교환원 서비스번호는 8(2차 발신음 확인 후)-100-82를 누르면 된다.
우크라이나의 통신시설은 사업용과 개인용 모두 부적당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1991년 기준 인구 1,000명당 886,000대의 전화가 있다. 다른 CIS 국가로의 통신은 전선이나 단파를 이용하고 있으며 CIS 국가를 제외한 약 167개국가로의 통신은 위성을 이용하고 있다. 국제전화는 직통으로 가능하며 키예프, 오데사 등지에 전자우편서비스(Electronic Mail Services)를 위한 시설이 설립되었다. 지상위성기지는 INTELSAT, INMARSAT를 포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970년대 이 대폭적인 전화회선 증설을 추진하여 상당한 실적을 기록하였으나 인구대비 전화회선 수는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또한 전화회선 수보다는 전화기의 보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온 결과 전화기 1대당 통화건수에 비해 총 통화량이 증가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1991년말 현재 도시간(都市間) 총 통화건수는 68억 9천만 건을 기록하였고, 인구 1인당 도시간 통화건수는 13.2건을 기록하였다. 기업에 대한 통신시설의 보급 또한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편이 그 중에서도 팩시밀리 및 텔렉스의 보급이 부진한 상황이다. 더욱이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의 송수신설비는 일부 전략연구소나 주요 공단에 국한되어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점은 이러한 통신시설의 자동화율이 극히 저조하다는 데 있다. 각 지역을 연결하는 통신의 1/2 이상이 수동식 중계(中繼)에 의지하고 있다.

현지로 전화
국제 전화는 전화국에서 신청하며, 수도인 키예프에서의 한국 통화시에는 1분에 미화 3불의 요금이 든다.


주의사항
<국내 비자발급처>
기 관 명 : 주 우크라이나 대사관
주 소 : 43, Volodymyrska St., 01034, Kyiv, Ukraine
전화번호 : 380-44- 246-3759/61
팩스번호 : 380-44- 246-3757
근무시간 : 월요일-금요일 09:00-17:30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과거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미개설시에는 주재국 키예프 보리스플 공항 영사처에서 입국 사증을 발급하였으나 현재에는 공항에서 아국인에 대해 입국사증을 발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입국시 입국 사증이 없으면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하므로 입국전 반드시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또는 인근국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입국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연고가 있으면 연락하여 초청장을 받는 경우가 있다. 팩스나 서신으로 초청장을 받으면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으면 된다. 종교비자는 6개월짜리가 있고, 일반 비자는 보통 1개월이다. 비자의 접수 시간은 오전 9:30-12:00, 오후 15:00-17:00이며, 비자 발급 시간은 15:00-17:00이고, 비자 수수료로는 US $ 30(단수비자), US $ 120(복수비자)가 든다. 비자 수수료는 외교 센터 빌딩 맞은편 하나은행에 입금시켜야 한다. 또한, 사증 발급의 신청의 경우, 우크라이나 입국사증은 해외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발급받아야 한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전화는 578-6910, 팩스 578-5514 입국사증 발급서류는 초청장(원본), 신청서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비치), 사진 2매가 필요하다. 통상 사증 발급의 소요기간은 1주일이며, 사증 발급 수수료는 미화 30불이다. 단, 급행료는 미화 60불, 사증발급 소요기간은 2-3일 걸린다.
1992년 4월 20일 우크라이나 국경통제소의 비자등록 서비스 절차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외국인 또는 무국적자는 우크라이나 출입국비자를 발급 받기 위하여 미화 $50 또는 이에 상응하는 경화를 지불해야 하며, 통과비자를 발급 받기 위해서는 $15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단체여행단의 일원으로 입국하는 자와 우크라이나 기업 및 조직과의 사업관계 수립을 위해 입국하는 사람들이 비자발급을 신청할 경우에는 그 비용은 정액의 50%인 $25로 규정하고 있다. 기타 CIS 국가 여행을 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1인당 $5를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외국인 및 무국적자가 비자연기를 요구할 경우에는 30일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내에서 허용되며, 이때 $20의 서비스 비용이 소요된다. 비자발급은 해외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담당하고 있다. 사전에 초청장을 받아야 하며 초청장은 정부부처, 외국인비자 등록 사무국이 인정하는 기관으로부터 입수할 수 있다.

<비자신청시 구비서류>
입국 사증 발급 서류는 초청장(원본), 신청서(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비치), 사진 2매, 주민등록등본, 여권복사본, AIDS 검사증(또는 건강진단서)이 필요하다.
'관광비자'의 경우는 신청서, 6개월 이상 남은 여권, 여권 사본, 여권용 사진 1장, 그리고 주민등록 등본과 초청장 원본이 필요하며, '상용비자'는 신청서와 6개월 이상 남은 여권, 여권사본, 여권용 사진 1장, 그리고 사업자 등록증 및 초청장이 요구된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입국시에는 일단, 외국인 여행자 보험에 가입 해야 한다. 가입하지 않으면 입국 심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여객기가 몰리지 않는 오전 또는 오후 늦은 시각에는 입국 심사에는 약 10-20분 정도면 되지만, 여객기가 몰리는 오후 1시-5시까지는 30분-1시간 가량이 소요된다. 입국 절차는 안전보험 가입, 입국 심사, 수화물 회수, 세관 순서로 이우어 진다. ) 입국시 :외국인 여행자 보험에 가입 해야 함. 가입하지 않으면 입국 심사 불가능. 여객기가 몰리지 않는 오전 또는 오후 늦은 시각에는 입국 심사에 약 10-20분 소요 여객기가 몰리는 오후 1시-5시까지는 30분-1시간 가량 소요. 입국 절차는 안전보험가입, 입국 심사, 수화물 회수, 세관 순서로 이루어 진다.
출국시 출국 심사에는 세관 신고 등 약 30분 가량이 걸리는 데, 비행기 출발 1시간 전 공항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함은 기본이다. 출국 절차는 세관 신고, 수화물 발송 및 탑승권 발급, 출국심사 순으로 행해지며, 출국 세관 신고시, 입국시 확인받은 세관 신고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검역관련 사항>
입국시 외국인에 대한 예방 접종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간염예방 접종을 못한다. 겨울이 꾀 추우므로 독감 예방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세관관련 사항(면세범위 등)>
면세품목에는 일반적으로, 담배 200g, 2리터 술한병, 1400달러 정도 가치의 선물로 한정된다. 입국시에는 반입 가능 품목으로, 세관 신고시 불필요한 종목으로는 양주 1병, 담배 10갑, 기타 $500이하의 선물용품 등이 있다. 그러나, 반입 금지 품목으로는 총기류, 무전기, 마약, 위해 약품 등, 카메라 및 귀금속, 보석류(반출전제)가 해당된다. 여행을 마치고 출국시 반출 편의를 위해 반드시 신고 요망한다. 만일 신고 하지 않으면 반출 불가되므로 조심하자. 출국시에는 규정상으로는 미화 $100 이상의 물품을 구입하여 반출할 경우, 외화 환전증명서 및 영수증을 소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초과 금액의 50% 과세를 문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물용품나 고가품이 아니면 비과세 또는 소액의 과세 징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을 포함한 골동품의 경우는 시청 문화국의 허가 취득후 반출이 가능한 데,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감정전문가 위원회(연락처229-5647,229-5340)로부터의 감정이 필요하며 1945년 이전 골동품은 반출이 불가하다.
휴대하고 있는 외국 통화는 모두 세관신고서에 기입하여 신고한다. 신고용지는 세관 검사대 가까이에 있다. 신고서에 기입할때 주의할 점은 외화수지 제한이 없으므로 소지외화, 트레블래스 체크전액을 기입할 것, 세관의 인증을 받은 신고서는 루블로 환전할 때마다 제출하여야 한다. 또한, 현금 1000불 이하를 소지하고 입국할 경우, 소지금액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없고 세관신고서만 제출하면 되지만, 현금 미화 1000불 이상일 경우에는 돈을 꺼내어 세관원 면전에서 세관신고서와 대조하여 소지 금액을 정확히 확인한다. 따라서, 미화 10,000불 이상 반입할 경우 특별 신고서 추가 작성이 필요하다. 1회 입국시 미화 50,000불 이상은 반입 불가하다. 그리고, 출국시 세관신고 없이 반출할 수 있는 금액은 미화 1,000불 이하 또는 동 상당액의 기타 화폐이다. 이는 입국시 미화 1000불 이하 소지하여 세관 신고가 면제된 경우이며, 입국시 반입한 외화 금액 이상의 외환 반출은 불가하다. 입국시 미화 3,000불을 신고하고 출국시 미화 5,000불을 소지하고 출국할 경우 반출가능 금액은 미화 3,000불이고 잔여액 미화 2,000불은 반출이 불가하다. 만일 출국시 세관신고서에 입국시 소지한 외화금액만을 신고하고 실제로는 그이상의 외화금액을 반출하려다 적발될 경우 주재국 법에 따라 사법처리 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신고금액과 입출국시 소지 외화금액이 일치하도록 하여야 한다.

<환전관련 사항>
거리에 있는 환전소나 은행을 이용해야 한다. 암시장 상인과는 상당히 위험하므로 거래하지 말아야 한다.

<외국인 금기사항>
이곳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누출된 방사능 오염으로 체르노빌과 북부 쥐따미르 일부 지역은 여행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핵미사일과 관련된 시설이나, 흑해 함대가 위치한 세바스토폴 등 크리미아 지역의 군사 시설 지역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제한 되므로 주의하자. 따라서, 입국 전 사증 발급 신청시 방문하고자 하는 지역명을 신청서에 기입해야 희망하는 지역을 여행할 수 있다.


시차 : -7시간



▶ 키예프

구 소련에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다. 전체 구 소련의 도시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나무가 많아 숲이 울창하기로 소문난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의 원조이자 최초의 보급지라고도 할 수 있는 키예프는 문화 역사적으로나 문명적으로도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며, 17세기 부터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페쯔르스크 라보라의 정신적, 지적 영향이야 말로 러시아 세계에 서, 정교의 사상과 신념을 넓게 유포시키고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라고도 불리우는 키예프는 소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던 모스크바 시절에, 상당히 큰 규모의 이국적인 도시였다. 이곳은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도시의 우상을 포기하고, 자신의 왕국을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선언한 이후부터, 키예프루스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에도 13세기에 몽고족의 침입을 받은 후, 이 나라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옮겨지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경제적 중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이다.
문화예술적인 면에서도 키예프 챔버 오케스트라, 키예프 국립 필 하모니와 키예프 아이스 발레단 등이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키예프 국립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로서, 키예프의 가장 중요한 연주홀인 M.V.Lysenko의 전용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한명 한명 모두가 유명한 음악가로서 예술적으로 완벽한 앙상블을 보여 주고 있다. 1990년 이후 지휘자인 Roman Kofman이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였는 데, 그는 키예프 오케스트라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지휘자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현악기로만 구성된 키예프 챔버 오케스트라는 최고 수준의 음악을 목표로 음악 애호가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드나이퍼 강이 유유히 도시의 중심에 흐르고 있는 키예프는 고고학자들이 키 도시의 역사를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깊은 도시에 속한다. 지중해 동부로 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철도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며, 잘 짜인 간선 도로망을 통해 모든 지역과 대도시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키예프의 볼만한 곳은 다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걸어서 돌아볼 수가 있다. 키예프 제일의 번화가는 시내를 남북으로 달리는 흐레샤티크 거리이며, 이 거리의 북쪽 변두리 강가에 있는 독립광장에서 남쪽의 큰 시장이 있는 주변까지가 특히 번화한 곳이다. 이 흐레샤티크 거리에서 북쪽에 있는 블라디미르 거리에 걸쳐서는 블라디미르 언덕, 성소피아 사원, 성 안드레이 사원, 역사 박물관 등의 관광 명소가 모여 있다. 이 두 거리가 교차하며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것이 타라스 세브첸코이다.

교육
셰프첸코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학생수가 약 2만 2천 여명이나 되는 '키예프 국립 대학'이 나온다. 이 대학은 주창자인 'Taras Shevchenko'의 이름을 따서, 'Taras Shevchenko 대학'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대학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32년 키예프의 몰리아 아카데미가 이곳의 전신이다. 이 대학은 건물이 온통 붉은색이라서 붉은 대학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건물은 짜르 치하에서 학생들의 봉기가 실패한 후 검붉게 칠해진 주요 건물들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밝은 색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한다.
이 키예프 대학은 최초로 마르크스 경제론을 보급한 지베르 교수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 대학의 건물 맞은 편에는 세프첸코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세브첸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학교 주위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비롯해서 세브첸코 박물관, 우크라이나 문학 박물관, 서양미술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어 강의가 끝나고 관람할 수 도 있다. 또한, 이 키예프 대학교는 우리나라의 고려 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으며, 이 학교에 곧 한국어학과가 개설될 예정이다.

산업
유럽 최고의 곡창 지대를 자랑할 정도로 구소련 당시 전체 농작물의 50%이상을 생산해 냈고, 천연가스와 원유, 철강석, 마그네슘, 수은, 목재 등의 천연자원과 화학 비료가 생산된다. 하지만, 1992년 독립과 개방화 이후 계속 되어지는 인플레이션으로 모든 국민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실정이다.
키예프 주는 농업이 발달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부에서는 아마(亞麻)·감자 재배 및 낙농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곡물과 사탕무가 주로 재배되는 남부에는 소규모 제당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다. 키예프 시 주변에서는 시장출하용 근교농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농업이 활발하지만 이 주의 경제는 무엇보다도 키예프 시의 대(大)자본과 공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특히, 키예프는 기계와 직물, 건축자재 등의 공장이 있으며, 금속과 기계 및 조선, 촬영기 등의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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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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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슈베르트, 하이든, 브람스, 요한 스트라우스, 베토벤의 고장으로 잘 알려준 음악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오페라와 콘서트, 음악공연이 열려서 음악과 함께 생활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Sound of music'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곳은 수백년 전해 내려오는 건축물, 고성, 궁전을 방문할 수 있으며, 포도원, 뉴브강쪽으로 늘어선 수도원들과 아름다운 작은 언덕과 빙하로 덮인 알프스의 정상을 볼 수 있다.

남북 길이 300km, 동서 길이 약 560km 산이 많고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으로 스위스ㆍ리히텐슈타인, 북서쪽으로 독일, 북쪽으로 체크, 동쪽으로 헝가리 남서쪽으로 이탈리아, 남동쪽으로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정식 국명으로는 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Austria)이다.

기차
유럽 전역이 연결된 기차를 이용해 주변국에서 쉽게 오고 갈 수 있다. 장기 여행이나 개별여행의 경우 주로 유레일 패스를 이용해 다른 나라에서 기차를 통해 들어온다.

항공
우리나라에서 오스트리아까지 직항으로 운항하는 항공은 없다. 항공편의 경우 주변국가인 프랑크푸르트나 스위스의 취리히 등을 경유해서 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객은 국내선 항공보다는 주변국가의 공항에서 철도등을 이용해서 여행한다.

면적 : 83,857㎢

수도 : 비엔나

인구 : 약 808만명(2002년)

정치형태 : 연방공화국

종교 : 인구의 약 80%가 로마 가톨릭교이다.

주요민족 : 오스트리아는 주민의 독일계 98%가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다. 소수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독일식 헝가리인으로 마자르인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국제적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주요언어 : 독일어

기후
오스트리아는 북부는 온대성 기후, 동부는 대륙성 기후, 서부는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오스트리아 서쪽 지방은 골짜기는 450-750m, 해발 2,400-3,600m 높이의 산악지방이다. 산악지대가 많아 기후의 변동도 심한 편이다. 동쪽 지방도 서쪽보다는 낮은 지형으로 해발 1,600-2,400m이다. 서부지역은 연 강수량이 약1,000mm, 동부 농업지역은 다소 적은 강수량을 보인다. 동부지역은 산이 많은 저지대를 이룬다. 여름의 기온은 평균 20℃을 보이고, 겨울철은 평균 -3-5℃이다.
빈의 겨울은 상당히 추운 날씨를 보이며, 잘츠부르크는 겨울에도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이 겨울이 비가 오는 우기를 보인다. 10-12월까지 우기이며, 11월에 눈이 오기 시작하여 3월까지 눈이 내린다. 티롤의 인스브루크는 산악 기후 권에 속하므로 일교차가 심한 편이다.

산업
경제부문에 있어 오스트리아는 자본주의 경제체재를 갖고 있으나 국유화, 국영화 되어 있다. 농업은 GNP의 약 4%을 차지하고 있는데, 주요 농작물로는 사탕무, 옥수수, 감자 등이다. 산비탈에서는 방목이 행해지며, 낮은 저지대에서는 포도 재배하고 있다.
제조업은 GNP의 34%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품으로 금속, 음료, 담배, 직물, 의료, 화학제품 등이 생산되고 있다. 건설업은 GNP의 약 8%을 차지하고, 주택, 도로, 산업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관광 업은 국가 경제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겨울뿐 아니라 여름에도 여행객들은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하고 있다. 겨울 스포츠가 발달하여 여러 나라에서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 위하여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를 찾고 있다.


쇼핑
오스트리아인은 쇼핑을 할 때에는 느긋하게 보면서 쇼핑을 즐긴다. 쇼핑을 할 때에는 손님이 직접 물건을 손에 들고 만져 보는 것을 싫어하며, 만져 볼 경우에는 상점 주인에게 먼저 의뢰를 한 후에 만져 보도록 한다. 대금 지불 후 거스름돈을 받은 후에는 잔돈을 확인한다.
직물, 도기, 유리제품, 목각제품, 세공 철제품 등이 유명하다.


역사
기원전 400에 켈트족이 노리콤 왕국을 세웠고, BC 200년후에 철광석 광산에 이끌려 온 로마인들이 도착하였다. BC 15년경 로마인들은 오스트리아 전지역을 차지하였고, 라이티아, 노리쿰, 파노니아 등 세 주를 만들며 번성하였다. 또한 토착민들을 로마화 시켰다. 이후에 도나우 강 북부에 거주하는 게르만족들의 영토에 대한 침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하여 격퇴 당하였다. 5세기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족이 터를 잡는 동안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으나 8세기 카알대제가 아바르족을 격퇴하고 오스트마르카만 백작령을 설치하면서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일원화되면서 게르만화 시켰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오스트리아를 영도한 왕가는 바벤베르크가로 군주들은 동방식민을 추진하면서 경제적ㆍ문화적으로 발전을 꾀하였고, 황제가 교황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세습 권을 얻었다. 13세기 중반 헝가리와 전쟁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계승자 없이 죽자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보헤미아의 왕자 프렘슬오타카르 2세를 군주로 선출하였고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4세에게 패함으로써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를 중심으로 왕국을 세웠고 개신교도들의 활동을 저지하였고, 투르크인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후 1438년부터 1806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면서 유럽의 패자로 남게 된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2세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성로마제국을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재상 메테르니히는 국제여론을 이용하여 유럽의 새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빈 회의 소집하여 복고, 정통, 연대를 기조로 하여 반동체제를 구축하면서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에 고무된 빈 시민들의 봉기로 인하여 혁명과 반동이라는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3월혁명은 메테르니히의 망명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 하였으나 상ㆍ하 시민들의 분열되었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이 형성되었다. 민족주의 감정이 왕국을 혼란시켰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붕괴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는 전쟁 전의 1/7에 해당하는 영토에서 사회민주당 주도로 공화국을 형성한다. 이후에 경제혼란과 함께 1929년에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 나치주의자의 위협이 증가하였으나 자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패배로 1945년에 공화국이 재건되었다. 1955년 7월에 주권을 회복하였다. 1972년 자유무역 조약을 협정하였다


국제전화
공중전화는 카드와 동전전화로 두 종류가 있다. 카드전화기의 보급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우체국, 담뱃가게, 여행안내소에서 전화카드를 판매하고 있다.
00+82(한국 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수신자 요금 부담 전화를 이용할 때에는 0800-200-208을 이용한다.

유용한전화번호
• 비엔나 주한대사관
Gregor Mendel Strasse 25 A-1180 Vienna, Austria
전화 : 43-1-478-1991 Fax : 43-1-478-1013
• 경찰서 133,
• 소방서122,
• 응급환자 발생시 24시간 당직의사 141,
• 전화번호 안내 1611
• 일기예보 1566

치안
전체적인 치안은 안전한 편이지만 다른 유럽국가 처럼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 소지품 관리를 철저히 하고 밤길이나 인적이 드문 길은 다니지 않도록 한다.

통화
유로화를 사용한다. 2004년 1월 현재 1유로는 1,524원 정도.


주의사항
오페라 극장에 갈 때에는 복장에 신경 써서 청바지나 반바지, 반소매 복장으로 참석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단정한 옷을 준비하여 입고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진 촬영 시에는 금지 구역이 아닌 지역에서 촬영을 하지 않도록 한다. 미술과, 음악회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적 건물, 교회에서는 촬영이 가능하지만 종교적 물건이나 미사 중의 사진은 찍지 않도록 한다.


철도
• 오스트리아 철도 패스
여행자를 위한 오스트리아 철도 패스를 이용하면 정해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내에서 철도를 무제한 사용할 수 있다.
철도패스는 15일 안에 3일을 사용할 수 있는 3일 패스로 1등석은 미화 $160, 2등석은 $109이다. 여기에 1일 추가할 경우 1등석은 $20, 2등석은 $15을 추가로 내면 된다. 철도 패스는 기본 3일권에 최대 5일을 추가할 수 있어 가장 긴 패스는 8일권이 된다. 12세 미만의 어린이는 어른요금의 반액이다.

• 동유럽 철도패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의 철도 시스템을 1개월 동안 정해진 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1등석과 2등석으로구분되며 5일권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5일을 추가할 수 있다. 1등석 5일권은 $226, 2등석은 $160이며 하루 연장할 때마다 1등석은 $26, 2등석으 $19을 추가로 지불한다. (가격은 2004년. 미국 달러 기준)

철도 패스는 여권과 동일한 영문 이름으로 예약해야 하고 구입 후 6개월이내 사용해야 하며 사용하지 않은 패스에 한해서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이 가능하다. 패스 이용에 따른 규정이 있으니 예약 구입시 숙지하고 이용하도록 한다.


오스트리아는 북부는 온대성 기후, 동부는 대륙성 기후, 서부는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오스트리아 서쪽 지방은 골짜기는 450-750m, 해발 2,400-3,600m 높이의 산악지방이다. 산악지대가 많아 기후의 변동도 심한 편이다. 동쪽 지방도 서쪽보다는 낮은 지형으로 해발 1,600-2,400m이다. 서부지역은 연 강수량이 약1,000mm, 동부 농업지역은 다소 적은 강수량을 보인다. 동부지역은 산이 많은 저지대를 이룬다. 여름의 기온은 평균 20℃을 보이고, 겨울철은 평균 -3-5℃이다.
빈의 겨울은 상당히 추운 날씨를 보이며, 잘츠부르크는 겨울에도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이 겨울이 비가 오는 우기를 보인다. 10-12월까지 우기이며, 11월에 눈이 오기 시작하여 3월까지 눈이 내린다. 티롤의 인스브루크는 산악 기후 권에 속하므로 일교차가 심한 편이다.


시차 : -8시간




▶ 뒤른스타인

비엔나에서 약 9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도나우 강변을 따라서 펼쳐진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사자왕 리차드가 십자군원정 복귀 중 레오폴트 공에게 감금당했던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한 뒤른스타인 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아름답게 흐르는 도나우 강이 한 눈에 보이는 절경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 멜크

포도원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비탈과 늦봄에 꽃이 핀 살구나무들이 번갈아 눈에 띄는 곳입니다. 성벽으로 둘러쌓인 작은 도시인 뒤른슈타인은 1192년 영국의 용맹한 사자왕 리처드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왕이었던 레오폴트 5세와 논쟁을 벌인 후 구금된 곳으로 매우 인기있는 곳입니다. 뒤른스타인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쿠엔링거성은 한때 파괴되었다가 1650년에 다시 건설된 곳으로 원래의 성터는 걸어서 갈 만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주변 전망이 매우 훌륭해 그림형제의 마술 왕국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 비엔나 [Vienna]

오스트리아의 숲과 푸른 도나의 강을 끼고 있는 빈은 아름다운 전원 도시이자 1558-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 중심지였고, 그후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 형가리 제국의 중심지로 제국주의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중부 유럽의 강자로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영하를 누렸던 18, 19세기에 도시가 완성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는 동서유럽의 중간에 놓인 교통의 요충지로 부다페스트, 프라하등 동유럽으로 가는 관문 도시로 발전했다. 또한 국제기관이 위치한 국제도시이며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행정, 금융, 상업의 중심지 역활도 겸하고 있다.

빈은 화려한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곳의 유명한 건물들 중의 하나인 쟝크트슈테판 대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세어졌다가 화재로 손실되어 200년 후 재건되였다. 다른 중요한 중세기 건물로는 13세기말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의 성인 호프부르크, 14세기 미노리텐키르헤 교회, 마리아암게슈타데 교회가 있다. 17세기말이 되면서 플라구에콜룸 같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 지역에서 바로크 양식은 70년 이상 유향했으나 마침내는 링 건축양식에 대체되었다. 링 양식의 건축물들은 링슈트라세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그 중에는 신프랑스르네상스풍의 국립 오페라관, 의고딕식의 포테페교회, 신이탈리아르네상스풍의 빈대학교, 신플랑드르고딕식의라트하우스(시청)등이 있다.

빈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수세기 동안 세계적 중심지로서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음악도시가 되었다. 이곳은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 브라암스, 말러, 부르크너, 쇤베르크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탄생했거나 활약했던 곳으로 서양 음악가들이 이곳을 본고지로 삼았다. 티롤 민속춤에서 파생된 왈츠는 1820년에 이곳에서 확립되었으며, 그 직후에 위대한 빈 오페레타 시대가 개막되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뛰어난 교향악단 중의 하나인 빈 관현악단(비엔나 필하모닉)의 본거지이다. 빈에는 3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다. 호프부르크 성의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이 시의 가장 돋보이는 소장품 중의 하나는 합스부르크가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왕관이다.

이 성에는 또한 최대 규묘의 그래픽 아트 수집품이 있는데, 100만 점 이상되는 이 수집품에는 렘브란트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미술사 박물관에는 합스부르크가에서 수집한 옛 명작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유명한 음악가들의 옛 집들은 현재 박물관이 되었고 박물관 주변이나 음악가가 주로 활동했던 곳에는 음악가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빈의 문화는 여러 민족 문화의 혼합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단정하고 우아하며 밝다. 예로부터 '음악의 도시'라고 불리는 만큼 그 문화적 특색은 음악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향토음악으로서의 '빈 왈츠'는 시민들이 많이 즐기고 있다. 연주단체로는 국립오페라극장 관현악단, 시립 빈 교향악단과 빈소년 합창단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체가 있다. 주민의 대다수는 가톨릭교도로 그리스도교도적인 베를린 문화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교육
오스트리아의 소도 빈에 있는 종합대학으로는 1365년 루돌프 4세에 의해 창설된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학이다. 설립할 때 3학부(법학 ·의학 ·문학)였으며, 84년 신학부가 추가되었다. 파리대학을 모델로 정비된 전형적 중세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기에는 한때 쇠퇴하였으나 18세기 중엽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교육계혁으로 다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학술기관으로 지우를 확립하였다. 특히 의학·법학 ·역사학 분야에서 빈학파를 형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빈 대학은 현재 5만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중이다. 또한 이 대학에서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다른 공립학교에는 일반적으로 태생, 성별, 인종, 신분, 계급, 언어, 신앙 등의 차별없이 다닐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모든 학교는 1975년 부터 남녀공학으로 되었다. 이곳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는 것은 우상이다. 또한 의무 교육은 만 6세 이후에 시작되며, 의무교육 연한은 9년이다.

산업
빈은 제 1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곳으로 전국 공장수의 1/4이상을 차지하며, 특히 전기기계, 인쇄, 화학 등 모든 부문에서의 집중률이 높다. 공장은 시의 남부에서 남동부의 변두리지역에 많고 북부의 플로리즈도르프 방면으로도 발전하였다. 업종별로는 식품, 화확, 전기기계를 비롯하여 섬유, 피혁, 금속, 요업 등이 많고, 대기업 보다는 중소기업이 더욱 활발하며 1912년 열린 국제박람회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성대한 무역 전시회였다. 또한 주요공산품으로는 전기가구·종이·의료·공작기계가 있다. 시 정부는 많은 사업체를 경영하는 등 경제산업에서 큰 역활을 한다.

이 곳은 또한 건설업과 금융보험업의 서비스업이 발달했으며, 알프스산등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 관광산업도 꾸준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금융보험업은 오스트리아의 국립 은행 Oesterreichische Nationalbank(OENB)로서 1995년 업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의 통화의 안정 유지를 주 업무로 한다. 체신청의 Oesterreichische Postsparkasse는 국영은행으로서, 오스트리아 전역에 퍼져 우체국이 은행창구의 역활을 한다.
오스트리아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알프스 산맥이 동서로 국토를 길게 관통하고 있어서 산악관광이 발달하여왔으며 겨울 스키스즌에는 영국, 덴마크 왕실을 비롯한 유럽각국의 유명인사들이 관광을 즐긴다. 또한 숙박업 및 요식업 종사자는 전체 고용인구의 4.4%(1995년 기준)에 해당되며, 1994년말에는 약 18,400개의 숙박업소와 약 3만8천개의 민박 가정등 총 약 1백만개의 베드가 있다. 관광업이 가장 잘 발달된 지역은 Tirol 주이며, 그다음으로 Salzburg, Kaernten 주의 순서이다.

오스트리아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빈은 중부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1월평균기온은 -1.5도이고 7월 평균 기온은 19도를 넘으며, 연평균 강우량은 800mm이하인 경우가 많다. 낮과 밤의 기온차나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는 서부지역 보다는 동부지역이 더크고 전지역의 강수량은 충분하며 양적으로 보면 서부지역이 동부지역보다 많은 편이며 동부지역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점차 줄어든다.




▶ 인스부르크

티롤 주의 수도 인스부르크는 알파인의 본고장이며 해발 2,000m의 눈덮인 산들로 이 곳은 한 여름에도 녹아내릴 줄 모르는 만년설을 뒤집어 쓰고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알프스이다. 흔히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연상하기 숩지만 알프스는 오스트리아 국경선내에 가장 넓게 자리잡고 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인스부르크는 알프스의 웅장한 산맥 가운데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연중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인강 주변에 펼쳐진 인스부르크는 빛나는 과거를 가진 고도의 도시였으며 1964년과 1976년 두 차례 동계 올림픽 경기를 개최한 도시로도 유명하다. 예로부터 알프스를 넘기 위한 교통의 요지로 발전했으며 상업과 관광의 도시로 번창하였다. 천혜의 수력을 이용한 섬유, 식품 등의 공업이 활발했으나 현재는 인스부르크의 옛날을 간직한 채 자연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으며 관광지로도 널리 알려져 연중 관광객의 발길을 끊이 질 않고 있다.

여름에는 알피니스트와 피서객들이 분비고 여름에도 여전히 해발 3000m가 넘는 산에서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알프스 티롤에만 약 119개의 스키지역이 있고 3500Km길이의 슬로프와 1187개의 리프크가 놓여 있다. 겨울이면 더욱 활기가 넘치며 스키시즌이면 인스부르크의 아침은 다른 도시보다 1시간 정도 빨리 시작되여 스키어들에게 각광받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 곳에서는 다양한 스노우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스키와 스노우 보드는 물론이고 크로스컨트리, 스케이팅, 봅슬레이, 눈 썰매등 논 덮힌 알파인은 하얀 스포츠장으로 변모한다.

교육
1562년에 창립한 인스부르크의 대학은 서쪽 오스트리아의 교육의 장이다. 그리고 이 대학은 비엔나와 그라츠의 대학교와 함께 높은 교육열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들 중의 하나이며 교육과 조사의 임무들뿐만 아니라 전통과 진보는 이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중의 하나이다.
이 대학은 국제적인 평판이 좋다. 그 이유는 금세기에 인스부르크의 4명의 교수들이 노벨상을 받았다. 인스부르크 대학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대학교와의 협력적인 계약을 맺고 있다. 또한 이 곳은 이웃 나라와 관련되는 국제 학회가 이루어진다.

산업
철도 교차점이자 시장 중심지인 이 곳의 산업으로는 식품가공업과 금속세공업, 그리고 직물, 신발, 맥주, 음악기기 제조업 등이 있다.




▶ 짤쯔부르크 [Salzburg]

잘쯔부르크는 로마시대에 생긴 도시이며, 8세기에 주교청이 설치된 후 교회령이 되어 가톨릭 주교가 통치하였고, 가톨릭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푹격으로 파괴되었으나, 아직도 교회와 궁전 등 바로크 건축의 작품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이 곳은 오스트리아 북서부의 공업도시로 독일 국경과 가까우며 비인에서 서쪽으로 300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며 알프스와 잘차흐강이 만나는 개활지에 위치한 아름다운 예술의 마을이자 잘츠부르크 주의 주도이다. 지리상으로는 "유럽의 심장"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옛날에는 "북쪽의 로마"라는 별명처럼 이 지역의 교통과 무역 중심지로 자리잡은 이유는 이 부근이 암염 산지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의 이름을 "소금의 도시"라고 했다. 지금도 이 곳의 소금이 전국에 공급되고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일찍 라틴 문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도시이다. 전쟁 후에는 남서부의 카프른에 유럽 최대급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잘츠부르크는 규모에 있어서는 빈보다 작지만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인 이유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원,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나 광장,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잘츠부르크 강과 호엔잘츠부르크 성, 그리고 잘츠캄머구트의 멋진 자연이 알프스와 어울리는 품세의 멋이 대단하여 "북족의 로마"라는 극찬을 받았다. 또한 이 곳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유럽 굴지의 아름다운 도시이다.

1816년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기 전까지는 독립주권을 가진 도시로서 대주교들이 잘츠부르크를 통치했다. 17세기와 18세기가 전성기였으며 이 시기에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궁정악사로 일하다가 그 당시의 대사교였던 코로레도 백작과의 불화로 1781년 25세의 나이로 이 곳을 떠났다. 그러나 모차르트는가 없는 잘츠부르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모차르트를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성대히 개최되는데 세계 각국의저명한 음악가들이 모여든다. 그래서 이 곳은 모짜르트의 영향을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다.

또한 악기, 인쇄, 출판, 석재, 시멘트, 양조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그로스글로크너산의 동쪽 기슭에는 라듐 온천지로서 유명한 관광휴양지 바드가슈타인이 있으며, 스키와 스케이트도 성향하여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다.

산업
이 곳은 지명의 거의 1/2이 농지이며 약 1/3이 숲이며 소 사육과 낙농업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며, 말 사육은 잘차흐 강 상류 계곡의 핀츠가우에서, 호밀 등의 경작과 과일재배 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며, 말 사육은 잘차흐 강 상류 계곡의 핀츠가우에서, 호밀 등의 경작과 과일재배는 알프스 전방에서 이루어 진다. 목재, 목제품, 종이가 수출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뒤른베르크에서 나는 소금과 비쇼프스호펜 부근의 광산에서 나는 구리는 지금도 가장 중요한 광물자원이다. 수입된 원료를 가공하는 거대한 알루미늄 공장이 렌트에 있고, 마그네사이트가 레오 강에서, 텅스텐이 잘츠부르크 시부근에서 채광된다. 타우에른 계곡의 저수지들은 수력발전에 이용된다. 공업은 주로 잘츠부르크 분지 내에서 이루어지며, 맥주, 직물, 의류, 피혁제품, 오른간 등이 생산되며 겨울 스포츠등은 관광산업이 주요수입원이며, 특히 음악과 연극 축제들이 행해지는 잘츠부르크 시를 비롯해 바트가슈타인, 젤암제가 이 주의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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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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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유럽대륙 북서쪽 북대서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연합왕국(United Kingdom)으로 불린다. 영국은 잉글리시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는 지역인 브리튼 섬(Great Britain)인 잉글랜드(13만 440㎢), 북쪽의 스코틀랜드(7만 8,770㎢), 서쪽의 웨일스(2만 760㎢), 얼스터라고도 불리는 북아일랜드로 구분된다.

영국은 우리나라보다 면적, 인구에 있어 약간 큰 섬나라이지만 근세 여러 가지 형태로 세계를 지배하여 왔다. 특히 산업혁명 후 수백 년 간 7대양에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세워 세계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영국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으로 "기울어 가는 오래된 대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지켜야 할 일은 끝까지 지키는 영국인들에게서 대영제국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게 해준다.

기차
유럽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을 바다 밑으로 횡단하는 유로스타가 있어 이를 이용한 여행이 가능하다.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사이를 운항한다.

항공
우리나라 인천공항에서는 대한항공이 런던을 직항으로 운항하고 있다. 그외 중국이나 일본을 경유하는 외국 항공사를 이용할 수 있으며 유럽내의 다른 도시를 경유하면 런던과 영국의 다른 도시로의 여행이 가능하다.

훼리
도버해협을 횡단하는 페리를 이용하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칼레, 네덜란드, 벨기에 간을 운항하고 있다. 칼레는 대략 1시간 20분 가량 걸리고 네덜란드 구간은 7-9시간 정도 소요되므로 밤에 출발해 1박을 해결하는 배낭여행객이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벨기에 구간은 4시간 가량 소요된다.


면적 : 24만 4101㎢

수도 : 런던

인구 : 5916만 4000명(2003)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로, 그레이트브리튼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과 아일랜드섬 북쪽의 북(北)아일랜드로 이루어진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될 때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음으로써 현재의 연합왕국이 되었다.

위치  유럽 대륙 서쪽 북대서양
면적  24만 4101㎢
인구  5916만 4000명(2003)
인구밀도  242.4명/㎢(2003)
수도  런던
정치  입헌군주제
공용어  영어
통화  파운드
환율  1파운드 = 1.86$(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2만 5120$(2003)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며, 영국 연합왕국이라고도 한다. 북대서양과 북해 사이에 위치하며, 프랑스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국토는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의 1/6을 차지하는 북아일랜드 및 그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 몇 개의 속도군(屬島群)과 해외령을 포함한다. 맨섬과 채널 제도는 왕실속령으로서 영국 정부의 국방 및 외교 관할을 받는다.

행정구역은 네 지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이 서로 다르게 구성된다. 잉글랜드는 47개 버러(borough), 36개 카운티(county), 29개 런던 버러(London borough), 12개 시·버러(city and borough), 10개 디스트릭트(district), 12개 시, 3개 로열주(royal borough)로 이루어져 있다. 스코틀랜드는 32개주(council area), 웨일스는 11개 카운티 버러(county borough), 9개 카운티(county), 1개 시(City), 1개 카운티(county)로 구성된다. 북아일랜드는 24개주(district), 2개 시(city), 6개 카운티(county)로 되어 있다.


정치형태 : 영국여왕이 공식적인 국가 원수인 입헌군주제이나 상징적인 존재이고 실권은 내각에 있다.

종교 : 종교는 성공회가 50%, 개신교가 30%, 가톨릭이 11%, 기타가 9%를 차지한다.

주요민족 : 영국의 인종은 가장 많은 인종은 앵글로 색슨족(잉글랜드인)이며,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웨일스인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언어 : 영어

기후
봄에는 평균 섭씨 6˚C-12˚C로 따뜻하다. 화창한 날씨일지라도 소나기 등 샤워가 오는 경우가 많아 가벼운 모직 옷이 방수 재킷을 가지고 가야한다. 여름에는 평균 섭씨 15˚C-16˚C로 티셔츠가 적합하고 서늘한 때를 위하여 재킷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 가을에는 평균 섭씨 14˚C-7˚C로 가장 좋은 날씨를 보이며 아침과 저녁에는 쌀쌀해지기 때문에 재킷을 준비한다. 겨울에는 섭씨 4˚C-5˚C로 아주 추은 날은 없지만 바람이 많아 체감온도는 더 낮아 지므로 옷을 준비하여 가져간다.


여행계획
• 영국은 봄(3, 4, 5월)의 경우 세찬 바람과 소나기가 쏟아지는 등 날씨의 변화가 심하므로 모직 스웨터와 방수 자켓이 필요하며, 여름(6, 7, 8월)은 티셔츠 차림이 적당하나 기온이 내려갈 경우를 대비하여 가벼운 스웨터나 자켓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10월 하순까지는 두터운 모직의류는 필요치 않으며, 겨울(12, 1, 2월)에는 혹독한 추위는 없으므로 한국의 겨울철 복장으로 준비하면 된다. 영국을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가을로 9, 10, 11월이다.


역사
영국에 대한 인상은 유럽근대화의 최선국이란 이미지이나 17세기 말 이후 시대에 해당하는 말일뿐 그 이전의 영국은 유라시아대륙 변경에 위치한 후진국가에 불과했다. 지중해 연안에서 그리스ㆍ로마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을 때 영국은 미개한 브리타니아로 불렸고 로마의 속주로 지냈던 시절(1-4세기)이었다.

4세기 말 로마세력의 물러나자 북방계의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침입이 이우지면서 로마인의 지배가 흔들리기 시작되었고 앵글로인ㆍ주트인ㆍ고트인의 로마본토의 침입으로 5세기에 로마의 지배는 끝나게 되었다. 6세기 말에는 영국영토중북부와 동부는 앵글인 이, 템즈강이남은 색슨인, 켄트주와 와이트 섬은 주트인이 차지하고 켄트, 에섹스, 서섹스, 이스트 앵글리어, 마시어, 웨섹스, 노섬 리어 등 7왕국은 걸설하였다. 828년 웨섹스의 엑버트 왕에 의하여 앵글랜드왕국으로 통합하여 영국 최초의 통일구가가 수립되었다.

597년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움으로 크리스트교가 전파되었고 9세기에는 데인족의 대규모 침입이 있었다. 877년 웨식스의 왕 앨프레드는 이들을 물리치고 927년 그의 손자 애설스탠이 전 잉글랜드의 직접적 지배권을 가진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또한 11세기에는 노르만디공 윌리엄 1세가 통일국가를 이룩하면서부터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순회재판제도와 그 판례의 집성으로 된 "코먼 로"에 사법의 집권하였다. 윌리엄 공이 사망하고, 노르만 왕조의 3대 왕인 헨리 1세는 국와법정과 대회의등의 기구를 조직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으나 헨리 1세가 사망하고 조카 스티븐과 헨리 1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 왕위계승권 문제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스티븐이 죽은 후,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플란타저네트가는 영국의 왕위자리를 잇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왕실의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들을 견제하고, 국왕법정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의 확립으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15세기에는 프랑스와 치른 백년전쟁(1337-1453)의 패배와 대귀족간의 국내전쟁인 장미전쟁(1455-1485)으로 봉건제도가 약화되었으며 1485년 헨리 7세의 즉위와 더불어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영국의 역사에서 중세와 근대의 가교역할을 한 엘리자베스 1세였다. 여왕은 1588년 당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세력을 격파, 해상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도 셰익스피어, 베이컨 등을 배출하며 문예부흥시대를 맞이한다. 17세기 초 스튜어트왕조가 들어서자 영국 내정은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간의 종교마찰이 발생, 수 많은 청교도들이 탄압을 피해 북미대륙으로 이주하는 사태를 빚어낸다. 이 종교분쟁은 왕정과 의회간의 마찰을 초래하여 결국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청교도혁명을 일으켜 왕을 처형하고 공화제를 선엄함으로 일단락 된다. 1688년 영국의회는 "권리선언"을 목적으로 명예혁명에 성공하여 입헌정치를 확립하고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으로 영국은 유럽대륙에서 근대화의 최선두 주자로 나선다.

산업혁명을 통하여 생산하게 된 값싼 영국의 공업제품은 식민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자유무역의 발전에 따라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고, 철과 기타 공업제품은 거의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산업혁명 결과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하고, 1832년에는 선거법 개정으로 이 계급에도 의회정치에 참가하는 길이 열렸다. 19세기 말에는 노동운동 조직과 사회주의 조직의 연합이 진척되었으며, 1900년에는 노동대표위원회가 결성되어 의회에 진출하였다. 1840년대의 아편전쟁을 통한 중국 진출과 58년의 인도 합병외에 다시 19세기 말에는 유럽의 다른 열강과 함께 아프리카 분할을 실시하여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건설되었다. 즉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경영, 산업혁명의 수행, 의회정치의 확립 등으로 초기 자본주의의 전형을 가르치는 모범 국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영국은 제 1차세계대전(1914-1918)과 제 2차세계대전(1939-1945)에 많은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외적인 위기에 직면하지만 1950년대와 60년대 초에 영국은 경제 성장으로 번영을 누린다.


공휴일/축제
-New Year's Day : 1월 1일
-Good Friday : 부활절 직전 금요일
-Easter Monday : 부활절 후 첫 월요일
-May Day Holiday : 5월 첫 월요일
-Spring Bank Holiday : 5월 마지막 월요일

유용한전화번호
-경찰 : 999

-화재시: 999

-긴급 의료지원 : 999

-차량 수리 : 0256-467777(AA Company)

-전화 고장시 : 152

-전화번호 문의시 : 192

-열쇠를 두고 잠근 경우 : Lock Smith (60파운드 정도)

-물건 분실 센타 : Victoria British Rail Station Lost Property (020-7922-6216)

전압 및 주파수
230 - 240V에 50Hz(전기제품 사용시에 어댑터 필요)

치안
일반적으로 안전한 편이지만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곳은 소매치기가 많으니 주의한다. 밤에 혼자다니거나 인적이 드문 곳은 다니지 않는게 안전하다.

통화
파운드로 2004년 1월 현재 1파운드는 2,206원이다.


주의사항
• 관광객이 많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이 영국도 신사의 나라 답지않게 지하철 구내, 상점, 백화점등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므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하므로 길을 건널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줄서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질서를 지키도록하며, 엘리베이터나 버스를 탈때에는 항상 여성에게 우선권을 주도록한다.

• 기차나 지하철 문은 아직까지 수동으로 작동되는 것도 있으니 내릴 때는 반드시 도어 오픈(OPEN) 버튼을 눌러야 한다.

• 화장실은 유료인 곳이 많으므로 잔돈을 준비해서 다닌다.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등에서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대부분의 상점이 우리나라보다 일찍 닫으며 주말에 문을 안여는 경우도 많다. 필요한 물품은 미리미리 구입해 둔다.


비자
o 우리나라와 체결된 사증면제 협정에 기초하여 최대 6개월(협정상은 상호 3개월)이내의 방문 여행 시에는 비자가 필요 없으나, 학업, 취업 등 6개월 이상 장기 체류가 필요한 경우에는 사전에 반드시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관련 입국허가 사증을 발급 받아 입국하여야 함.
(관련 상세 : 주영대사관 공지사항 "영국의 새로운 입국·체류 증명제도 도입" 참조)

*공항입국 심사시 6개월 이내의 방문여행의 경우 사증이 필요없다 하더 라도 영국내 연고자 연락처(성명,주소,전화 번호 등)또는 숙박지 관련사항(호텔명,전화,예약여부 등) 및 여행기간에 따르는 소요경비 재원 등에 대한 질문에 대비하여 관련사항 준비철저 요망

o 주한 영국 대사관 연락처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 4
-전화번호 : (02) 3210-5500
-FAX : (02)725-1738

철도
영국은 유레일 패스를 사용할 수 없는 지역으로 별도의 영국 철도 패스를 이용해야한다. 영국 철도 패스는 몇가지가 있는데 이용할 수 있는 지역, 이용방법등으로 구분된다.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즈등지에서 이용할 수 있으며 런던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교통편도 이용할 수 있다.
각 철도패스는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도 있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버스를 이용할수 있는 것도 있으며 관련 교통기관을 할인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패스들은 영국에서 구입할 수 없으므로 미리 구입해서 입국해야 한다. (가격은 2004년 3월 현재 US $ 기준)

• 영국철도 패스 (Britrail Classic)
영국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철도 패스로 정해진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이용한다. 패스는 구입한 후 6개월 이내에 사용하여야 하며 1등석 패스의 경우 3명 혹은 4명이 같이 여행하여 패스를 구입하면 3번째와 4번째 승객은 50% 할인이 가능한 파타패스 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다.
1등석 성인 기준으로 4일패스는 $279, 8일은 $405, 1일은 $599 22일은 $765, 1개월은 $909 이다. 2등석은 1등석 요금에서 33%가량이 할인된다.

• 선택패스 (Britrail Flexi Pass)
2개월 안에 정해진 일수 만큼 패스를 사용하면 된다. 기차를 연속적으로 타지 않고 가끔씩 이동하는 스케줄이 있을 때 이용하면 된다. 1등석 4일권이 $349, 8일권은 $515, 15일권은 $775이며 연속패스와 마찬가지로 3번째 4번째 일행에게 1등석 성인 요금의 50%가 할인된다. 2등석 요금은 1등석 요금에서 약 33%가량 할인된 가격이다.
위의 두 패스 이용자 중 26세 이하는 2등석으로 유스요금이라는 할인 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다.

• 영국철도 + 아일랜드 패스
영국 전역의 철도와 Northern Ireland, Republic Ireland 지역의 철도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1등석일때 성인 5일권은 $515, 10일은 $849 이며 2등석은 이 요금에서 약 30% 가량 할인된다.

• 스코트랜드 패스(Freedom of Scottland)
스코트랜드 지방의 ScotRail, Great North Eastern Railway and Virgin trans를 유효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8일이내 사용해야 하는 4일권은 성인이 $145, 15일 이내 사용해야 하는 8일권은 $189이다. 2등석 기준 요금이며 15세미만의 어린이는 반액정도 적용된다.

• 동남부 패스 (Britrail Days out of London)
런던 주위를 돌아볼 때 유리한 패스로 영국 동남쪽 지방에서 편리하게 사용된다. 이 패스로 이용할 수 있는 철도 서비스는 Anglia Railway Trains Service, Connex, Gatwick Express, Stansted Express, Great Eastern Railway, Island Line, LTS Rail, Silverlink Trainservices, South West Trains, Thames Trains, Thameslink Rail, The Chiltern Railway Co., Wales & West, West Anglia 등이다.
1등석으로 8일이내 2일간 사용하는 패스는 $89, 4일권은 $149, 15일 이내 사용하는 7일권은 $199이다. 2등석은 이 요금에서 33%~ 20% 가량 할인된다.


봄에는 평균 섭씨 6˚C-12˚C로 따뜻하다. 화창한 날씨일지라도 소나기 등 샤워가 오는 경우가 많아 가벼운 모직 옷이 방수 재킷을 가지고 가야한다. 여름에는 평균 섭씨 15˚C-16˚C로 티셔츠가 적합하고 서늘한 때를 위하여 재킷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 가을에는 평균 섭씨 14˚C-7˚C로 가장 좋은 날씨를 보이며 아침과 저녁에는 쌀쌀해지기 때문에 재킷을 준비한다. 겨울에는 섭씨 4˚C-5˚C로 아주 추은 날은 없지만 바람이 많아 체감온도는 더 낮아 지므로 옷을 준비하여 가져간다.


시차 :
버밍엄/스코틀랜드 : -9시간
맨체스터(Manchester) : -14시간


▶ 런던 [London]

영국의 수도로서 영국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영국연방의 사실상의 중심도시이며, 뉴욕, 상하이, 도쿄와 더불어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이다. 1888년 런던주가 설치되엇고, 99년 시티오브런던을 제외한 지역을 28객의 행정구로 구분하여 런던 주청이 통할하였다. 다만 런던 경시청(스코틀랜드 야드)은 주변의 여러 주에 미치는 수도경찰관구를 관할하였다. 1963년 런던 행정법에 의해서 65년 런던 주청이 폐쇄되고 대신 시티오브런던을 포함한 32개의 행정구로 구성된 그레이터런던 주청이 설치되었다. 런던주는 종래의 런던주 외에 미들섹스, 하트퍼드셔, 에식스, 켄트, 서리 등 각 주의 일부를 포함하며, 수도 경찰관구보다는 좁으나 런던교를 중심으로 반경 약 24Km, 구 런던주의 약 5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였다.

교육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는 19세기 자유주의 운동으로 생겨났다. 1825년 시인 토머스 캠벨이 '기계공'과 '대부호' 사이의 계층을 교육시키는 대학을 세우자고 한 데 이어 1827년 자유주의자와 영국 비국교도들이 런던대학교(지금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세웠다. 대학이 가톨릭 신자, 유대인, 비영국성공회교도에게 입학을 허락했기 때문에 왕의 인가는 받지 못했다. 1831년 영국성공회의 후원으로 킹스 칼리지가 설립되었지만 비성공회교도들이 인가를 방해했다. 1836년 수업은 하지 않지만, 위의 두 대학의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학위를 수여하는 행정상의 실체로서의 런던대학교가 만들어졌다. 1849년에는 보충인가장(Supplemental Charter)으로 대영제국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 등록된 학생이면 누구나 런던대학교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치르고 런던대학교 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옥스퍼드와 런던근로자대학과 같이 서로 다른 교육기관 출신 학생도 런던대학교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어떤 교육기관에도 등록되지 않은 학생에게도 학위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19세기말까지 많은 다른 교육기관과 제휴했는데, 그 기관은 영국에서 최초로 여자에게 학위를 수여한 베드퍼드 칼리지, 지금은 사회학 연구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런던경제학·정치학대학, 나중에 임페리얼 과학기술대학이 된 3개 기관이다. 1900년에는 자체 교과과정을 개설할 수 있도록 인가 받았다. 이 대학이나 자매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내부학생'이라 부르고 시험은 치르지만 등록되지 않은 학생들은 '외부학생'으로 일컫게 되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런던대학교 외부시험을 치르려 하기 때문에 영국과 식민지국 도처에 있는 대학교들은 런던대학교 교과과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인도·오스트레일리아·아프리카가 런던대학교를 모델로 대학 체제를 세웠다.

산업
런던 인구의 과반수는 광의의 유통부문 업종에 종사하고 있으나 주변 공장지대에는 기계·직물·시계·전기·약품·플라스틱·식품·담배·인쇄 등의 각종 공업이 성하다. 유통산업에서도 중요한 곳은 런던 항으로 런던·틸베이·세이트캐서린·이스트인디아·웨스트인드아 등 11개의 독이 있으며, 평상시에도 2만 명 이상의 항만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런던의 대인구를 유지하는 각종 시장도 유명하며, 빌링스케이트 어시장·스미스필드 식육시장·버로마켓·코벤트가든·스피틀필드의 각 채소 시장 등은 모두 17세기 이전부터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런던의 경제적 지위를 대표하는 것은 런던시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이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옮겨간 후에도, 국제경제에 있어서 런던의 중요성은 시티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현재도 국제상품시세의 중심이 뉴욕이 아니고 런던에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기상과 기후
영국의 기상은 변화가 심합니다. 어떤 계절에 영국을 방문하든 따뜻한 옷과 방수 자케트를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코틀랜드와 남부 잉글랜드 사이에는 현격한 기온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페이지 아래의 표는 영국 전역의 월별 기온과 강우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을 (9월 - 11월)

가을에는 온화한 날씨인 경우가 많으나 매우 추운 날도 있습니다. 기후는 섭씨 7도에서 14도 사이에서 변화하고, 9월은 11월보다 훨씬 따뜻한 기온을 보입니다.

겨울 (12월 - 3월 초)

겨울에는 영국의 가장 짧고도 가장 추운 날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낮시간은 7-8시간 정도로 유지되지만 이 또한 변화가 매우 심합니다. 기후는 섭씨 1도에서 5도 사이에서 움직입니다.

봄 (3월 - 5월)

봄에는 아름다운 화장한 날씨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 춥거나 비가 오기도 합니다. 기후는 섭씨 6도에서 11도 사이에서 변화하고, 5월에는 섭씨 18도에 이르는 매우 따뜻한 날씨들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여름 (6월 - 8월)

여름의 날씨는 대부분 따뜻합니다. 그러나 저녁 시간에는 서늘한 기온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평균 기온은 섭씨 14도에서 20도 사이에서 움직이고, 때때로 28도에 이르는 더운 날씨인 날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남부 잉글랜드 사이 지역의 기온은 매우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아시는 것처럼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서늘한 기온을 보입니다.

공항안내
런던의 공항은 히드로 공항과 게트윅 공항이 대표적인데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은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공항에 도착하면 EU 국가 회원국과 비 회원국으로 나뉘어 입국심사를 받고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

버스
런던의 주요 시내버스는 대부분 붉은색의 2층 버스이다. 버스 안에서 직접 좌석을 오가면 티켓을 판매한다. 버스는 행선지에 따라 구간 요금제를 실시하고 있다. 버스 요금은 지하철보다 저렴하다. 2층버스는 뒷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린다.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중이거나 길이 막혀 도로 중간에 서 있을 때에도 타고 내릴 수 있다.

전철
지하철과 시내버스가 런던의 주요 대중 교통 수단이다. 지하철은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또는 튜브 Tube 라고 부른다. 1863년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만들어진 이래 현재 11개 노선이 운영되고 있다. 시내를 6개 존 Zone으로 나누어 05:30부터 밤늦게까지 운행된다. 지하철 노선은 서울보다 훨씬 복잡하므로 지하철 노선도를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한다. 노선도를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한다. 지하철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05:30∼24:00, 일요일 07:30∼23:30에 운행한다.

지하철 요금은 구간제를 적용하는데 대부분의 관광 명소가 1구간에 다 들어가 있다. 티켓은 자동판매기나 지하철역의 창구에서 구입하면 된다. 런던의 교통 요금은 비싼 편으로 지하철로 관광하려면 할인 티켓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런던에서 3일 이내에 머물 경우 1일 크래블카드 One Day Travelcard를 구입하면 경제적이다. 1일권은 이용할 수 있는 구역별로 요금이 다르다.

철도
유럽 대륙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입국하면 템스 강 남쪽의 워털루 역에 도착하게 된다. 1일 카드는 워털루 역 대학실의 여행안내소에서 구입할 수 잇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입국하는 경우에는 런던 리버풀 거리 역에 도착한다.

택시
검은색의 고풍스러운 오스틴 택시는 붉은색 2층버스와 함게 런던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런던의 명물이다. 요금은 비싼 편이어서 먼 거리를 가거나 러시 아워때 타기에는 부담스럽다. 요금의 10% 정도 팁을 주어야 한다.

기타
런던의 각종 교통패스는 여행자에게 편리함과 경제적인 이익을 안겨준다. 여행계획을 잘 세우고 일정에 맞는 패스를 선택하도록 한다. 여행자 카드 (Visitor Travelcard)를 제외하고는 영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2004년 3월 현재 영국 파운드 £ 기준)

• 런던 여행자 카드 (Visitor Travelcard)
런던의 지하철과 버스를 횟수 제한 없이 정해진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다. 이 여행자 카드는 관광지와 식당의 할인 쿠폰이 포함된 책자를 같이 받을 수 있어 더욱 경제적이다.
런던의 모든 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것과 가장 중심지인 1, 2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되며 각각 이용할 수 있는 일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전 구간 카드는 2일, 3일, 4일, 7일권이 있으며 각각 £13.2, £18.9, £24.8, £37.8이며 1, 2구역만 이용할 수 있는 카드는 3이르 4일, 7일권이 있으며 이보다 저렴하다. 어린이는 약 5-60% 할인된 요금을 적용받는다.

• One Day Travelcard
런던의 지하철과 Light Railway, Tramlink 버스와 National Rail Service를 하루동안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으며 영국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다만 오전 9시 30분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다. 성수기에 1-2구역을 이용할 수 있는 카드는 £5.30이며 1-6구역까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10.5이며 비수기에는 이보다 저렴하다.

• 주말여행자카드 (Weekend Travelcard)
토, 일요일 혹은 공휴일과 연결된 날에 사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다. 1구역과 2구역에서 사용하는 것은 £6.1, 1- 6구역까지이용할 수 있는 것은 £7.5 이다.




▶ 맨체스터 [Manchester]

맨체스터시티는 영국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70만 정도의 도시이다. 영국의 전체적인 땅 면적과 생김새는 우리 한반도와 비슷한데, 한반도로 친다면 바로 서울 정도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가 맨체스터이다. 이 나라의 수도인 런던은 우리나라로 친다면 울산 정도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수도로서는 한 쪽으로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맨체스터는 수도의 역할을 할 만한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행정구역을 구분하기 때문에 맨체스터지역을 잉글랜드 북서부라는 의미에서 North West라고 부른다.

맨체스터시티 주변에는 맨체스터를 생활권으로 하는 군소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런 도시들과 맨체스터 시티가 합쳐 Greater Manchester라는 광역 행정권을 이룬다. Greater Manchester의 인구는 300만명 정도로 런던, 버밍엄과 함께 영국의 3대 도시권을 형성한다. 영국 사람들이 그냥 맨체스터라고 이야기할 때는 보통 이 Greater Manchester를 말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여기가 바로 현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산업혁명의 발생지인 것이다.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집필한 엥겔스는 그의 아버지가 맨체스터에서 기업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에 따라 이 도시에는 그와 관련된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흔적들이 몇군데 있다. 사회주의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분위기지만, 가진 자들과 못가진 자들의 대립이 첨예했던 한 시대에 자신의 인생을 바쳐 사회를 개조하려 한 혁명가의 분위기가 이 도시에 남아 있다는 것은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산업
샐퍼드·스트랫퍼드 공업지역과 맨체스터 시로 이루어진 중심도시와 이 중심도시의 북단과 동단에 있는 직물업 도시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현저한 경제적 차이가 있었다. 중심도시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다양하고 안정된 경제상태를 유지해왔는데, 넓은 영역의 서비스 활동뿐만 아니라 인쇄업과 기계·전기제품·화학제품·의류 등을 포함한 다양한 제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로 대도시권의 제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공업지역과 직물업지역 간에 있었던 격차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시는 금융·재정 중심지로서 북부증권거래소, 도매협동조합, 잉글랜드은행의 지점 등이 있다. 머지 강을 거쳐 들어오는 주요수입품은 목재·식량·면화 등이며 공산품을 주로 수출한다.




▶ 버밍엄

영국 잉글랜드 중앙부에 있는 공업 도시이다. 질이 좋은 석탄과 철광산이 부근에 있어 일찍이 영국 최대의 중공업 지대로 발전하였다. 주요 산업은 기계·금속 공업을 비롯하여 자동차·항공기·화학·탄약·공구·플라스틱 공업 등이다. 철도와 운하가 발달되어 있으며, 역사가 오랜 대학·도서관·미술관·박물관·교향악단 등이 있는 문화 도시이다. 19세기부터 실시된 도시 계획으로 공원과 그린벨트 등이 조화를 이루어 도시 전체가 아름답고 정연하다.




▶ 쉐필드

영국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영국 내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현대적인 도시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의 한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적인 산업지대로서, 북부 잉글랜드 지역에 위치해 있어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적인 경관을 지닌 유명한 관광 명승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지역 사람들은 생활비가 타 지역에 비해서 상당히 저렴한 편이며, 영국인들 중에서도 가장 친절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그리고, 이 도시는 협의 위원회, 관광객을 위한 안내센타, 그리고 국립 시 체육 스포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지역에 갖춰진 시설들 또한 뛰어나서 관광객들 또한 한번 쯤은 들려볼 만한 곳이 많다. 두 개의 아트 갤러리와 박물관들, 나이트 클럽, 영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관, 온갖 미각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과 클래식 및 팝 콘서트 등을 다양하게 즐겨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피크 국립 공원(Peak National Park)에서의 산책과 등산은 쉐필드의 또 다른 멋인 푸르름과 상쾌함을 안겨다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철강업을 중심으로 한 품질 좋은 칼제품과 공구 세트의 생산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제품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이 곳 쉐필드의 스포츠 중, 축구는 단연 뛰어난 기량으로 국가의 많은 지원을 받으며, 실력 향상에 힘쓰고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교육
쉐필드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대학 중의 하나인 쉐필드 대학교(University of Scheffield)는 유럽에서도 좋은 교육시설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 학교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전문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을 2년 이상 다닌 사람이라면, 기준에 합당한 영어 성적만 가지고도 파운데이션 없이 곧장 대학의 본 과정에 입학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곳 쉐필드에 소재한 대학들은 대부분 대영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상호대차 서비스(Consertium of University Research Libraies)를 실시하여, 이곳 학생이나 시민들이 보다 효율적인 정보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이 대학의 장학금인 Britisch Scholarship Scheme의 경우는 석사과정에 입학 예정인 우리나라 학생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의 학생들에게 기회가 주어 지는 것으로서, 수여 금액은 3000파운드에 달한다.

쉐필드 단과대학(Scheffield College) 역시 이론과 실습을 통한 탄탄한 교육 과정으로 유럽에서도 유명한 편이다. Castle, Loxley, Norton, Parson, 그리고 Peaks를 위시로 한 5개의 주요 센타가 마련되어 있고, 그 외에도 60여개의 도시 인근 지역의 센타가 산재해 있다. 이렇듯 광범위한 범위의 교육센타 확대로 인해,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보다 넓은 교육 기회의 장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산업
약 200여년 동안, 쉐필드는 철강 상업, 철물 제조 및 다양한 종류의 절삭 도구 제작으로 이름을 떨친 도시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철강 수출의 절반이 셰필드 지역에서 이루어 졌고, 이후 철강 관련 기술, 특히 고품질의 특수 공업용 스틸과 스테인레스 등의 근원지였다. 이러한 활동은 셰필드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도 함께 이루어 졌다. 그외에도 인근에 석탄과 철광석 등의 자원이 충분히 매장되어져 있어, 산업 혁명의 발원지이자 현대 세계를 농업중심 사회에서 공업중심으로 전환시킨 표본의 도시이다. 이곳에서는 인류 최초의 기차가 발명되었고, 수공업에서 기계를 이용한 공장 공업으로 발전시킨 곳이기도 하다.

쉐필드 소재 2개 대학간의 연계 및 SCEPTRE(the Sheffield Centre for Product Development and Technological Resources)을 통한 생산품 개발 등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두 대학은 셰필드 사이언스 파크와 셰필드 테크놀로지 파크의 개발에 참여 함으로써, 파트너 쉽을 갖게 되었다. 쉐필드 테크노폴의 핵심적 활동은 시설을 중계하는 것으로서 제조업체, 특히 소규모 기업을 서로 결합시켜 준다. 테크노폴에서 촛점을 둔 것은 금속 및 재료, 금속과 관련된 엔지니어링 분야이다. 대상 지역은 쉐필드와 동일 우편 번호가 부여되는 한정된 외곽 지역으로 쉐필드 도심에서 북으로 15마일, 남으로 14마일, 동으로 30마일 범위 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이러한 관련업체에 도움을 주로 제공하는 것은 테크노폴을 구성하고 있는 조직체들인데, 그들간에는 파트너가 있다. 그 대표적인 해당 중소 기업의 지원 분야로는, 철강 및 철강에 기초한 생산품, 스프링, 주조물, 기초 금속 분야, 건강 및 안전분야, 유리 그리고 절삭 및 절단 도구, 금속주조, 생물, 화학, 환경, 구조, 메카니칼 분석 및 실험 분야 등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쉐필드의 배낭 전문 제작 업체인 Summit는 영국의 뛰어난 등반가인 Rab Carrington과 그 스탭들이 직접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디자인하고, 설계 전 단계에 참여하여 이곳 쉐필드에서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를 원하는사람들에게 미려한 디자인, 우수한 기능과 뛰어난 품질에 최상의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RAB의 철학은 1983년 회사 창립부터 17여 년간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 품질은 세계 곳곳에서 인정받고 있다.




▶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는 은빛 물결이 현란한 호수, 백 파이프, 맥아로 빚은 고급 위스키, 장엄한 절경의 산을 연상케 하는 스코틀랜드의 수도이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성과 왕조의 유산이 풍부한 곳으로 고지대의 사냥감과 유서 깊은 유적지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산란하러온 연어들이 뛰노는 구불구불한 강과 그림에 나오는 풍경 그대로인 어촌 등 독특한 개성을 지닌 곳이다. 뿐만 아니라 8월에 열리는 화려한 국제축제에서 에딘버러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은 절정을 이룬다. 스코틀랜드 북쪽의 하이 랜드 (High Land : 고지대)와 남쪽의 로랜드 (Low Land : 저지대)로 나누어지는데,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기후나 언어 습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영국의 기후처럼 예측 할 수 없는 날씨로 유럽에서 가장 혹독하다고 알려지며, 특히 scotch mist라고 불리는 부술부슬 내리는 비와 악천후가 유명하다. 스코틀랜드는 세계 속의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많은 유명한 것들이 유래한 곳이다. 골프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스코틀랜드의 그 유명한 음식 하기스가 생겨났으며, 특히 스카치 위스키를 만드는 양조장이 유명하다. 위스키와 Highland 라는 말이 동일시될 정도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유명하여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영혼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북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위스키 기행 ( The Malt Whisky Trail)은 스코틀랜드의 장엄한 산과 고요한 푸른 초목을 지나가며 Glenlivet나 Glenfiddich와 같은 오래된 위스키 양조장을 견학할 수 있다. 양조장에서는 곡물을 거둬드리는 과정부터 견학할 수 있으며, 마지막에 만들어진 위스키의 시음도 가능하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이미지는 전통 스코틀랜드의 민속춤이나 아주 건장한 청년들이 킬트 옷을 입고 하는 장대던지기를 통해 볼 수 있다. Highland Games에서는 이 두 가지 외에 백파이프 연주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는 세계 속의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많은 유명한 것들이 유래한 곳이다. 골프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스코틀랜드의 그 유명한 음식 하기스가 생겨났으며, 특히 스카치 위스키를 만드는 양조장이 유명하다. 위스키와 Highland 라는 말이 동일시될 정도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유명하여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영혼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북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위스키 기행 ( The Malt Whisky Trail)은 스코틀랜드의 장엄한 산과 고요한 푸른 초목을 지나가며 Glenlivet나 Glenfiddich와 같은 오래된 위스키 양조장을 견학할 수 있다. 양조장에서는 곡물을 거둬드리는 과정부터 견학할 수 있으며, 마지막에 만들어진 위스키의 시음도 가능하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이미지는 전통 스코틀랜드의 민속춤이나 아주 건장한 청년들이 킬트옷을 입고 하는 장대던지기를 통해 볼 수 있다. Highland Games에서는 이 두가지 외에 백파이프 연주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스코트랜드의 가장 유명한 국가음료수는 스코트랜드산 위스키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위스키 공장을 관람, 비디오, 전시회를 통하여 자유롭게 접하고 관심을 보인다. 스코틀랜드하면 스카치 위스키, 백파이프, 격자 무늬 타탄, 골프의 발상지로 연상되는 지역이며 장엄한 절경의 산, 은빛 잔물결의 현란한 호수 등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본토의 남북 길이가 약 450km, 최대 넓이가 약 250km로, 북쪽과 서쪽으로는 대서양이 동쪽으로는 북해와 접해 있는 스코틀랜드 주변에는 790개에 달하는 섬들이 있다.

교육
스코틀랜드의 교육제도가 수준이나 평판 면에서 잉글랜드나 웨일즈, 북아일랜드의 교육제도와 차이를 갖고 있는것은 아니나, 몇몇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교육제도는 중등교육이 12년제인 반면 나머지 지역은 13년제로 되어 있으며 GCSE에 해당 되는 것이 스코틀랜드의 Standard of Ordinary Grade 시험으로 Form 4의 학년 말에 시험을 치른다(Form 4는 14세 가을부터 15세 봄까지 이어지는 중등학교의 4학년을 말한다). 다음에 학생들이 Form 5(16세에 해당)의 학년말에 Higher Grade 시험을 보면 스코틀랜드의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데 GCE'A' 시험을 치고자 하는 학생들은 Form 6로 진학하게 된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에서 중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다른 지역의 졸업생들보다 1년 일찍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Honours 학위는 4년동안 진행된다. 결국 학위의 수준은 영국의 전 지역에서 똑같고 초등, 중등, 대학까지 졸업하는데 최소 16년이 걸리게 된다.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인 에든버러·글래스고·세인트앤드루스·애버딘·던디·스털링 등에 모두 8개의 고등교육기관들이 있다.


산업
스코틀랜드의 경제는 북해 석유산업의 성장이 있기까지 느리게 발전했다. 그후 1970년대 및 1980년대초에 들어서면서 석유 생산시설 건설과 북해 석유 생산을 위한 지원산업과 같은 석유관련 산업이 발달하게 되어 수많은 고용을 창출했다. 그러나 1980년대말 국제유가가 계속 하락하여 석유생산이 줄었고 많은 실직자가 생겼다.
주요광물자원은 석탄으로 주요탄광지역은 로디언·파이프·스트래스클라이드 주 등에 있다. 그밖에도 금·은·납·크롬·규조토·고회석·중정석 등이 조금 채광되고 있다. 이탄이 광활한 지역에 0.6m 또는 그 이상의 깊이로 묻혀 있지만 그것의 경제적 가치는 크지 않다. 물은 특히 산업발전을 위해 귀중한 자원이다. 스코틀랜드에는 석탄·석유를 동력으로 쓰는 발전소들이 있지만 채펄크로스·헌터스턴·돈레이 등에 있는 원자력발전소들이 이 나라 전체 전기의 약 2/5를 공급한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생선·조개류 어획고의 2/3 이상을 차지한다. 피터헤드는 유럽 공동체(EC)에서 대구 등 흰살생선의 도착항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며, 그램피언 주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생선가공업 중심지이다. 농업은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기계화되고 있다. 남부 고지대와 산악지대에서는 구릉지의 목양업이 중요하고 북동 지역은 사료작물 재배와 가축사육이 지배적이다. 남서 지역에서는 낙농업이 널리 행해진다. 밀과 보리가 중요 농작물이며 특정지역은 전문화된 농업이 발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이스트로디언은 시장 출하용 야채재배, 테이사이드 주는 나무딸기밭, 스트래스클라이드 주의 클라이즈데일 구는 온실재배용 토마토와 집약적 과일재배 등으로 유명하다. 임업 또한 중요 산업으로 농촌지역 인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전자산업은 1960년대 이래 특히 파이프·로디언·스트래스클라이드 주에서 크게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시계, 손목시계, 금전등록기, 정밀기기, 토목공사용 기계 등을 만들어왔으며 자동차 제조업은 1960년대초 이후에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섬유업은 호익·갤러실스·셀커크·피블스·글래스고·에어 등의 도시에서 활발히 이루어진다.
한때 경제의 근간이었던 제철업·조선업이 지금은 쇠퇴일로에 있다. 인쇄업·양조업은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 기반이 잘 잡혀 있다. 항구들은 많은 물건을 취급하며, 수출보다 수입품이 많지만 수입품의 대부분은 재수출용이다. 항공운수업은 글래스고·애버딘·프레스트윅·애든버러 등의 주요공항을 통해 꾸준히 성장해왔다. 산업은 밀, 감자, 무, 콩 따위의 재배 및 양치기와 소기르기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성하다. 또한 어업도 활발하여 이 나라 어획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클라이드강 유역은 글래스고를 중심으로 하여 중공업 지대를 이루며, 조선, 금속, 기계, 양조, 섬유 공업이 성하다.




▶ 옥스포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도시 옥스포드(OXFORD)는 런던 북서쪽 10KM 지점, 템즈강 상류에 위치해 있다. 12세기부터 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엔 양털의 집산지에 불과했던 옥스퍼드는 13세기에 최초의 칼리지가 창립됨으로써 오늘날의 대학도시로 발전하는 기름이 되었다. 시내 곳곳에 40여개의 단과대학이 흩어져 있는 이 대학도시는 템즈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영국의 유수한 인재들을 키워낸 곳이다. 옥스포드의 중심부는 여러 큰 길이 만나는 CARTAX라는 곳이다.




▶ 요크

영국에서도 요크와 같은 신비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곳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뛰어난 건축물과 2,000년에 이르는 역사, 그리고 분주한 쇼핑 거리와 여러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아담한 도심에서 30개가 넘는 박물관, 미술관, 또는 관광을 선택할 수 있는 요크는 4계절 내내 모든 사람에게 무언가를 제공합니다.

방문객들은 중심가의 고급 상점들, 전통적인 선물 가게와 독립 부티크에서 최고의 쇼핑 경험을 할 수 있으며, 패션에 민감한 이들은 시 외곽에 형성된 디자이너 아웃렛 빌리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녁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여가도 매우 다양하여 달빛 아래 유람선, 공연 또는 극장 관람, 또는 유럽에서 가장 유령이 많은 도시 중 하나인 이곳에서 유령 관광에 나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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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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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알바니아공화국(Republic of Albania)이며, 알바니아인(人)은 '슈키페리야'(독수리의 나라)라고 부른다. 발칸 제국 중에서 작은 나라의 하나로, 동쪽으로 마케도니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 아드리아해(海), 북쪽으로 몬테네그로, 북동쪽으로는 세르비아의 코소보메토히야 자치주, 남서쪽으로 이오니아해에 면한다. 알바니아계 주민이 90%에 달하는 세르비아의 코소보메토히야 자치주를 둘러싸고 1998년의 코소보 사태 등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양국 간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행정구역은 12개주(qark)로 되어 있다.

알바니아는 유럽의 공산주의의 마지막 요새였다. 잔인했던 독재자 엔버 호자(Hoxa)의 철권으로 다스려진 스탈린주의 국가인 알바니아는 지나친 폐쇄성과 외국인을 기피하는 성향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영공을 지나는 국제 항공기에 대한 비행 허가를 내주지 않던 나라이다. 동유럽의 막스주의 정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린 후에도, 알바니아의 지도층은 이 현상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폭정 체제는 1991년에 막을 내렸다. 알바니아가 '독수리의 후예'를 의미하는 것처럼 이 나라의 지형은 울툴불퉁한 산악 국가이다. 로마군대의 주둔지였으며 비아 이그 나찌아(The Via Ignatia)라 불리던 교역의 요충지로서 지정학적 위치가 이 나라를 수많은 전쟁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역사는 정복당하고 다시 점령당하는 기록으로 가득하다. 또한 이 나라는 오스만 터키 제국이 오백년 이상을 지배해 온 탓으로 유럽에서는 유일한 모슬렘 국가이다. 사도 바울이 알바니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기독교는 이슬람과 공산주의에 의해 위축되어 현재 알바니아의 그리스도인은 18%에 불과한데 그것도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대부분이다. 지금 이 나라는 복음 사역의 문이 활짝 열린 상태이며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라가 서구 민주주의로 전환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수 십만의 알바니아인들이 보트로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가려고 시도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다시 본국으로 강제로 송환되었다. 국민 대다수가 심각한 정신적, 영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나라는 유럽에서 가장 개발되지 않은 국가에 속한다.


이곳의 수도는 '티라나'(Tirana)인데, 이곳은 알바니아 최대의 도시로서, 1920년 이래 알바니아의 수도로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는 약 23만명 정도이고, 티라나는 알바니아 정치, 경제 중심지로 전체 산업생산의 30%를 차지한다. 또한 티라나국립대학교를 두고 있어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듀레스'(Durres)시는 알바니아의 제2의 도시로 기원전 627년에 세워졌으며, 1914년까지 알바니아의 수도였다. 휴양지와 관광지로 유명한 항구도시이며 알바니아의 주요 항구가 있어 해상관문의 역할을 한다. 전체 산업생산의 10%를 차지한다. 인구수는 약 7만 9천명 정도이다. 이 외에도,'엘바산'(Elbasan)의 경우는 알바니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공업도시로, 특히 철강공업이 발달하여 알바니아 전체 철강의 1/5을 생산한다. 인구는 7만 8천명 정도이다. 그리고,'슈코데르'(Shkoder)는 북알바니아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주요 케이블선, 시멘트, 종이, 식품류를 생산하는 호반도시로 유명하다. 전체 산업생산의 8%를 차지하고 있고, 25만 KW의 발전소 시설이 있다. 인구는 7만 6천명 정도이다. '블로레'(Vlore)는 알바니아의 남부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화학제품, 시멘트, 식품류 등을 생산한다.


알바니아인들은 자기 나라를 슈키페리야(Shqiperija) 즉 '독수리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국기(國旗)도 이를 반영하여 붉은색의 바탕에 머리가 둘인 검은 독수리가 가운데에 그려져 있다. 두 개의 독수리 머리 사이에는 파란색의 별 문양이 있어 용맹성ㅇ르 더한다. 1944∼90년에 알바니아는 사실상 스탈린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1당제 공산주의 국가였으며, 알바니아노동당(1991년 사회당으로 개칭)이 인민의회의 승인 아래 모든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1991년 이후로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도 인민의회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듬해 비공산계인 민주당이 140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의회에서 선출한 대통령은 총리와 각료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자연환경은 지형적으로 국토의 3 /4을 차지하는 산악지와 모든 농경지가 집중되어 있는 서부 해안지대로 구분된다. 산악지대는 다시 알프스산맥지대, 중부고지대, 남부고지대 등 3개지역으로 구분된다. 알바니아는 해안을 끼고 있는 나라이면서도 이처럼 내륙이 산악지이기 때문에 국토의 평균 고도가 700m나 되며, 이는 유럽의 평균 고도보다 2배나 높다.알프스산맥지대는 알바니아 북쪽에 위치하며 높이가 2,700m에 달하는 석회암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중부고지대는 북부의 드린(Drin)강에서 남부의 오슘(Osum)계곡에 이르는 지역으로 해발 2,751m에 달하는 알바니아에서 가장 높은 코라브(Korab)산과 오흐리드(Ohrid)호, 프레스파(Prespa)호 등이 있다. 남부고지대는 오슘(Osum)계곡의 남쪽 지대로 다소 낮고 완만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 북부와 연결된다. 해안지대는 북쪽의 알프스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여 약 200km정도 뻗어 있고 폭이 15-35km 정도로 이 해안지대에 알바니아의 모든 농경지가 집중되어 있다. 식생(植生)은 산악성 지형의 영향을 받아서 저지대에는 지중해 지방의 관목인 마키로 이루어져 있고, 해발 1,000m 지점까지는 참나무가 많고, 그보다 높은 산지에는 떡갈나무와 너도밤나무가 식생하며, 더이상의 고지에서는 침엽수가 나타난다.


알바니아는 1991년 이전까지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하에서 개발되어 왔다. 1992년 정부는 사유화와 시장자유화에 중점을 둔 경제 개혁 조치를 취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경작이 가능한 땅은 총국토면적의 약 1/4이며 그 중 1/2가량에서 곡물을 재배하고 있다. 그 밖에 영구적인 목초지가 전체 면적의 15%, 삼림지대가 38%를 차지하고 있다. 농경지 가운데 1/2 이상이 관개되며 옥수수·보리·귀리·콩류·사탕무·면화·해바라기씨·담배·감자·과일 등이 재배된다. 주요가축으로는 양·염소·소·돼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산악지대에는 광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으며, 물살이 센 강들을 훌륭한 수력발전 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에너지용 광물자원인 원유, 갈탄, 천연 가스, 천연 아스팔트 등이 생산되며 금속성 광물로는 세계 최대 채굴량을 보이는 크롬철광을 비롯하여 니켈을 함유한 철광석, 동 등이 채굴된다. 원유와 천연 가스의 매장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국내 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아 여분을 수출하고 있다. 수력발전에 의한 전기공급량이 전체 공급량의 9/10 가까이 차지한다. 공업으로는 정유, 철강제품, 제련된 크롬·동, 석유화학제품, 플라스틱, 질소비료, 과인산석회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소비재는 전반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그리고, 1945년 이전에는 간선도로나 표준 철도망이 전혀 없었다. 198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 티라너에서 시작하여 국내 모든 주요도시들과 유고슬라비아로 이어지는 철도 체계가 완성되었으며 도로망은 외진 산간마을로까지 연결되었다. 아드리아 해 연안에는 4개의 항구가 있다. 알바니아의 수출품은 광석연료·크롬광·철광석·철·강철·동제품·과일·야채 등이며 기계류·장비·예비부품·광물·금속제품을 수입한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이탈리아·독일이다. 알바니아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실행되고 있다. 의료혜택은 무료이며 국민들의 건강상태는 1951년 이후 크게 향상되었으나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여전히 뒤떨어진 편이다. 7∼15세까지의 의무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 역시 무상으로 이루어지며 1957년에 설립된 티라너대학교가 대표적인 이 나라의 주요 고등 교육기관에 속한다.

항공
자체 항공사가 없이 수도인 티라나의 인근에 위치한 리나에 국제공항이 자리한다. 1977 년 그리스와 항공협정이 체결되었고, 1992년에 알바니아 항공망을 구축하였다. 오늘날에도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그리스, 터키,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등의 다양한 항공사가 이곳에 취항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직까지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 타국을 먼저 한번 거쳐서 가야만 한다.

훼리
선박은 서방과의 교역에 중요한 화물 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항구는 듀레스(Dures)와 블로레(Vlore)이고 그외 사란데(Saranda)가 있다. 듀레스는 알바니아 해상운송의 80%를 처리하며 화물 최대수용량은 25,000톤이다. 1983년 11월부터 듀레스와 이태리의 트리스트(Trieste) 사이에 1988년에는 사란데(Saransa)와 이태리의 코르퓨(Corfu)사이에 1991 년에 듀레스와 이태리의 바리(Bari) 사이에 페리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면적 : 28,748km2

수도 : 티라나

인구 : 1995년 기준 3,521,000명

위치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서북부
면적  2만 8703㎢
인구  316만 6000명(2003)
인구밀도  110.3명/㎢(2003)
수도  티라나
정체  공화국
공용어  알바니아어
통화  레크(Lek)
환율  122.89lek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1,370$(2003)


종교 : 공산주의는 모든 종교를 심하게 탄압해 왔으며, 1967년 모든 종교를 완전히 금지했다. 1990년 금지령은 해제되었지만, 회교와 정교, 카톨릭 지도자들로부터의 탄압은 다른 종교에 대한 차별법으로 이어졌다. 종교적인 수치는 2차 세계대전 전의 종교센서스를 근거로 한 추정치이다. 1967~1990년까지 알바니아는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종교 행사는 금지되었고, 많은 교회 건물들이 극장이나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90년 중반께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국민의 70%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카톨릭이 10%(거의 알바니아의 북쪽 지역에 거주), 알바니아 정교가 17%(거의 알바니아의 남쪽 지역)를 차지하고 있다.
무종교/기타가 41.9%를 차지하고, 수니파와 베크타시파를 합해서 회교는 40%에 달한다.따라서,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유일한 주요 회교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도, 바하이 종교는 0.12%, 기독교 18%, 로마 카톨릭 7% 정도이고, 외국의 여호와 증인과 같은 유사 기독교가 약 0.02%를 차지한다.

주요민족 : 알바니아인(Albanian, 96%), 그리스인(Greek, 2.54%), 마케도니아인이 종족의 주류를 이룬다. 자세히 살펴 보면, 알바니아인은 93.5%를 차지하고 있고, 집시는 2.5%, 그리이스인들은 2.4%로서 남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기타 종족이 1.6%에 달하며, 아르문(블라치)는 약 60,000여 명, 마케도니아인은 30,000이며, 그 외 몬테네그로인이 구성되어 있다.
40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데, 한편 알바니아는 수도 티라나를 중심으로 토스크(Tosk)인과 그리스계 주민들이 몰려 사는 부유한 남부 지역과 게그(Gheg)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가난한 북부 지역으로 분리된다. 공산당을 배척하고 정권을 잡은 샬리 베리샤 대통령과 현 정부의 주요 각료들은 대부분 북부를 근거지로 한 게그인으로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남부 주민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왔다. 따라서 1997년 3월에 발생한 알바니아의 무장 소요가 남부 지역에서 시작된 것은 북부 출신 집권층에 대한 남부인들의 반감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언어 : 알바니아어는 인도 유럽어에 속하는데 고대 일리리아 방언의 하나이다. 알바니아어에는 2개의 주요 방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게그 방언이 1909년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알바니아 남쪽 지역의 토스크 방언이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잘 사용되는 제 2외국어로는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1972년 티라나에서 개최된 철자법 회의에서는 두 방언을 기초로 통합된 문어체를 만들었으며, 현재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기후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따뜻하며 맑고 건조하고, 겨울에는 연중 강수량의 40% 정도의 비가 내리며 서늘하고 습한 날씨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 국가의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 이고, 지역마다 차이가 심한 편이다. 알프스 산맥지대는 2,000mm 이상인 반면 동부 국경지대는 650-700mm 강수량을 보이기도 한다. 가장 비가 많이 오는 11월의 평균 강수량은 211mm에 달한다.

지리
알바니아는 아드리아해 동쪽에 위치한 발칸 반도 국가이다. 약 300km 정도의 긴 아드리아해안을 끼고 있는 유럽의 남서쪽 발칸반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알바니아는 남쪽으로는 그리스가, 북쪽으로는 몬테네그로가 자리하고 있다. 즉,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코소바/일리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이스 등에 둘러쌓여 있으며, 국가의 총 면적은 28,748km2이고, 남북간의 길이는 약 340km이며, 동서 최대 너비는 153km이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알바니아인들은 고대 인도유럽계 민족인 일리리아인의 후손들로 적어도 BC 1000년부터 발칸 반도 서부 지역에서 계속 살아왔다. 알바니아 남부에 있던 부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러스 시와 레저 시는 그리스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들이다. 북부의 일리리아인들은 지역 군주들에 의해 여러번 통일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군주는 북쪽의 달마치야에서 남쪽의 비요서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슈코더르를 수도로 삼았던 아르곤 왕(BC 3세기 후반)이다. 아르곤 왕이 죽은 뒤 왕비 테우타가 정벌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로마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BC 168년에 일리리아 전체가 로마에 점령당했다. 그후 알바니아는 로마 속주인 일리리쿰의 일부가 되었다.

BC 4세기 초에는 Raulanti, Ardiaei등의 고대국가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BC 2세기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4세기말에는 동로마제국에 편입되어 비잔틴문화에 예속되었으며, 로마의 통치하에 일리리쿰은 번영을 누렸다. 395년 부터는 행정적으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합병되었다. 3∼5세기에 서(西)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을 받고 6∼7세기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았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을 지켜낸 발칸 반도의 몇 안되는 민족 중 하나였으며, 9세기에는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14세기에 들어와 투르크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투르크인들은 후에 민족의 영웅이 된 계르기 카스트리오티를 교육시켜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고 스칸더르베그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그는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물리쳤다. 1443년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받아들인 그는 알바니아에 대한 투르크족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대항했으나, 그가 죽은 이후 투르크의 지배가 강화되어 알바니아의 경제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78년 러시아와 터어키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지도자 압둘 프라셰리(Abdul Frasheri)를 중심으로 프리즈렌(Prizren)연맹을 결성하여 터어키에 대항하였으나 1881년에 터어키에 의해 해체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알바니아는 1912년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외침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1944년에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고립정책을 고수하여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개혁의 물결을 타고 후진성과 고립주의를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다.유럽의 기타 국가들이 이미 19세기 초에 시작한 민족주의가 알바니아에서도 대두되어 19세기 중엽부터 민족문화 부흥기에 접어들어 알바니아어 교육과 서적, 신문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1915년에 열린 런던 비밀조약에 의해 북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남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알바니아는 이같은 결정에 반발하여 1918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920년에는 티라나를 알바니아의 수도로 선언하여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했다. 1920년 12월에는 독립주권 국가로서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1925년에 알바니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유고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28년 왕으로 즉위한 보수주의자 조구(Ahmed Zogu)는 대내적으로는 독재체재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이태리의 원조를 받으면서 독립국으로서의 기반을 굳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1939년 4월 무솔리니의 침공으로 이태리에 합병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동안 외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지 않고 다만 유고의 전략적 지도만으로 공산화에 성공하는데, 1941년 엔버 호자(Enver Hoxha)는 자신을 주축으로 하여 3개파로 나뉘어진 공산주의파를 통합하고 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다. 1943년에는 독일군이 침공하였고, 1944년 5월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였으며, 1944년 11월 민족해방전선의 주도하에 공산정권을 형성하였다. 공산정권은 1946년 1월 11일 단일 후보를 내세운 선거를 치러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해 3월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1946년 7월, 11월에는 유고와 상호협력조약과 경제협약을 맺어 합자회사 설립, 관세폐지와 양국의 화폐 동일화 등을 체결함으로써 유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1946년 코민포름에서 유고가 추방되자 유고와의 협약을 파기하였으며, 1948년 1월 당명을 알바니아 노동당으로 개칭하고 유고로 부터의 원조 단절과 농업집단화에 따른 경제적 난관을 타결하기 위해 소련과 기타 동구권 나라에 의존하기로 결정하고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자(Enver Hoxha)는 스탈린의 지원을 받게 되며 1950년 9월에는 코메론에 가입하게 된다.1953년 스탈린이 서거한 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격하하고 동서진영간의 평화공존을 추구하자 소련과의 유대도 불투명해졌다. 1955년 5월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하고 그해 12월 14일에는 유엔에 가입하였지만 흐르시쵸프의 반스탈린정책은 호자(Enver Hoxha)가 구축한 스탈린적 체제의 동요와 분열을 유발하였기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서방과의 협력 증진을 위해서 6월 19일에는 CSCE(全歐安保協力會議)에 가입하였다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자유화하자 흐루시쵸프는 집단지도체제 확립 및 조제의 복권 등을 알바니아에 제시하였지만, 오히려 호자(Enver Hoxha)는 이를 거절하고, 스탈린을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추앙하면서 알바니아를 스탈린주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여, 1961년 12월 소련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1962년에는 코메콘에서 탈퇴한다. 1961년 이후 소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나서 중국의 모택동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호자(Enver Hoxha)는 1967년 알바니아를 근대화하기 위해 '소문화 혁명'을 추진하였고, 또한 종교활동을 금지하였다. 1969년 9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면서 중국과 방위조약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70년 중국이 서방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자 이를 비난하였고, 1977년에는 중국이 알바니아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함으로써 중국과도 결별하였다. 1985년 4월 11일 호자(Enver Hoxha)가 사망하자,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가 신임 노동당 제 1서기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호자(Enver Hoxha)의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점차적으로 서구세력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87년에 그리스와 이태리와의 관계를 개선하였으며, 서독과 국교수립을 맺어 최초로 서방측에서 6백만불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미온적인 개방화는 심각한 경제난, 비밀경찰의 국민 감시, 인권 탄압 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1989년 13월 슈코더르(Shkoder)시에서 최초의 반정부시위가 발생하였다. 이같은 국내의 상황과 소련의 개방정책,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에 대한 민중봉기 등과 같은 국외의 사태를 직시하여 '위로부터의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후 1990년 1월 2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복수후보제 도입 등의 부분적인 개혁안을 결정하였고, 1990년 5월에는 국민들의 해외여행 자유화와 종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항과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기업경영의 자율권을 20%내에서 인정하는 사항이 민회의에서 통과되었으며, 11월 카르카니(Adil Carcani) 수상은 알바니아의 경제난을 타계하기 위해서 식량과 생필품의 수입, 국내기업들과 외국기업과의 합작사업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신경제정책을 발표하였다. 1990년 12월 12일 알바니아 최초의 야당인 민주당(DPA, Democratic Party of Albania)이 창당되었고, 12월 30일에는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1991년 2월 20일 티라나(Tirana)에서 수천만 시민들이 호자(Enver Hoxha)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시위가 발생하였고, 2월 22일 알리아(Ramiz Alia)대통령은 나노(Fatos Nano)를 수상으로 하는 과도내각과 대통령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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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블런스:222-235
경찰서 및 소방서:19
전화문의:14
군인병원(사고시):225-768
일반대학병원:262-62
소아과병원:363-479
-전화 보급률은 낮은 편이며, 근래에 전화 사정이 좋아지고 있음


통화
알바니아의 화폐는 lek(Lk)를 사용하며 1lek는 100 qindarka이다. 현재 환율은 100Lk가 1$이다. 통화단위는 lek(Lk)이며 1lek는 100 qindarka이다. 1 US Dollar = 135.50LK 1LK=\8.83 (1999. 9 기준)이다.

한국으로 전화
알바니아의 통신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며 1993년 현재 인구 1,000명당 전화보유수가 13대이다. 알바니아정부와 함께 스위스, 이태리, 오스트리아, EU, EBRD가 총 34,000$을 지원하여 통신시설을 재구성하고 있다. 주요도시에서 IDD를 이용할 수 있다. 알바니아의 국가코드는 355이며, 주요도시의 지역번호는 Tirana 42, Durresi 52, Elbasan 545, Shkodra 224, Gjirokastra 726, Korca 824, Vlora 63, Berati 62, Kavaja 574 이다.


주의사항
알바니아에서는 식사 뒤에 빵으로 접시를 닦으면 불만족의 뜻을 표시하므로 조심하여야 하고, 결혼식 초대를 거절하는 것을 상당한 결례로 여긴다.

영적 움직임의 시간대라고 할 수 있는 축제와 순레의 예를 들면, '라마단'과 '에이드 알 피트르'라는 금식과 기도의 달로서, 이어지는 이틀간의 축제가 있고, '신년축제'인 헤지라를 축하하는 축제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매 5년마다 7월 여름에 행해지는 '지로카스테르 축제'는 전통적인 알바니아의 민속 문화의 축제이며, 연중 내내 '미라호리트 모스크로의 순례'의 경우는 모슬렘 축하절기에 더욱 붐비며 행해진다.
공산정권 시절의 언론은 정부의 감시하에 공산주의 사회건설과 선전에 이용되었고, 개혁화 이후 1990년 12월 28일 언론통제가 폐지되었다. 알바니아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여덟 종류이며 대부분 정당들이 후원하고 있다. 사회당의 『제리 포풀리트 Z i i popullit』(국민의 목소리), 사회 민주당의 RD(민주주의의 르네상스), 공화당의 『레푸블리카 Republika』등이 있다. 한편 『가제타 쉬퀴프타레 Gazeta Shqiptare』는 알바니아어와 이탈리아어로 발행되며, 『드리타 Drita』(빛)는 작가, 예술가, 시인들을 위한 주간 정기 간행물이다. 또한, 텔레비전은 `티라나 방송(TV Tirana)', 라디오는 `라디오 티라나(Radio Tirana)'가 있으나 텔레비전 수신기를 구입할 수 있는 부유층들은 이탈리아 및 유고 방송의 시청이 가능해 국내 방송보다는 외국 방송을 선호하고 있다.

시차 : -8시간



▶ 티라나 (Tirana)

우리나라의 경기도와 강원도의 크기를 합친 면적 정도로 한반도의 1/8에 불과한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Tirana)는 17세기에 터키 장군 바르킨자데프 술레이만 파샤에 의해 건설된 터키 기원의 도시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서의 터키 승리를 기념하여 처음에는 테헤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곳이고,1920년 이래 알바니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알바니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라틴어로 "백색"을 의미하며, "백색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알바니아는 옛부터 수많은 침략과 지배를 받아 왔으나, "독수리의 자손"이라는 용맹스러움을 그대로 살려 자신들의 국기에다 쌍두의 독수리를 그려 넣기에 이른다. 57년 설립된 알바니아 최초의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여러 교육 및 연구기관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을 이루어 이 나라 교육의 핵심지 역할을 하는 티라나는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티라나 도시의 창립과 더불어 그 이후의 발전은 비옥한 옥토와 삼림과 해안, 그리고 아드리아해와 동부 알바니아의 십자로 역할을 해 왔던 지리학적인 형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발칸 반도 내에 유유히 흐르는 슈쿰빈(Shkumbin)강의 모습 또한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도심지는 넓고 시원하게 탁 트인 거리들과 고대의 석조 건물 및 현대적인 감각의 구조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구의 만남이 티라나 전역을 감싸고 있는 듯 하다.중심부 스칸데르베그광장에서 방사상으로 뻗은 6개 도로를 골격으로 시가지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스칸데르베그광장 부근에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세워진 정부청사가 있다. 이 도시의 고유 지역번호는 42이다.
16세기 까지만 해도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고, 20세기 초까지도 인구 1만 5000 정도에 불과한 비교적 새로운 도시였던 티라나는 17세기 이후 터키의 지배하에서 더욱 발전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기후가 온난하고 교통편이 좋아, 1920년 수도로 선정된 뒤 급속히 발전하여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금속제품, 석유, 식품가공 및 담배, 직물, 제화, 농업기계 등의 공장이 많이 산재해 있어, 알바니아 전체 공업생산의 1/5을 생산한다.
그 밖에도 이 도시는 국립 발레단과 극장, 오페라, 도서관과 역사 박물관 등의 문화적인 면에서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도심의 문화 궁전은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의 공간으로 쓰였던 잔재가 남아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알바니아의 최초 민간 사기업인 Dardanian 은행을 비롯한 Lufthansa, Compaq, Trussardi 등의 비지니스 센타들이 속속 새로이 들어 서는 등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다.

교육
현재 티라나에는 총 1700 여명의 교수진과 약 2만 5천 여명의 학생들이 있으며, 티라나 국립 대학교를 비롯하여, 2개의 농업 대학과 3개의 사범 대학, 체육 대학 그리고 예술 대학 등 총 8개의 대학이 있다. 1991년에 슈코더르에 의해서 설립되어진 Luigi Gurakuji University of Shkoder와 Higher Institute of Agriculture와 1991년, 티라나 농업 대학교로 개칭한 티라나 농업 대학교(Tirana Agricultural University)도 이곳에서는 유명하다. 알바니아의 대표적인 지적 상아탑 역할을 한 티라나 국립대학교(Tirana State University)는 1957년에 설립 되었으며, 처음 개교 당시의 학교 명칭은 Enver Hozha University of Tirana였지만, 1991년 부터 티라나 국립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대학에는 1천 여명의 교수와 1만 3천 여명의 학생이 있으며, 개설학부에는 역사학과 철학학부, 정치학 학부, 지질학과 광물학 학부, 자연과학 학부, 엔지니어링 학부, 의학 학부 등의 총 8개 학부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 밖에,"티라나 국제학교(Tirana International School)"는 1991년 9월에 설립되어진 사적인 비영리 재단의 학교로서, 3세부터 13세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고급 영어 교육을 목표로 세워진 곳이다. 학교시설들은 최신의 흐름에 맞춰 잘 갖추어져 있고, 학생들을 위한 넓은 운동장도 준비되어 있다. 교사진들도 학교 인근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학생들의 생활 지도를 맡아주기도 한다. 이 학교는 정통한 지식의 교수법으로서, 학생들의 교육에 임한다는 교육 철학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최상의 학습 환경 속에 학습 의욕을 고취시키고자 한다. 티라나 국제학교의 수업료로는 1년을 기준으로 할 때, 3-4세의 경우, 교육비로 $5000, 등록비로 $100 , 시의 기금료로 $1600 정도가 들며, 5세의 경우에는 교육비가 $8300, 등록비는 $100, 시의 기금으로 $1600 이, 그리고 6-17세 연령의 아이들일 경우에는 $10800의 교육비가 들고, 마찬가지로 $100의 등록비가 들어 간다. 이 외에도 국제 사회에 걸맞는 어린이 영어 교육을 전담하는 QSI(Quality Schools International)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곳의 시민인 학생들이 다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1년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외국 부모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이곳의 학습과정은 영어 학습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행동, 문화적 인식, 환경적인 이해 등의 커리큘럼이 잘 자여져 있다.

산업
중공업 위주의 정책에 따라 화학, 전기, 기계에 우선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알바니아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산업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금속제품, 섬유, 식품가공 및 제화, 직물, 농업기계와 유리, 담배 등의 소비재 부문의 공업이 들어서 있어, 티라나의 제조업은 알바니아 전체 공업생산의 1/5을 차지하기도 한다.
농업이 주가 되고 있으나, 크롬을 비롯한 석탄, 철광석 등과 같은 다양한 광물자원은 매장량이 풍부하여 단연 앞서가는 산업이 되었다. 이곳을 위시로 하여크롬 같은 경우에는 약 3천 7백만톤이 매장되어 생산량이 세계 3위를 자랑할 정도이고, 니켈 같은 경우는 약 100년간 채광이 가능할 정도이다. 95년 부터 기계류 장비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고, 광물에 대한 세금을 축소 시키는 등의 광업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법안이 새로이 마련되어져, 더욱 광업의 발전은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오늘날에는 내륙의 유전 개발을 위해 미국과의 협상을 진행중이기도 하다.
1993년 관광객에 의한 수입으로 총 GDP의 5% 정도를 차지한 알바니아는 관광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내세우고자 앞으로도 관광객 5십만 명 유치에 힘쓰고자 하지만, 실제로 이전까지의 방문객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티라나를 중심으로 한 기존 시설의 정비와 서비스 향상, 그리고 넉넉한 자본금으로 외국 회사와 합작을 통해 관광산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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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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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는 유럽대륙 북서쪽 연안의 섬나라로 북위 51.5-55.5도와 서경 5.5-10.5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영국 서쪽의 아일랜드섬의 대부분을 점하는 공화국으로, 독립정부인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에 속해있는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은 중앙 평원을 주의의 산지가 둘러싼 접시같은 형태로 강과 호수 및 연못이 많고 겨울에도 목초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현재의 아일랜드인의 조상인 켈트족은 기원전부터 이섬에 정주해 5세기중반 성 파파톨리트에의해 크리스트교로 개종, 9~12세기에 노르만인이 침입, 12세기 중반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래 종교의 상이에 따른 압박에 시달려 재삼 반항을 했으나 실패했다.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와 크롬웰에게는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1921년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성립하였고 1937년에 에이레 공화국으로 국가명을 바꾸고 제2차대전에 중립을 지켜 1949년 독립을 달성하였다.
아일랜드 정부기관들은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후 20년동안 1937년의 헌법과 1948년 아일랜드공화국법에 의해 영국과의 지난관계를 청산하면서 정치적 안정의 전통을 확고히 하여 통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아일랜드는 헌법에 따라 의회가 제정한 법과 관습법에 기초한 의회 민주주의 국가이며 유럽연합의 규정도 아일랜드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아일랜드헌법은 정부형태를 명시하고 대통령과 행정부,상하 양원의 권한과 기능을 규정하며 사법부의 구조와 권한,국민의 기본권리등을 명시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의회에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데, 현재 하원은 비례대표제로 선출된 166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선거는 5년에 최소 한번 이상 실시되며 하원을 구성하는 5개의 주요 정당은 피에나파일,피네게일,노동당,진보민주당과 좌파민주당이다. 상원은 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1명은 수상에 의해 지명 선출되고 나머지는 각종 직업 전문의원단 중에서 대졸자들에 의해 선출된다. 상원은 법을 제정하거나 수정할 수 있으며 하원은 상원에 의해 제정 또는 수정제안된 법을 기각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행정권은 행정기관에 의해 실행되며 하원에 대해 책임이 있다.행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다.
아일랜드 경제는 1993년 부터 1997년 사이에 40%의 성장을 기록할만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97년 한해에만 9.5%의 경제성장을 하며 OECD국가들 중 가장 빠른 성장율을 기록하고 있고 1998년과 2000년 사이에는 6-7%의 성장율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개인 소비율을 통해 나타나는 국민생활 수준도 1987년에는 유럽연합 평균의 60%이던 것이 1997년에는 90%에 달하고 있다. 신중한 재정 및 통화관리, 임금정책에 대한 사회적 일체감, 외국인 직접투자유치,유럽연합 구조기금, 숙련된 노동력, 고부가가치의 기술수출과 내수 소비의 강력한 증가 등의 요인들이 이러한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1993년과 1997년사이에 고용율은 매년 3.8%씩 증가 하였으며 높은 성장율에 비해 인플레율은 감소하여 물가 성장율은 연간 2%에 그치고 있다. 국가재정도 건실해져서 1997년의 정부 일반재정의 수입/지출은 국내 총생산의 0.9%에 달하는 잉여분을 기록 하였으며 국내 총생산에 대한 정부 부채율도 1993년에 95.7%이던 것이 1997년에는 66%가 되었다. 주요 경제문제의 하나인 실업율도 1993년의 15.7%에서 1997년에는 10.2%로 감소하여 유럽연합의 평균 실업율보다 조금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아일랜드 산업분야의 고속 성장은 세금과 보조금 제도 등을 통해 해외투자를 유치한 첨단 기술 분야, 유럽 단일시장 내에서의 아일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숙련된 노동력의 가용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첨단 기술 분야 중에서도 컴퓨터 산업의 성장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이 아일랜드 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학과 공학 분야도 많은 발전을 하고 있으며 46개 산업국가의 경쟁력을 비교한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서 아일랜드가 11위를 차지했다. 3개의 정부기관이 아일랜드 산업 발전을 담당하는데 이들은: 전반적인 정책 협조를 제공하는 훠파스(Forfas), 아일랜드 기업들의 국제 무역을 돕는 기업 진흥청과 외국 투자를 유치하고 사후 관리를 담당하는 산업 개발청이다. 1,100개가 넘는 외국 투자 회사가 아일랜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450개의 미국회사, 175개의 독일회사, 160개의 영국회사가 포함되어 있다.
한편, 관광업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분야로서 해외 관광객 수는 1988년에 230만명에서 1997년 5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97년 해외 관광객의 57%는 영국인이며, 23%는 기타 유럽국, 16%는 북미 지역이며 나머지는 기타 국가이다. 아일랜드 관광청은 정부 투자기관으로서 관광산업의 개발과 홍보에 주력하고 있으며 2000년대에 아일랜드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해 오고 있다.

항공
서울에서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주요도시를 경유하여 더블린에 갈 수 있음. 특히 런던과 더블린은 주간에는 거의 매시간 항공편이 운항되고 있으며 양국간 국내선에 준한 출입국관리가 적용됨.

훼리
한국과 아일랜드간 직항 선편은 없으며 보통 로테르담(화란)에서 환적함. - 한국항구에서 아일랜드 항구까지 약 38일 정도 소요


면적 : 70,282km2

수도 : 더블린

인구 : 1999년 기준 3,600,000명

종교 : 북아일랜드에 신교도가 많은 데 비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에는 구교도가 많다. 종교는 국민의 90%가 카톨릭을 믿는다. 아일랜드국교회가 2.5%이다.

주요민족 : 아일랜드인

주요언어 : 20세기 초 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 이후, 아일랜드어의 사용을 지속적으로 장려하여 성인의 32.5%가 아일랜드어를 알고 있다. 아일랜드어는 초등,중등과정에서 중요한 과목 중 하나이다. 최근 몇 년동안 점차 많은 학교들이 오직 아일랜드어만을 통한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들은 "Gaelscoil"( or all-Irish School)이라 불린다. 국영라디오 방송국(Radio na Gaeltachta)과 국영텔레비젼방송국(Teilifis na Gaeilge)이 아일랜드어 방송을 하고있다.

기후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멕시코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는 온난하며 습윤하다. 연간 평균기온 12℃이며 여름은 평균 17℃이하로 낮고 겨울은 평균 5℃이상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곳도 있다. 전반적으로 맑은 날은 적으며 비나 안개, 흐린 날이 많다. 강수량은 연간평균 1,092mm로 높은 편이며 습도도 일년 내내 높다. 겨울에는 강풍이 고습도가 높아 추운 날이 계속되며 한 여름에는 끈적거리기도 한다.

지리
아일랜드섬의 토지는 비옥하고 평균해발 60∼120m의 넓은 중북부 저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저지대를 해안가의 고지대가 거의 둘러싸고 있다. 해안 총연장은 3,169km 에 이르며 아일랜드 해와 세인트 조지해협은 대륙붕으로 되어 있다. 여러 곳에 높이 180∼300m 의 구릉과 호수, 습지, 낮은 준령들이 있고 높이가 200m 이상인 지역은 전 국토의 15% 미만이다. 서부 및 남부의 해안은 굴곡이 있고 후미진 곳도 많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BC 7000년경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수렵인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정착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BC3000년 경에는 동물을 키우며 토지를 경작하는 농부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신석기 정착지를 이후로, BC 2000년경에는 개척자들과 철기시대인들이 아일랜드로 건너오게 되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약 150개의 소왕국으로 나뉘었는데 이것이 다시 5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공통의 언어와 법체계, 사회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BC 6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 온 켈틱(Celtic)침략자들의 물결이 아일랜드로 밀려왔다. 기독교 문물의 유입은 전통적으로 패트릭성인 (St.Patrick)의 크나큰 업적으로 여겨진다. 6세기와 7세기는 아일랜드 수도원들에 중심을 둔 아일랜드의 예술,학문,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아일랜드의 수도지들은 AD800년 이전에 유럽 여러곳에서 학문과 기독교의 중심을 세웠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9세기와 10세기동안,아일랜드는 북유럽의 바이킹족에게 잦은 침략을 받았다. 바이킹 족은 더블린(Dublin),콜크(Cork)와 워터포드(Walter ford)에 도시생활을 발달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무역상들이었다.바이킹족의 영향력은 1014년 클론탈프(Clontarf)에서 아일랜드의 하이킹(The Highking)에게 패배한 후 쇠퇴되어 갔다. 12세기에는 그 전에 이미 영국과 웨일즈에 정착하고 있었던 노르만족(The Normans)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노르만족은 빠른 속도로 아일랜드 영토의 4/3정도를 장악하였고 아일랜드는 영국왕의 통치하에 놓여지게 된다. 그 후 400년 동안 노르만족은 아일랜드에서 영향력있는 존재였으며 급진적으로 겔릭화되었다.(Gaelicised) 이 시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적 변화는 아일랜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종교적차이에서 야기된 아일랜드에서의 일련의 반란들 이후.게일릭(Gaelic)저항은 서서히 무너져 갔고, 1603년에는 최후의 게일릭 본거지인 북쪽(Ulster)지방이 왕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7세기에는 보인(Boyne)전투와 어흐림(Aughrim)전투로 일단락지어진 왕권에 대한 저항을 엿볼수 있다.노르만 정착민들의 후손과 게일릭 아일랜드인들은 패배하였고 그들의 많은 지도자와 추종자들은 아일랜드를 떠났다. 이후 영국교도들이 정치력과 주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18세기에 아일랜드에서는 많은 경제적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의회는 천주교인(Catholic)들을 배제하면서도 발전해 갔으며 영국의회에 부속되었다.새로운 세계로의 아일랜드인들의 끊임없는 이민행렬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천주교인들보다는 북쪽지역의 장로교인들 (Ulster Presbyterians)이 주류를 이루었다.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아일랜드인의 연합단체(The Society of the united Irishman)가 설립되었다. 그들은 1798년에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치성립을 목적으로 아일랜드에서 민중봉기(반란)를 도모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영국과의 완전 의회 통합안이 1800년에 통과되었다. 1840년대 말에는 감자수확의 대대적인 실패로 인하여 아일랜드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백만명이 죽었으며 또 다른 백만명이 나라를 떠났다. 10년만에 아일랜드의 인구가 8백만에서 6백만까지 1/4가량 줄어들게 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16년 부활절에 있었던 아일랜드 공화국의 선포가 유산됨에 따라 5년간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정치적 대립에 의한 반란과 독립을 위한 헌법논쟁이 점차 일어나 1921년 헌법논쟁이 정점을 이르러 영국·아일랜드조약이 체결됐다. 남아일랜드는 연방부내의 자치령이 되었고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됐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계의 북아일랜드는 연합왕국내에 머무르게 됐다.
1926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하는 데바레라(De Valera)는 공화당을 결성하여 1932년 총선에서 집권한 후 1937년 국민투표를 통해 북아일랜드 를 영역으로 하는 자유독립 민주국을 선언하는 신헌법을 제정하고 국명을 에이레(Eire)로 변경했다.공화당은 1948년까지 정권을 담당했지만 같은 해 선거에서 코스테로가 이끄는 통일당, 노동당 등의 정당으로 이루어진 연립정권에 양도됐다. 그리하여 1949년 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영국연방으로부터 탈퇴했다. 계속되는 북아일랜드 분쟁에 대해 1985년 자문역할이 부여됐다. 1990년 11월 러리 대통령의 임기만료후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당의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이 당선되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1992년 11월 총선거에서 여당 공화당은 9의석이감소하였지만 제 1당을 지켰다. 공화당은 제 3당인 노동당과 정 합의를 하고 1993년 1월 12일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1994년 북아일랜드 문제로 영국과 회담을 가졌으며 북아일랜드 평화공동선언을 했다.


유용한전화번호
경찰, 병원, 소방서 모두 999번을 돌린 후, "Police" "Hospital" 또는 "Fire Station" 서비스를 요청한다.


전압 및 주파수
전기는 220V, 50 Hz (한국은 60 Hz임)만 있어서 110 V 제품을 쓰려면 변압기가 필요하다.

치안
치안은 대체로 양호한 편으로 대도시에서는 마약문제도 있지만 지방은 유럽 연합에서 가장 범죄율이 낮은 곳이기도 하다. 계속된 불황으로실업자가 증가하고 도난사건도 늘어서 호텔 로비 및 레스토랑, 노상 등지에서의 주의가 필요하다. 긴급상황 시에는 999번을 이용하면 된다. Dublin 시내 Connolly Station 주변 Sheriff Street, Sean McDermot Street Dublin 시내 Christ Church 주변(야간) Dublin 시내 Grafton Street는 우범지역은 아니나, 여행객으로 항상 붐비는 곳이므로 가끔 소매치기가 일어난다.

통화
기준통화단위는 아일랜드 파운드(1 또는 Punt)이며 보조통화단위는 Pence로 1 아일랜드 파운드는 100 Pence이며 약 2,119.00원에 해당한다.(1.52 USD)1 아일랜드 파운드 짜리 동전을 제외하고는 영국화폐도 통용된다.(98년 10월기준)

한국으로 전화
한국호출 국제전화 access : 0082-지역번호-전화번호


주의사항
<국내 비자발급처>
기 관 명 : 주한 아일랜드 대사관
주 소 : 서울 중구 남창동 51-1 대한화재해상보험 빌딩
전화번호 : 774-6455
근무시간 : 09:00-12:30, 13:30-17:00(토,일요일 휴무)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유효한 여권만 있으면 비자 없이 입국가능, 단 3개월 이상 체류시 비자필요

<비자신청시 구비서류>
부임, 유학 등의 장기 체재자의 경우는 입국 후근처 외국인등록 사무소에서 외국인등록을 해야만 한다. 여권과 사진 4매,노동허가증이 필요하며 학생일 경우는 입학·재학증명서, 체재중의 비용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6개월에서 1년간의 체재허가로서 연장가능하다. 체재허가기간 중 해외여행 등으로 1개월 이상 집을 비울 때는 그 때마다 신고를 해야한다. 불법체재의 경우 국외추방이나 강제추방 당하는 일이 있으며 아르바이트도 불가능하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당초 아일랜드 입국시에는 영국을 제외한 지역으로부터 입국할 경우 별도의 입국절차를 거쳐야 하나, 영국을 경유하여 입국할 경우 별도의 입국절차가 필요없었으나, 최근 동구 등에서 불법이민자 급증으로 영국으로부터 입국시에도 입국심사를 필요로 하며, 입국 절차가 까다로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관관련 사항(면세범위 등)>
담배류,주류는 17세 이상의 여객을 대상으로 한다. 궐련 200개피, 가는 여송연 100개피(1개피 3g 이내) 또는 여송연 50개피, 살 담배 250g. 위스키, 브랜디, 진, 럼, 보드카와 같은 알콜도가 22도 이상의 주류는 1리터 혹은 와인 등을 기본으로 한 22도 이하의 주류나 발포성 와인 등의 알콜도가 강한 와인 2리터,그외의 와인 2리터. 향수 50g,오데토왈렛 1/4리터. 그 외 소지하거나 휴대한 물품 1인당 32파운드까지. (15세 미만의 여객은 IEP 16 까지)

<환전관련 사항>
통관에 관해서는 술과 담배 등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는 정도로 EC제국 이외 외국인은 술은 1병, 와인은 2병, 담배는 10갑까지 허용한다. 그 밖의 다량의 고가제품들을 제외하면 엄격히 과세가 부과되는 일은 없다. 외화에 의한 해외송금 및 환전은 자유로우며 국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금액은 1,200 아일랜드 파운드이 . 환전은 1%의 수수료를 지불하며 최고 환율은 은행환율로 더블린 공항에 있는 아일랜드 은행 및 중앙우체국의 환전소를 이용하면 된다.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멕시코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는 온난하며 습윤하다. 연간 평균기온 12℃이며 여름은 평균 17℃이하로 낮고 겨울은 평균 5℃이상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곳도 있다. 전반적으로 맑은 날은 적으며 비나 안개, 흐린 날이 많다. 강수량은 연간평균 1,092mm로 높은 편이며 습도도 일년 내내 높다. 겨울에는 강풍이 고습도가 높아 추운 날이 계속되며 한 여름에는 끈적거리기도 한다.


시차 : -9시간



▶ 골웨이

골웨이는 서부 케이루타크호 지방의 끝자락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지방 특유의 아일랜드어와 옛 풍습의 습관을 보전하는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골웨이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흥미롭고 활기찬 도시 중의 하나로, 도시 자체도 흥미롭고 주위의 오래된 해안 휴양지에 몇몇 볼만한 곳들도 있습니다. 또, 환상적인 아란군도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하지요.
코리브 강 양쪽으로 마을이 밀집되어 모여 있으며, 대부분의 쇼핑가는 코리브 강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골웨이에서는 다양한 문화 축제들이 연중 열리고 있지요. 2월에 개최되는 재즈 페스티발을 비롯하여, 부활절 문학축제, 7월의 골웨이 예술 축제등이 유명합니다.
아일랜드 서부 해안가에선 가장 활기넘치고, 인기있는 도시로, 거리 곳곳에서 아일랜드의 명물인 pub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의 건축물과 여러 사람의 복장에서 지금의 스페인과 교역시대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행자들에겐 경마, 골프관광, 해안 피서지등이 흥미있는 사항이 되지요.
골웨이는 서부 케이루타크토지방의 끝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지방 특유의 아일랜드어와 옛 풍습의 습관을 보전하는 경향이 분명하고 그 밖에 쇼타제에서는 특이한 전통음악 노래, 춤, 연극 등을 볼 수 있다.
Galway 와 주변에 있는 곳을 모두 나열한 Galway Edge는 관광안내소에서 무료로 제공됩니다. 펍이 많아 놀기도 좋은 곳입니다. 17Cross Stdpsms는 편안하면서도 100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Sean O'Nachtain's가 있는데 때때로 동성연애자들이 모이곤 하는 곳입니다. 강 서쪽으로도 음악이 있는 곳이 많은데, 전통음악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Dominick st Upper 와 Fairhill st 코너의 Monroe's Tavern가 붐비는 곳입니다.

교육
골웨이 대학 (UCG)은 원래 아일랜드 Qu9een's College의 하나로 1845년 설립되어, 1849년 공식적으로 문을 연 대학입니다. 강의실과 오래된 도서관 건물이 있는 "Quadrangle"건물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본따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새로 건립된 부분은 Scott, Tallon, Walker 세명의 건축가가 디자인하여 증축되었습니다. 대학 캠퍼스는 일반에게 항상 공개되며,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습니다. Aras Failte라는 인포메이션 센터가 97년에 새롭게 문을 열어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Aras Failte는 Quadrangle 빌딩에 매우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산업
아일랜드는 아래의 중점분야들의 제조업 및 무역업에 대한 투자를 환영한다. 이에 발맞추어 골웨이도 국가 경제 시스템을 쫒고 있는 실정이다. 아일랜드 산업분야의 고속성장은 세금과 보조금제도 등을 통해 외국인투자를 유치한 첨단기술분야, 유럽 단일시장내에서의 아일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숙련된 노동력의 가용 등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ㅇ첨단기술분야중에서도 컴퓨터산업의 성장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이 아일랜드에서 활동하고 있음. 의학 및 공학분야에서도 많은 발전을 하고 있음
-주요 산업 - 전자산업: 반도체, PC 시스템 및 주변장치, 통신 기술산업: 자동차부품, 항공, 산업 전자산업 보건사업: 의료장비, 병원제품, 의료약품, 화학제품 소비산업: 스포츠, 레저, 개인용품, 패션산업 금융산업: 은행업, 상호기금, 재무법인, 보험 국제서비스산업:전화사업,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는 목초가 잘 자라 '녹색의 나라'라고도 불리우는 만큼 낙농업도 발달했고, 사면이 바다인 섬나라기 때문에 수산업도 발달해 있습니다.




▶ 더블린 [Dublin]

아일랜드어로 Dubh Linn은 '검은 물웅덩이'라는 뜻입니다. Baile Atha Cliath('여울로 막힌 부락'이라는 뜻)라고도 씁니다. 예전에는 특권도시였으며, 현재는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더블린 주의 군도지요. 아일랜드 중동부 아일랜드 해와 접한 더블린 만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일랜드의 주요항구이자 금융·상업·문화 중심지입니다.
더블린은 영국 서쪽에 위치한 섬나라로, 동부는 영국과의 사이에 아일랜드 해(海) 및세인트 조지 해협이 있고 북부는 영국의 북아일랜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부 및 서부는 대서양에 인접해 있습니다.
더블린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에 있으며 더블린 만을 향해 동쪽으로 흘러가는 리피 강이 이곳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중심지는 중앙의 더블린 성으로부터 반경 6.5㎞ 남짓한 거리 내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형상을 하고 있으나, 교외지역은 부근에 있는 산들과 시 중심부로부터 26㎞ 가량 떨어진 바다에 이르기까지 뻗어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수도이자 남북을 망라해 이 섬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인 더블린은 빈부가 혼재하는 도시로, 한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우아하고 부유해 보이는 조지왕 시대의 광장 Georgian Square 옆으로는 아름다움이란 사라진지 오래인 듯한 궁색함이 맞닿아 있고 더블린의 길고 번잡했던 역사에는 아직 현대적인 발전의 시기는 도래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은 흥미롭고 다양한 풍모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교육
대표적인 교육기관과 문화단체로는 더블린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1591), 로열더블린 협회(1731) 등이 있다. 린스터 저택이 있는 대지 위에 세워진 2채의 빅토리아식 건물들은 국립도서관과 국립박물관인데, 저명한 작가들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숀 오케이시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더블린대학교University of Dublin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로서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라고도 한다. 1591년 영국·아일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설립해 더블린 시에 기증했다. 설립 당시 트리니티 칼리지는 더블린대학교를 구성하는 첫번째 단과대학으로 세워졌으나, 이후 다른단과대학이 설립되지 않아서 트리니티 칼리지와 더블린대학교라는 두 이름으로 서로 통용되었다. 오랫동안 성공회교도들만 입학할 수 있었으나, 1873년 종교상의 자격요건이 모두 폐지되었다.

산업
기후가 온화하여 농업이 성하다. 한때 모직·면직·견직·포플린 등과 같은 섬유산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맥주와 흑맥주 생산업체인 '기네스브루어리회사'는 아일랜드에서 제일 큰 기업체이자 수출업체다. 그밖의 산업으로는 식품가공·유리·담배·조선 등이 있다. 행정과 무역이 이곳의 주요활동이며 각종 농산물과 알콜성 음료는 중요한 수출품목이다.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멕시코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는 온난하며 습윤합니다. 연간 평균기온 12℃이며 여름은 평균 17℃이하로 낮고 겨울은 평균 5℃이상이지만 눈이 내리는 곳도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맑은 날은 적으며 비나 안개, 흐린 날이 많습니다. 강수량은 연간평균 1,092mm로 높은 편이며 습도도 일년 내내 높습니다. 겨울에는 강풍이 고습도가 높아 추운 날이 계속되며 한 여름에는 끈적거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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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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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랜드는 지질학적으로 아직 계발이 되지 않은 곳이 많은데, 빙하는 중앙 사막의 화산암에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며, 용솟음치는 광천과 간헐천은 아이슬란드 인구의 3/4에게 열을 공급하고 있다. 이 지역은 몹시 사나운 눈보서부 피요르드에 휘몰아치고 있다. 아이슬랜드는 바이킹의 축소판이자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로서, 관광객으로부터 많은 수입을 얻고 있는데, 15달러 정도하는 호스텔, 12달러 정도의 앙트레, 9달러의 세탁, 그리고 3달러의 아이스크림 등이 아이슬란드의 여행 물가를 짐작케한다. 수도는 인구 10만 명 정도의 레이카비크(Reykjavik)이고, 주요도시로는 코파보규르(Kopavogur), 아큐레이리(Akureyri), 호르나피요듀르(Hornafjordur) 등을 들 수 있다. 아이슬랜드는 관광산업의 발전에 역점을 두어 왔으며, 이곳의 관광업은 특유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1960년대의 성장속도 만큼은 못하지만 1980년대에도 꾸준히 성장해 왔고, 1990년대 사이에 관광객들의 숫자는 거의 두배에 달하게 되었다. 호텔산업 역시 관광업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해 왔지만, 짧은 관광 시즌 때문에 성장이 억압되어 왔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관광객들에게 대대적인 홍보를 하여 5월이나 9월에 아이슬란드에 방문할 것을 홍보하고 있다고 한다.
아이슬랜드는 국민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가진 민주 공화국이지만 대통령의 역할은 거의 형식적이다. 1980년 선출된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Vigdis Finnbogadottir) 대통령은 여성이며 1992년 6월에 재선되어 세계 최초로 장장 16년 동안 집권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단원제의 의회를 채택하고 있는데 양원제는 1991년에 폐지되었다. 의원은 4년마다 선출되며 의석 수는 1987년 60석에서 63석으로 늘어났다. 정당은 보수 독립당, 노동 진보당, 사회 민주당, 사회주의자 연합, 사회 민주 연합, 여성당, 시민당 등이 활동하고 있는데 독립당이 1995년 선거에서 37%의 지지도를 얻어 집권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경제면에서 볼 때에, 아이슬랜드에서는 어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연간 평균 160만 톤에 이르는 어획물 가운데 97% 정도가 냉동, 염장, 어육 가공품, 통조림의 형태로 수출되고 있다.
바다로 사면이 차단된 북극권의 화산섬 아이슬랜드의 거칠고 험한 지형 덕분에 아이슬랜드의 국토에는 인간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곳이 널려 있다. 북극권의 냉랭함과 용암대지의 삭막함, 그러나 때묻지 않은 아이슬랜드의 자연풍광을 느낄 수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모두 22개의 화산이 온통 섬을 뒤덮고 있는 용암대지를 뚫고 불을 뿜어대고 있다. 그리고, ‘얼음의 땅’에 불꽃이 작열, 빙탄이 공존한다. 이들 화산은 유사 이래 지금까지 100여 차례나 분화(噴火)를 거듭해 왔으며 그로 인한 지진도 잦다. 자연히 온천이 많이 생겨 전국에 700여개나 된다.
수도인 레이캬비크는 그리 높지 않은 커다란 구릉이며, 언덕 위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이라는 나비게이션(Navigation) 교회가 우뚝 솟아 있다. 교회 뒤편에는 깨끗한 주택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 한가운데 회색 벽과 까만 지붕, 그리고 4개의 첨탑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교회가 눈에 확 들어올 것이다. 또한, 언덕의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이내 항구가 있는 부둣가에 이른다. 항구에는 형형색색의 요트와 어선들이 평화롭게 정박해 있다.
국토의 절반이 4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으며 해안가에 위치한 국토의 21%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인 이 나라의 기후는 맑은 날을 거의 보기 힘들고, 모래를 휘감아 채찍질하듯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더욱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이들 현지인들 사이에서 "지금의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5분만 기다리시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이슬랜드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면적 : 103,000km2

수도 : 레이카비크

인구 : 1995년 기준 267000명

종교 : 루터교 복음파가 전 국민의 93%를 차지하고 있으며 타 종교를 믿는 사람, 또는 무신론자는 7%에 불과하다.

주요민족 : 대부분의 국민들은 초기의 스칸디나비아인과 켈트 정착민의 후손으로서, 이민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며, 거주 외국인의 대부분은 임시 근로자이거나 아이슬랜드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주요언어 : 아이슬랜드어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칸디나비아어와 같은 게르만어에 속하는 데, 이 언어는 고대 노르웨이어에서 나왔으며 언어적 전수에 있어서 약간 보수적인 면을 띠어 새로운 용어를 채택하는 데에 외래어를 거부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슬랜드 젊은이들은 제2외국어로 덴마크어를 구사할 줄 알며, 그 다음으로는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의사 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는 편이다.

기후
이 나라는 지구의 북쪽으로 잔뜩 올라가 있지만, 섬의 남서쪽으로 멕시코 만류가 흘러 의외로 춥지 않은 해양성 기후이다. 북쪽 해안은 그린랜드해류의 영향으로 연평균 기온이 3도 내외로 낮은 편. 저기압의 발생지로, 기상이 극히 불안정해 안개 낀 날이나 흐린 날이 많다. 화산섬이고 기후도 한랭한 까닭에 농사가 거의 안된다. 전체적인 기후는 맑은 날을 거의 보기 힘들고, 모래를 휘감아 채찍질하듯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더욱 춥게 느껴진다.
겨울은 길고 춥지만 극한적인 추위는 없고 여름은 겨울보다는 따뜻하지만 여전히 추운 편이다. 내륙 산악지역을 제외한 7월 평균기온은 11℃ 정도이며, 1월 평균기온은 0℃이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남동지역의 4,100㎜ 이상으로부터 중북부지역의 406㎜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리
아이슬랜드의 국토 면적은 10만 3000km2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동서로 500km, 북서로 300km에 이르는 본토는 오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 고원(52%), 용암 지대(11%), 모래 삼각주(4%) 그리고 만년설(12%)로 이루어져 있다. 국토의 절반이 4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으며 해안가에 위치한 국토의 21%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역사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8세기까지 무인도였던 이 섬은 1262년 노르웨이 주민들이 상륙해 살기 시작했다. 1380년에는 덴마크령으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9세기 초까지 아이슬랜드의 지배권은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아이슬랜드의 첫번째 거주자들은 870~930년 사이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로부터 정치적 망명을 해 온 노르웨이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과거에 영국에서 활약하던 바이킹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정치적인 투쟁으로 축출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군주제에 반대하였고 민주적인 의회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13세기 초에 이르자 아이슬랜드에서 200여 년 동안 계속되던 평화의 시기는 끝나게 되었고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치인들간의 분쟁과 바이킹들의 약탈이 국가 체제를 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때 노르웨이 왕 하콘 하코나르손(Hakon Hakonarsson)은 이를 호기라 생각하고 아이슬랜드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해 1281년에 아이슬랜드를 흡수 통합하였다. 5세기 동안의 억압 통치하에서 수많은 아이슬랜드인이 희생당하였지만 아이슬랜드의 독립 움직임은 꾸준히 증가하였고 정치적인 로비 활동도 벌여 1874년에는 덴마크 왕국으로부터의 간섭 없이도 자국 내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그후 1918년에 아이슬랜드는 독립을 성취하였으나 1944년에 공화국이 될 때까지 덴마크 왕을 아이슬랜드의 지배자로 계속 인정해야만 하였다. 이 나라는 1918년 덴마크 주권 하의 자치왕국이 되었고, 1941년에 독립을 선언, 이어 3년 뒤인 1944년 공화국으로 독립한 나라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덴마크 왕국은 아이슬랜드의 방위와 외교 문제를 더 이상 책임질 수 없게 되었고 1년 후인 1941년 5월에 아이슬랜드 국민들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아이슬랜드 공화국의 설립은 1944년 6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연합국측은 아이슬랜드가 국가 방위 능력이 부족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여 미군의 주둔을 허락하였고, 아이슬랜드 내의 3개 기지를 99년 동안 임대차 계약으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1952년 이후 아이슬랜드는 북구 이사회(Nordic Council)의 회원이 되었으며 또한 UN(국제 연합), IMF(국제 통화 기금), 바르샤바 조약 기구,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EFTA(유럽 자유 무역 연합), 유럽 협의회,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도 가입하여 국제 정치 경제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44년 의회은 국민투표의 승인을 통해 덴마크와의 모든 공식적 관계를 끊고 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1949년 NATO의 일원이 되었다. 1959년부터 1971년까지의 기간은 독립당과 사민당이 통치하여 왔으며, 1971년 6월 총선거 결과 좌익계가 크게 진출하여 진보당 당수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연합당과 자유좌파당간의 연정(聯政)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연정은 어로수역 확대 및 NATO 기지로부터 미국철수를 주장한 바도 있으나 연립정당간 물가정책에 관한 의견대립으로 74년 6월 조기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좌익에 패북(敗北)하였다. 우리나라와는 1962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전압 및 주파수
전압은220v를 사용하며 주파수는50 Hz입니다.

통화
통화단위는 Krona(크로나)이다.

한국으로 전화
모든 우체국과 호스텔에서는 우편물을 취급하고 있으며 전화국은 보통 우 체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화 요금은 5, 10, 50크로나이며 시내 통화 요금은 10크로나이다. 국제 직통전화는 90을 돌린 다음 국가번호를 돌리면 되며 간접 통화의 경우에는 09를 돌리면 됩니다. 응급전화는 03을 돌린 후 교환을 요청해도 되고, 또는 전화번호부 앞표지 안쪽 면에 적혀있는 전화 번호를 보고 걸어도 된다.
국제자동전화 이용시에는 여행국의 국제자동전화 식별번호(아이슬랜드에서는 354)와 우리나라 국가번호(82), 지역번호(첫자리 숫자 "0"은 생략)와 가입자 번호의 순으로 누르면 된다.


주의사항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비자는 3개월 이내의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며 체류기간 동안 여권, 왕복/편도 승차권(return/onward ticket), 그리고 충분한 돈이 필요하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매년 8월 15일경이 되면 마치 누군가가 제동을 걸어놓은 것 처럼 아이슬랜드의 관광은 활력을 잃어버린다. 호텔, 유스호스텔들은 문을 닫고 버스들은 운행을 중단하게 되며, 늦여름에 이곳을 찾는 많은 여행자는 대부분의 명소들이 9월 15일까지 방문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게 되기도 한다. 9월 30일까지는 여행객들 대부분이 국가가 동면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는 데, 레이캬비크를 비롯한 아이슬랜드를 방문하고자 할 때는 이 점을 잘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환전관련 사항>
은행은 월-금요일까지 오전 9시15분에서 오후4시까지 영업하며, 대부분 Austurstraeti와 Laugavegur에 위치해 있다. 은행에서는, 현금을 바꾸는데는 90-100Ikr의 수수료를, 여행자 수표를 바꾸는데는 165Ikr의 수수료를 받는다. 영업시간 이외에는 관광안내소나 구세군(5월-10월)에서 바꾸면 된다. 특히 Landsbanki Islands에서는 수수료없이 좋은 환율로 환전이 가능하다.
환전시 유의할 것은 가급적 동전을 남기지 않는 것인데, 만약 동전이 있다면 그 나라를 떠나기 전에 다음 방문할 나라의 돈으로 바꾸거나 달러로 바꾸는 것이 좋다. 금액이 너무 작다면 공항에서 과자나 사탕을 사버리는 것도 요령이 된다. 기념으로 동전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불법이다.

<상품구입시 유의사항>
아이슬랜드에서는 양모피, 말모피, 바다표범모피, 도자기, 은제품, 스웨터, 스카프 등을 싸게 살 수있습니다. 흥정을 해 보고 가격이 괜찮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바다표범 모피를 구매할 수 있다.

<복장 및 의복 관련사항>
아이슬랜드는, 우리나라에서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의 평균 기온이 11도 밖에 안 된다. 같은 위도의 다른 나라들보다는 따뜻한 편이지만 여름이라도 따뜻한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1월의 평균 기온은 0도이며, 우리나라에서 입는 것과 같은 두툼한 겨울 옷을 준비해야 한다.
국토의 절반이 4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으며, 해안가에 위치한 국토의 21%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기후는 맑은 날을 거의 보기 힘들고, 모래를 휘감아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더욱 춥게 느껴지며, 날씨가 변덕스러우므로 햇빛 좋은 날에 외출하더라도 따뜻한 옷을 준비해야 한다.


시차 : -9시간



▶ 수도 :  레이캬비크 (Reykjavik)

레이캬비크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수증기의 만" 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이 곳은 지구상에서 활화산이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화산과 온천, 그리고 기포가 브글거리는 호수는 초기시대의 바이킹에서부터 현대의 관광객까지 숨막히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장관입니다. 만년설이 덮인 이 섬의 쇠고봉은 아이슬랜드가 아직도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아이슬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로서 인구가 겨우 10만 정도에불과하지만 그 크기에 비해서 아주 번화한 도시이며 이 곳은 아이슬랜드 남서쪽 팍사 만의 남동쪽 모퉁이에 튀어나와 있는 셀탸드나르 반도 북해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북위 64도에 위치한 세계 최고 위도상의 수도입니다. 레이캐비크는 874년에 고대 스칸디나비아인인 잉골푸르 아르나손 등의 정착으로 취락이 시작되었으며, 20세기까지 이 도시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데인족이 다스리는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1786년 지방자치체의 권한을 부여 받았고, 1801년에는 덴마크령 행정중심지로 지정되었습니다. 1843년에는 아이슬란드 국회가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이 곳은 고위도에 위치하며서도 1월 평균 기온은 -0.3도 밖에 안되고, 7월은 11.1도로 난방이 필요하며, 연강수량은 805mm인데, 적설은 평균 60mm에 불과합니다. 또 온천도시로서도 유명한데, 87도의 온천을 이용한 급탕 시설이 거의 전시에 걸쳐 있습니다.
레이카비크에는 자연의 명소가 많이 있습니다. 더 페밀리 파크 앤 더 팜야드 에니멀 주, 더 버터니컬 가든,골든. 서클 관광 등이 모두 자연과 관련된 명소입니다. National Museum of Iceland(국립박물관), The Family Park and The Farmyard Animal Zoo(더 페밀리 파크 앤 더 팜야드 에니멀 주), The Botanica l Garden(더 버터니컬 가든), Listasafn Islands(산호세>국립 미술관), GOLDEN CIRCL E TOUR(골든. 서클 관광)이 있습니다. 항공은 서남서쪽으로 32Km 떨어진 케플라비크에는 국제공항이 있습니다. 항공기를 이용할 경우에는 매일 뉴욕과 오를랜도를 출발하여 레이카비크를 경유해서 룩셈부르크로 가는 아이슬랜드 항공을 이용하는 방법과 레이카비크와 암스테르담 등의 유럽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이글 항공을 이용하면 됩니다. 시내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면 편하지만 자동차가 없을 경우에는 자전거를 빌려서 탈 수 있습니다. 시외교통은 항공과 배를 이용하면 편합니다. 음식점에는 A. Hansen(레스토랑), Fjaran(레스토랑), Fj&ouml;rugarðurinn(레스토랑), Gafl-Inn(레스토랑)등이 있습니다. 쇼핑은 크린글란 쇼핑몰(Kringlan shopping mall), 플리마켓 콜라포티드(Fleamarket Kolaportid)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는 큰 호텔이 많이 있습니다. 숙박에 따르는 서비스가 대부분 많이있습니다.
또한 이 곳은 이 섬의 상공업 및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어항이며 아이슬랜드 산업의 거의 절반이 이곳에 모여 살고 잇습니다. 서남서쪽으로 32km떨어진 케플라비크에는 국제공항이 있습니다. 수산가공과 냉동, 간유제조,식료품, 선박, 섬유제품들을 생산하고 풍부한 수력발전을 이용한 비료 공장과 알루미륨 정련공장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매우 현대적이고 깨끗한 이 도시는 건물의 대부분이 콘크리트로 지어졌고, 가까운 온천에서 관을 통해 끌어오는 물로 난방을 합니다.
이 곳의 중요한 건물로는 국회의사당, 루터교 대성당(1975), 아이슬랜드 국립도서관(1818), 아이슬랜드대학(1911), 국립박물관, 국립극장, 주립병원, 해양학교 등이 있습니다. 또한 양원제 의회, 복음루터파 교회, 신문사 등이 있어 서유럽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슬랜드 대통령 관저인 베사스타디르가 이 곳 교외에 있습니다.
여행상식으로는 시차는 우리보다는 10시간이 느립니다. 통화단위는 Krona(크로나)입니다. 1 US Dollar는 70.19 Iceland Krona이고, 1 KR Won 는 0.06 Iceland Krona 이며, 1 Iceland Krona는 17.97 KR Won(1998년 11월22일 현재)입니다 전압/주파수는 220V/50 Hz입니다. 우편업무는 모든 우체국과 호스텔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통 전화국과 우체국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01월 01일 New Year's Day이고, 04월 09일 Holy Thursday 입니다. 04월 10일 Good Friday이고, 04월 13일 Easter Monday입니다. 04월 23일 First Day of Summer이고, 05월 01일 Labor Day and May Day입니다. 05월 21일 Ascension Day이고, 06월 01일 Whit Monday 입니다. 06월 17일 National Day이고, 08월 03일 Bank holiday입니다 12월 25일 Christmas이고, 12월 26일 Boxing Day입니다. 1998년의 경우이며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
아이슬랜드 대학은 Su urgata 101 Reykjavik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1년에 설립된 주립 대학교입니다. 처음 개교 했을 당시 45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6,000명의 학생이 9개 관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곳의 전화번호: 354 525 4000 팩스: 354 552 1331, 인터넷 주소는 http://www.hi.is/HIHome.html 입니다.


산업
이곳은 섬나라이라서 어업이 발달했다. 70% 이상의 물고기를 수출함으로써 이와 같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아이슬랜드 주위에는 북극으로 부터의 시내와 차가운 자양분을 포함한 흐름들이 만나는 따뜻한 만이 매우 양호한 상태여서 여러 가지 종류의 해양 동물이 살고 있어 풍부한 어장들이 있다. 물고기는 아이슬랜드의 주된 천연자원 중의 하나이여서 낚시 영토는 엄한 보호를 받는다. 또한 물고기를 함부로 잡는 것은 심하게 제안받고 있다. 이 곳에서 주로 잡이는 물고기는 대구, Haddock, Saithe, Redfish, 청어와 열빙어 등이 있다.
이 곳의 농업은 을은 농업의 땅은 대부분이 가축을 위해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는 건초와 Silage를 만들기 위해 성장한 플을 위해 사용된다. 양과 젓소는 이 곳에서 주로 키우는 가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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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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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는 중부 유럽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아드리아해를 접하고 이태리, 오스트리아,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와 접경하고 있다. 종종 슬로베니아를 '구유고연방의 스위스'라고 일컬어지고 있을 정도도 자연 경관이 스위스와 유사한 점이 많다. 총 20,273 km2의 면적을 가진 작은 나라이며, 아드리아해에서 북쪽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승용차로 3시간반, 헝가리국경선인 북동쪽에서 이태리 국경선인 남서쪽까지 5시간정도 걸릴뿐이다. 이렇게 작은 국가이지만 고속도로로 관광할 경우 수려한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 국민들은 자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같은 슬라브 어족에 속하는 세르비아어와도 다르고 문법도 까다로워 배우기가 힘든 언어로 알려져 있다. 수도인 류질리아나가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긴 하지만 볼만한 관광지는 전국에 산재해 있다. 볼 만한 관광지는 류빌리아나를 기점으로 볼 때, 트리글라브 국립공원과공원지역에 속해있는 휴양 관광지 블레드 호수, 동계 스포츠 지역으로 유명한 보히니, 세게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포스토이나 종유동과 유네스코 자연보호 지정지인 스코치안굴, 세게적인 명마 생산지인 리피차, 온천 휴양지 로가스카 슬라티나, 46km의 아드리아 해안도시 포르토로쉐, 피란 등지가 있다.이들 관광지 중 여름철 관광지로는 트리글라브국립공원이 잘 알려조 있다. 이 공원은 특히 소차게곡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보히니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히니는 겨울 경치가 아릅답고, 스키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슬로베니아를 관광할 게획이면 위에 말한 유명한 곳들을 가보면 좋을 듯 싶다.
슬로베니아는 비즈니스 잠재력이 많은 국가이며 매력적인 관광 국가이다. 독립후 체제전환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는 중부유럽국가중에서도 경제 및 산업 구조조정에서 가장 성공을 거두었다. 슬로베니아와 비즈니스를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잘 발달된 비즈니스 여건을 갖추고 경쟁력있는 지식 노동자를 보유하고 있고 유럽시장으로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EU정회원 가입을 준비하고 있는 중동구국가중에서도 슬로베니아는 작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입이 가장 유력시되며, 종종 헝가리 다음, 체코스로바키아보다는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역사적으로 인근의 독일문화, 로마문화, 슬라브문화의 교차지로서 그 문화에 있어 인접 3개 문화와의 연계된 요소가 많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슬로베니아인들의 문자해득과 문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켜 주었고, 1518년 Jurij Dalmatin은 성경을 슬로베니아어로 최초로 번역하고 Adam Bohiric는 슬로베니아어 문법서를 저술하여 문화적 기초를 세웠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희곡 및 시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융성하였으며, 시인으로는 Valentin Vodnik, 희곡작가로는 Anton T. Linhart가 유명하며, 이들은 작품을 통해 불란서 혁명과 계몽주의의 자유정신을 표현해 나갔다. 또한 변호사, 사상가 겸 시인인 France Presere은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결정적, 민족적인 시를 통해 슬로베니아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그의 시 "Zdravljica"(축배)는 슬로베니아 국가의 가사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슬로베니아에서도 소설이 번창하였으며, 당시 소설가중에서 Josip Juric이 유명하며, 그는 문화평론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20세기초 문화작품은 유럽의 상장주의와 퇴폐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인으로는 Murn Alekoandrov, Dragottin Kette가 저명하고, 희곡 작가 Ivan Cankar는 산업화 및 자본주의 성장에 따른 전통적 가치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범유고슬라비아 사상을 전파하여 나갔다. 이외에도, 음악적인 분야에서도 슬로베니아 민족은 8세기 이후의 기독교화 과정을 통해 합창을 중요시 하게 되고, 중세에는 종교음악이 주류를 이루었고, 18세기에 들어와 근대음악의 여건이 형성되었으며, 고전주의와 이태리 오폐라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시대에는 Benjamin Ipavec, Risto Savin 등이 활동하였으며, 낭만주의 시대 이후 현대 음악가로는 Marij Kogoj, Slavko Osterc 등이 유명하다. 미술에서도 슬로베니아의 조각 및 회화는 교회건축물의 장식 미술로서 발전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Azbe, Jakopic, Sternen, Jama, Grohar 등이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슬로베니아의 자연환경은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 헝가리와 짧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끼여 있다. 동유럽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이 나라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이며 율리안(Julian) 알프스 산맥에서 트리글라브(Triglav) 산은 최고점(2864m)을 차지하고 있다. 1991년 12월 23일 채택된 슬로베니아의 신헌법은 헌법질서로서, 민주공화국, 법치사회국가, 삼권분립, 국민주권 등을 표방하고 있으며,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절충형을 쓰고 있다. 적극적인 평화공존 노선을 견지하며, 주로 독일, 오스트리 아의 외교노선에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교관계로는 독립 이후 1992년 5월 22일에 UN에 가입하는 등 '96년말 현재 미국, EU등 세계 100여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슬로베니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의 절충형이며, 의회 형태는 양원제를 도입하고 있다.

항공
슬로베니아에는 Ljubljana-Brnik, Maribor, Portoroz 세 곳에 국제 공항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 직접 가는 직항편은 없다. 따라서, 유럽의 대도시를 거쳐 이곳으로 와야 하며, 이 나라의 Adrian Airwqys이라는 국적 항공기가 슬로베니아 수도인 류블랴나와 유럽 대도시를 연결해 주고 있다.
또한, 슬로베니아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는 이탈리아의 Triesre, 오스트리아의 klagenfurt, Graz 공항들을 들 수 있고, 류빌리아나로 도착할 수 있는 정기 국제선은 뮌헨, 프랑크푸르트, 취리히에서 매일 운항하며, 마케도니아의 스콥예에서 매주 5회 운항하는정기선이 있다. 그리고, 런던에서 매주 4회, 티라나, 이스탄불, 빈에서 매주 3회 파리와 모스코바에서 매주 2회, 텔라비에서 주 1회로 정기 운항하고 있는 국제선을 이용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를 방문할 경우에는 육로, 항공, 선편 어느것이나 가능하다.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방문할 경우에는 항공으로 바로 입국할 수 있다. 외국인들은 항공편으로 비엔나까지 와서 여기서 기차편으로 입국하기도 한다. 한국으로부터는 대부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입국하는 경우가 가장 많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훼리
아드리아 해안에 접한 코베르, 피란, 이졸라로 요트나 보트 여행자를 위한 출입국 사무소가 있다. 특히 1955년부터 4월 14일~10월15일까지 운항하는 프링스호가 정기 운항하고 있는데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운항은 매주 금, 토, 일요일에 포르토로줴에서 8시에 출발 베니스에 10시30분에 두착, 같은 날 베니스에서 5시30분에 출발 포르토르줴 10시에 도착하고 요금은 성인이 한화로 약 30만 5천원정도 이라고 한다.


면적 : 20273km2

수도 : 류블랴나(Ljubljana)

인구 : 1999년 기준 1,980,000명

종교 : 카톨릭 교도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큰 도시로는 수도인 류블랴나(33만 명) 외에 마리보르(Maribor:10만 8000명), 첼예(4만 2000명), 크라니(Kranj:3만 7000명) 등이 있다.
슬로베니아는 강한 카톨릭 전통을 갖고 있는 데, 성서공회는 슬로베니아에 있는 50만 명의 학생과 모든 가정에 성경을 배포하려는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성경은 학교 도서관과 164개의 일반 서점을 통해 배포되고 있다. 또한, 슬로베니아는 종교 개혁 이래로 개신교에 의한 전도가 꾸준히 이루어졌지만 복음주의 교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주요민족 : 슬로베니아는 200만 명 정도에 가까운 인구 가운데 약 85%가 슬로베니아인으로 단일 민족의 비율이 구유고 연방 공화국 가운데서 가장 높다. 슬로베니아인 87.8%, 크로아티아인 28%, 세르비아인 2.4%, 기타3.2%의 종족 구성을 보이며,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 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혈통을 지닌 종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슬라브계가 97%이며, 슬로베니아, 소수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체코 및 기타 민족이 3%, 그외에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민족으로 구성되어 진다.

주요언어 : 슬로베니아어는 크로아티아어와는 다른 슬라브어이다. 로마 문자로 쓰여지며 대부분의 슬로베니아인들은 제2외국어로 영어와 독일어를 주로 쓰는데 해안 명승지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해도 무난하다고 한다.
구유고연방 때에는 베오그라드가 연방이 수도였으므로, 세르보크로아티아어(편의상 구 유고 연방 때의 지칭)의 세력이 가장 우세했다. 따라서, 슬로베니아에서는 모두가 세르비아어를 병용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그들의 언어가 별도로 있긴 하지만 세르보크로아티아어가 통용된다.
문자는 로마자를 사용한다. 문법이 까다롭고 주어의 수에 따라서 동사의 어미도 같이 변한다. 만나는 누구와도 국민학생과도 영어는 통할정도로 외국어 습득을 중요시하는 나라이다.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는 대부분 구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은 4개국어 정도는 구사하고 10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많다. 제 1항구 도시인 코베르는 이탈리아어를 공용하고 있고 방송도 이탈리아어 전용 채널이 있다.

기후
알프스 기후지역이며 대륙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지역에 속한다.슬로베니아 날씨는 지리적인 영향으로 변화가 좀 심한 편이다. 북부 및 북동부 지역에는 산악지역으로 남쪽 해안지역 및 평야보다 대체적으로 차갑다. 5대 도시 평균기온은 1월이 2.9도, 7월이 22도이다. 여름에는 일조량이 많으며 따라서 관광 당국 및 정부기관이 슬로베니아를 홍보할 때 '알프스의 양지바른 곳'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개, 겨울에는 눈도 오고 비도 오나 최근에는 그리 많은 양이 내리지 않고 있다. 남쪽 해안지역에는 '부리야'라고 불리는 강한 계절풍이 분다. 심지여 여름에도 알프스 산악지역에는 폭풍우가 불기 때문에 산행객들은 일반적으로 주의가 요망된다.

지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고산 지역 국가로서, 중부 유럽의 남부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서쪽으로 이탈리아와 202km, 북쪽으로 오스트리아와 324km 헝가리와 88km 크로아티아와 546km에 들러쌓여 있고, 46.6km가 아드리아 해안에 접해있다. 영토의 크기로는 스위스의 반에 해당한다. 자동차로 2시간이면 베니스에, 비행기로는 2시간이면 런던에 도착할 수 있다. 이 나라는 국토의 50%이상이 산지이다. 영토의 평균 해발고도는 600m 이고 , 가장 높은 산은 율리안 알프스의 최고봉인 트리그라브인데 198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슬로베니아를 상징한다.


관광제안
여행시 편지를 보낼때 우표는 신문 가판대(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우체국은 월-금요일 8:00-19:00, 토요일은 8:00-13:00까지 문연다. Cigaletova의 우체국은 5시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 은행의 업무 시간은 월-금요일 8:30-12:00, 14:00-16:30이고, 토요일 8:00-12:00까지 한다. 또한, 약국 업무시간은 7:00-20:00 으로 밤에도 문을 여는 곳도 있다.
슬로베니아 축제일에는 1월 1,2일 새해와 2월 8일인 문화의 날, 부활절 월요일이 있고, 4월 27일 National Resistance Day, 5월 1,2일 노동절, 6월 25일 국경일,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이 있으며, 10월 31일 종교 개혁일, 11월 1일 기념일, 12월 25일 크리스마스와 12월 26일 독립기념일이 대표적이다. 또한 슬로베니아 여름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류블랴나에서 열리는 국제 여름 축제와 와인 축제(8월 말, 9월 초)이며 피란(Piran)에서 열리는 피란 음악의 밤도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슬로베니아에서도 다른 서구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복을 입는다. 오늘날 슬로 베니아의 전통의상을 입을 기회는 민속축제일이나 전통적인 예식이 있을 때뿐이다. 여성의 전통의상은 길고 검은 스커트 안에 하얀 페티코트를 받쳐입고,상의에는 조끼를 입은 뒤 머리에는 화려한 스카프를 하는 것이다. 손으로 짠 양말과 금속성의 벨트도 빼 놓을 수 없다. 남성의 전통의상은 벨벳으로 된 짙은 조끼에 스웨이드(새미가죽)로 된 바 지를 입으며, 그 안에는 하얗고 긴 언더웨어를 입고 부츠와 실크스카프, 그리고 챙달린 모자를 쓴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할때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데, 고속도로는 130km/h, 메인 도로는 100km/h, 다른 도로는 90km/h,이고 거주 지역에서는 50km/h의 속도제한이 있다. 안전벨트 착용은 뒷좌석을 포함해서 의무사항이고 헤드라이트는 운전중에는 낮시간에도 항상 켜야 한다. 음주운전 단속의 기준은 혈중 알콜농도 0.5 mg/1000이다. 또한, 슬로베니아 대부분의 도시는 기차로 갈 수 있다. 다른 나라로의 연결편 또한 편리하다. Eurocity Minara가 류블랴나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로 연결된다.


역사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6세기말 남슬라브족이 남부 오스트리아 및 슬로베니아의 Sava, Drava 및 Mura 강 계곡에 정주 시작하였으며, 620년경 남슬라브족은 동쪽의 Avar 족 및 북쪽의 Bavaria 족으로 부터의 방어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Klagenfurt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Karinthia 슬라브공국과 연합하였다. 745년에 Karinthia 공국은 프랑크제국에 병합되어 기독교로 개종하고 점차 독립성 상실하였다.
869-874간 슬라브족 영주 Kocelj는 남부 Pannonia 지방에 독립 슬로베니아국을 유지하였고, 14세기부터 슬로베니아 전역이 오스트리아 Habsburg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고, Habsburg 왕조는 이 지역을 1918 까지 통치하였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18년 세계 1차 대전의 패전으로 Habsburg 왕조가 붕괴한 후 동년 12월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였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슬라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이 선포되었으나 이태리,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상당한 영토를 점령한 후 1929년 Serbia 왕국과 통합, 유고슬라비아왕국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41년 나치독일의 침략으로 유고슬르비아왕국이 패망한 후 슬로베니아는 독일, 이태리, 헝가리에 분할되었으며, 1941년 4월 슬로베니아 공산당, 기독사회당 및 여타 좌파그룹은 슬로베니아 민족해방전선 (Liberation Front of Slovene Nation)을 결성 점령군에 대한 빨치산운동을 전개하였다. 슬로베니아 유격군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주도의 Josip Broz Tito 지휘 아래 있는 범유고슬라비아 빨치산 군에 합류하였으며, 영·미 연합군은 세계 제2차 대전중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군을 나치항전에 있어 동맹군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지원하였다.
즉, 슬로베니아 빨치산군은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시까지 현 슬로베니아·오스트리아 국경 산악지대에서 독일군과 슬로베니아내 친나치, 반빨치산·공산주의 그룹과의 항전을 계속하였고, 독일 패전 후 전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스탈린하의 구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되고 모든 권력이 중앙통계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집중되었으며, 동년 11.29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선포와 더불어 유고연방을 구성하는 6개 자치공화국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0년 티토 사망 후 중앙정부의 연방구성 각 가치공화국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고, 각 자치공화국의 자치권 확대되었다.
그후 1989년 9월 27일, 슬로베니아 공화국 의회는 헌법개정을 통해 공화국의 동의없이 연방정부가 슬로베니아 공화국에 대해 비상상태를 선포할 수 없으며 유고 연방으로 부터의 탈퇴권을 재확인하였다. 1990년 1월에는 유고 공산당연맹 총회에서 슬로베니아 대표단은 슬로베니아의 정치적 장래를 국민투표 결정한다는 자신들의 제의가 채택되지 않자 철수하였으며, 연방공산당으로부터 탈퇴, 민주개혁당(Party of Democratic Reform) 결성하였다. 동년 3월에, 슬로베니아 의회는 국명에서 "Socialist" 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연방 중앙정부의 대 슬로베니아 경제제재에 대한 비상 조치 계획 선포하였으며, 4월에 제2차 세계대전후 최초로 실시된 자유총선에서 대통령에 구공산당 계열인 민주개혁당의 Milan Kucan 이 당선되고 총리에는 기민당의 Lojze Peterle가 취임하게 되었다. 1990년6월 2일, 슬로베니아 의회는 유고 연방으로 부터의 독립을 결의하였다. 1990년 12월 23일에 행해진 국민투표에서 87% 이상이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지 함으로써 독립선언 재확인 유고연방 중앙정부는 동 국민투표가 연방헌법에 위해한다고 공표하고 세르비아공화국은 연방중앙은행을 습격 약 200억 달러의 보유외화를 탈취하였다.


전압 및 주파수
220 V에 50 Hz를 사용한다.

치안
정세 및 치안 관련 사항을 보면, 1991년 6월에 구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안정이 유지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치안상태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통화
슬로베니아의 화폐 단위로는 '톨라'tolar(SIT)를 쓰며, stotin이라는 보조 단위도 겸용하고 있다. 2000년 1월을 기준으로 한 1톨라의 가치는 미달러로 환산할 때, 1:216이며, 1톨러는 100스토틴이다.

한국으로 전화
슬로베니아에서 국제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00을 누르고,우리나라 국가번호를 누르면 된다. 우체국이나 전화부스에서 전화할 수 있으며 토큰이나 전화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데, 전화카드는 우체국이나 대부분의 가게와 길거리 가판대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현지로 전화
외국(한국)에서 슬로베니아로 전화를 걸 때 국가번호는 386이다.


주의사항
< 대사관/영사관 관련사항>
슬로베니아에는 상주공관이 없다. 대신에 주 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관할하고 있다. 이곳의 주소는 Gregor Mendelstrasse 25, A-1180 Wien, Austria 이다. 전화번호는 (0043-1) 4781991/5 이고 FAX는 (0043-1) 4781013 이다. 또한,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리아나 주재 KOTRA 지사의 전화는 061-168803이다.

<긴급연락처(경찰서, 병원 등)>
표준시각에 대한 정보는 95번, 일반정보는 981, 전화번호 조회는 988, 도로 정보를 원할 시에는 987번을 누르면 되고, 택시를 불러 이용하려면 9700, 9701, 9702, 9703, 9704, 9705, 9706번이다. 기타 긴급 연락처로는 범죄 신고나 분실 신고를 하고자 할때, 경찰서는 92번을, 그리고 화재 신고로 소방서를 부를 때에는 93번, 긴급 의료 시설을 요청하려면 94번을 이용하면 된다. 그리고, 전화 번호 안내의 경우는 988번이다.

<외국인 금기사항>
신유고연방 및 티토 전 구유고연방 대통령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사항 등에 관련된 정치와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다.
수도물에는 석회석이 섞여 있으므로 생수(Mineral Water)를 음료수로 사용하는 것이 좋으며, 교통 관리상 주차금지 지역에 주 정차 했을 경우 즉시 차를 끌어가며 벌금 부과하므로 조심하도록 하자.

<상품구입시 유의사항>
슬로베니아의 전 지역에서는 쇼핑이나 음식을 먹을 때, 유럽에서 통용되는 대부분의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시차 : -8시간



▶ 류블랴나 [Ljubljana]

류블랴나(Ljubljana)는 유고슬라비아의 북서단에 자리하는 슬로베니아공화국의 수도로서, 문화와 상공업의 도시이다. 기계와 자동차 및 맥주, 담배, 피혁 등의 공업이 성하며, 인쇄공업이 특히 발달하였다. 고대 로마의 한 도시였으나 6세기 후반에 슬라브족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1595년에 세운 대학이 있으며,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약 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류블랴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는 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중의 하나이며, 2년마다 열리는 류블랴나 인쇄 예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역사를 갖고 있어 오스트리아풍의 차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가볼 만한 곳은 그라드(Grad) 성, 로즈니크(Roznik) 언덕, 슈마르나(Smarna) 산, 블레드(Bled) 호 등이 있다.
류블랴나에 있는 유명한 건물과 공공 광장들에는 건축가 요졔 플레취니크(1872~1957)가 설계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의 얼굴은 이 나라의 화폐인 500 톨라리 지폐에도 나올 정도이다. 류블랴나는 트로모스토비예(Tromostovje : 세 개의 다리)라는 시내 중심에서 강이 꺾어지는 곳에 있는 주옥같은 건축물들도 자리하고 있다. 또한, 박물관과 미술관은 의회 주위에 밀집해 있다. 현대 미술 관과 국제 그래픽 미술센터도 이곳에 있다. Stari 광장과 근처 Gornji 광장을 따라 늘어선 카페에는 갖가지 장식품이 진 되어 있다. 의회 건물 맞은 편에 있는 Cankarjev 돔에서는 슬로베니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정기적으로 공연한다. 6월 말에는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며 6월 말에 서 8월에 열리는 Mednarodni Poletni 페스티벌에서는 야외 극장에서 발레나 오페라를 볼 수 있다. Oncet라고 하는 민속결혼식은 6월 마지막 주에 개최되고 있는 가장 열광적인 축제이다.
이곳의 최근 환경문제로는 산업폐기물로 인한 사바강의 오염, 중금속과 독성 화학물질로 인한 연안 해수오염, 대기오염으로 인한 코페르(Koper)근처의 산림훼손, 산성비 등이 현안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산업
슬로베니아는 구유고의 선진 공업 지역으로 기본적으로 경제적 기반은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은 독립 선언 직후 무력 충돌 후유증을 이미 불식하고 경제의 시장화로 노력을 집중하는 것과 동시에 서구 제국과의 경제 관계의 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이 도시의 대표적인 산업으로는 호프와 와인 등의 농업과 전기 기기, 금속 가공, 섬유, 목재 가공, 관광 등을 들 수 있고, 특히 류블랴나의 제약 산업은 유명하다.
류블랴나의 동부 지역에는 주요한 탄광들이 있으며 서부에는 수은, 예세니체(Jesenice)에는 제강(製鋼) 공장, 크라니(Kranj)에는 직물 공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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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국가명은 슬로바키아 공화국(The Slovak Republic)으로 2차 세계 대전 후 체코와 통일국가를 형성하였으며 1993년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분리하였다.
슬로바키아는 1989년 '벨벳혁명'이라 불리우는 무혈시민혁명에 의해 공산정권이 퇴진하고 시민포럼(Civil Forum)중심의 연립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1946년 이후 최초로 실시된 1990년 6월의 자유총선에서 벨벳혁명을 주도한 '시민포럼'과 '반폭력대중운동'이 각각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제1당으로 부상하였으며, 벨벳 혁명에 의해 탄생한 구연방의 신정부는 클라우스 당시 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는 석유화학 등 중공업부문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용이하지 않았고, 구 코메콘 체제의 해체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슬로바키아에서는 급진적 개혁에 대한 반발과 독자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92년 총선에서 이러한 민의를 불러일으킨 민주 슬로바키아가 제1당이 되었으며 1993년 구 체코 슬로바키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되었으며 당시 코바치 대통령이 취임했다.

항공
우리나라에서 직항으로 운항하는 항공사는 없지만 체코 항공 체코 및 프랑스 항공과 합작으로 운영하고 있다. 분리 독립후 브라티슬라바 국제공항을 중심으로 유럽 및 북미 대륙을 연결하는 새로운 항공노선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비엔나 국제공항-브라티슬라바 국제공항간 을 연결하는 복합 운송망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리고 국내 주요도시간 항공기가 운행중이다.

현재는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분리 전의 국영항공사가 계속 운항하고 있는데, 주로 프라하의 루지네 공항에서 브라티스라바 공항을 연결 운항하고 있다. 일단 프라하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 편리하다.그밖에 시카고, 몬트리올, 뉴욕과는 1주일에 2회 운항하고, 모스크바와는 1주일에 1번 연결 운항하고 있다. 슬로바키아 내의 공항은 Poprad Tatry, Kosice 에 운항하고 있으며, 프라하의 루지네 공항에서도 이들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면적 : 20,273㎢

수도 : 브리티스라바

인구 : 약 5,400만명 (2003년 기준)

종교 : 대부분이 카토릭을 믿지만 개신교 신자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주요민족 : 슬로바키아인 85.7% 헝가리인 10.7% 집시 1.5% 체코인 1.1%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0.5% 기타 0.2%에 달한다. 약 60만명의 헝가리인은 대부분 슬로바키아의 남동부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주요언어 : 공식언어는 슬로바키아어. 약 80%가 체코어와 비슷 체코어와 헝가리어등이 쓰이고 있다.

기후
슬로바키아는 사계절이 뚜럿한 대륙성기후의 나라이며, 우리나라와 같이 겨울은 춥고 건조하며 여름에는 무덥고 습하다.
수도인 '브라티스라바(Bratislava)'의 1월 평균 기온은 섭씨 3°C ~2°C 이고, 6월에는 16°C~ 26°C 이다. 대체로, 산악지대로 갈수록 차가운 기온분포를 보인다. Bratislava의 연평균 강수량은 650mm정도이고, 고산지대에서는 연간 130여일 동안 눈이 내린다.

지리
중부유럽에 속하며 서쪽으로 체코, 북쪽으로 폴란드, 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헝가리, 남서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접해 있다. 슬로바키아는 산악 지대 국가이다. 카르파티안 (Carpathian) 산맥은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근처에서 시작하여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에 이른다.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 중부지방의 반스카 비스트리카 (Banska Bystrica) 근교로 모아지는 저지 타트리(the Lower Tatras)와 북부지방의 프로프라드(Proprad) 근교의 고지 타트리(the High Tatras)로 볼 수 있다. 몇몇의 높은 정상들로 인해 폴란드와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기도 한다.
북쪽 지역은 고원지대, 남쪽과 남동 지역은 저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북쪽 산악지대에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높은 스트레도슬로벤스키 주의 비소케타 트리 산맥에 속하는 2,655m의 게를라흐 봉이 위치하고 있다. 이 나라의 주요 하천으로는 남쪽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모라바 강과 도나 우 강을 들수 있고 산악지대를 흐르는 주요 하천으로는 바흐, 호론, 호르나트, 보드로크 강 북쪽으로 흐르는 포프라트 강이 있다.

관광제안
슬로바키아의 열차는 특급(Expresni), 급행(Phylik), 보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보통열차 이외에는 추가 요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외에서 발행된 승차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역의 창구에서는 국내의 차표만 취급한다. 국제선 차표는 국영 여행사 체도크(CEDOK)의 메인 오피스에서 취급하고 있다. 좌석 예약시 안내서나 역에 있는 오렌지 색의 출발 시각표에서 R마크가 있는 열차는 예약이 필요하고, 마크가 없으면 예약이 필요없다. 마크가 있는 경우에는 차표를 산후 예약 창구로 가서 좌석 예약권을 사야 한다. 슬로바키아사람들은 열차의 경우 기본적으로 예약을 하고 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슬로바키아의 경우는 5월과 6월, 그리고 9월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최적기이다. 대부분의 슬로바키아 사람들은 6월과 8월사이에 휴가를 즐기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호텔이나 관광지가 관광객들로 붐빈다. 특히 타트라스산 리조트 지역의 호텔은 학생들로 꽉 찬다.
주요 행사 및 축제를 보면, '아그로콤플렉스'(Agrokomplex:농산물관련 전시회)의 경우는 매년 7월과 8월 사이에 4∼5일간 니뜨라(Nitra)市에서 개최되며, 각종 농산물, 종묘, 화훼, 동물사육, 농기계, 주류 등이 전시된다. 이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리는 가장 커다란 전시회라고 할 수 있으며, 행사기간을 전후하여 방을 구하기가 힘들고, 이 행사에는 매년 10만여명 이상이 관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아우토살론'(Auto Salon:자동차전시회)은 매년 여름(8월 또는 9월)에 개최되는 슬로바키아 최대의 자동차전시회로서, Concept Car와 같은 첨단형/미래형자동차 등은 전시되지 않지만, 역시 10만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갈수록 더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행사이다. 同 전시회는 승용차와 일반화물용 대형트럭을 주로 전시하는데, 체제전환 이후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1995년의 전시회에는 韓國의 4개 자동차업체들이 참가한 바 있다. '國家建國記念日 행사'는 1993년 1월 1일 舊체코슬로바키아연방으로부터 평화롭게 분리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킨 기념일이 건국기념일로서 자리를 잡았으며, '國際平和 마라톤' 행사인 이 대회는 슬로바키아 제2의 도시인 꼬시쩨(Kosice)에서 192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개최되어온 행사이다. 즉,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정규구간 마라톤대회이다. 이 대회에는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으며, 매년 10월초에 치루어지는 국제대회이다. 그 밖에도, 브라티스라바 음악주간 행사는 매년 10월 초 또는 중순에 약 1주일동안 국제행사로 마련되는데, 브라티스라바城이나 각 음악관(콘서트홀) 등에서 각종 초청연주회, 국립교향악단 공연 등의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여름 문화행사'(Kulturne Leto) 역시 유명한데,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중순부터 약 3개월간 치루어지는 이 행사는 포크댄스, 전통음악연주, 간이연극 등으로 시작되어 연극, 발레, 음악회 등의 공연이 열린다. 또한, 독특한 축제의 일환인 '국제 귀신 페스티발'(Medzinarodny Festival Duchov a Strasidiel)은 매년 4월말부터 약 1주일간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세인트 보이니쩨(St. Bojnice)城에서 펼쳐지는데, 이 성에 얽힌 귀신에 관한 이야기로 관람객을 안내하며, 밤에는 이 성에 얽힌 역사를 성벽에 슬라이드와 조명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행사이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고대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 최초로 거주한 민족은 켈트족이었다. 그후 AD 1세기경부터 게르만인과 로마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켈트인들을 축출하고 이 지역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분쟁을 야기시켰다. 그 후 이 지역에 슬라브인이 정착한 시기는 AD 5세기경부터이며 고대 체코인은 현재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고대 슬로바키아인은 현재의 슬로바키아에 정착하게 되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즉 슬라브족이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에 정착한 것은 5세기 경에 속한다. 그때쯤 AVARS족이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슬라브족들을 침략하자 이에 대항하여 SAMO가 몇몇 부족 들을 통합하여, 625년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이 지역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SAMO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SAMO 왕국도 658년 SAMO의 죽음과 함께 멸망하게 되었다. 9세기초 833년 모라비아의 왕자는 니트라를 점령하고 지금의 중·서부 슬로바키아와 모라비아, 그리고 체코를 포함하는 대모라비아 제국을 세웠다. 이 왕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이 하나로 통일한 국가였다. 대모라비아 제국의 왕자는 서쪽의 프랑크족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비잔틴 황제에게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 863년에 그리스 선교사인 키릴과 메토디우스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그리스 정교로의 선교는 이루지 못했지만 예식과 성경의 전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최초의 슬라브 문자인 키릴 문자를 만들었다. 이 왕국은 계속 성장해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남부, 헝가리 서부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비잔틴 제국의 선교사 CYRIL이 기독교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CYRIL 위에서 말했듯이 문자 를 고안해 복음서 등을 번역하였다. 이 CYRIL 문자는 아직도 러시아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라비아 왕국도 907년 마쟈르족들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게 되었고 마쟈르족은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에 헝가리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907년 들어 대모라비아 제국은 내부 지배층의 분열과 독일과 헝가리의 압력으로 멸망하게 되었다.907년 모라비아 왕국이 멸망한후 10세기경 PREMYSLID 족이 체코 부족을 통합하여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보헤미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보헤미아 왕국은 1029년 모라비아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는 등 그 세력이 갈수록 커져 갔다. 침입자인 헝가리인은 슬로바키아 남부에 정착하여 1000년에 헝가리 왕국에 병합시켰고, 1018년에는 슬로바키아 전역이 헝가리에 통합되었다. 이 때 헝가리의 군주는 서구의 라틴 문명을 흡수하고자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13세기 들어 타타르인의 침입을 받은 후, 헝가리 왕은 독일인들을 동쪽 국경(현재의 동슬로바키아)에 정착시켜서 차후의 침략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맡겼다. 이 때 슬라브어에서 분리된 슬로바키아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14세기부터 PREMYSLID 왕조가 단절되고 룩셈부르크 왕조가 지배한후 모라비아 왕국은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슬로바키아는 동슬로바키아 지역의 스피시가 1412년부터 1772년까지 폴란드에 귀속된 기간을 빼고는 1918년까지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 된다. 16세기 초반 투르크가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헝가리는 수도를 부다에서 브라티슬라바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합스부르크가에서 헝가리의 왕위와 영토를 맡게 되자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9세기 이래 처음으로 하나의 통치권 안에 놓이게 된다. 1526년 모학(MOHACS)전투에서 룩셈부르크가가 오토만에 패하고 페르디난드 1세가 체코와 헝가리의 왕이 된후,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는 합스부르그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후 보헤미아와 합스부르그가의 30년 전쟁 결과 보헤미아가 패하게 되자 합스부 그가의 체코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되고,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그가의 왕가로 합병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한 후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각각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00년 TOMAS MASARYK은 체코 진보당을 설립하여 의회정치와 보통선거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당이 결성되어 민족 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MASARYK은 1914년 12월 독립투쟁을 위해 런던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으며, 1916년 EDUARD BENES 및 MILAN STEFANIK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1918년 5월 13일 피츠버그 협정에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정치적 연합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918년에는 연합국이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회의를 승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후 정부수립을 위한 최고기구로 인정하게 되었다.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는 임시정부로 재조직되었으며, 10월 18일 MASARYK와 BENES는 워싱톤과 파리에서 각각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18년 10월 28일 세계 제 1차대전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된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건국했다. 새로운 국가는 17세기초 오스트리아 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중유럽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체코인들과 거의 1,000년동안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두 민족은 각각 자치단체에 결정권이 있었고 서로 이질적인 면도 많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세계 제 1차대전과 제 2차대전 사이에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었던 나라이다. 이 점은 체코슬로바키아의 1, 2대 대통령이었던 Tomas Masaryk과 Edvard Benes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민주주의는 사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지켜졌으나 인종적인 다양함이 정당제도를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이런 정당제도는 단기적으로 정당간의 연립정부의 탄생을 야기시켰고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주요한 정치 불안요인은 나라의 2/3를 차지하는 슬로바키아인과 독일인들의 불만이 커진데 있었다고 한다. 1938년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슬로바키아 주민들의 불만은 국가의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체코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라는 개념과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은 비록 다른 민족이지만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홍보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는 했다. 그러나 두 민족은 비록 언어는 비슷했지만 역사, 문화, 경제적으로 다른 점이 많이 있었다. 두 나라의 역사를 보면 9세기경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모라비아 제국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그 후 중세기에 슬로바키아는 Magyar의 지배를 받았던 반면, 체코는 정치 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를 건국하였다. 또 1348년 보헤미아의 찰스 1세에 의해서 중유럽에서 처음으로 프라하에 대학교를 설립했다. 그후 체코는 1620년 오스트리아에 점령당했고 바로뒤 합스부르크 제국에 합병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의 수용을 강요당하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세기 개신교는 체코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반면 슬로바키아는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하였고 체코와는 달리 도시화·산업화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그러나 이 두 민족은 수세기에 걸쳐 상호 연관되어서 살아왔기 때문에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다른 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어 슬로바키아인들은 교육과 학문분야에서 뛰어나 19세기 체코 민족주의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엔 시인인 Jan Kollar와 고고학자인 Pavel Josef Safarik 등이 큰 역할을 했다. 많은 슬로바키아인들도 체코 못지 않게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열성적이었다. 그래서 슬로바키아인들의 외교적인 노력과 홍보가 세계 제 1차대전 기간 동안 벌어졌다. 또 체코와 힘을...


전압 및 주파수
220V/50 Hz

치안
브라티스라바 시내 번잡한 지역에서 소매치기가 간혹 있으니 각별한 유의를 요한다. 슬로바키아에는 우리 공관이 상주하고 있지 않으며 여권 분실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권 관리에 각별한 유위가 필요하다.(여권을 분실할 경우, 체크대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 인편이나 우편을 통하여 수령할 수는 있음).

통화
화폐단위는 슬로반스카 코루나(SK-Slovak crown)로, 1SK는 100할레르(Haler-halierov)이다.
지폐는 20, 50, 100, 500, 1,000, 5,000SK가 있으며, 동전으로는 1, 2, 5, 10SK와 10, 20, 50할레르가 있다. 1993년부터 체코와 다른 화페를 사용하고 있는데 미화 1달러는 약 45 코루나 정도 된다.

주의사항
슬로바키아에는 우리 공관이 상주하고 있지 않으며 여권 분실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권 관리에 유의를 해야 한다. 혹시라도 여권을 분실했을 경우에는, 체코 대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고, 인편이나 우편을 통하여 수령할 수도 있다.
공중화장실 이용시, 동유럽 대부분의 공중 화장실은 지하에 있으며, 화장실 입구에는 노인들이 앉아 있다. 화장지는 따로 준비되어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별도로 구입해야 하며 노인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팁의 액수는 보통 시내버스 요금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화장실의 입구위에 있는 바구니에는 더러 지폐가 팁으로 놓여져 있는 때가 있다. 이는 선전용이므로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슬로바키아어로 남자는 muz, 여자는 zena 이므로 화장실 이용시 유의하기 바란다.

철도
동유럽 철도패스를 이용하면 보다 저렴하고 계획적인 여행을 할 수 있는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의 철도 시스템을 1개월 동안 정해진 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1등석과 2등석으로구분되며 5일권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5일을 추가할 수 있다.
1등석 5일권은 $226, 2등석은 $160이며 하루 연장할 때마다 1등석은 $26, 2등석으 $19을 추가로 지불한다. (가격은 2004년. 미국 달러 기준)

시차 : -8시간




▶ 브리티스라바

슬로바키아의 수도로써 빈·부다페스트와 함께 도나우 강을 젖줄로 번영해 온 도시이며 슬로바키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그러나 급속한 현대화로 인하여 아름다운 고도(古都)의 정경을 고속도로와 공장들이 망치 고 있는 곳이다. 다뉴브강 맞은 편으로 늘어선 아파트 단지들은 보기 흉한 꼴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3세기 동안 헝가리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비교적 문화적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는 편이다. 도시의 분위기는 거리 전체가 퍽 아담하며 어딘지 착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비가 어울릴 것 같은 도시이다.
1993년 1월1일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분리 독립한 후 수도로써 발전해온 이 도시는 오래된 고도시로 슬로바키아의 관광의 핵심이라고할 수 있다. 이도시를 관광하기위해서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버스 터미널은 물론 도시 안에 있지만 이용하기 불편한 곳에 있다. 브라티스라바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이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모든 유럽의 도시가 그렇듯이 이 도시역시 우리나라의 도시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게 별로 크지 않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찍 도착했다면 이곳을 구경하고 다른 나라로 가던지.. 다른 도시를 구경할 수 있다.

교육
아카데미아 이스트로폴리타나 대학 이 대학은 1465년에 헝가리 왕 마티아슈 코르빈이 창설했는데 르네상스식의 요소가 가미된 후기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이 대학에서는 1467년부터 저명한 독일 인문주의자들과 천문학자 뮐러-레기오몬타뉴스가 강의를 하였다. 대학은 4개의 단과대학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490년에 오아의 죽음으로 대학 발전이 중지되었던 적도 있다. 현재는 에술대학 캠퍼스로 사용되고 있다. 외국인을 위한 어학기관은 사설학원을 제외하고는 한 곳이 있는데, 이 어학원은 국립대학인 '우니베르지따 꼬멘스께호'(Univerzita Komenske(UK):University of Commenius) 부설기관으로 수도인 브라티스라바와 꼬시쩨에 소재하고 있으며, 동 어학원은 일반학생을 위한 기관이다. 그리고 세네쯔(Senec)에는 향후 슬로바키아내의 대학에 진학하여 의학이나 약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외국인을 위한 어학원이 소재하고 있다. 이들 어학원은 모두 별도의 기숙사를 시내에 두고 있다. 사설학원은 주로 슬로바키아人에게서 영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나, 외국인에게 슬로바키아어를 가르치는 과정을 설립한 곳도 몇군데 있다.
슬로바키아 최고 대학인 브라티슬라바 코멘스키 종합대학교(JA Comenius University of Bratislava) 이 학교는 신성 로마제국하인 1467년 헝가리의 왕 마타아시 코르비누스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을 모방하여 설립하였다. 당시 신학, 의학, 법학, 철학 등의 학부를 가진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나 15세기말 종교개혁으로 교수진이 모두 이탈리아로 돌아가 1492년부 터 교육활동이 중단되었다. 1차 대전 후 1919년 체코의 국가원수인 마사리크에 의해 지금의 코멘스키 대학으로 설립됨으로써 근대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1939년 의학, 철학, 법학부를 개설하여 슬로바키아 대학으로 개편되었고 다시 1954년 자연과학, 신학, 지리학부 등 8개 학부를 가진 코멘스키 종합대학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현재 이 학교는 슬로바키아 문화의 중심지로서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고 420여명의 정교수를 포함하여 5,400명의 교직원과 1만 2천여명의 학생이 재학 중에 있다.

산업
주요산업으로는 기계, 금속,화학 등이 발달하였고 과학 연구, 교육, 문화 등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현대화되고 발달되고 있어서 아름다운 고도시의 매력이 사라져가고있는 것이 안타가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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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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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와 '플라맹고'의 나라이자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피카소로의 나라다. 이들의 문화와 예술은 스페인인들 속에 잠재되어 있다. 축제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리는 스페인 사람들은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항상 삶을 즐기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스페인을 '정렬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일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던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유럽 남서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약 85%을 차지한 스페인은 서쪽으로 포르투갈, 남쪽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 아프리카와 마주하고 있다. 영토는 본토와 지중해의 발레아레스 제도 및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로 구성하며, 모로코 북부의 세우타 시와 멜리야 시는 모로코의 종주권 주장에도 스페인령으로 간주한다. 공식 명칭은 스페인 왕국(Kingdom of Spain)이다.

수도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마드리드이다. 주요 도시로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세비야, 사라고사 등이 있다.

1950년대 중반 후에 정치적, 경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면서 발전을 거듭하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 유럽 최대의 농업국으로서 국토의 대부분이 척박한 땅으로 농축산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주요 생산물로는 밀, 사탕무, 보리, 올리브, 오렌지가 주 생산물이다. 목축업보다는 어업이 발달하여 대서양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연근해 어업, 원양 어업이 활발하다. 1950년 공업화를 이루면서 섬유, 철강, 화학 등이 주요 산업으로 자동차 산업, 장난감 산업도 비중이 크다. 이러한 경제성장으로 농림수산업에 종사하는 경제활동인구가 20%이내로서 공업국가로 성장을 하고 있다.

기차
유럽에서 스페인에 입국할 때는 주로 기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유럽에서도 비교적 멀리있어 유럽 배낭여행 30일 코스를 가더라도 맘먹지 않으면 가기 힘들다.
기차를 이용해서 수도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등 유명 관광지로 간다. 주로 장거리 야간 열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파리에서 저녁 8시경에 기차를 타면 마드리드에 다음날 오전 9시경 도착한다. 호텔 열차와 비교적 고가의 열차는 국경에서 갈아타는 불편이 없지만 일반 열차의 경우엔 국경에서 스페인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경우도 있다.

항공
수도인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같은 대도시의 공항을 이용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직항으로 가는 항공편은 없다. 파리나 런던, 프랑크푸르트 같은 서유럽의 대도시를 경유하여 여행한다.


면적 : 505,000㎢

수도 : 마드리드(Madrid)

인구 : 약 4020만명 (2005년 기준)

종교 : 로마 가톨릭을 국민의 95% 이상이 믿고 있으며 그외 이슬람 교와 개신교신자가 소수 있다.

주요민족 : 스페인인 75%로 거의 대부분이며 카탈루냐인 17%, 갈리시아인 6%, 바스크족 1% 등이 있다. 이중 바스크 족은 스페인의 북부의 바스크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바스크 지역에서는 바스크어가 사용된다.

기후
북위 27˚와 44˚로 적도에 가까운 북반구 온대지역이다. 특색있는 지형과 해류의 영향으로 다양한 기후를 나타낸다. 북서부의 대서양 연안은 해양성 기후로 비가 많으며,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부 내륙 고원 지대와 남서부는 대륙성의 건조한 기후를 보인다. 또한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일년내내 온난하다. 일반적으로 건조하며 강우량이 많다.
북대서양풍이 연중 불어 사하라로부터 불어오는 더운 건조한 기류의 영향과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카 산맥은 여름 내내 아열대 기류의 북부 한계를 이루며 건조한 기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스페인의 기후에 큰 영향을 가진다.
7, 8월에는 작렬한 태양으로 남부지역은 45℃, 사막지역은 뜨거운 볕으로 인하여 기온을 높다. 북부의 발레아릭 군도는 35℃이다. 북부 지방의 겨울은 항상 비가 온다. 갈리시아와 피레네 산맥은 강우량이 적고, 눈이 조금 내린다. 한겨울에 남부 지방은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으나 마드리드 북부 지방과 피레네 산간 지방은 춥다.
스페인 내륙 및 남부의 여름 햇빛과 더위는 너무 강렬해서 반드시 모자나 선글라스를 착용하여야 한다.
의류는 한국의 계절과 비슷하게 준비하면 된다.

지리
스페인은 북위 36-43°27’, 동경 9°18’-11°에 위치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85%를 차지하고, 15%은 포르투갈을 접하고 있다. 한반도의 약2.3배이다. 국토의 31%가 경작지이고, 수림지는 31%, 목초지는 20%고 다년생 농작물 재배지는 10%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지역별로 3개의 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강우량이 많아 숲이 우거진 북구이고, 갈리시아ㆍ레온ㆍ나바라ㆍ카탈루냐 지방으로 서북부를 말한다. 둘째, 중앙부의 메세타라 고원이고, 셋째로 지중해 동부ㆍ안달루시아ㆍ발렌시아 지방을 말한다. 반도의 평균고도는 800m인 메세타라는 고원으로 이루어졌고, 북부가 남부보다 약간 높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Hola 올라!
의 미 : 안녕하세요?

현지어 : Adios 아디오스!
의 미 : 안녕히 가세요.(헤어질 때)

현지어 : Si/N0 시/노
의 미 : 예/아니오.

현지어 : Cuanta cueta? 꾸안따 꾸에스타?
의 미 : 얼마예요?

현지어 : Permiso 뻬르미소
의 미 : 미안합니다.

방문적기
스페인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기후를 나타내므로 각 계절에 따라 적합한 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다.
봄에는 레반테 산악지구와 안달루시아 지방이 좋다. 또한 여름에는 스페인 중부 및 세비야의 더위가 극심하므로 이곳은 피하는 것이 좋다. 가을에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스페인의 전지역이 여행하기에 적합한 기후를 나타내며, 남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알리칸테, 나라가는 혼화한 기후로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마드리드는 4-5월, 10월이 여행시즌이며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축제가 많은 4-5월이 방문적기이다.


역사
선사시대에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온 켈트족 등 북부 아프리카와 서유럽 민족이 반도 북부에 정착하여 살았고, 지중해 연안에는 북부 아프리카 인이 거주하였으며, 고대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들이 동부 및 남부 해안을, 카르타고인들이 남동부를 차지하였다.
BC 218년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고,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BC 1세기 경부터는이베리아 반도를 '이베리아' 혹은 '이스파니아'라고 불렀다.

그 후 5세기에 게르만 계 부족들이 침략하였고, 서고트족의 급격한 부상으로 그리스도 교를 받아들였다. 8세기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그리스도 세력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재정복을 시도하였다.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두 왕국은 하나가 된다. 1492년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면서 14세기 말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들을 거느리는 강대국으로 부상한다.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후반까지 황금의 세기라 일컫는다. 1492년 콜롬부스의 지리상 발견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 스페인은 16세에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 대륙을 정복한다. 식민지에서 채굴한 은, 금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모직물 공업 등 여러 가지 경제발전을 이룩한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유럽전역에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스페인의 영광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권력에 압도당한다. 안으로는 가혹한 종교재판과 유대인과 무어인에 대한 박해로 노동력이 고갈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무적함대의 명예를 영국에 넘겨준다. 정치적으로는 부패하였고 혁명을 일으킬 신흥계급이 없었으므로 국외 식민지들의 독립이 가속화되었으며, 미국과의 전쟁으로 급속한 몰락을 겪으면서 유럽 내에서 후진국으로 전락한다.

20세기에 국제적 고립과 반 봉건적 잔재가 낳은 사회 문제로 교회 중심의 대토지 소유는 민중 불만을 샀다. 왕권은 군부로 민중운동을 막으려 했으나 군부도 권력을 잃은 왕권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1931년 스페인은 왕정을 폐지하면서 공화국체제로 전향한다. 그러나 귀족과 군부의 영향으로 추가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와 농민들은 '인민전선'을 결성하게된다. 1936년 총선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프랑코 중심의 우익진영과 스페인 내전을 벌인다. 이 내전은 3년 동안 계속 유지하다가 반란군인 프랑코 장군의 승리로 결말 짓는다. 이후로 36년 간 프랑코 총독 1인이 독점으로 전체정치를 이룬 결과 경제적,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보인다. 11월 20일 프랑코가 사망한 후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군주제가 다시 부활하였다.

카를로스는 민주화에 앞장섰으며, 1977년 실시한 선거로 정치, 경제의 민주화에 착수하면서 로마 가톨릭교의 공식적 지위를 박탈하고 자유기업제도와 인권을 보장하고, 여러 지방에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1978년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헌법을 제정, 1982년 사회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함으로 펠레페 곤살레스 마르케스를 총리로 한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한다.
스페인은 서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이질적 국가로 자리잡았지만 다른 유럽 국가와 동화되면서 1986년에 EC의 구성원이 되었다. 1989년 10월 사회노동당의 재집권에 성공하였지만 구소련 지역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분리주의 움직임을 보였다. 스페인은 유럽공동체인 EC와의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대외적으로 신임을 얻으면서 1992년 스페인은 세비야 국제박람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관광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공휴일/축제
1월1일- 신년

1월6일- 주현절

1월6일- 동방박사의 날(Dia de los Reyes):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시내 중심부에선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마드리드)

1월20일- 라 람보라다(La Tamborada) : 산세바스티안에서 열리며 이날은 온마을 사람들이 잘 차려입고 광란의 밤을 보낸다.

2-3월
카르나발(Carnaval)- 화려한 의상 퍼레이드를 하는 환락의 축제 카르나발은 부활절 약 7주전에 전국적으로 열린다.
라스 파야스 데 산호세(Las Fallas de San Jose)- 발렌시아에서 3월 중순에 일주일 동안 펼쳐지는 축제. 밤새도록 화려한 불꽃놀이와 행진이 펼쳐진다.

3월19일- 성요셉의날

부활절 전 금요일 성목요일

부화절 전 금요일 성금요일

4월
세마나 산타(Semana Santa)- 부활절이 낀 주에 성상을 앞세운 어마어마한 군중의 퍼레이드가 있다. 세비야가 유명하다.
페리아 데 아브릴(Feria de Abril)- 세비야의 또 다른 축제로 4월말 일주일간 열리는데 종교축제의 절정인 세마나 산타와 쌍벽을 이룬다.

5월1일- 노동절

5월15일- 산이시도르축제(Fiesta de San Isidro) - 마드리드의 수호 성자 이시도르를 기념하는 축제로 행진과 파티, 투우가 끊임없이 열린다. (마드리드)

6월20-24일- 성 후안 축제 (알리칸테지방)

7월25일- 산디아고 축제

8월15일- 성모 승천일

9월24일- 라 메르쎄(La Merce)- 일주일간 투우와 민속제가 열리는 바르셀로나의 가장 큰 축제.(바르셀로나)

10월12일- 신대륙 발견일

11월1일- 모든 성인의 날

12월6일- 헌법의 날

12월8일- 성모 수태일

12월25일- 크리스마스

유용한전화번호
- 스페인내 한국대사관
대표전화: (34)91-353-2000
Fax: (34)91-353-2001
근무시간 외 비상연락처: 606-957-332

- 주한 스페인 대사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726-52
Tel. 02-793-5703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를 표준 정격 전압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낡은 건물이나 시골지역에서는 125V, 110V을 사용하고 있고, 플러그의 모양은 우리나라와 같은 둥근 모양이다. 전시 제품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전압을 확인한 후에 사용하도록 한다.

치안
스페인은 도둑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기차나 버스 안, 공항, 역, 정류장, 관광지등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방 도난 사고나 소매치기 범죄가가 자주 일어난다. 또한 관광지에서 친절하게 다가와 자신이 관광 안내를 해준다고 할 경우에도 조심한다. 최근들어서는 금품을 노리고 관광객을 위협하는 일도 자주 보고 되므로 밤 늦은 시간에 다니거나 혼자 다니지 않도록 하고 가급적이면 현금은 적게 소지하고 소지품 관리에 주의한다.

통화
통화 단위는 유로(Euro)로 2002년 03월부터 페세타(Peseta)대신 사용한다. 환전은 은행이나 공항, 대형 백화점 안의 환전소, 호텔 등에서 할 수 있다.

한국으로 전화
국제전화 연결 번호는 07번으로 호텔이나 내선전화가 있는 곳에서는 우선 외부 연결 번호(주로 0이나 9)를 누른후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상대방 전화번호를 누른면 된다.
수신자 요금 부담을 이용할 때에는 900-990-822를 누른 후 통화한다.

현지로 전화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전화시
001+34(스페인 국가번호)+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주요도시 지역번호
바르셀로나(Barcelona) 93
마드리드(Madrid) 91
발렌시아(Valencia) 96
사라고사(Zaragoza) 976


주의사항
• 주 스페인 대한민국 대사관
주소 : Embajada de la Republica de corea C/Gonzalez Amigo 15, 28033 Madrid, Spain
전화 : 34-91-353-20-00 팩스 : 34-91-353-20-01

• 일반적 상점은 09:00 - 14:00까지 영업을 하고 17:00부터 20:00까지 근무하나 날씨가 더워지면 씨에스타(낮잠)로 점심이 길어진다. 은행은 09:00-13:30, 14:00까지 근무하고 있다.


철도
스페인 내에서 지정된 기간 동안 철도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철도패스로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다. 스페인 플렉시 패스는 2개월안에 3일동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하루씩 더 추가할 수도 있다.

패스는 1등석과 2등석으로 구분되어 요금이 책정되어 있으며 2~5명이 같은 일정으로 여행하면 할인 받을 수 있다. 패스 소지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위스로 연결되는 특급열차 이용시 특별요금을 적용받으며 일부 페리에 한해서 할인이 가능하다. 12세 미만의 어린이는 성인 요금의 50%이고 패스는 사용하지 않은 것에 한해 1년 안에 환불이 가능하다.

1등석 패스는 성인이 $225, 2등석은 $175 이며 1일 추가시 1등석은 $35, 2등석은 $30의 추가요금을 낸다. (위 요금은 2003년 요금으로 인상될 예정이다.)


북위 27˚와 44˚로 적도에 가까운 북반구 온대지역이다. 특색있는 지형과 해류의 영향으로 다양한 기후를 나타낸다. 북서부의 대서양 연안은 해양성 기후로 비가 많으며,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부 내륙 고원 지대와 남서부는 대륙성의 건조한 기후를 보인다. 또한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일년내내 온난하다. 일반적으로 건조하며 강우량이 많다.
북대서양풍이 연중 불어 사하라로부터 불어오는 더운 건조한 기류의 영향과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카 산맥은 여름 내내 아열대 기류의 북부 한계를 이루며 건조한 기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스페인의 기후에 큰 영향을 가진다.
7, 8월에는 작렬한 태양으로 남부지역은 45℃, 사막지역은 뜨거운 볕으로 인하여 기온을 높다. 북부의 발레아릭 군도는 35℃이다. 북부 지방의 겨울은 항상 비가 온다. 갈리시아와 피레네 산맥은 강우량이 적고, 눈이 조금 내린다. 한겨울에 남부 지방은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으나 마드리드 북부 지방과 피레네 산간 지방은 춥다.
스페인 내륙 및 남부의 여름 햇빛과 더위는 너무 강렬해서 반드시 모자나 선글라스를 착용하여야 한다.
의류는 한국의 계절과 비슷하게 준비하면 된다.


시차 : -8시간




▶ 그라나다 [Granada]

옛 아랍 문화의 영광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신비로운 도시 그라나다는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의 주도로 옛 그라나다 왕국의 수도였다.눈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북쪽과 과달카비르강의 지류 헤닐강과 다르로강이 합류하는 높이 670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711년경 부터 스페인을 약 8세기 동안다스렸던 이슬람 계통의 나사리 왕국의 최후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그라나다는 최고의 기타 연주곡으로 알려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무대이다. 그리고 시내에는 3개의 언덕이 있는데, 사비카 언덕은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곳으로 일명 알함브라 언덕이라 불린다. 알바이신 언덕 중간에 있는 산 니콜라스 성당 앞은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전체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볼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도피처로서 오밀조미라고 작은 골목길이 인상적이다. 그라나다에는 안달루시아의 될 중에서도 이슬람문명의 흔적이 가장 많이ㅏ 남아 있다고 한다.
그라나다 시내 중심의 시장에서는 싸고 멋진 수공예품을 구입할 수 있고 또한 플라멩코 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 마드리드 [Madrid]

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에 위치하며 해발 646m 고도의 평원 Castilln Plain에 30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이다.
현 마드리드는 비지니스 센터, 행정부, 정부, 스페인 왕가의 대저택 등을 소재하고 있으며, 유명한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한 많은 볼거리로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또한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정열적인 문화와 예술, 유흥을 향유하는 도시이다.

산업
19세기까지는 왕실 소유의 직인이 짠 수예벽걸이, 자기제품 등이 주류 산업이었으나 현대에는 자동차, 오토바이, 항공기, 전기기계 등의 기계공업 산업이 주류를 이루며 고무, 플라스틱, 제약 등의 화학공업, 제지, 피혁, 가구, 출판, 인쇄등의 경공업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산업 지역은 교외와 새 위성도시 지구에 형성되었다.




▶ 바르셀로나 [Barcelona]

스페인 제2의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피카소와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배출환 도시로 유명하다. 이베리아 반도의 북동부 지중해의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으로 온난한 기후를 나타낸다.그리고 카탈루냐와 스페인어 두 가지의 공식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1469년에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고 고유의 카탈루냐어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50년에 창립되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냐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9세기 후반에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시인구는 약 200만명으로 국민 총생산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 최대의 상공업 도시이다. 1888년에 세계박람회가 개최되면서 바르셀로나의 경제력과 도시계획에 대해 국제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그리고 약 10km에 걸쳐 아빙구다 데라 디아고날 거리가 바르셀로나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딕지구라 불리우는 구시가지와 현대의 빌딩이 들어 차 있는 신시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신시가의 중심인 람블라 거리에는 은행,회사,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에 있는 19세기까지 양식의 건물들과, 동ㅉ고의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 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DE MALLORCA]

발레아레스 제도의 대표적인 섬으로 알려져 있는 마요르카는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게 태양이 빛나는 곳 중 하나입니다. 팔마는 로마의 유적들과 고딕양식의 성당, 벨버성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올리브 숲을 거쳐, 해발 400m 에 위치하고 있는 발데모사의 그림같은 마을로의 관광도 가능합니다. 마요르카 진주나 수공예 레이스 등이 대표적인 토삼품입니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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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유럽에 속해 있는 연방 국가 스위스의 공식적인 국가명은 라틴어로 Confederatio Helvetica이고 줄여서 CH라 표기한다. 따라서, 이곳을 여행하다 보면 스위스의 모든 차량에서 국가 표시 CH를 볼 수 있다. 북쪽은 독일, 서쪽은 프랑스, 남쪽은 이탈리아, 동쪽은 오스트리아·리히텐슈타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베른(Bern)이며 그 외의 주요 도시로는 취리히, 바젤, 제네바(쥬네브), 로잔 등이 있다. 연방국은 26개의 칸톤(스위스의 주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토의 60% 가량이 알프스의 고산지대이며 서쪽과 남쪽은 산맥이고, 북쪽은 평야 지대로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이탈리아어로 몬테 비안코:4807m)은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3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매혹적인 알프스 경관은 스위스를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의 하나로 만들어 체르맛, 다보스, 생 모리츠 등의 산악 휴양지, 루체른 호, 루가노, 마조르 호 등의 호수와 루체른, 인터라켄, 로잔, 로카르노 등의 호반 도시에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아와 관광 수입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스위스는 이미 19세기 초에 파리와 영국의 방문객들을 상대로 관광업이 성행하였으며 호텔이 생겨났다. 세계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호텔 경영학은 스위스 호텔의 뛰어난 명성과 본질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유래한 요리는 프랑스 요리의 명성에 크게 기여했고, 현재 스위스의 많은 식당들이 높은 평판을 얻고 있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1인당 초콜릿 소비가 가장 많으며 시계 산업 또한 스위스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Made in Switzerland라는 상표는 정확도로 명성을 얻었고 스위스의 군용 칼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주머니 칼로 인정받고 있다. 또 스위스의 은행은 비밀 엄수로 유명하며, 외국 자본의 피난처로 이용되면서 세계 금융과 은행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면적 : 4만 1285㎢

수도 : 베른(Bern)

인구 : 약 740만명 (2005년 기준)

정치형태 : 연방공화국

종교 :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카톨릭 46%, 개신교 45% 기타 9%의 종교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똑같이 널리 퍼져 있으나 집중도는 주마다 차이가 있다. 신교가 강한 주는 베른과 보, 취리히인 반면에 발레, 티치노, 우리는 대부분 가톨릭이다. 대부분의 스위스인들은 교회세를 내며 정부가 이를 주 보조금 형식으로 교회에 분배한다.

주요민족 : 스위스인들은 고대 켈트족, 로만 및 게르만족의 후예들로 독일인과 프랑스 인, 이탈리아계 종족에 속한다. 독일계가 60%, 프랑스계 약 20%, 이탈리아 계가 약 10% 정도이다.

주요언어 : 다양한 인종과 주변국의 영향으로 독일어 75%, 프랑스어 20%, 이탈리아어 9% 사용된다. 독일어는 전 국토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며 프랑스어와 이탈리이어는 양 국가와 인접한 지역에서 사용된다.

기후
스위스의 기후는 유럽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로 서부 대서양, 동 부대륙, 북부극지 및 남부 지중해 등 유럽의 4대 기류의 영향을 두루 받고 있다.
이 같은 외부 요인과 함께 산지에서 고원에 이르는 지형의 급격한 변화 등 지역에 따라 날씨와 기온의 기복이 크다. 특히 산악지대에서는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지역에 따라서는 여름이라도 방한용 스웨터가 필요하다. 스위스는 봄부터 여름이 여행과 휴양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긴 하지만 산악지대이기 때문인지 기상변화가 매우 심하다. 보통 여름에는 20-25도, 겨울에는 2-6도, 봄, 가을은 7-14도 사이를 오르내린다.

지리
스위스는 유럽 대륙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독일과 346㎞, 서쪽으로 프랑스와 572㎞, 남쪽으로 이탈리아 734㎞,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165㎞, 리히텐슈타인과는 41㎞에 이르는 국경을 이루고 있다.
국토의 70% 이상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되어 있는 스위스는 남쪽지역의 절반 이상이 알프스 산맥이고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는 북서부 지역에는 쥐라(Jura) 산맥이 있다. 그 사이로 제네바, 베른, 루체른, 취리히 등을 잇는 비교적 평평 한 대지가 가로놓여 있다.
국토는 지형에 따라 북동 방향에서 남서 방향으로 나란히 서 있는 쥐라산맥 지역과 중앙 저지(일명 스위스 고원)지역, 알프스 산맥지역 등 3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알프스 산맥은 몬테 로사(Monte Rosa, 4634m), 마터호른(Materhorn, 4477m) 등 험준한 고봉들을 이고 있어, 전 세계 산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만년설 이 일품인 알프스 산맥은 유럽대륙을 적시는 라인 강, 다뉴브 강, 론 강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간단한 현지어
Guten Tag(구텐 탁 : 낮인사), Danke(당케: 감사합니다), Auf wiedersehen (아우프 뷔더젠: 작별인사)

방문적기
겨울 스포츠를 즐기려면 12-4월, 관광과 하이킹을 하려면 5-10월이 좋다.
알프스 리조트는 4월 하순과 5월, 11월에 거의 폐쇄된다.

여행계획
• 스위스에는 다양한 등급의 호텔과 팬션, 유스호스텔 등이 있으며 숙박비는 유럽에서도 비싼 편이다. 숙소를 정할때는 교통편도 중요하지만 호수나 산을 바라보는 고즈넉한 시골에 잡으면 정말 스위스 다운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규모가 작은 숙소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으며 외국인 관광객에게 선호된다.

• 스위스내의 알프스에는 나머지 알프스 전체 지역보다 더 많은 빙하가 흐르고 있다. 빙하의 총면적은 3,000㎢에 이르며 현재의 빙하는 전 국토가 얼음으로 뒤 덮였던 빙하기에 비하면 소규모로 남아 있는 것이다. 몇몇 빙하는 현재도 계속 유지되고 있으나 대부분은 지난 수백년간 조금씩 축소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빙하를 주의깊게 감시하고 정기적으로 빙하를 측정하고 있다. 수력발전에 필요한 물을 이들 빙하에서 얻고 있다. 여름에는 녹아 내린 빙하의 물이 계곡을 흐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 물은 몹시 기온이 낮아 함부로 수영을 하면 위험하다. 따라서 허가된 지역에서만 수영 하도록 한다


역사
스위스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민족은 게르만족 갈래의 켈트족 가운데 헬베티족으로 B.C. 107년 로마에 대항한 기록과 B.C. 58년 알프스 지역을 지나 프랑스로 진격하는 로마군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이후 로마에 정복당하여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은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부 지역은 레에티아(Raetia) 주에, 서쪽은 벨기카(Belgica) 주에 속하였으며 그 후 론 강 계곡에 부르군트 왕국을 포함해서 서부 스위스의 대부분이 성립되었다. 동쪽으로는 알라만 공국이 위치해 있었고, 동남부의 산악 지대는 그 당시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되고 알라만족은 게르만 색이 강하여 독일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부르군트 제국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알라만족과 부르군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고, 알프스의 다른 지역에 랑고바르드족이 기초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어,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카를 대제의 손자가 왕국을 분할할 때 앞에서의 경계선이 다시 통용되었다.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왕 콘라트 4세가 죽은 다음 신성 로마 제국의 왕은 실권을 잃어가고 교황과의 서임권 트쟁으로 약화되면서 일부 지역은 영주들의 독자적인 지배에 들어가기도 했다.
따라서 세력이 강한 영주의 지역은 공작, 백작, 주교, 수도원장, 많은 기사와 도시들의 지역 공동체가 형성 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런 상황이 스위스의 칸톤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주위의 다른 영주들의 팽창욕을 부추길 수 있었는데 이를 막기위해 여러 지역이 연방으로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스위스 내의 평지 지방은 신교를, 산악지방을 카톨릭을 믿게 되면서 종교전쟁이 일어나고 제네바에 세운 캘빈의 신교 교회로 신교가 유럽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캘빈의 영향으로 스위스는 정치, 경제를 재 정립하고 공장들을 세워 지금의 시계공업 같은 기반을 마련한다. 그후 중립을 선언하고 1648년 스위스 연방의 정치적 독립과 중립이 인정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스위스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1847년 이후로 더 이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래된 중립 정책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1, 2차 세계 대전이 스위스를 완전히 비껴간것은 아니지만 스위스는 근본적으로 중립을 지켰으며 전후에 국제연맹같은 기구들이 스위스에 설치되었다. 스위스는 어떠한 국제기구에도 가입하지 않다가 국민투표를 거쳐 2002년 9월 UN에 가입하였다.


공휴일/축제
- 스위스의 공휴일

신년: 1월 1~2일
성금요일
부활절
성월요일
그리스도 승천일
성령강림절의 월요일
건국기념일: 8월 1일
크리스마스: 12월 25~26일

- 스위스의 축제

2월 : 파스나흐트 Fasnacht -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봄 사육제. 특히 바젤과 루체른 행사가 열광적이다.
3월: Combats de Reines - 3월에서 10월까지 발레 지방에서 벌어지는 전통 투우.
4월: Landsgemeinde -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펜첼 사람들이 중앙광장에 모여 야외 의회를 연다.
7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록/재즈 가수의 공연이 열린다.
8월: 독립기념일 - 8월1일 기념행사와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거리행진 - 취리히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테크노 퍼레이드.
10월: 포도주축제 - 노이샤텔, 루가노 등의 와인 양조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
11월: 양파시장 - 베른에서 축제 분위기 속에 벌어지는 시장.
12월: L'Escalade - 사보이 공작의 침략을 물리친 일을 기념하는 제네바 성벽오르기 축제.

국제전화
한국에서 스위스로 전화할 때는 국제전화 호출 번호(001 또는 002), 41(스위스 국가번호), 지역번호(취리히 01 등. 최초의 0은 불필요), 상대방 전화번호 순으로 건다.

*주요도시 지역번호
베른(Bern) : 31
제네바(Geneve): 22
인터라켄(Interlaken): 36
취리히(Zurich): 1

전압 및 주파수
220V에 50Hz를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가전제품을 이용하려면 콘센트를 바꿔야 한다. 호텔에서는 예치금을 받고 빌려주기도 한다.

치안
스위스는 영세 중립 국가로서 일반적인 치안상태는 양호하며 주변 국가에 비해서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소매치기 범죄도 적은 편이다. 그러나 증가하는 외국난민의 영향으로 역이나 공항, 시장등 사람이 많은 관광지에서는 소지품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통화
스위스의 화폐단위는 스위스 프랑이며, 2008년 4월 현재 1스위스 프랑은 약 968원 정도다.


철도
유럽에서도 여행 강국답게 여행자를 위한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철도를 위주로 한 트래블 시스템도 잘 되어 있어 편리하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단순히 도시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오르는 등산 열차와 유람선, 버스도 같이 이용할 수 있다.

스위스 전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스위스 패스와 플렉시패스, 패밀리 카드, 트랜스퍼 티켓, 스위스 카드등이 있으며 여행 여정과 일수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패스를 이용하면 국제 구간의 특급열차에 특별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으며 산악 열차나 박물관 입장시 할인 받을 수 있고 산악 자전거나 스키장비등도 할인이 된다. 그 외 몇몇 호텔도 할인 서비스가 있다.


스위스의 기후는 유럽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로 서부 대서양, 동 부대륙, 북부극지 및 남부 지중해 등 유럽의 4대 기류의 영향을 두루 받고 있다.
이 같은 외부 요인과 함께 산지에서 고원에 이르는 지형의 급격한 변화 등 지역에 따라 날씨와 기온의 기복이 크다. 특히 산악지대에서는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지역에 따라서는 여름이라도 방한용 스웨터가 필요하다. 스위스는 봄부터 여름이 여행과 휴양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긴 하지만 산악지대이기 때문인지 기상변화가 매우 심하다. 보통 여름에는 20-25도, 겨울에는 2-6도, 봄, 가을은 7-14도 사이를 오르내린다.


시차 : -7시간



▶ 그뤼에르 [Gruyeres]

푸르름이 가득한 구릉지대에 있는, 치즈로 유명한 산간 마을이다. 몇 분만 걷게 되면 나타나는 한가한 중심에는 향토 민예품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점이 늘어서 있다. 언덕 위로 솟아 이는 그뤼에르 성은 보존 상태가 양호마여, 시대에 따라 골라 모은 장식이나 가재도구를 견학할 수 있다. 주변의 마을들은 전통적인 관습과 공예품 등을 소중히 지키며 목축을 중심으로 한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출처:스위스 관광청>




▶ 그린델발트

인터라켄에는 남쪽으로 두 개의 계곡이 펼쳐진다. 그 중 하나는 그린델발트를 감싸고 도는데 스키 리조트와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그린델발트는 융프라우 지역의 대형 스키 코스 중 하나로 아이거 Eiger 북벽 아래에 위치한다.

사실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인터라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날씨가 흐린 경우에는 융프라우 등반을 포기하는 관광객들이 많이 몰린다. 여름엔 이 곳에서 Eisgrotte 까지의 짧은 하이킹에서 First 까지의 먼거리 하이킹까지 다양한 코스의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겨울엔 하우프트 거리 주변의 스포츠 상점에서 스키용품을 렌트하여 이 지역의 다양한 스키 코스를 즐길 수 있다.

그린덴발트는 높이가 무려 1,034m인 고원에 위치하여 그린덴발트, 아이거, 슈레크호른, 베터호른 등의 거봉의 등산기지로서 유명한 마을이다. 하지만 인구는 겨우 3,600명 정도이고 마을 주변에는 고원목장이 펼쳐져 있는 국제적인 휴양지이다 그린덴 발트라는 이름은 켈트어의 '바위와 숲'에서 유래했다. 또 빙하의 마을이라고도 불리듯이 오버라, 운하라 두 빙하가 바로 앞에 있다.

그린덴발트를 여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융프라우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배낭 여행자들도 스위스에 가면 거의 다 이곳을 오를 만큼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린덴발바트가 위치한 베르너 오버란트는 아이거 묀희, 융프라우 등 세개의 산을 비롯한 4,000m 급의 웅장한 산에 둘러사인 지역이다. 녹음이 집게 깔린 목초지와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의 샬레(산장), 카우벨(소의 목에 거는 일종의 방울)을 울리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 그리고 목초지 사이를 누비며 달리는 등산열차, 눈 앞에 우똑솟은 높은 산과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등 가장 스위스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 로잔 [Lausanne]

로잔은 스위스 서부 보의 주의 레만 호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스위스 제 4의 도시로 스위스 로망드 지역의 문화중심지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지만 스위스 특유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유서깊은 도시로 국제 올림픽위원회 IOC의 본부가 있으며 스위스 최고 재판소, 로잔대학, 13세기의 성당, 15세기의 성 등의 역사적인 건물도 많이 있다.

로잔의 지역 어디에서든 레만호를 바라볼수 있으며 호수 건너편으로는 생수로 유명한 프랑스 에비앙을 마주보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레만 호 부근과 알프스 산자락에는 세계 각국의 부호들의 호화스런 별장들이 몰려 있다. 제네바와 함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부유한 농업을 바탕으로 무역과 통상의 역도 하고 있으므로 철도 교통이 발달한 곳이다.
로잔은 스위스내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의 생산지인 만큼 제네바로부터 로잔까지 완만한 경사면에 포도밭이 펼쳐지고 있다. 라보 지구는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햇볕을 많이 받아 단맛이 강한 포도를 생산하여 맛좋은 와인을 만들고 있다. 시원한 레만호에서는 여름에 수상스키, 보트 세일링 등을 즐길수 있다.

산업
19세기에는 인쇄, 금세공, 피혁제품 분야의 산업이 발달 하였지만 현재는 정밀기계, 식품, 플라스틱 공업이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업과 관광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 루체른

피어발트슈테터호의 서쪽 끝 로이스강의 기점에 위치하여 취리히에서 남서쪽으로 약 60km정도 떨어진 곳으로 루체른은 중세의 거리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루체른은 산으로 둘러싸인 맑은은 호수가 있으며 피어발트슈테터 호반을 중심으로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로이스 강과, 근교에는 리기나 필라투스같은 유명한 산봉우리들도 있다.
도시를 가른 로이스 강에 의해 만들어진 루체른 호수는 스위스 최대의 리조트 지역이 되었고 관광 산업이 발달하였다. 알프스와 비에르발드 스타테르 호수를 배경으로 빈 마르크트 광장과 하이리첸 광장은 16세기에 번성했던 예술기법인 밝은 채색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스위스의 최대 관광도시이니 만큼 역사적인 유적들과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오래된 건물들과 운치있는 지중해 풍의 경관이 어우러진 곳이다. 특히 카펠 다리는 스위스의 역사의 장면들로 장식되어있는 곳으로 시의 상징이 되고 있다.




▶ 바젤 [Basel]

바젤은 독일과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래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국제 금융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제 결제 은행 BIS 가 있으며, 스위스 최대의 전시장인 '바젤 페어'가 매년 3, 4월에 열리는데 이중 특히 시계 박람회가 유명해 매년 개최되고 있다.
바젤은 스위스 내의 어느 도시 못지 않은 국제 도시인 동시에 취리히의 뒤를 잇는 스위스 제 2의 도시이다. 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그 이유으는 예로부터 학문활동이 왕성했기 때문에 특히 인쇄, 출판 산업이 성행하였다. 네델란드의 인문학자 에라무스와도 인연이 깊은 이 도시에는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있다. 예술에 대한 영향도 지대하여 바젤의 미술관에는 세계적인 걸작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고, 유명한 음악 학원들도 많다. 학문과 문예의 중심지로 명성이 높으며 시민에 의해 건설된 바젤 미술관, 만화 박물관, 종이 박물관을 비롯한 독특한 테마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봄과 겨울사이인 2~3월 사이에는 바젤에서 큰 축제가 열린다. 거리 곳곳에서는 봄을 맞이하는 축제 파스나흐트 Fasnacht 가 성대하게 열린다. 악마나 피에로 등의 특이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피리를 불면서 도시 한복판을 행진하는 화려한 축제이다. 파스나흐트를 시작으로 하여 부활절, 견본시장이 개최되는 가을은 바젤이 가장 활기 넘치는 시기이다.

산업
스위스 최대의 하천 항구가 있어서 외항선들의 근고지가 되고 있는 바젤의 위치에 의해 이곳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 제약 회사의 본사와 공장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고도의 공업도시이다.

바젤은 겨울에는 검은 구름이 끼는 날이 많지만 강수량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시기에는 서쪽으로 갈수록 날씨가 따뜻해진다. 1월은 평균기온은 0'c 전후로 상당히 쌀쌀한 날씨가 지속된다. 여름철인 7월의 평균 기온은 15~16'c 이다. 한 낮의 기온은 30'c를 넘는 날도 있지만 습도가 낮아서 생활하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6~8월에는 비교적 비가 오는 날이 많으며 초근에는 도시에서 열대야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 브베 [Vevey]

몽트뢰에 인접하며, 주위에 포도밭이 펼쳐진 브베는 중세시대부터 와인 산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한 도시이다. 현재는 세계적인 기업 '네슬레'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래된 건물이 남아 있는 골목과 잘 정돈된 화단이 아름다운 레망 호숫가의 산책로, 포도밭 사이를 관통하는 오솔길 등, 가볍게 산책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호반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 챨리 채플린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 인사들의 사랑을 받은 도시로 브베와 몽트뢰(Montreux) 사이에 그들의 일화와 연고지를 찾아볼 수 있는 산책 코스가 있다. 또한 철도나 케이블카로 레 플레이야드, 몽페를랑 등의 크고 작은 산에 오르면 호수와 알프스의 전망과 꽃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이웃 마을인 몽트뢰처럼 브베 역시 매우 패셔너블한 분위기의 도시이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출처:스위스관광청>




▶ 생모리츠 [st.moritz]

 -하이디 휘테(Heidihutte):1979년 스위스가 제작한 TV드라마<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촬영된 산 속 오두막입니다. 그레바잘바스에서의 촬영이 끝난 뒤 생모리츠로 옮겨습니다. 콜리비아로 오르는 케이블의 중간 정차 역 찬타렐라에서부터 이어진 길은 약 100종류의 꽃이 심어진 "하이디 플라워 크래일"이라 불리는 하이킹 코스입니다.

 - 온천 센터 : 미네랄 아로마 온천과 마사지 등 실속있는 프로그램이 가득합니다.

 - 엥가딘 박물관 : 이 지방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민속 기구 등을 전시합니다. 토요일 휴관

 - 세간티니(Segantini) 미술관 : 세간티니의 미술관으로, 그의 유명한 3부작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 생모리츠 호수 :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호반 산책을 할 수 있습니다.

 - 콜뷔리어(Corviglia) : 거리의 중심에서 가까운 전망대로, 호수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이곳의 자랑거리입니다. 케이블을 타고 피쯔나이르(Piz Nair )까지 오르거나 하이킹을 즐기면 좋습니다.

 - 도르위드스톤(Stone of the Druids ) : 고대 켈트민족의 거대한 돌 유적 중 하나입니다.

 - 하이디집 : <하이디> 영화 촬영에 사용되었던 오두막이 있습니다.

즐길거리
 - 다보스(Davos) - 생모리츠 : 기차로 1시간 35분
 - 취리히(Zurich) - 생모리츠 : 기차로 3시간 25분
 - 루체른(Luzern) - 생모리츠 : 기차로 4시간
 - 인터라켄(Interlaken) - 생모리츠 : 기차로 5시간 50분

철도
두 번의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잘 알려진 생 모리츠는 사계절에 걸쳐 즐길 수 있는 세계의 알프스 리조트입니다. 상쾌한 고지대 기후인 여름에는 윈드 서핑과 산악 자전거, 은빛 세계인 겨울에는 스키와 스케이트, 썰매, 봅슬레이 등 온갖 즐거움이 가득하답니다. 눈밭 경마, 눈밭 폴로 등 인기 있는 이벤트도 많은데, 이런 활동적인 스포츠와 함께고급 호텔이나 브랜드 숍이 늘어서 있어, 세계 VIP들이 모이는 기품있는 리조트라는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빙하특급과 베르니나(Bernina) 특급의 발착 지점이기도 하며, 열차나 버스로 엥가딘(Engadin)의 계곡과 브레가리아(Bregaglia)의 계곡에도 갈 수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여행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샤프하우젠 [Schaffhausen]

'선박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샤프하우젠은, 라인강 교역으로 번영한 곳이다. 상트요한 교회와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기사의 집, 시청 사옥 등 중세의 건물이 늘어선 구시가지가 남아 잇는 한편으로, 약 3만 5천 명이 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의 상징적 존재인 므노트성의 위에서는 라인강과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주변에도 볼거리가 많으며, 특히 유럽 굴지의 크기를 자랑하는 라인 폭포는 놓쳐서는 안될 곳이다. 그밖에도 라인강 하강유람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 아펜첼 [Appenzell]

완만한 언덕에 이어지는 전원 풍경이 특징적인 아펜첼 지방. 독특한 풍습이나 축제 등 전통을 소중하게 지키고 있다. 형형색색의 가옥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아펜첼과, 아름다운 겨울 축제 '질베스터클로이제'가 열리는 우어네슈, 치즈 제조로 유명한 슈타인 등 소박한 마을들은 실로 '스위스의 전원'이라는 느낌이 넘친다. 레이스와 직물, 카우벨 장식 등 장인이 만드는 수공예품은 선물로도 그만이다.




▶ 알프스

알프스는 유럽 중남부에 있는 대산맥 체계 이다. 남서쪽 지중해의 제노바 만에서 북동쪽의 빈까지 1,200㎞의 활 모양으로 뻗어 있으며 알프스가 차지하는 총면적은 20만 7,000㎢이다.
알프스는 서부(프랑스 남동부와 이탈리아 북서부), 중부(이탈리아 중북부와 스위스 남부), 동부( 독일,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의 일부) 알프스로 나누어지며, 각각 여러 개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알프스에 인접한 주요 도시들로 프랑스의 그르노블,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이탈리아의 볼차노 등이 있다.

알프스는 지질학적으로는 제3기(250만~6,500만 년 전)의 젊은 습곡산맥에 속한다. 유명한 마터호른 봉(해발 4,478m)을 비롯하여 지역 대부분은 높은 봉우리와 급경사진 비탈이 특징인 반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역(예를 들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돌로미티케 산맥)은 거대한 낭떠러지와 협곡이 많다.
산맥의 평균 높이는 1,800~2,400m이며, 3,000m가 넘는 봉우리들도 많다. 그중 가장 높은 것은 해발 4,731m의 몽블랑이다. 알프스의 지형에 큰 영향을 준 빙하침식은 산봉우리와 인접한 계곡과의 높이차를 매우 크게 만들었으며 대서양, 지중해, 흑해의 분수령을 이룬다. 알프스는 유럽의 주요 강인 론, 라인, 도나우, 포 강의 지류 등이 발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높이 1,950m의 연평균 기온은 0℃이다. 연강우량은 바깥쪽 산맥에서는 2,000㎜이나 안쪽 산맥으로 들어 갈수록 감소해 500㎜ 정도이다. 빙하는 3,840㎢에 달하는 면적을 덮고 있으며, 해발 3,000m 이상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중에서 스위스 남서부에 있는 알레치 빙하(면적 128㎢ 이상)가 가장 크다.

알프스는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 같은 낙엽교목이 저지대에서부터 해발 1,500m에 이르는 지점까지 자라고 있으며, 중간지대(해발 1,800m)에는 가문비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의 침엽수가 자란다. 풀, 꽃, 관목을 볼 수 있는 고산초원은 해발 2,400m에 있다. 가장 높은 고산지대(3,000m 이상)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암석과 만년설이 덮여 있다. 알프스의 몇몇 국립공원과 보호구에서 아이벡스류, 샤무아, 마못쥐, 산토끼, 검 독수리 등의 본토박이 동물상(相)을 볼 수 있다.
알프스 산맥으로 인하여 생긴 스위스 남부의 생고타르 고개에 개통된 생고타르 터널(1980)은 세계에서 가장 긴 16.3㎞의 간선도로 터널이다.

스위스 남동부 그라우뷘덴 주에 있는 보호구역은 장크트모리츠에서 북동쪽으로 24㎞ 떨어진 이탈리아 국경에 인접해 있다. 1914년에 설립되어 1959년에 확장된 이 공원은 넓이가 169㎢이며, 중앙 알프스 산맥과 고회석으로 이루어진 동(東)알프스 산맥 가장자리의 방대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목적을 가진 자연보호구역으로, 벌목, 방목, 꽃을 꺾는 행위, 사냥, 낚시 등이 일절 금지되어 있다. 알프스 산맥의 진귀한 식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귀한 곳이다. 야생동물로는 아이벡스(알프스 야생염소), 샤므와(알프스 영양), 붉은 사슴, 여우, 담비, 마못, 독수리 및 사냥용 조류 등이 있다. 잘 닦여진 도로들이 이 공원을 가로지르고 있고 그 도로들에서 여러 방향으로 걸어다닐 수 있는 오솔길들이 뻗어 있다.




▶ 융프라우 [Jungfraujoch]

융프라우는 해발고도 4,158m로 알프스 산맥의 하나로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으며 몇천년전에 만들어진 빙하를 볼 수 있다. 융프라우를 오르면서 보는 설산의 위엄은 자연의 웅장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융프라우에는 세계에세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기차역인 융프라우 역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융프라우를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융프라우로 오르는 길은 산악 열차로 급경사를 톱니바퀴를 이용해 오르며 특히 클라이네샤이덱에서 융프라우 역까지는 꽤나 긴 터널을 통과하는데 이 터널을 만들기가 까다로왔다고 한다. 정상까지 오르면서 터널 속에서 중간 중간에 내려 좌우로 난 전망대를 통해 빙하의 흔적을 구경한다.

정상에 오르면 우체국, 식당, 카페, 기념품 점, 전망대등이 있고 날씨가 좋으면 밖으로 나가 눈을 직접 만질 수도 있으며 썰매나 스키등을 탈 수도 있다. 특이한 것으로는 얼음궁전으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천정부터 바닥까지 얼음을 이용한 얼음동굴로 곳곳에 얼음으로 만든 조각들이 있어 독특한 맛을 낸다. 정상에선 비싸긴 하지만 사발면을 팔고 있다.

융프라우는 여름에도 눈과 빙하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날씨가 흐리지 않다면 햇살이 좋아서 그다지 춥지 않지만 보온은 필요하다. 또한 고지대이니 만큼 기상변화가 심해 간혹 눈보라가 치고 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의 날씨를 보이기도 한다. 즉 산 아래 도시의 날씨와 다르며 방송에서는 실시간으로 기상상태를 보여주므로 이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융프라우는 여름에도 날씨가 쌀쌀하고 햇빛이 강하니 긴팔 옷과 선글라스를 준비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 인터라켄 [INTERAKEN]

베른은 스위스 중심에 자리잡은 수도로서 베른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스위스 중서부 아레강 현안에 발달한 도시로 베른이란 이름은 이 지방에서 곰 사냥을 많이 한다는 것에서 유래되어 있다. 그만큼 베른 주의 깃발과 공원 등지에서도 곰에 관한 것들을 볼 수 있다. 스위스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스위스의 심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은 스위스에서 4번째로 크다.

스위스의 도시치고는 역사가 짧은 편이지만 12세기 후반에 건설된 군사 도시로 시작하여 인구 약 14만여명중 86%는 독일어, 그외 스위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77%가 프로테스탄트, 그외 나머지가 카톨릭교로 이루어져 있다. 베른은 알프스의 줄기인 아레강을 끼고 1154년무렵에 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부르군트의 영주 체링거 5세에 의해 1191년부터 본격적인 시가지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베른의 시가지를 싸고 도는 아레강과 동서로 뻗어 있는 도로, 어느 모습하나 놓치기 어려운 정경들이며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시역은 중심부의 시청사, 대성당, 연방정부청사 등으로부터 확장되어 아레강을 건너는 다리로 구시가와 다리 건너편의 주택가와 공장들로 이어져 있다.

산업
구시가에 집중된 정밀기계, 섬유, 초콜릿 등의 공업이 활발히 이루어져 있다.


인터라켄이라는 도시 이름은 브린츠(Brienz)와 툰(Thun) 두 개의 호수 사이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며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들이 도시를 둘러싸여 있다. 날씨가 좋으면 융프라우 정상이 보이기도 한다.
주로 융프라우를 비롯한 산악열차가 출발하는 기점으로 이용되는 도시로 스위스 여행객 중 대부분이 이 도시에 들른다. 도시는 그다지 크지 않아 산책 삼아 걸어다닐 정도의 크기이며, 도시가 전체적으로 호반 휴양지 분위기를 띈다.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곳인 만큼 기차역 주변으로 고풍스런 호화 호텔과 쇼핑센터, 상점,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기차 역에 내리면 역 옆으로 인터라켄의 도시 지도가 있고 램프를 이용해서 숙소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으니 이를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 제네바 [Geneva]

스위스의 3대 도시 중의 하나인 제네바는 레만호 주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제네바는 국제연합UN, 국제적십자IRC,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등의 국제기구가 집결해 있는 국제 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민의 1/3이상이 외국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각국의 관광객들로 늘 북적거리며, 각국의 노동자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인다. 망명 신청한 사람이 가장 많은 도시인 제네바는 스위스 은행이 자리잡아 있다. 도시전체가 깔끔하고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정돈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네바로 불리워지고 있는 이곳은 프랑스에 인접한 곳으로 프랑스어로는 주네브(Geveve), 독일어로는 겐프(Genf)라고 한다. 하지만 이 도시는 프랑스 어권의 도시이기 때문에 주네브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위스 제 3의 도시로서 론 강이 흐르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 루쏘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칼뱅의 종교 개혁 이래 구체제에 반대하는 은신자들이 선택한 도시이기도 하다. 도한 혁신적인 사상의 볼테르와 바이런, 소련의 레닌 등이 방문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기도 한 곳이다. 아름다운 레만 호수를 곁에둔 채 알프스 산을 바라보고 있는 제네바는 외관상으로 작은 곳이지만 유럽의 중심에 있는 유럽 여행의 출발선이다.

제네바의 관광은 19세기의 영국 귀족들이 휴가를 스위스로 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제네바를 선호하여 지금의 관광대국으로 발전하고 시계점, 보석, 귀금속점 등의 상가가 번영하고 스위스의 대표적인 상품들이 많이 발전하면서 제네바는 일찌기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 여름의 제네바 호반은 온난한 기후에 다른 지방보다 먼저 공원과 뜰의 꽃들이 매력적으로 만발해 있으며, 아름다운 산책로가 곳곳에 있어 주변의 야산으로 산책을 하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수선화의 대군생은 산의 나라 스위스에서의 짧은 봄의 정수이며, 그래서 현지호텔에서는 그 꽃을 관광하는 '나르시스 투어'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스위스의 기후는 대부분 여행하기에 알맞고 사계절이 뚜렷히 나타난다. 우기는 없지만 산간지역의 날씨는 변화가 많다. 고도 100m이상 올라갈때마다 기온은 0.5도씩 내려간다.




▶ 체르마트 [Zermatt]

해발 1620미터에 위치해있 작은 마을인 체르마트(Zermatt)는 5600명의 적지 않은 주민이 거주하며 4000미터가 넘는 총 38개의 봉우리에 둘러쌓여 있는 산악마을입니다.
체르마트는 스위스의 어느 목적지 중에서도 드물게 화석연료차량 없는 청정환경과 다른 곳과 비교할수 없는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어 많은 산악매니아들과 자연애호가들이 연중 내내 찾는 곳입니다.
그래서 체르마트 내에서는 마차나, 전기차량을 이용하거나 또는 걸어서 이동해야 하며, 이것이 다소 어려운 듯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실 체르마트라는 도시는 마테호른(Matterhorn Glacier Paradise) 때문에 이름이 알려진 곳입니다.
알프스산맥에는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있습니다. 그 중 단연 으뜸인 것이 마테호른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것입니다. 월트디즈니 조차도 이 산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체르마트 방문직후 그 인상적인 자태에 너무도 감동하여 마테호른 모형을 디즈니랜드에 만들 정도로 마테호른에 심취했던 것입니다. 파라마운트(Paramount Pictures)사의 로고로 사용되어 더욱 유명한 산이 바로 마테호른 입니다.
1865년 7월 영국인 에드워드 윔퍼와 그의 동료들이 처음으로 마테호른 봉을 정복하였습니다. 하산도중 일곱 명의 팀원 중 4명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전 세계 산악계에 급속히 타전되었고 이를 계기로 마테호른은 더욱 매력적이고, 신비한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테호른은 “산 중의 왕”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칭호는 단지 그 높이가 4478미터의 고산이기에 붙여진 이름은 아닙니다. 카리스마적인 존재감과, 흠잡을데 없는 산의 형상, 때때로 안개와 어우러지는 봉우리, 그래서 알프스에서 이 만큼 독특하고 신비한 기운을 가지게 하는 곳이 없을 정도의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알프스의 어느 지역보다 멋진 자태를 뽐내는 마테호른 봉(Matterhorn Glacier Paradise)은 유럽인들과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산으로 융프라우를 대체 할 만한 차세대 메인 데스티네이션이라 할 만 합니다.
세계 최고 청정지역 중의 하나로 유명한 체르마트 마테호른은 스위스 내에서도 정평이 나있는 아름다운 하이킹 코스와 여름에도 설원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스키리조트(여름슬로프-23km 겨울슬로프-50km이상)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통화
CHF(스위스프랑) - 약 870원

일반적으로 11월~3월까지는 클라인 마테호른(Klein Matterhorn)이 -7~-10도 정도이며, 그 외의 시즌에는 -10도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으나 방한복과 썬글래스, 모자 등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http://bergbahnen.zermatt.ch/e/bahnen/wetter.html

공항에서 시내까지
제네바나 쮜리히공항에서 체르마트까지 열차로 3시간반 정도면 갈 수 있다. 보통 스위스패스(Swiss Pass)를 이용하면 스위스내의 거의 모든 열차(Bernina Express, Glacier Express, Golden Pass, William Tell)는 물론 편리한 포스트버스(Post Bus)를 이용할 수 있다. 포스트버스를 이용할 경우 체르마트의 입구격인 Visp 나 Brig 에서 체르마트행 열차로 갈아탈 수 있다. 체르마트역은 종착역이기 때문에 내리면 바로 체르마트 빌리지로 들어가게 된다.

도시로
체르마트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차량을 운행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은 곳입니다. 따라서 무공해 청정지역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전용차량이나 코치(버스)로 여행할 경우에는 일단 태슈(Tacsh)에서 셔틀 열차를 갈아타고 체르마트 역까지 이동하여 전기택시나 그린옐로 환경버스를 타시고 체르마트시내까지 이동하여 케이블카 탑승지점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교통정보◆

◇ 로잔(Lausanne) - 체르마트 : 기차로 2시간 45분
◇ 인터라켄(Interlaken Ost) - 체르마트 : 기차로 3시간 10분
◇ 제네바(Geneva) - 체르마트 : 기차로 3시간 50분
◇ 취리히(Zurich) - 체르마트 : 기차로 4시간 20분
◇ 루체른(Luzern) - 체르마트 : 기차로 4시간 30분

역안내
총 5개의 플랫폼에서 매시간(반시간)마다 Brig 나 기타역으로 출발하며, 역사내에 호텔이나 아파트먼트(호텔보다 좀 낮은수준의 숙박시설)를 검색하고 방상태를 바로 확인 할 수 있는 무료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설치된 전광판에 각 숙박시설명이 코드로 표시되어 있어 코드번호를 누르면 호텔과 바로 연결됨)

철도
◆단체손님의 경우◆
손님들은 체르맛에 가기위해 보통 코치(버스)를 타고 Tasch(태쉬-체르맛에서 10분거리) 까지 이동하여 근처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전기버스로 환승하여 체르마트로 이동하게 됩니다. 셔틀과 체르마트내의 전기차량 이용료 - 18chf(주차비포함)

◆개별손님의 경우◆
보통 Visp 나 Brig 역에서 기차(Regio)를 갈아타고 체르마트로 이동합니다(약1시간 소요). 체르마트 빌리지는 매우 작은마을이므로 걸어다녀도 무리가 없슴.

택시
◆택시셔틀◆
체르역에서 전기택시를 탈수 있다. 역에서 보텀스테이션(마테호른 글라시어 파라다이스 탑승지점)까지 모셔다 드립니다. (약 12chf)

기타
체르마트 역에 내려서 역사를 빠져나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전기택시와 전기버스이다. 전기 택시는 크기가 매우작다. (다마스보다 작다) - 보텀스테이션 까지 약 12 chf(스위스프랑)

경비 및 환전
기본적으로 스위스프랑으로 환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체르마트 빌리지내에 은행이 있고 체르마트역에서 환전이 가능합니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싼것을 감안하여 경비계획을 잡는것이 좋습니다.

관광제안
체르마트가 주목받는 또 하나의 특징은 풍부한 식물들과 동물상들로 이 곳이 천혜의 자연 천국임을 보여주며, 에델바이스 같은 몇몇 종류의 보호종들을 비롯하여 1000종 이상의 꽃들이 가는 발길마다 여러분을 맞이 합니다.
잘 짜여진 체르마트 하이킹 코스의 이정표들은 4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삼림, 꿈같은 호수, 인상적인 빙하들로 여러분을 인도하며 아마도 야생 사슴들을 비롯한 각종 야생동물과 하늘 위에서 유유히 위용을 자랑하는 독수리들과 조우할 기회도 갖게 될것입다.
마테호른의 스키 파라다이스는 겨울 설원스포츠의 완벽한 조건을 제공합니다. 겨울시즌에는 일년 내내 총 연장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스키 슬로프가 준비되며, 여름시즌에도 알프스의 높은 해발과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여름스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름하여 설원스포츠 매니아들의 진정한 낙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저녁에 체르마트 역에 도착하여 1박이나 2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체르마트 빌리지가 크지 않기 때문에 호텔에서 보텀스테이션 까지 마을을 가로질러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실제로 빌리지내의 아무리 먼거리도 15분 이면 충분합니다. 오전에 마테호른봉(Matterhorn Glacier Paradise)관광을 마치고 오후에는 마을을 거닐어보세요. Kirch Strasse에는 마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습니다. 역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Snow & Alpine 센터에서 Matterhorn Glacier Paradise 티켓과 스키패스를 살 수 있습니다. 센터 바로 옆길로 들어서면 알파인뮤지엄(Alpine musium)과 조시(Josi-와인,치즈판매점)를 만날 수 있는데, 체르마트 빌리지의 역사와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실제로 체르마트 빌리지는 여행객들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한 지역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열차역에서 내리면 바로 호텔 검색을 할 수 있고 그리 복잡하지 않은 빌리지, 친절한 사람들 등등 매우 매력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파인 뮤지엄 입장료◆
- 어른 : 8 chf
- 4명이상단체 : 6 chf
- 청소년(1~16세) : 무료
- 개장시간 : 16:30~18:30(일요일은 휴관)

방문적기
사계절이 언제든 방문하기 좋은 곳입니다. 숙박시설로 봐서는 4~5월, 10~11월이 비수기여서 숙박료가 싼편입니다. 하지만 마테호른의 진가는 겨울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입니다. 크리스마스시즌에 방문하는 것도 권할만 합니다만 방사정이 다소 어려운 관계로 미리 예약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쇼핑
체르마트의 유명한 쇼핑가인 반호프 거리는 500여 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시계제품과 보석류 제품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호화로운 보석매장에서는 만날 수 있는 최고급시계류들은 쇼핑매니아들을 만족시킬 쇼핑의 천국이라 할 만합니다. 뿐만아니라 패스트푸드를 비롯하여 스위스, 이태리, 맥시코, 타이, 일식, 그리고 중식등 다양하고 풍부한 고급요리를 제공하는 식당까지 각양 각색의 미각을 충족시킬수 있는 곳이 바로 체르맛입니다.

여행계획
오전 8:30에 곤돌라가 보텀스테이션에서 출발합니다. 클라인 마테호른(Klein Matterhorn)까지 45~50분정도 소요됩니다. 중간에 푸리(furi)역과 트로크너슈텍(trockner steg)을 차례로 지나가는데 푸리역까지는 8인승 곤돌라를 타고 푸리에서 클라인마테호른 까지는 120인승 의 거대한 마테호른 글라시어 파라다이스 호를 탑승합니다. 글래시어 익스프레스 호에서 내려다 보는 마테호른의 숨막히는 전경은 마치 놀이 동산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방불케 합니다. 내려올때는 푸리역에서 내려서 하이킹을 해보는 것도 권할만 합니다. 보통 오전에 모든 것이 끝나며, 보통 트로크너 슈텍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오게 됩니다.(26~30chf)

즐길거리
체르마트는 하이킹과 스키, 이렇게 두 가지가 유명합니다. 일반적으로 하이킹 코스가 잘 정돈되어 있고, 스키는 여름에도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르마트 역전에 있는 빅토리아(Viktoria)쇼핑점 지하에 렌탈샾도 있어 장비를 렌탈할 수 도 있습니다.

스키복 상하+스키장비 렌탈→약 110 chf (2005년4월 기준)
스키패스→반일권부터 시즌권까지 다양 (58chf~) : Snow & Alpine 센터에서 구입 가능
자전거 렌탈가능





▶ 취리히 [Zurich]

스위스의 북 서쪽에 위치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의 수도로 오해하지만 단지 우리나라와 직항 항로가 개설되어 있는 곳일 뿐이며 항공으로 입국시 대부분 취리히를 이용하게 된다.
스위스는 북으로 독일, 동으로 오스트리아, 서쪽으로는 프랑스, 남으로는 이태리와 인접한 나라이다. 스위스의 제 1의 도시로서 산업, 경제, 문화이 중심지이다. 눈덮힌 알프스의 장관과 맑고 푸른 호수들 사이에 마치 그림같은 곳으로 국제 도시로서의 명성이 높으며 취리히 호와 리마트강 옆에 아담하게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인구는 많지 않지만 문화의 중심지로 제임스 조이스, 바그너 등의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 학자들이 찾아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고, 교육학의 선구자인 페스탈로치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이니 만큼 많은 국제회의가 개최되고 있으며 스위스 중앙은행, 취리히 공과 대학 등 유명한 기관들도 자리잡아 있다.

취리히의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전형적인 스위스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이미 로마시대 때 부터 지리적 이점을 살려 지금의 린덴호프에 세관이 설치되고 취리쿰에서 지명이 탄생되었다. 스위스의 유일한 도시적 면모를 갖추고 있는 취리히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어등의 3개 국어가 사용되며 스위스에서 독일어 권의 중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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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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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프러스는 그리스어로는 키프로스라고 발음하며, 터키어로는 크브르스라고 한다. 공식 명칭은 사이프러스 공화국이고, 사이프러스는 그리스 로마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중해 동쪽 깊숙한 곳 중동 앞 바다에 있는 섬이다.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이 섬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비너스가 탄생한 사이프러스의 파포스 섬에는 꽃잎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고 어디선가 날아온 또 다른 신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큰 조개껍질 하나가 연꽃처럼 수면위로 떠오르며 진주를 내뱉 듯 아름다운 처녀 비너스를 탄생시킨다. 즉, 사이프러스는 미의 여신,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아프로디테)가 이 키프로스 섬 앞바다에서 솟아올라왔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이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하지만 지금의 사이프러스는 민족과 종교로 갈라져 끊임없이 유혈극을 벌여오며, 중동 못지 않은 화약고로 알려져 있다. 전체 인구 95만 중 80%가 그리스계, 20%가 터키계로 지금은 남쪽 60%의 땅을 그리스계가 차지하여 '사이프러스 공화국'을 만들었으며, 북쪽 40% 땅을 터키계가 차지하여 '사이프러스 연방 터키계 주민 공화국'으로 나뉘어져 2천여 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곳은 북부의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TRNC)과 64%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RC)으로 나뉘어 있다. 남부는 주로 그리이스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제적으로 여전히 전체 섬의 합법적인 정부로 알려져 있다.

다른 중동 지역들과는 다르게 사이프러스에서는 어업이 아주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그래서 어업은 현재까지도 이 나라의 주요 경제 부문을 차지하고 있는 데, 관광업과 목축업 또한 이 나라의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광물 자원으로는 구리, 황철광, 석면과 석고가 있으며, 종이와 화학, 섬유, 정제등의 제조업이 발달했다.

훼리
해운에 있어서 정기 국내항로 역시 갖추어져 있지 않은 나라이다. 단지 그리스, 시리아, 이스라엘, 이탈리아, 레바논 및 이집트 등으로부터 정기 선박편이 취항하고 있기는 하다. 이곳의 유명한 항구로는 Famagusta를 꼽을 수 있다.

수도 : 니코시아(Nicosia)

종교 : 그리스 정교가 대부분으로 78%가량 되고 나머지 18%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주요민족 : 종교 구조와 비슷해 그리스인이 78%, 터키인이 18%, 영국인이 약간 있다.

주요언어 : 그리스어와 터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며 영어도 통용된다.


여행계획
• 신선한 씨푸드와 더불어 바비큐 요리가 사이프러스의 전 지역에 걸쳐 유명하다. 그리스와 터키의 생활문화가 공존해 그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대표적 음식으로는 바비큐 된 양고기 등과 야채를 얇게 잘라서 빵 안에 넣어 먹는 케밥(Kebab), 간고기와 쌀을 포도나무 잎에다 넣어서 먹는 돌마스(dolmas), 고기, 허브, 양파를 넣어 만든 스튜인 타바(Tava) , 쇠고기나 토끼고기에 와인, 식초, 양파, 향신료를 넣어 만든 스튜인 스티파도(Stifado) 등이 있다. 기후적 특성에 걸맞은 각종 신선한 과일류들을 아주 싸게 구입할 수 있다.

• 사이프러스의 대표적인 축제인 '홍수 축제'는 큰 홍수에서 구제됨을 경축하기 위한 축제의 일환이다. 이때가 되면 사이프러스의 해안가 마을은 가장 행렬, 민속음악, 춤으로 시끌벅적거린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날 아도니스(아프로디테의 연인)가 다시 살아나 아프로디테(미의 여신)와 해안에서 만난다고 한다. 정화의 수단이기도하고 행운을 가져온다고 여겨져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바닷물을 뿌리며 우리나라의 야자타임과 비슷한 Chattismat 놀이를 즐긴다.
그리고 2월에 행해지는 리마쏠(Limassol) 카니발은 Limassol에서 열리며, 5월의 '꽃 페스티발'은 사이프러스의 전 지역에서, 6월에서 9월 까지의 기간에는 '파피아(Pafia) 페스티발'이 파포스에서, 7월에는 Lalnaka지역에서 '랄나카 페스티발'이 열린다. 8월 말에는 와인 페스티발이 열리며, 9월에는 여름 시네마 페스티발이, 또한,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성대하게 개최된다.


역사
청동기 시대(약 BC 1600∼1050)에 이곳은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그리스 문화와 언어를 보유하고 있던 미케네인과 아타이아인이 찾아와 정착을 하여 미케네 문명의 영향하에 있게 되었다. BC 800년에는 페니키아인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BC 7세기에 11개의 키프로스 왕국들이 아시리아의 영향력 아래에서 크게 번영하면서 세력을 떨쳤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사이프러스섬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넘어갔으며, BC 58년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395년 로마제국이 분열된 후 사이프러스는 잠깐 동안의 기간들을 제외하고 700년 이상 비잔틴 제국 황제들의 지배를 받았다. 7세기에 이르러서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이 시작되었으며, 그후 300년간 비잔틴 제국과 칼리프가 공동 영토로서 사이프러스를 다스렸다.

영국의 리처드 1세가 성지를 향한 십자군 원정중인 1191년 이 섬을 정복하여 예루살렘의 추방된 왕인 기 드 루시냥에게 주었고, 루시냥의 봉건 군주국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 그 후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점차 사이프러스의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마침내 15세기에 사이프러스는 베네치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573년는 오스만 투르크가 사이프러스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이후 수에즈운하 방위를 위한 군사기지로서 사이프러스를 생각하고 있던 영국은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투르크로부터 행정권을 빼앗고, 제 1차 세계대전 개시와 더불어 1923년 로잔느 조약으로 사이프러스를 식민지화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 후 부터는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반영 감정이 섬 전체에 확산되었으며 분할을 주장하는 터키계 주민, 전략적 위치로 인한 열강 세력의 간섭등으로 완전한 독립이 쉽지 않았다. 1960년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독립 공화국을 이룩하였다.


치안
치안사정은 비교적 좋은 편이나 신변안전에 유념하여야 한다. 휴양지중 동쪽에 위치한 Agia Napa는 여름철 휴가기간에 치안이 상대적으로 안 좋은 지역이며 최근 범죄발생이 급증하고 있응 실정이다.


주의사항
• 건강상 특별한 유의사항은 없으나, 여름철에는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으므로 탈수, 일사병, 열사병 등에 주의해야 하며, 특히 햇빛이 강해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 크림, 모자가 필수적이다.

• 수돗물에는 석회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가급적 병에 든 생수를 마시는 것이 좋다.


시차 : -7시간



▶ 니코시아

니코시아는 섬의 Mesaoria Plain중심인 5개의 손가락이 있는 Kyrenia산의 아름다운 북쪽지역에 위치한다. 니코시아(Nikosia)는 사이프러스(키프로스)의 수도이다. 비록 이곳의 기원은 약5000년전 청동기 시대에서 시작되지만, 10세기이후 1,000년동안 그들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곳의 이름인 니코시아에 관한 여러가지 속설들이 있는데, 그리스어 Lefkosia 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람들에게 유명한 나무인'Lefki'라는게 인정되고 있다. 사이프러스의 정부와 외교본부 그리고 사이프러스의 문화적인 중심지가 모두 이곳에 있다.
니코시아는 330~1191년에 비잔틴인들이 지배하다가 1192~1489년에는 뤼지냥가(家)의 왕들이 차지했으며 1489~1571년에는 베네치아, 1571~1878년에는 투르크, 다시 1878~1960년에 영국이 통치하는 등 여러 세력들에게 지배당했다. 그래서 니코시아는 키프로스 역사의 흥망성쇠와 동, 서방 양쪽에서 받은 영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니코시아에서는 경공업이 주로 지역 시장을 상대로 발달해 있어 면사, 직물, 담배, 밀가루, 제과, 청량음료, 신발류, 의복 등을 생산하는것이 이 지역의 주요 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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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국기는 위로부터 파랑, 검정, 흰색의 동일한 3개의 수평의 줄로 이루어져 있다. 1940년 이전에 사용하던 국기를 1990년 5월 최고회의(Supreme Council)가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2년 7월 7일 국기의 문양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국기의 3가지 색상은 에스토니아의 역사, 민속, 풍습, 자연을 나타내고 있다. 파랑색은 신뢰, 충성, 헌신을 상징하며 하늘, 바다, 호수를 나타내며, 검은 색은 암울했던 시절의 에스토니아 국민들이 겪었던 고난을 상징하며 전통적으로 과거 에스토니아 농부의 검은 색 웃옷을 나타낸다. 흰색은 계몽과 덕(德)을 향한 노력을 상징하며 자작나무 껍질과 눈, 여름 동안의 백야를 상징한다.
그들의 국장은 1925년 6월 19일 의회에서 국장 사용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국장은 문양이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가 있다. 큰 것은 방패 모양의 금색 바탕에 은색 눈과 붉은 색 혀를 가진 푸른색 사자가 3 마리 세로로 있고, 방패의 왼쪽, 오른쪽, 아래의 3 면을 금색의 오크나무 잎이 둘러싸고 있다. 작은 국장은 방패 둘레의 금색 잎이 없고 나머지는 똑같다. 첫 번째 사자는 자유를 위해 싸운 용기를 상징하며, 두 번째 사자는 1343년 Harjumaaa에서 있었던 폭동의 용기를 상징하고, 세 번째 사자는 1918-1920년 자유를 위해 싸운 에스토니아인들의 용기를 상징한다. 오크나무 잎은 에스토니아의 인내와 힘, 그리고 자유의 영원함을 나타낸다.
국가는 3절로 되어 있으며,'나의 조국, 나의 자랑이며 기쁨'이란 뜻으로 작사자는 Friefrich Pacius이고, 작곡자는 John Voldrmer Jannsen이다. 에스토니아의 수도는 북부에 위치한 탈린(Tallinn)으로 핀란드만(Gulf of Finland)에 접해 있는 항구도시이다. 에스토니아어로 탈린(Tallinn)이란'덴마크 사람의 거리'라는 뜻이다. 12세기 중엽부터 역사에 등장하여 4,500개 이상의 역사적 건축물이 잘 보존된 고도(古都)이다.
발트해 가장 남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국가의 기원을 알아보면 우선 이 지방에서는 옛부터 에스토니아 인이 살고 있었으며 북구 제국과 독일의 침략을 자주 받았고, 18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다음 해 1918년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제2차 대전 중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지만 최근 소련의 정치, 경제 재건 정책(페레스트로이카)과 연방해체에 의해 1991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독립을 달성했다.
또한, 에스토니아의 자연 환경은 내륙의 호수는 총 2,015㎢이며 1,400개의 자연 및 인공 호수가 있다. 가장 큰 호수는 러시아 연방과의 국경지대의 페이프스(Peipsi / 3,555㎢)이며, 가장 큰 인공호수는 러시아와 에스토니아의 국경의 나르바저수지(Narva / 190㎢)이다. 가장 깊은 호수는 Rouge Suurjav(수심 38m), 두 번째로 큰 호수는 Vortsjarv(270㎢)이고, 그외에도 Pihkva 호수 등이 있다. 길이가 10㎞ 이상이 넘는 강이 420개가 있다. 분당 50㎡ 이상의 강물이 흐르는 강은 Narva(399㎡), Emajogi(72㎡), Parnu(64㎡)등 3개 뿐이다. 핀란드만(Gulf of Finland)으로 흐르는 북쪽 지방의 강들은 그림같은 폭포를 이루며 일부는 동쪽의 페이푸스호(Peipsi)와 서쪽의 리가만(Gulf of Riga)으로 유입된다. Narva강은 Peipsi호를 거쳐 급류를 이루다가 핀란드만으로 흘러드 데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이 수력을 이용하여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식물은 북부 혼합림에 속한다. 선사시대에는 해안일부지방만 제외한 전국토가 숲으로 뒤덮혀 있었다. 당시는 양물푸레나무, 단풍나무, 가문비나무, 소나무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현재는 숲이 전국토의 40%를 차지하며 오리나무, 자작나무 등이 자라고 혼합림을 이룬다. 숲은 에스토니아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산림과 관목지대는 늑대, 엘크, 곰, 멧돼지, 스라소니, 수달 등의 사냥 장소가 되었다. 발코손바닥사슴, 노루, 붉은 사슴, 멧돼지 등을 비롯한 60여종의 포유동물이 서식하며 특히 북동부 삼림에서는 곰과 시라소니를 볼 수 있다.동식물은 빙하시대 이후 1만년 동안 계속되었다. 1,500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59종의 식물과 198종의 동물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현재 Lahemaa(649㎢)국립공원, 1개의 생물보호구역, 1개의 수상보호구역, 5개의 국가 자연 보호구역 등 총 630㎢의 보호구역이 있으나 당면한 문제는 증가되는 공기 및 수질 오염과 자연보호이다.


위치 :  유럽 동남부
수도 :  사라예보 (Sarajevo)

보스니아(보스니아어: Bosna 보스나, 세르비아어: Босна 보스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80%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시차 : -7시간



▶ 탈린

발트해의 핀란드만(灣)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
기원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이 만든 성채 자리에 성을 삼은 데에서 비롯한다. 13세기에 비스뷔 ·뤼베크 ·브레멘 등 발트해 연안 여러 도시의 상인들이 이주하면서 한자 동맹의 중심도시가 되어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1346년 발데마르 4세가 시(市)를 튜튼 기사단에 팔아 넘겼고, 1561년 스웨덴에 속하였으나, 나중에 쇠퇴하였다. 69년 덴마크 군함의 포격을 받았으며 70년, 77년 러시아에 점령되었다. 1710년 황제 표트르 1세가 이곳을 러시아 발틱 함대의 근거지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에스토니아 독립 전에 항만지구의 일부는 소련의 해군기지로 이용되었다.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 유럽 어느 곳도 중세풍의 성벽과 건물위로 돌출한 탑, 뾰족한 교회첨탑, 꼬불꼬불하며 자갈로 포장된 거리 등이 뒤섞인 탈린의 구시가 만큼 14, 15세기의 분위기를 잘 간직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매우 현대화되어 헬싱키의 교외라 불린다 탈린 중심에 있는 토옴페아(Toompea)언덕은 여행객들이 꼭 보아야 할 곳이다. 19세기 러시아정교의 알렉산드르 네브스키(Alexandr Nevsky)성당이 있으며, 에스토니아 의회 리이키코쿠(Riigikogu)의 집회장소인 토옴페아성이있다. 그리고 1233년에 세워진 루터교성당 토옴키리크(Toomkirik), 그 가까이는18세기 귀족의 저택에 세워진 에스토니아 미술박물관, 1475년경에 높고 견고하게 세워진 탑 키에크-인-테-셰크(Kiek-in-de-Kök) 등이 있다.탈린 구시가지 동쪽 약 2km에 있는 카드리오르그(Kadriorg)는 오크, 라일락, 마로니에 나무들로 우거진 쾌적한 공원이다. 바로크양식의 카드리오르그궁전과 함께 이탈리아인 니콜로 미케티(Niccolo Michetti)에 의해 러시아황제 피터대제를 위해 설계되었다. 이 궁전은 1718년에서 1736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피터대제 자신이 벽돌을 3장 쌓기도 했다. 궁전 뒤에는 피터대제가 건축당시 거처했던 조그만 오두막집이 있는데 지금은 피터대제 개인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탈린에는 숙박시설이 많기는 하지만 여름에는 호스텔일지라도 미리 예약해야한다. 구 시가에 있는 라에코야 광장(Raekoja Plats :Town Hall Square)에는 탈린의 식당과 카페들이 몰려있다. 여름에는 라에코야 광장 전체가 가벼운 스낵, 핫도그, 전통적인 코틀레트(kotlett), 사쿠맥주 등을 파는 임시 노천카페로 붐빈다. 또한 구 시가지에 한창 성업중인 나이트클럽이 많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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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국가들 중의 하나로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산업 혁명이 이루어진 곳으로 정식 명칭은 벨기에 왕국(The Kingdom of Belgium)이다. 수도는 브뤼셀이며 유럽 대륙의 북서부에 남북길이는 약 193km, 동서 최대 너비는 약 240km의 우리나라의 경상북도 만한 나라이다.

게르만 혈통의 네덜란드계 플라망과 라틴계 혈통의 왈로니, 그리고 작은 부분이지만 독일계의 마을까지 있다. 여러 민족이 좁은 땅에 어우러져 살고 있어서인지 벨기에인의 이해심은 깊다고 정평이 나 있으며 언어적인 천재성으로 유럽의 대표부 EC와 NATO 본부등 국제 기관을 수용할 정도의 국제적인 국가이다.
벨기에는 유구한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전통의 도시이기도 한 브뤼셀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작은 파리라고도 불린다. 과거 스페인 점령 하에 있었던 국가 중의 하나로서, 예로부터 그 위치가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한때는 네덜란드 왕국(Dutch Kingdom)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유럽사에 브뤼셀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996년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의 브뤼셀은 지금은 없어져 버린 센느강 섬에 만들어진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서독일에 해당하는 겔른과 플랑드르 지방의 물품교역의 중간지로서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의 번영과 발전이 역사에 기록되었고, 오늘날 유럽 중심지로 자리잡은 것이다.

오늘날의 브뤼셀은 시원시원한 대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수많은 고층 빌딩들이 도시를 메우고 있고, 바로크와 고딕식 건물들이 현대 문명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수많은 국제기업들이 이곳에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세계적인 도시의 명성을 지니고 있다.
벨기에에는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플란다스의 개'를 쓴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며 그 유명한 브뤼셀의 그랑플라스의 오줌싸개 소년상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명소다. 벨기에의 맥주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특히 맥주로서 가장 높은 14도의 맥주를 만들고 있다.


수도 : 브뤼셀

인구 : 약 1천만명 (2003년 기준)


관광제안
벨기에의 축제는 그 나라 국민들의 역사적인 전통과 성격을 잘 나타내게 화려하고 재미있게 표현된다. 때문에 시간이 잘 맞아 떨어지면 축제의 열기에 푹 빠져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다. 벨기에의 축제에는 언제나 가장 행렬이 따르며, 시민들이 최고로 즐기는 행사라 고 할 수 있다. 이 날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축제를 즐기며, 여행객들이라면 꽤 인상적인 추억을 남길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축제에는 4월초, 중순에 열리는 부활절과 5월의 메이데이, 같은 달에 열리는 고양이축제, 7월 첫째주 목요일의 오므항 축제, 7월 하순경의 마녀잡기 축제, 그리고 8월 말의 베고니아 축제와 12월의 성혈의 행렬이 있다.

그 중에서도 뭐니뭐니 해도 가장 유명한 이곳 벨기에의 축제로는 '뱅슈 카니발'을 들 수 있다. 2월은 카니발의 시즌으로 벨기에 각지의 마을에서 카니발이 개최되는데, 특히 뱅슈의 카니발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유럽에서는 동지 때부터 춘분에 걸쳐 가면축제가 열리는데, 그 중 벨기에의 인구 3만 정도의 작은 도시 뱅슈에서 열리는 카니발은 특히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통적인 카니발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가면축제가 유달리 발전된 이유는 가면을 쓴 인물들이 풍요로움과 행복을 가져다 주고 질병과 악령을 쫓아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카니발의 유래는 1549년 로마제국 황제의 여동생이 뱅슈에서 머물고 있을 때, 황제와 그 아들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뱅슈에서 엄청나게 열린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축제 기간에는 색종이를 뿌려 도시가 온통 형형색색으로 변하고 축제참가자들은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흥겹게 춤을 춘다. 특히 '참회의 화요일'에는 뱅슈 카니발의 왕이라고 할수있는 '질'이 등장하는데 질은 뱅슈인들에게 위엄있고 장중한 존재로서 풍요와 행복을 상징한다. 질이 되기 위한 자격조건은 굉장히 까다로와 벨기에 국적을 가지고 뱅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이 축제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남자이어야만 한다.
그는 축제 아침에는 녹색 안경에 구레나루와 밀랍 가면을 쓴채 춤을 추고, 오후가 되면 시청앞 광장을 계속 돌면서 북소리와 함께 그 유명한 타조 털이 달린 엄청나게 큰 모자를 쓰고 사람들에게 오렌지를 던지면서 춤을 춘다. 오렌지는 호사스러움을 상징하며 특이한 복장과 독특한 뱅슈만의 문화를 맛볼수있는 뱅슈의 카니발은 유럽을 대표하는 화려하고 예쁜 축제로 매년 많은 관광객을 불러 들이고 있다.

여행계획
• 벨기에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6~9월이고, 한여름이라 해도 기온은 23℃ 정도로 지내기 좋다. 봄이 시작되는 4~5월도 좋은데, 5월은 브뤼셀이나 이페르를 위시하여 각지에서 축제의 계절이 시작되고, 가을에는 아르덴 지방의 단풍이 좋고 생쾌한 드라이브 시즌이 된다. 겨울은 흐린 날이 많고, 일조시간도 짧아서 16:00경이면 어두워지는데 이 시기는 오페라, 연극, 콘서트, 발레 등의 시즌이기도 하다. 겨울은 해가 빨리 지며 관광에는 불편하지만 오페라,콘서트 등이 자주 열리므로 이를 염두에 둔다. 4월에서 9월까지가 가장 벨기에에서는 따뜻한 날씨이고 관광하기 좋지만 질척질척한 도로를 걸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언제라도 방문해도 좋다. 거의 벨기에의 전통의상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인코트와 우산을 준비해가는 것도 필수일 것이다.

• 벨기에를 지키고 있는 위대한 3인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벨기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사람들을 뜻한다. 누가 뭐래도 벨기에의 가장 큰 영웅은 '탱탱'이다. 탱탱은 철학가이자 시인, 만화가이기도 한 Herge가 탄생시킨 만화 주인공이다. 귀여운 강아지 미루와 함께 리포터로 활약하는 탱탱의 모험기는 현재 52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에서 출판중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기에의 만화중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스머프도 속한다.
벨기에의 두번째 영웅은 '와댕'이다. 일명 '파이 던지기 대가'라고도 한다. 그가 스타덤에 오른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이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인데 빌 게이츠 얼굴에 파이를 세 번이나 던졌다. 그는 빌 게이츠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유명 인사의 얼굴에 크림칠을 했다. 그는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파이를 던진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마지막 영웅은 '부드왱' 전 국왕으로 벨기에 국민의 90% 이상이 이 부드앵 국왕을 '현명하고, 재치있고, 안정적' 이었다고 평가한다.

• 벨기에는 손으로 뜬 레이스로 유명한 곳이다. 브뤼헤 등에서는 노랗게 물든 것 같은 아름다운 색상의 손수건이나 섬세한 레이스를 가장자리에 두른 테이블 중앙의 장식용 덮게·꽃병 받침 ·냅킨등의 쇼윈도에 전시되어 있다. 손뜨게라면 오늘날에도 최고의 사치품으로 여겨지는데 결혼을 앞둔 사람은 과감히 웨딩용 벨을 사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EC나 NATO본부가 있는 탓인지 브뤼셀의 물가는 전체적으로 비싼편이지만 크리스털 제품·레이스 제품·손으로 만든 초콜렛등은 비교적 싼 편이다.


역사
로마인의 지배가 5세기 초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뒤에는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5세기 중엽∼7세기 말엽)와 카롤링거 왕조(8세기 초엽∼9세기 중엽)가 지배했다. 로마인들이 패망한 후, 벨기에는 5세기경 프랑크가의 지배를 받았지만 샤를마뉴 대제의 제국이 멸망 한 후에는 여러 제 후의 공국으로 바뀌었다.
여러 공국중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가 14세기말에 플랑드르 지방의 지배권을 얻었고 15세기 말, 부르고뉴와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혼에 의해 통합 되었다. 오늘날의 벨기에 지방은 1504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516년에 결혼과 유산을 통해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함께 스페인 왕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 당시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쳐서 스페인 네덜란드라고 불렀다.

스페인 지배시 왕위 계승전쟁 후에 벨기에의 지배권은 오스트리아로 지배권이 넘어갔으며, 다시 나폴레옹의 프랑스로 넘어갔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벨기에는 네덜란드로 넘어갔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1830년 독립하고 1839년에야 네덜란드가 양국간의 국경과 독립을 인정하고 중립국이 되었다.

1910년 Albert I세가 즉위하여, 1차 대전 중 독일에 항전하였고, 전후 벨기에는 독일과의 일부 국경지역을 할양 받았으며, 독일 식민지 루완다와 부룬디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 또한 전후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포기하였으며, 각종 사회개혁이 이루어 지기도 했다.
2차 대전중에는 독일에 패하여 영국에 망명정부가 수립되고 전후 책임 문제로 국왕이 퇴위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이후 1950년대 유럽의 여러가지 공동체 설립에 힘쓰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1984년에는 베네룩스 관세동맹을 맺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치안
전체적으로 안전한 나라이지만 유럽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집시나 불법 체류자들의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특히 기차역, 공항, 쇼핑센터, 유명관광지등이 주 범행장소가 되므로 주의하도록 한다.


시차 : -8시간




▶ 겐트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Brussels)을 중심으로 북부지방인 플랑드르 지방에 위치해 있으며, 브뤼셀과 브뤼헤(Bruges), 안트워트(Antwerp)와 브뤼헤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운하화 된 라이에 강과 스헬데 강의 합류지점에 있는 대 도시권의 중심지로서 벨기에 북서부에 있는 동(東)플랑드르 주의 주도이다.

겐트는 7세기에 세워진 벨기에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며 플랑드르 지방의 유서 깊은 중심지이자 벨기에에서 4번째 규모의 도시이다. 겐트에는 Gent-Terneuzen 운하로 인해 중요한 항구가 있어 이 항구에서 바다를 통해 도시로 제품들을 공급하고 있으며, 현재 겐트는 벨기에 제2의 항구도시이자 방직공업의 중심지이다.

겐트는 벨기에의 어떤 도시보다도 과거의 유산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며 도시내 건축물들은 여러 건축양식을 동시에 보여주는 주요한 매력물들이다. 또한 겐트는 '꽃의 도시'라고도 불리우는데 도시 주변의 꽃 재배자들은 전세계로 아름다운 꽃들을 판매하고 있으며, 매 5년마다 겐트 꽃 박람회(Gent Flower Show)가 개최되어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벨기에 국립대학(Belgian State University)를 비롯한 교육기관에 많은 젊은 학생들이 있어 겐트는 중요한 플랑드르 지방의 문화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 브뤼셀 [Brussels]

브뤼셀은 런던에서 316km, 파리에서 308km, 암스텔담에서 202km, 쾰른에서 219km, 룩셈부르크에서 213km, 코펜하겐에서 924km의 거리를 두고 주요유럽국가들의 수도의 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고, 인구 120만의 대 도시로 인구 밀도는 매우 높은 편이지만 산악 지방이 거의 없는 지형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용면적이 넓고, 국토가 그다지 좁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구주연합의 수도이기도한 국제도시로 도로, 철도, 항공 등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EU 집행위원회와 NATO본부를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가 있으며, 국제적인 도시의 모습과 함께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건물들을 통해 중세 도시의 향기들이 물씬 풍기는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벨기에 최대의 도시다.
브뤼셀 주민의 70%가 불어계통, 30%가 네덜란드어 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개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같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 이름, 교통 안내 표지판 등이 2개 언어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유구한 역사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 중세의 건물 들과 수많은 현대적인 고층 빌딩들이 도시를 장식해 더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통의 도시로서 과거에는 스페인 점령 하에 있었던 북해 연안의 저지대 국가 중의 하나로 그 중의 중심 지역으로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며 네덜란드 왕국 (Dutch Kingdom)의 중심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17세기경에 이미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평을 받은 브뤼셀 시가는 서쪽의 상업구와 동쪽의 주택구로 갈라져 있다. 지금의 브뤼셀은 사방으로 대로가 뻗어 있고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철도와 간선도로가 모두 브뤼셀로 집중되어 있으며, 벨기에 여행의 가장 적당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
브뤼셀은 중부유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중세 유럽풍의 고전적인 건물과 회색 빛의 색바랜 거대한 돔, 파리를 연상시키는 문화 유적지 등 브뤼셀은 수도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서의 역할 또한 대단하다. 총 1490여개의 국제 기구 외에도 250여 개의 외국 기업의 유럽기지 이기도 하다. 상업 및 서비스 분야는 큰 자랑거리 이며 컨설팅, 정밀기계 공학, 전자, 화학, 제약, 컴퓨터, 식품 가공 통신, 음향, 영상 산업 등에서 수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하절기가 평균 22-23도, 동절기가 평균 1-4도로 온화한 편이나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 많은 전형적인 유럽의 날씨를 보이고 있다.




▶ 브뤼쥐

브뤼쥐는 '천정 없는 미술관'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예술적인 도시로 북서부 서 프랑드르 주의 주도다. 그림같은 운하, 교회의 탑, 수도원의 기념비 등 고풍스러운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다. 미술가 로덴바하는 작품을 통해 브뤼쥐에서는 수많은 탑의 그림자가 주는 압박이 매우 괴롭다고 표현할 만큼 첨탑이 많은 도시다. 또한 계절별로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고 아름다워서 4계절 어느때나 방문해도 좋은 도시이다.

브뤼쥐는 9세기경부터 항구도시 운하 도시로 크게 번영하였으며 10세기에 프랑드르 백작의 영도 아래에서 자치 도시권이 승인 되었다. 또한 14세기에 한자 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양모방적, 수직물 공업, 레이스, 다이아몬드가공 등의 발전으로 중세유럽의 국제도시로 번영하였다. 또한 15세기에는 판 아이크, 델구스, 멤링 등의 여러 예술가들의 활약이 돋보인 곳이기도 하다.




▶ 앙뜨베르펜

벨기에의 제 2의 도시이자 무역항으로 벨기에 최고의 항구도시이다. 플랑드르의 거장인 루벤스가 이곳을 대표하는 예술인이다.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고금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안트베르펜에 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작품을 제작했다. 종교화에서부터 풍속화에 이르기까지 생의 즐거움으로 가득찬 작품들을 그려 바로크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 진다. 그리고 안트베르펜의 관광은 그로스 마르크트부터 시작되며 구시가를 따라서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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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명  바티칸시국(Holy See)
지정년도  1984
유네스코 분류  문화
테마분류  문화유산
소재지  Vatican City State
좌표  N41 54 07.8 E12 27 26.5

위치 :  로마시
언어 :  이탈리아어, 라틴어
기후 :  온대지중해성 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교
면적 :  0.44㎢

수많은 고대 유적을 가진 국제적 관광 국가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시내 시 지역 안에 바티칸 시국(市國)이 있다. 현재 바티칸은 카톨릭의 총본산으로 카톨릭과 관계된 국제적인 연구 및 교육기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속한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 요한 바오로가 살고 있는 바티칸 궁전,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 바티칸 박물관과 시청사 등으로 이루어진 초미니 국가지만 엄연한 한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우고 있고, 인터넷 도메인 네임에 한국이 kr을 쓰듯이 바티칸 시국은 va를 사용한다.

한 번에 30만까지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 흰색 선이 도로위에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국경이다. 바티칸은 이탈리아가 19세기 들어 근대통일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교황청 직속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으며 1929년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의 지역에 대해 주권을 인정받아 세계에서 영토 0.44㎢의 가장 조그만 독립국이 되었다. 현재 바티칸의 토권은 성베드로 대성당과 그 주변 및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로마 동남쪽 120km지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하계 관저에 국한된다. 영토내에는 성 베드로광장, 대성당, 교황궁전, 관청, 미술관, 도서관, 은행, 방송국, 인쇄국, 철도역, 우체국, 시장 등이 있다.

이 국가에서 대표적인 명소중의 하나인 성베드로 성당의 정문 계단 앞에는 성바오로상과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성 베드로의 상이 보이는 데, 이 회랑의 형태는 예수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본뜬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낸 형상이다. 성당 중앙의 대 '쿠로라'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2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황의 제단이 있다. 그리고, 성당 내부의 6만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홀은 길이가 현관을 포함하여 211. 5m이며, 천정 높이는 45.44m이다. 대성당 중앙 끝의 창문에는 말개의 길이가 1.5m인 '성령의 비둘기'가 장식되어 있어 눈에 띄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상이다. 이는 그가 21세때 만든 조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상으로 관람객들이 꼭 보고 지나가는 코스가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베드로 성당의 돔은 전세계에서 가장 큰 것에 속하며, 돔 밑에는 모자이크로 된 4복음서 저자인 마르코, 루가, 마태오, 요한의 초상 화가 네 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성당의 돔의 위용에 압도될 정도이며, 마르코가 들고 있는 펜의 길이는 무려 1,65m나 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작게 보인다고 한다. 베드로의 묘 앞에 꿇어앉아 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교황 비오 6세이고, 이 안쪽 상부에는 비둘기의 스테인드글라스,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베르니니의 거대한 '성 베드로 의자'가 유명하다. 성 베드로가 사용했다고 하는 나무 의자도 있으며 왼쪽 계단은 교황의 지하묘로 향한다.

바티칸 시국하면 대표적으로 떠 오르는 것이 바티칸 궁전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나와 광장 옆 길로 돌아가면 위치해 있는데, 14세기 아비뇽 유폐를 마치고 교황청이 바티칸으로 되돌아 온 이래 교황의 거주지가 된 이 궁전으로 20개에 달하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소장품은 역대 교황이 모은 것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미술과 미술사적으로 다양한 시대의 진귀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소장품중 아주 중요한 대표작만 골라 보는 데도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밖에도 여행객들과 관광객들이 처음으로 통과하게되는 벨 베데레의 뜰(Cortile Ottagonale)에는 국보급 유물인 여러 조각상들이 있어 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바티칸은 로마 관광객의 대부분이 방문하는 곳이며 특히 카톨릭 신자들에게 반드시 들려보아야 할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 성지를 순례를 목적으로 매년 부활절에 교황의 연설을 듣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이는 신도가 1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항공
이탈리아 로마의 시구역에 자리한 바티칸 시국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 공항을 이용한다

주요민족 : 인구는 약 1,000명정도이며 주로 이탈리아 인과 스위스인이다.

주요언어 : 대표적인 언어로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이며 그중 라틴어가 교회 공용어이다.

기후
바티칸 시국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나 겨울에는 발칸반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의 영향을 받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연 평균기온은 15.5 ℃, 연 강수량은 750mm이며, 강수량은 9~12월에 많아 11월 강수량이 100mm가 넘지만 7월에는 불과 15 mm에 달한다. 물론 해에 따라서 변동이 심한 편이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3년마다 7, 8월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겨울은 우계로 구름낀 날이 많지만 여름에는 비가 소나기 형태로 갑작스럽게 내렸다가 갠다. 특히 고지는 저지보다 비가 많아 하천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역사
서기 64년경 로마 황제 네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베드로의 시신이 바티칸의 언덕에 묻혀있으며 350년 경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성전인 성베드로 성당을 세우면서 교회의 재산권이 인정되고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내에서 크리스트교가 정식으로 인정되었지만 4~5세기경 훈족과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제국은 동, 서로마로 분열된다.

로마교회는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III세의 우상 파괴론으로 그리스 정교와 로마 카톨릭으로 양분되었다. 이후 로마 카톨릭은 서부 유럽에서 계속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756년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프랑크 국왕에게 라벤나와 그 외 도시를 기부받아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고, 이어 칼대제의 영토 증여로 교황령은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제국의 수도는 라벤나, 콘스탄티노플 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중세시대 교회는 봉건제도와 함께 중세사회의 막강한 권한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16세기 말 교황령의 규모는 18,000㎢, 인구도 312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와 일정한 조세등으로 세력이 확장된 교회는 각국의 왕실 문제에도 관여하는 등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되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이에 따른 왕권의 강화 등으로 아비뇽의 유수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교황의 권위는 하락하고 만다. 1513년 경에는 자금난으로 신축이 지연된 베드로 성당을 위해 면죄부를 발행 종교개혁이 일어나 전 유럽을 신, 구교간의 전쟁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종교전쟁은 웨스트팔리아(Westphalia)조약으로 종결되고 네델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하며, 독일의 신·구교는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어 서구 기독교는 가톨릭 개신교(프로테스탄트)로 분열되었다.

교황령은 중세, 르네상스시대, 근대를 거치면서 영주들의 세력속에서도 증가하게 되었으나, 1870년 이탈리아가 로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를 통일하면서 교회의 세속적 권력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870년 이탈리아 임마누엘 왕은 보불 전쟁 때에 프랑스 군이이 로마를 철수한 때를 이용하여, 로마를 점령하였고,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기고 영토를 박탈하였다.

1922년에 교황이 된 Pius Ⅵ세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1929년 이탈리아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하고 바티칸을 주권 독립국가로 인정함을 골자로 하는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 바티칸은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급기야 오늘날 바티칸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984년에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는 카톨릭을 국교로 한다. 로마는 성도이다' 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조항을 제거하여 교회의 특권을 축소하게 되었다

전압 및 주파수
일반적으로 전기 규격은 220V, 50Hz이고, 두 개의 동그란 핀이 부착된 플러그를 사용한다.

치안
범죄율이 높은 곳은 아니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이고 바티칸이 있는 이탈리아가 유럽에서도 관광객을 노린 소매치기 범죄가 높은 곳이므로 소지품 관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통화
Euro화를 사용한다.


주의사항
바티칸 박물관과 카타콤베 관광 시, 지나친 노출은 금지된다. 여성은 민소매, 미니 스커트, 남성은 반바지 차림 등은 삼가야 한다. 즉, 바티칸의 어느 곳이든 관광할 때에는 소매가 없는 나시옷이나 배꼽티, 미니 스커트, 반바지, 샌들 차림의 복장을 하고는 입장이 금지되니 주의해야 한다




▶ 바티칸 [Vatican City]

바티칸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심지로 교황이 지배하는 독립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이탈리아 로마(Rome)의 북서쪽, 티버강(River Tiber)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베드로(St. Pietro)가 순교하고 묻힌 곳이자 역대 교황들의 중심 거주지이다. 남동쪽에 있는 동시에 30만명 수용가능한 성베드로 광장 앞 도로 위에 그어진 흰색선이 이탈리아와의 국경이며, 이 광장을 제외하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티칸은 독자적인 통신체계, 우체국, 라디오 방송국, 의료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나 식량, 물, 전기, 가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자는 수입 한다. 이곳의 문화는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많이 쇠퇴하였으나,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비평가, 미술가 및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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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 귀퉁이의 빨강 테두리를 한 십자(十字)는 세인트 조지 십자(George Cross) 훈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몰타 국민이 연합군에 가세하여 잘 싸웠기 때문에 영국 국왕 존 6세가 하사하였으며, 1943년 12월에 빨강과 하양만으로 된 기에 추가되었다. 빨강과 하양 2색기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11세기에 사라센인(人)의 지배에서 몰타를 해방시킨 시칠리아의 로저(Roger) 백작의 기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 가장 일반적이다. 빨강은 정열을, 하양은 순수·정의·평화를 나타내며, 가로세로 비율은 보통 3:2이다. 1964년 9월 2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제정하였다.

정식명칭은 몰타공화국(Repubic of Malta)이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남쪽 90km의 지중해 중앙에 몰타(Malta)를 주도(主島)로 고초(Gozo)·코미노(Comino) 등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중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학적 유적이 풍부한 곳으로, 선사시대의 무덤인 하이포게엄(Hypogeum),  신석기시대 사원, 바로크풍의 수도 발레타(Valletta) 등이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세계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1814년 영국의 영토에 편입되어  제1,2차 세계대전 시 영국의 전쟁 수행에 유익한 역할을 하였고, 1964년 독립 후에도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항공, 관광, 금융의 중계지 역할을 자임하면서 2004년 5월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행정구역은 없으며, 행정상 절차는 지방의회에서 감당한다.

남부 유럽 지중해 중앙부에 위치하며 여러 개의 섬인 몰타 제도(諸島)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다. 1530년부터 요한기사단(몰타기사단)의 영유지로 있다가 1798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었고 2년 뒤 영국이 탈취하여 1814년부터 영국 영토로 있다가 1964년 독립하고 영국연방에 가입하였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남쪽 지중해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 몰타는 언제나 푸르고 맑기로 유명한 지중해의 작은 섬으로서, 이곳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다. 몰타는 페니키아어로 '피한지'또는 '항구'라고 하는 의미로 고대 지중해 교통의 요지였다. 제 2차 대전에는 연합군에 가세하여 잘 싸웠기 때문에 영국 국왕 죤 6세가 몰타 주민에게 그 영예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세인트 죠지 훈장을 수여해, 1943년 12월에 국기 백색 바탕의 형태를 도입하였다. 1964년 영연방 일원으로 독립하였고 공화제를 도입, 정부형태는 내각 책임제 를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제주도 면적의 1/6에 해당되는 몰타 공화국은 고조(Gozo), 코미노(Comino), 몰타(Malta), 이외에 3개의 작은 무인도인 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경선은 없고 해안선의 길이가 140 km에 이른다. 몰타의 섬들은 주로 석회암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가 185-245 m에 달하고 그 주위를 에워싼 검푸른 점토질의 경사지가 남쪽으로 점점 낮아진다. 섬의 남쪽은 해안 주변이 낮은 평지를 이루며, 반대로 섬의 북쪽은 해안선을 따라서 고원과 같은 높이의 들쑥날쑥한 절벽이 있고, 이 만은 천연 항구를 만든다.
석회암이 많은 지질학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몰타에서는 작물의 경작이 힘들기 때문에 계단식 대지를 만들거나 관개(灌漑)를 이용한다. 또한 물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경작에 부족한 물은 바 물에서 소금기를 제거한 민물로 충당한다. 이들 섬에는 영구적인 강이나 호수가 없으므로 토양 형성이 느리고, 따라서 자연적인 식생이 드물다. 전 국토중 이용가능한 부분은 38%, 영구 경작지는 3%, 초목지나 산림지는 0%, 기타가 59%를 차지하고 있다.

몰타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멜리에하만의 해변을 들 수 있다. 이곳은 모래사장이 넓고 깨끗해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 드는 곳이며, 발레타(Valetta)시의 카스티 광장과 마르파의 패러다이스 만은 기암괴석과 들꽃으로 조화를 이루는 해변으로서 유명하다. 그리고, 므디나의 성 베드로 사원과 그밖에 국립 박물관, 고고학박물관, 영국 해군기지, 경마장 등도 있다.

항공
몰타의 국제공항은 수도 Valleta에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Luqa에 있다. 이 국제공항은 1973년에 설립되었으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도시와 연결되고 있지만 우라나라와 직항 운항되는 항공편은 없다.

면적 : 316㎢

수도 : 발레타(Valleta)

종교 : 카톨릭 98%, 기타 기독교와 회교를 믿는 리비아인의 소수 있다.

주요민족 : 몰타인의 외모는 키가 작은 편으로 아랍계 혼혈이다. 그외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언어 : 몰타어와 함께 영어가 사용되고 있다.

지리
남지중해의 시칠리섬 남쪽 93㎞에 자리하고 있는 몰타 공화국은 고조섬(Gozo), 몰타(Malta)섬, 코미노(Comino)섬과 그외의 무인도 3개의 섬으로 구성된 총 6개로 이루어 진 곳으로서, 면적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1/6에 해당된다. 또한, 이 곳에서 북아프리카 연안의 최고지대는 Dingli Cliffs를 볼 수 있는 데, 이곳의 높이는 245m이다. 35.50 N, 14.35 E에 위치하며, 중부 지중해에 있는 작지만 전략적인 3개의 섬인 몰타에는 강은 없고 건조한 석회석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은 이후 BC 217년에는 로마에 점령되었으며 870년 경에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몰타는 1091년, 시칠리아 백작인 노르만 귀족 루제로 1세가 이곳에 상륙하여 몰타 국경내에서 아랍인을 격퇴하였으며 1530년에는 기사단(Knights of Malta)에 양도 되어졌고, 1798년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몰타 공화국을 점령하였다. 그 후 1815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에 합병된다.

1964년 9월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였으며 1971년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비동맹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고, 1974년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몰타는 1974년부터 1987년까지 국제 비동맹기구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시험한 것이 실패하고 1987년 이래 경제를 자유화하고 EC회원국 가입을 신청했다.


치안
유럽에 비해 범죄 발생율이 저조한 나라로 여행객에겐 안전한 곳에 속한다. 그러나, 마약과 관련된 범죄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통화
몰타 Lira를 사용하며 미화 1달러는 약 0.5리라 정도 된다.

시차 : -8시간



▶ 발레타 (Valleta)

몰타섬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몰타의 수도이자 항구도시인 발레타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도시이자 유럽공동체(EU)에서 지정하는 유럽문화도시 중의 하나이다. 발레타시의 중심부는 지중해의 발레타 해협에 돌출한 스케베라스 산(Mount Sceberras)의 벼랑 위에 서 있다. 발레타시가 있는 몰타섬은 지리적 위치상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요새도시로 시작하여 외곽지역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발레타 시가 위치한 스케베라스 산은 만의 한가운데로 튀어나와 있어 만을 동쪽의 그랜드하버(Grand Harbour)와 서쪽의 마르삼세트 항(Marsamxett Harbour)으로 나누고 있다. 발레타시는 이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가로망 및 도로 주변의 건물들은 직각 격자형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데, 이는 르네상스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초기 도시계획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발레타시에는 산업시설은 거의 없으며 중계무역 및 지역내 거래의 중심지이다. 또한 값진 예술품, 지중해의 온화한 날씨, 중세의 문화유산, 절벽 및 해안과 같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모두 갖춰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관광지로서 고급호텔이나 레스토랑 등 관광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도시이다.

교육
발레타시내의 주요한 교육기관으로서는 1592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설립한 몰타대학교(University of Malta)와 18세기 말에 세워진 몰타 국립도서관이 있다.

산업
발레타시에는 산업시설이나 산업활동이 거의 없으며, 관광업 이외에 주로 중계무역이나 지역내 섬들간의 상업적인 거래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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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경 가까이에 위치한 소국으로 독립국이라고는 하나 프랑스와의 관계가 깊어 언어도 프랑스 어를 사용한다. 국토는 바티칸 다음으로 작은 나라다. 배후에 산지가 있고 기후는 온난하며 경치가 매우 좋고 아름다와 세계적인 관광 휴양지로 잘 알려져 있다. 재정은 카지노, 우표, 담배 등의 수입으로 조달되며 1월의 몬테카를로 다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으며 로마 시대에는 무역항으로 번영, 1911년 알베르 1세에 의해 헌법이 제정되었다.

모나코의 국기는 2개의 크기가 같은 수평면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윗면은 흰색, 아랫면은 빨간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그 모양이 인도네시아의 국기와 흡사하다. 오늘날 국가의 수입 총액 가운데 상당 부분은 무역 거래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얻어지며 모나코는 관광 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휴양지로 손꼽힌다. 한때 겨울 명소로 널리 알려졌으나 지금은 모나코 해변과 잘 갖추어진 정박 시설로 여름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모나코라는 나라 이름의 유래는 이 지방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이 모이코스(독신자)라고 불리운 것에 의해서라는 설이 있다. 해라클레스가 만들어 놓았다는 모나코는 좋은 항구로 인해 옛부터 지중해의 중요한 항구로 여러 번 분쟁에 휘 말렸던 곳이기도 하다. 징병 제도도, 세금도 없으면서 주민 1인당 소득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모나코는 카지노와 5월에 열리는 모나코 그랑프리로 유명한 곳이다.

이 작은 규모의 나라는 크게 4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모나코 항의 남쪽에 암석이 돌출 된 Monaco Ville인 구시가와 카지노와 그랑프리 경주로 유명한 항구 북쪽을 Monte Carlo라고 하며, La Condamine는 항구 주위의 평지를, Fontville는 항구 남서쪽의 공업 지대를 일컫는다.
더군다나 그레이스켈리가 왕비였던 모나코 왕국은 세계 최고의 휴양지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니스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이곳 몬테 까를로 역에 내리면, 바로 모나코에 닿을 수 있다.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넓고 푸른 잉크빛의 바다가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갖가지의 다양한 화려하기 그지 없는 요트들의 형상이 더욱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왕궁도 구경하고 박물관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가에서 찍은 모나코의 전경은 그야말로 휴양이라는 말의 뜻을 영상으로 표현할 만할 것이다.

니스에서 하루만에 여행하기에 최적이며 가파른 산이 지중해로 이어지는 한쪽 면을 계단처럼 차고차곡 들어선 건물들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다. 세계의 부호들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놓고 휴가를 보내거나 카지노에 심취한 도박(?)꾼들이 몰려드는 카지노의 메카이기도 하다.
몬테카를로 카지노, 몬테카를로 스포팅 클럽, 카페 드 파리스, 롭스 호텔의 선 카지노 등 유명한 네 개의 카지노가 몬테카를로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모두 매일 밤 한번의 대박을 기대하며 돈뭉치를 들고 나타나는 부호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모나코는 환락의 세계로도 이름있지만 쇼핑과 관광에서도 빠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모나코 항구의 왼쪽 언덕위에 모나코 시를 시원스럽게 바라다볼 수 있는 왕궁이 있고, 왕궁과 가까이에는 450종 4,500여마리에 이르는 해양 생물이 전시되고 있는 해양 박물관, 올드 모나코 박물관, 열대 정원, SAS 자동차 콜렉션 등 작은 도시 국가에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차 있다.매년 5월이면 포뮬러 1 대회가 도시를 가로질러 펼쳐지는데 이때는 몰려든 관광객이 모나코의 인구의 3배가 넘는 100만 명까지 늘어난다.

훼리
모나코는 아름다운 항구로서 여러 세계 나라로 부터 선박들이 정박하며, 항구에 아름다운 요트쇼들이 펼쳐진다.

기타
인구 3만 명, 가로 1킬로미터, 세로 2킬로미터의 도시국가 모나코는 파리에서 기차를 이용하거나 니스까지 비행기를 이용한 후 자동차나 헬리콥터를 이용해 모나코로 올 수 있다.

종교 : 공식 종교는 카톨릭이며 주민의 95%가 로마 카톨릭을 믿는다. 그외 무교나 회교도, 기독교등의 신자가 약간 있다.

주요민족 : 프랑스인 47%로 가장 많으며 이탈리아 인과 원래의 모나코인으로 알려진 모네가스크인이 각각 16% 정도 된다.

주요언어 : 공식언어는 프랑어이며 영어, 이탈리아어, 모나코 언어인 모네가스크어가 통용된다.

기후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연평균기온이 16℃이고 1년에 60일 정도만 비가 내린다. 월평균기온은 9월의 10℃에서 8월의 24℃에 이르는 분포를 보인다. 여름은 건조하고 반대로 가을에 비가 오는 편이다. 4월-5월과 9월-10월이 모나코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산업
모나코 국가의 주요 수입원은 카지노와 관광업 등이다. 또한 올리브유, 향수, 리쿠어 제조 등 전통 공업 외에 지금은 화학과 기계, 섬유 등의 공업에 힘쓰고 있다.

관광제안
• 모나코에서는 세계 각국의 명차를 모두 볼수 있는 곳이다. 카지노장 주차장에 가면 포르세, 페라리, 벤츠에서 우리나라의 에스페로까지 각국의 모든 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주차되어 있다. 또한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대회가 열리는 5월이면 현재의 도로를 개조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이곳은 작은 도시이므로 한나절이면 충분히 여행을 할 것이다.

• 이곳에서 카지노를 빼어 놓을 수 없는 데, 카지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그리말디 가의 제정이 악화되자 샤를 3세가 고안한 것으로 이것이 성공을 거두어 숙박 시설, 극장 시설 등을 정비하여 새로운 도시 몬테 카를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돈이 많다면 정장을 차려 입고(낮 시간대라도 반바지 차림으로는 입장할 수 없음) 그랑 카지노로 가서 게임룸 탁자에 앉아보도록 하자. 몬테 카를로(Monte Carle)의 대 카지노 대리석 계단 위에서는 제복을 입은 문지기 2명이 입장객을 살피는 데 캐주얼 복장은 입장할 수 없고 정장차림이 좋다. 안쪽의 유료 살롱은 늘 사람들이 붐비는데, 본격적인 게임은 저녁 8시에 시작하여 아침까지 계속된다. 입장 자격은 21세 이상이며, 몬테카를로 자동차 경주가 있을 때는 휴관이다. 왕궁 맞은 편의 관광지화 된 대로와 골목은 아름답고 그늘진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모나코 전체가 근사하게 보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일부도 보인다.

역사
기원전 10세기 경, 페니키아인들이 처음으로 이곳 모나코에 발을 디뎠으며, 그 후부터 여러나라의 종족들이 이 나라의 항구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시대에는 최대 무역항으로 번영을 이룩한 곳이기도 하였지만, 민족 대이동의 혼란기에 도시와 함께 항구가 파괴되어 버렸다.

7세기에 롬바르디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2세기 동안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 1297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제노바의 명문 그리말디(Grimaldi)가에서 지배했으며, 그리말디가는 스페인의 보호 밑에 있던 1524~1641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12세기 초 제노바의 명문 그리말디가가 프랑스의 원조를 받으면서 진출하여 13세기말엔 그리말디가의 영지가 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정권이 그리말디가를 추방하고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그리말디가는 복귀하게 되었고, 1815년의 빈 회의에 따라 모나코는 사르데냐 왕국의 보호하에 놓였다. 1848년 영토를 프랑스에 잃음으로써 그 크기가 축소되었으나 1861년에 체결된 프랑스-모나코 조약으로 독립을 되찾게 되었다.13세기에 이탈리아의 그리말디가(家)가 건너와 현 왕실을 열었으며, 1793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861년에 공국을 다시 일으켰다.

1863년 경제적 취약에 따라 국가존속을 위한 방법으로 카지노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성공하여 몬테 카를로(Monte Carlo)가 중심이 되어 관광과 휴양지로 유명해졌다. 1959년 대공(大公)인 레이에 3세(1956년,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왕비로 맞이함)가 헌법 일부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국민 회의를 해산시켰으며, 대신 1961년에 국회를 구성했다.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는 개혁을 추진하여 모나코의 정치적, 경제적 규모를 확대시켰다. 그러나 1962년에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다시 국민 회의를 부활시키고 새로운 자유주의 헌법을 허용하게 되었다.

치안
범죄 발생률이 비교적 낮아서 북이탈리아와는 달리 모피나 보석을 지니고 거리를 다녀도 안전하다. 모나코는 자국의 안전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통화
Euro 사용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연평균기온이 16℃이고 1년에 60일 정도만 비가 내린다. 월평균기온은 9월의 10℃에서 8월의 24℃에 이르는 분포를 보인다. 여름은 건조하고 반대로 가을에 비가 오는 편이다. 4월-5월과 9월-10월이 모나코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시차 : -8시간


위치 :  남부 유럽
수도 :  모나코 (Monaco)
언어 :  프랑스어
기후 :  지중해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교(국교)
면적 :  1.95㎢
관광명소 :  몬테카를로, 왕궁, 해양박물관, 밀랍박물관


▶ 몬테카를로 [MonteCarlo]

모나코를 이루고 있는 4구 가운데 모나코 북동부에 위치한 휴양 도시로 남쪽에 있는 모나코 시와는 항구 반대쪽에 위치하며, 프랑스 니스의 바로 북동쪽으로 마리팀알프스 산맥의 기슭에 있는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몬테카를로 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국가인 모나코의 한 도시로서 카지노를 통해 연간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카지노를 비롯하여 고급호텔, 쇼핑센타, 박물관, 컨벤션센터 등이 밀집되어 있는 관광의 도시로 전세계 부자들이 즐길 수 있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휴양지이다. 모나코의 시민들은 카지노에 출입할 수 없으며, 도박은 관광객에게만 허용된다. 예전에는 겨울 명소로 널리 알려졌으나 지금은 해변과 잘 갖추어진 정박 시설로 여름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교육
몬테카를로시에서는 6세부터 16세까지는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교육내용은 파랑스와 비슷하다. 인구가 얼마 없어 교육기관이 많지 않으며, 특히 종합대학교는 없다.

산업
몬테카를로시의 1차 산업시설은 거의 없으며, 거의 대부분이 카지노를 비롯한 관광산업 및 서비스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운송 및 무역업과 텔레커뮤니케이션 등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추세이며, 카지노 주변에 많은 은행들이 있다.

몬테카를로시의 기후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평균 기온이 약 16.2 °C이며 연간 약 300일 이상 햇볕을 볼 수 있다. 가장 더운 8월의 월평균 기온은 24℃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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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은 리히텐슈타인공국(Principality of Liechtenstein)이다. 동쪽과 북쪽은 오스트리아와, 북쪽, 서쪽, 남쪽은 스위스와 접해 있다. 바티칸시국(市國), 산마리노, 모나코공국 등과 함께 소국(小國)에 속한다. 1867년부터 영세중립국으로 있으며,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없고, 왕족 이외에는 빈부의 차가 거의 없으며 실업과 범죄도 없는 평화로운 나라이다. 국제연합(UN)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유럽평의회, 벨기에  외의 국가에서는 스위스가 외교 관계를 대신한다. 행정구역은 11개 주민자치제(Gemeinde)로 이루어져 있다. 

알프스 산맥의 기슭,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은 인구가 약 3만 명(그 가운데 3분의 1이 외국인 거주자)이며 면적이 160km2에 불과한 국가이다.
리히텐슈타인은 1990년 UN(국제 연합)에 가입한 엄연한 주권 국가이지만 스위스 화폐를 사용하는 등 사실상 스위스의 한 주(州)와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다. 지난 1923년 이후 관세 업무를 스위스에 대행시키고 있으며 군대도 없다. 스위스와 전화와 통화도 같이 쓰지만 분명한 독립국이다. 또한 우표의 나라로 알려져 있으며, 수도는 파두츠이다.
공업이 발달한 남쪽의 라인 강 상류 지방에는 파두츠, 발저, 트리젠, 트리젠베르크, 샨, 플랑켄 등의 행정구가 있다. 북쪽에 있는 라인강 하류지방은 에셰, 마우렌, 감프린, 루겔, 셸렌베르크 등의 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전후에 산업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주민들이 보다 큰 행정구로 이주하고 있는 경향이다. 한편,가장 인구가 많은 행정구는 행정,상업 중심지인 파두츠와 주요 공업지역인 샨이다.

입헌 세습의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는 단원제로 임기 4년의 의원 15명이 있다. 총리는 의회의 발의에 따라 국가 원수가 임명한다. 군대 없는 영세 중립국으로 병역의 의무가 없다. 그리고,리히텐슈타인은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오스트리아,스위스,아이슬랜드 등과 함께 EFTA(유럽 자유 무역 연합)의 회원국이며 스위스와는 달리 UN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EC(유럽 공동체)와 EFTA의 회원국들이 단일 시장을 형성키로 한 계획에 동참하는 것은 국민 투표에서 부결됨에 따라 현재로서는 어려운 실정이다.
외교를 스위스에 위임하고 있으며 전화, 통화도 스위스와 같은 체계이다. 이 나라의 국기는 1921년에 제정되었으며, 파랑과 빨간색 바탕에 공작의 지위를 나타내는 왕관이 왼쪽 윗부분에 있다. 파란색은 하늘,빨강은 화로불, 왕관의 금색은 국민과 통치자가 하나임을 나타낸다. 국기를 수직으로 게양할 때에는 왕관이 똑바로 서 있도록 방향을 바꾼기를 사용한다. 당시 리히텐슈타인은 독일연방의 하나였기 때문에 원작에는 조국 독일이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지금은 수정되어 없어졌다. 가락은 영국 국가와 같은데 다만 다시 만들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리히텐슈타인에는 공항이 없고 단지 국경선 근처에 몇 개의 기차역만 있을 뿐이다. 관광할 만한 곳으로는 현재 일반 대중에게 개방되지 않았지만 언덕 위에 올라가서 전체 모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성당이 있으며 국립 예술관,우표 박물관 등도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관광 안내소 옆에 위치한 우표 박물관에는 1912년 이래 발행된 300종 이상의 우표를 소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리히텐슈타인 하면 우표를 떠올릴 만큼 우표는 이 나라의 중요한 재원이다. 우표는 박물관의 한 방안에 전시되어 있고,매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항공
리히텐슈타인에는 공항이 없으며 가장 가장 가까운 공항은 스위스의 쮜리히 공항(ZRH)이며, 쮜리히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스위스의 자르간스(Sargans)나 부크스(Buchs)로 가서 버스 서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그래야만 이곳의 수도인 파두츠에 도착이 가능하다.

면적 : 160㎢

수도 : 파두츠

인구 : 3만 3000명

정치형태 : 입헌군주제

종교 : 신앙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으며 카토릭이 83% 가량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기독교를 믿고 있다.

주요민족 : 독일계 인종이 95%이상으로 주민의 대부분을 이루며 이탈리아 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인종이 있다. 특이한 것은 리히덴슈타인이 금융센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여기에 근무하는 외국인이 인구의 35%가량을 넘는다.

주요언어 : 독일어가 공식언어이지만 국민들은 아직도 발음과 어휘가 이 나라 특유의 형태로 변화한 알라만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기후
대륙성 기후인 리히텐슈타인은 대체로 추우며, 흐린 겨울에는 눈과 비가 잦은 편이다. 서늘하거나 온화한 여름 날씨는 흐리고 습하다. 특히 '푄'이라는 따뜻한 남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이며, 연 강우량과 적설량은 지역에 따라 약 914∼1,143mm를 보인다. 12월∼3월에 걸쳐 많은 눈이 내리기 때문에 스키를 즐기기에 아주 적합하고, 겨울에는 기온이 -15℃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여름에는 따뜻하고 건조하다. 낮 평균 최고기온이 20∼28℃를 나타낸다.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산악지대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포도와 옥수수 재배가 가능하다.

지리
위로는 독일 옆으로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사이에 낀 입헌군주국으로 면적이 160제곱킬로미터 밖에 되지않는 유럽에서는 네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동부 지역의 2/3는 중앙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레티콘 대산괴의 험준한 산기슭에 있는 언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들의 높이는 약 1,800∼2,623m이다. 고도가 낮은 사면들은 상록수림과 고산지대 꽃나무들로 덮여 있고 벌거벗은 산꼭대기는 눈으로 덮여 있다. 이 산맥에는 3개의 큰 계곡이 있으며 자미나 강이 흐른다.
서부 지역은 라인 강 유역의 범람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이 지역은 나일강 유역과 더불어 북쪽으로 점차 넓어지는 삼각주 저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강 유역은 한때 습지대였으나 1930년대에 만든 강 수로 덕분에 이제는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토양으로 변하였다.

역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귀족이었던 리헤텐슈타인이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출석하기 위해 영지를 손에 넣으려고 지금의 땅을 구입한 것이 이 나라의 시초가 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은 1719년 셸렌베르크 공국과 파드츠 공국을 합병하여 만들어졌다. 1719~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라인 동맹의 일원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1815년부터 독일 연방에 귀속되었고 1866년 독립하였다.
1차 세계 대전까지는 오스트리아와 관세, 통화 동맹을 맺고, 그 이후에는 스위스의 보호하에 들어가 통화, 관세를 공동화했고 외교도 스위스 정부를 통했다. 리히텐슈타인의 소규모의 군대가 1868년에 해산됨으로써 현재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고, 국민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없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는 인연을 끊고 현재는 스위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920년에는 스위스와 우정(郵政)동맹을 맺었고, 1924년에는 스위스와 관세 동맹을 체결하였다. 현대적인 헌법은 1921년에 마련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군주제가 계승되고 있다.

현재 리히텐슈타인은 대 오스트리아, 바티칸, UN을 제외하고는 스위스에게 외교를 대행하고 있다. 1990년에는 UN에 가입하였고, 1991년 5월에는 구주 자유 무역 연합(EFTA)에 가맹하였으며, 1년 뒤인 1992년 12월에는 구주 경제 지역(EEA)에 가맹, 1993년에는 아담 2세가 국민에게 입헌군주제 폐지 권한을 인정하는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였다.

전압 및 주파수
220V

치안
리히텐슈타인에서는 범죄 발생률이 극히 적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고 온 집시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개인 소지품 관리에 주의한다.

통화
스위스 프랑(Sw F)을 사용하며 1.62스위스 프랑이 미화 1달러에 해당한다.

시차 : -8시간



▶ 파두츠 (Vaduz)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위치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강 동쪽 비탈면
인구  5,106명(1999)
 

파수츠는 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강(江)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며 16세기에 건축된 군주 요제프 2세의 고성(古城)이 시가를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아주 아담한 리히텐슈타인의 수도다.
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강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며 16세기에 건축된 군주 요제프 2세의 고성(古城)이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파두츠는 행정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소를 방목하고 곡물이나 포도가 재배되는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섬유, 식품, 정밀기계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며, 아름다운 환경에 힘입어 관광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우표를 사려고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중심가에는 카톨릭교회, 미술 전시장, 우표 박물관, 호텔, 선물가게 등이 몰려 있다. 호텔은 10곳 정도가 있으며 유스호스텔도 있다. 1,600미터 위에 있는 스키장이 유명해 다이애나비도 마음에 들어 했을 정도다.

산업
파두츠에는 여러 외국기업들이 사업자 등록을 해 놓아 리히텐슈타인의 조세수입에 도움을 주는 한편,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은행 거래의 비밀이 절대적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파두츠는 행정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소를 방목하고 곡물이나 포도가 재배되는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섬유, 식품, 정밀기계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며, 아름다운 환경에 힘입어 관광지로서도 알려져 관광 산업에도 노력을 기하고 있다. 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우표를 사려고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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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연안에 있는 공화국인 리튜아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1940년에는 소련, 1941년부터 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면서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다가,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하였다.
발트3국 중 발전이 뒤졌으며,농업의 비중이 크다. 공업은 식품과 경공업이 주요부문이고, 낙농과 양돈이 전문화되었으며, 근년에 기계, 화학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국내를 횡단하는 철도 및 자동차 도로는 빌뉴스에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스크, 리가에 이르는 것과 카우나스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는 것이 있다. 수상운송의 중심은 네무나스강 중류의 카우나스이고, 항만으로는 클라이페다가 있다.

리투아니아는 평지가 주를 이루는 국가로서 가장 높은 지역인 주아자핀 지역이 불과 294m이다. 국가의 면적은 아일랜드 정도의 크기이며, 한반도의 1/4에 해당된다. 발틱 국가중 세 번째로 큰 나라에 속하기도 하는 이곳에는 다섯 개의 국립공원과 수많은 자연 보호지역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Kursiu Nerija 국립 공원은 높은 모래언덕과 같은 특이한 자연환경을 비롯하여 소나무숲, 해변 개펄 등으로 가득차 있다.

리튜아니아의 수도인 빌리우스(Vilnius)에는 약 60만명의 인구가 있으며,이곳의 국제적인 풍모인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이주자들 때문에 가능했다. 중부 유럽 등으로 부터의 영향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며, 16세기에 Vilnius는 동부 유럽의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 이자 17세기에는 폴란드 황금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세기에는 중요한 유대도시가 되었다. Vilnius는 발틱해로부터 250Km떨어진 Neris강변,리투아니아 남동쪽, 벨라루스 접경지대에 위치하고,시의 중심부는 강의 서부지역이며 대성당 광장이 중심이다.

항공
아시아에서 가는 직항편은 없다. 한국에서 가기 위해서는 런던 히드로 공항이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스케쥴에 속한다. 공항은 시 중심부로부터 5km 떨어진 Kirtimai의 교외에 있으며, 카우나스 공항은 Old Town 북쪽 10km 지점에 있다.



면적 : 6만 5300㎢

수도 : 빌리우스(Vilnius)

인구 : 약 369만명

정치형태 : 의원내각제

종교 : 국민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 신자이며, 소수의 루터교와 러시아 정교 신자도 있다.

주요민족 : 리투아니아인 80%, 러시아인 9%, 폴란드인 7%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수의 우크라이나 인, 벨라루시인, 유태인, 타타르인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리투아니아 인으로 민족분규는 없는 편이다.

주요언어 : 리투아니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기후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혼합되어 있으며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고 여름은 온난한 온대성 기후이나 연중 안개 낀 일수가 40-110일, 폭풍우가 있는 일수가 15-50일, 눈보라치는 일수가 10-15일로 불안정한 날씨가 많다. 1월 평균기온은 -4.9 ℃, 7월 평균기온은 17.0 ℃이다.
리투아니아의 5월에서 9월까지는 여행이나 관광을 즐기기에 결코 적합한 시기는 아니다. 대다수의 여행자들은 7월에서 8월 중에 오기 때문에 이 시기에 저렴한 호텔과 호스텔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겨울인 11월에서 3월은 거의 매일 눈이 흩날리며, 춥고 햇빛을 구경하기가 좀처럼 드물다.

지리
북동부 유럽의 발트해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라트비아 공화국 (Latvia)과 453㎞, 남동쪽으로 벨라루시 공화국(Byelorussia)과 502㎞, 남서쪽으로 폴란드(Poland)와 91㎞, 서쪽으로 러시아연방의 칼리닌그라드 (Kaliningrad)지방과 227㎞ 국경을 접하고 있다. 덴마크, 스코틀랜드 등의 국가와 같은 위도상에 있으며 발트해 국가중 가장 큰 리투아니아 국토의 총면적은 65,200㎢로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보다 약간 크며 한반도의 1/4 크기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동유럽 평원의 일부에 속하는 평탄한 저지대를 형성한다. 발틱해안을 따라 15-20㎞ 폭의 Paj rio 저지대가 있는데 이는 빙하시대에 생긴 빙퇴석(氷堆石)이 저지대 평야를 이룬 것이며 저지대 가장자리 해안평지 동쪽에 고대 빙하시대의 계곡에서 만들어진 모래와 자갈로 뒤덮힌 emai i 고지대가 있다.
고지대의 최고봉은 Medvgalis로 해발 234m이다. 이 고지대는 남쪽의 Baltic 고지대와 중부지방을 지나 동부의 저지대로 이 어진다. 국토의 최고봉은 동부지방에 있는 해발 294m의 Juzapine Hill과 해 발 293m의 Kruopin HiIl이다. 하천과 호수가 복잡하게 연결이 되어 수계를 형성하고 있다. 남쪽에서 북 쪽의 발틱해로 흐르는 Nemunas강을 비롯하여 발틱해로 구불구불 흘러드는 강이 여러개 있으며 호수는 Baltic 고지대의 북쪽지방에 밀집되어 있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Laba diena.
의 미 : 안녕하세요.

현지어 : Apgailestauju.
의 미 : 죄송합니다.

현지어 : Viso gero.
의 미 : 안녕히 계세요.

현지어 : Aciu.
의 미 : 감사합니다.

현지어 : Kiek kainuoja?
의 미 : 얼마입니까?


역사
근대 리투아니아 인들의 시조는 발트족으로 BC 2000년경 이 민족이 남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왔다. 12세기경에는 리투아니아 지역에 거주했던 서쪽의 Samogitians과 동쪽의 Aukstaitiai 부족들과 리투아니아의 남서쪽과 폴란드의 접경지역에 거주했던 Yotvingians과 발틱인들은 후에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에 동화되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후 13세기 중반에는 Mindaugas는 짧은 시간 동안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들을 카톨릭 신앙아래에 통합한다. 16세기말부터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통치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당시의 세력을 확장하던 폴란드와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항하였지만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

세계 1차대전 중에 리투아니아는 독일에게 점령당하였지만 독일 패전 후 1918년 소련과 폴란드의 세력다툼 사이에서 독립을 선언 공화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1919년에 폴란드 군대는 Vilnius를 점령하지만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하는 평화 협정에 조인하였다. 이후 2차 대전 중에 독일과 소련의 밀약으로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스탈린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로 소비에트 연방이 되었다. 2차대전중 독일과 소련의 점령을 번갈아 진행되었으며 종전 후 실질적인 세력은 공산당에게 넘어갔다.

1960년대 부터 지식인의 정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열망과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소련의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엔 민족주의의 힘입어 독립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마침내 1989년 소련의 인민의회에서 독립이 인정, 소련 공산당에서 분리되었다. 의회는 리투아니아를 독립공화국으로 선포하였으며, 독립 선언서에 100일 간의 모라토리엄을 선포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1991년 8월 19일 모스코바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항한 쿠테타가 일어나자 모든 것이 변하였다. 서방세계는 드디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였고,소련도 1991년 9월 6일에 이를 승인하였다. 1991년 9월 17일 리투아니아는 유엔에 가입하였다.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

치안
관광 호텔이나 레스토랑 주변에서 주로 밤에 소매치기를 포함한 거리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주인이 없을 때 자전거와 자동차 절도도 흔한 편이며 열차, 기차역등 사람이 많은 곳과 호텔 객실에서는 강도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통화
리타스(litas)를 사용하며 4 litas가 미화 1달러에 해당한다.

시차 : -8시간




▶ 빌리우스

영어로는 빌리우스(Vilnius), 폴란드어로는 빌노(Wilno)라고 하는 이 도시의 옛 이름은 빌나(Vilna)다. 바르샤바 북동쪽 380 km, 민스크 북서쪽 180 km 지점에 있으며, 네무나 강의 지류 빌리야강 양안(兩岸)에 위치한다.
1323년 이래로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리우스(Vilnius)는 역사적으로 국제적인 도시이다. 19세기 초에 빌니우스는 이디시(Yiddish)문학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인구의 절반이 유태인이었다. 네리스(Neris)강이 빌니우스를 휘감고 흐 르며 구시가의 대부분은 강 왼편에 있다. 빌리우스에서 서쪽으로 128㎞ 되는 곳에 위치한 리투아니아의 오래된 도시인 카우나스(Kaunas)가 있다. 빌리우스보다 규모는 작지만 중세의 차분함이 느껴지는 도시이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이 도시는 국제적인 풍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리투아니아의 유태인이주자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부 유럽 등으로 부터의 영향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빌리우스는 동부 유럽의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 17세기에는 폴란드 황금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세기에는 중요한 유대도시가 되었다. 그 당시 독일, 폴란드 러시아는 모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차 대전 이후 폴란드와 유대인들은 거의 사라지고 빌리우스는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시의 중심부는 강의 서부지역이며, 대성당광장이 중심이다. 광장 북쪽에 대성당이 있고,그 뒤에는 게디미나스(Gediminas) 언덕이 있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Old Town은 대성당 광장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있다. 교회의 뾰족탑은 쭉뻗은 길의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숨겨진 정원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이 밖에 빌라우스(Vilnius)대학, 대통령 궁, 전망대 유대인들의 옛마을과 거주지역이 있다. '세 개의 십자가 언덕(Three Crosses Hill)'이 옛도시를 내려다 보며 길 게 펼쳐져 있다. 세 개의 십자가는 17세기 이 지역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세 수도사를 기념하기 위해 거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신도시는 구도시에서 서쪽으로 2km떨어진 곳에 있으며,거의 모든 건물이 19세기에 건설되었다. 시청이 여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리투아니아인들의 대량학살 박물관(Museum of the Genocide of the Lithuanian People) 이 또한 여기에 있다. 그 뒤쪽으로 게스타포(Gestapo)와 KGB건물이 들어서 있다. 가이드 들은 모두 여기에 수용되었던 자들이고, 관광객들에게 그들이 고문을 당했던 방들을 보여 준다. 강의 남쪽에는 미국의 록음악의 전설인 Frank Zappa의 상반신 기념 동상이 있다. 구도시 근처에는 많은 숙박시설이 있으며 좋은 식당들이 있다.

교육
빌라우스 대학교는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서 무려 400년이나 되었다. 이 학교는 학교 내에 박물관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훌륭한 전통과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학교는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등의 건축양식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대학 교회가 박물관이 되어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조각품과 회화작품도 있고 내부장식이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다. 벽을 따라 작을 칸을 막은 방이 즐비한데 오래된 화폐, 고서, 측량기기, 망원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리투아니아의 문화 중심지로 1579에 설립된 예수회 학교의 후신인 V. 캅수카스스국립대학교와 1969년 설립된 빌리우스 토목공학대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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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에 있는 십자가 언덕(Crosses' Hill in Lithuania)
















리투아니아에 있는 십자가 언덕(Crosses' Hill in Lithuania)..

우리에게는 낯선 나라 중의 하나인 러시아 옆에 위치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트해 연안의 세 나라 가운데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십자가 언덕이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이 두나라의 국민들의 대다수가 러시아 정교와 복음주의 루터교를 믿는 반면에

리투아니아는 국민들 대다수가 가톨릭 교회를 믿는 이른바 가톨릭 국가이다.

그런 만큼 이 나라에는 가톨릭 유적이나 유물들이 프랑스나 스페인에 못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많다.

그 중에 가장 알려진 것으로는 십자가 언덕을 들수가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발트 3국 사목방문하셨을 때 들렀던 곳이며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종교적인 성지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이 곳에 십자가가 세워졌는지는 정확히는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14세기부터 사람들이 하느님께 소원을 비는 뜻으로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하나씩 둘씩 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그 유래를 찾는 경우가 많다.

이 곳이 정작 유명세를 탄 것은 종교를 탄압하던 소련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독립국가가 아닌 소련의 연방을 이루던 작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소련의 식민지였는데,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던 소련당국은 종교를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항의로 리투아니아인들은 십자가 언덕에 십자가를 놓기를 계속했다.

그러면 소련군은 낮이면 불도저 및 탱크와 공군기로 이 십자가 언덕을 초토화 시키거나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고

밤이면 리투아니아인들이 다시 세우고 하면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내려 왔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정성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이 나라는 1989년엔가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소련과 동구권의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이 십자가 언덕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성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 어떠한 것이 이 곳에 있다.

이 곳은 리투아니아 가톨릭 신자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성지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 현지에서는 Kryziu Kalnas라고 하고 영어로는 Hill of Crosses라고 한다.


왠지 무서워요...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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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

정식 명칭은 러시아 연방(Russian Federation)으로 구소련의 붕괴 이후에 과거의 면적 및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아직까지도 유라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와 중국, 인도, 미국에 이은 세계 4위의 인구(약 1억 5000만 명)를 자랑하고 있다. 러시아의 국기는 1705년 1월 20일 피터 대제가 최초로 상업을 하는 선박들에 게양시키기 위해 백,청,적의 3색국기를 제정해 사용하다가 긴 역사를 걸쳐 1993년 12월 11일 옐친 대통령에 의해 지금의 국기로 부활되었다. 국기의 백색은 고결함과 정직함을 나타내고, 청색은 믿음, 공정함, 순결함을 뜻하며, 붉은색은 용기와 용감성,헌신,관대함, 사랑을 나타내 주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 동쪽에서부터 아시아 북부에까지 걸쳐 있는 나라이며,전세계 육지의 1/6을 점유하고 있다. 21개 공화국과 6개 지방(krai), 49개 주(oblast), 1개 자치주, 10개 자치구(okrug), 2개 시(모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그) 등 총 89개로 나누어져 있다.
러시아는 넓은 영토를 점유하는 까닭에 북쪽의 사막지역, 툰드라,산림툰드라,산림,스텝,산림 스텝 등 다양히 분포되어 있으며, 석유, 철, 가스, 철광석, 인회석, 칼리염, 인광석, 금등이 매장되어 있다. 전세계 천연자원의 1/4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채 매장량은 엄청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하면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긴 국가로서 유명한데,특히 문학 부문에서는 러시아만의 독특한 문학을 가지고 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죄와 벌','전쟁과 평화'로 잘 알려진 러시아 문학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해외에 소개되었다. 고대 러시아 초기에 연대기와 성자전 문학을 시작으로 하여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시로 대표되는 운문 문학이 자리를 잡았으며, 19세기 초반에 산문 문학의 체계가 잡힌 러시아 문학은 그 짧은 역사에 비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어느 서구의 문학보다도 지명도가 높다. 또한,19세기 초 푸쉬킨에 의해 발아된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은 벨린스키와 고골리를 거치면서 그 내용과 형식이 더욱더 발전되어 갔으며 투르게네프를 포함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세계 문학의 정상에 서게 되었다.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형성기인 19세기 전반기의 대표작들로는 푸쉬킨의 '대위의 딸'을 비롯하여 고골리의 '외투', '죽은 혼' 등이 있으며, 러시아 문학의 전성기인 19세기 후반에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의 작품들이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희극과 시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주요 희극 작가로는 안톤 체호프를 들 수가 있는데,그의 작품인 '벚꽃 동산'에는 쇠퇴해 가는 러시아 귀족 사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고리키라는 걸출한 작가의 등장은 소비에트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 사조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탄생을 예고하였으나,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가진 문학적 경직성과 비자율성은 결국 솔제니친, 브로드스키 등의 망명 작가들을 탄생시켰다.

제정 러시아 초기의 음악은 주로 이탈리아와 서유럽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었다. 유명한 음악가로 차이코프스키를 들 수 있으며 국민 악파 5인조의 사상을 이어 받아 발레곡 '백조의 호수'와 교향곡 제 6번인 '비창'을 남겼다. 혁명 초기에는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가 러시아 음악계를 주도하였다. 특히 쇼스타코비치는 정부의 음악 관계자들과 심각하게 대립했지만 실내악,오페라,발레곡,교향곡 등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으며,그 가운데 `15번 교향곡'은 매우 유명하다. 비교젹 최근의 대중 가수로 한국계 록 가수 빅토르 최의 인기는 사후인 지금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러시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발레인데 러시아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였다. 발레에 대한 러시아인의 관심은 매우 컸으며 19세기에는 서양 무용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들은 러시아 발레의 전망을 한층 더 밝게 해주었다.


면적 : 1707만 5400㎢

수도 : 모스크바

인구 : 약 1억 4441만명

정치형태 : 공화제

종교 : 러시아 정교, 이슬람 교, 기독교 등

주요민족 : 러시아인이 85%, 그 외는 소수민족이 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소수 민족은 오랜동안 소련세력에의해 점령당했던 민족이 많아 자연스레 민족간의 갈등이 잦은 편이다. 간혹 민족분규가 매스컴을 장식한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러시아어이지만 다양한 민족구성 만큼이나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취학후 일정기간까지는학교에서도 소수민족의 언어를 배운다.

기후
러시아의 기후는 그 위치와 면적, 지형 등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광대한 영토의 대부분이 중위도 또는 고위도에 위치하고 한랭한 지역이 많을 뿐 아니라 해양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다. 러시아는 동서로 길 뿐 아니라 남북의 폭도 극히 넓어 남북의 기온차도 현저하게 크다.

흑해 연안의 얄타 지방은 1월의 평균 기온이 3.7℃인 반면,북쪽 끝의 첼류스킨 곶 지방은 더운 날이 거의 없다. 특히 베르호얀스크에서는 기온이 -67.8℃까지 내려간 일이 있어 북반구의 한극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대륙성 기후로서,모스크바 부근은 겨울 평균기온 영하 10도,여름 평균기온은 영상16도에 이른다.
서쪽의 유럽 러시아 지역은 여름인 7월의 경우 등온선 분포는 거의 위도와 평행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북극해 도서지방은 0 ℃,북극해안은 5∼10 ℃,시베리아 일대는 15 ℃ 전후, 유럽 러시아 지역은 20 ℃에 육박하는 기온분포를 보인다.
강수량 분포는 북위 60 ° 부근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떨어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대서양 기단의 진로가 북위 60 °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역의 강수량이 500 mm 이하인 가운데, 유럽 러시아와 동 시베리아에서는 500 mm,시베리아 중부 400 mm,북극해,카스피해 부근에서는 250 mm 이하의 강수량 분포를 보인다. 우랄산맥에는 지형성 강우가 빈발하는 편이며,지중해성 기후와 유사한 흑해 부근에서는 겨울 강우량이 많다. 또한 극동지역은 몬순성 강우가 많다.

러시아에서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5~7월의 초여름이다. 거의 매일 상쾌한 날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무르만스크에서는 백야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의 경우는 7~8월이 아주 좋다. 최상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때이다. 러시아는 여름다운 여름, 겨울다운 겨울을 느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이런 계절의 묘미를 즐기기 위해 여름여행과 겨울여행을 러시아에서 즐겨보자.

지리
러시아의 국경은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현 독립 국가 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구성 공화국들과 동구 유럽 여러 나라 및 중동과 우리 나라를 포함한 수많은 유라시아 국가들과 마주하고 있다. 동경 19,서경 169.5,북위 44°- 82°사이에 위치해 있는 러시아의 영역은 북동유럽에서 우랄 지역을 거쳐서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에 이른다.

서부 및 서시베리아는 평원지역이며, 동시베리아는 산악지대를 이루며 중간의 우랄산맥을 제외하면 러시아의 지형은 남동쪽으로 험준한 산악지대가 발달하였고, 북서쪽으로는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있어 흡사 커다란 반구형의 극장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지형적 특성에 따르면 러시아는 콜라-카렐리야 지역, 러시아 평원, 카프카스 지역, 우랄산맥, 서(西)시베리아 저지, 중앙 시베리아 고원, 남부 산악지대, 동부 산악지대로 구분된다.

콜라-카렐리야 지역은 핀란드 국경을 접한 유럽 러시아의 북서부 지역이다. 카렐리야 지역은 고원지형을 이루나 해발고도는 낮다. 대부분 200 m 이하의 구릉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곳곳에 빙하호와 늪지가 발달하였다. 콜라반도에는 히비니산(1,191 m)을 제외하고는 해발고도 300 m 미만의 낮은 구릉이 발달하였다.
러시아 평원은 서쪽 국경선으로부터 동으로 우랄산맥까지, 북극 해로부터 남으로 카프카스 지방과 카스피해까지 펼쳐진 대평원이다. 광활한 평원의 서쪽과 남쪽으로 발다이구릉, 스몰렌스크-모스크바고원, 중앙러시아고원,프레몰가고원 등 400 m 미만의 저산지가 분포해 있다. 이 고원들 사이로 드네프르강, 돈강, 드비나강 등이 흐르면서 그 주위에 범람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발다이 구릉은 해발고도 300 m 내외의 빙하성 산지로서 볼호프강, 드비나강, 볼가강 등의 분수계 역할을 하고 있다.
카프카스 지역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쿠반저지와 쿠마저지 및 카스피해 연안저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 러시아평원과 연결된다. 특히 카스피해 연안은 해수면 이하(-27 m)의 낮은 저지대이다. 쿠반저지와 쿠마저지 사이에는 평균 해발고도 400 m의 스타브로폴고원이 있다. 한편 카프카스 지역 남단에는 험준한 카프카스산맥이 동서로 발달해 있어, 러시아와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국경선 역할을 한다. 우랄산맥은 북극해 연안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총 길이 약 2,080 km의 습곡산맥으로서 러시아평원과 서시베리아저지를 구분해주고 있다. 북쪽의 나로드나야산(1,894 m)을 비롯해 해발고도 1,500 m이 넘는 산은 소수이고 그 사이로 낮은 산들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랄산맥은 큰 교통장애 요소가 되지 못하며, 일찍부터 주요 교통로가 발달해 왔다. 서 시베리아저지는 우랄산맥에서 동쪽의 예니세이강까지,북극해에서 남쪽 알타이산맥까지 펼쳐져 있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저지는 오브강과 이르티슈강이 형성한 거대한 범람원으로서 늪지가 많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은 예니세이강과 동쪽의 레나강 사이에 발달한 고원지대로서 대부분 해발고도 400∼700 m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니세이강과 레나강의 지류가 고원 사이로 흐르면서 골짜기를 이룬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 북쪽으로는 비랑가산맥과 푸토란산맥이 있으며, 남쪽에는 바이칼리아 산맥이 있다. 이들 산맥은 비교적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는 야쿠티아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부 산악지대는 카자흐스탄의 동쪽 국경선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으로, 알타이산맥, 동, 서 사얀산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산맥들은 해발고도 2,700∼4,200 m의 험준한 산지로서, 정상부에서는 평탄한 고원을 이룬다. 또한 정상부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예니세이, 오브, 이르티슈강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한편 바이칼호는 단층작용으로 형성된 거대한 호수로 최대 수심이 1,616 m에 이른다. 동부 산악지대는 동쪽의 바이칼호로부터 야블로노비산맥, 스타노보이산맥, 주그주르산맥, 콜리마산맥, 추코트 산맥으로 이어져 베링해까지 연결된다. 한편 베르호얀스크 산맥과 체르스키산맥은 남북으로 뻗어 각각 주그주르산맥,콜리마산맥과 만난다. 이 산맥들은 해발고도 2,000∼3,000 m 사이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대 유럽 지괴와 북아메리카 지괴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습곡산지이다. 한편 동부산악지대의 동쪽지역은 화산이 집중 분포해 있다. 특히 캄챠카반도와 쿠릴열도는 활발한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환태평양 화산지대의 일부이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스까쥐쩨 빠좔루이스따,까또르이 차스?
의 미 : 몇시 입니까?

현지어 : 다이쩨,빠좔루이스따,드바 빌레따 다 세울라 .
의 미 : 서울행 표 2장 주세요.

방문적기
러시아의 여름여행
러시아는 대륙 자체가 넒기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기후가 있다. 러시아의 여름은 우리 나라처럼 30℃ 이상이 되는 때도 있다. 하지만 시베리아의 경우기온이 10℃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특히 비가 온 후에는 기온에 더 떨어져서 겨울날씨와 같이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지기도 한다. 따라서 속내의는 기본으로 준비하고 긴팔이나 스웨터 또는 두껍지 않은 잠바를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한가지 더, 러시아의 모기는 여행을 하는 내내 성가신 존재들이다. 간팔이나 긴바지를 입거나 모기향을 준비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만원 정도 투자해서 방충망을 준비해 모기 때문에 오는 여행중 스트레스에 미리 대처해 보는 것도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러시아의 겨울여행
세계에서 가장 추운 베르호얀스크(시베리아)가 있는 러시아의 겨울은 -40℃는 거뜬히 넘고 그 외 기역도 우리 나라의 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살은 에는 듯한 추위"에 대한 두려움으로 겨울 중 러시아 여행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방한 대책을 단단히 세워둔다면 겨울 중 러시아에서의 좀 더 색다른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추운 지역을 여행할 때는 무조건 두꺼운 옷을 입는 것 보다는 얇은 옷으로 여러 겹 겹쳐 입는 것이 보온에 효과적이다. 그리고 셔츠나 바지, 스웨터는 울제품으로 입는 것이 좋다.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가벼운 등산화가 좋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자주 갈아 신을 수 있게 양말을 넉넉히 준비해 두자. 장갑은 가벼운 장갑을 먼저 끼고 털장갑을 끼면 좋다. 이밖에 털모자, 목도리 등으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야 한다. 덧붙여 안경을 쓰는 여행자의 경우 차가운 곳에서 더 차가워 질 수 있는 메탈소재의 안경테는 삼가는 것이 좋다.


역사
10세기 중엽 스뱌토슬라프 공후는 하자르족과 볼가불가르족을 원정하여 승리하고 비잔틴 제국과 도나우불가르족과의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동유럽에 새로운 정치 세력이 출현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의 아들 블라지미르는 최초의 법전을 반포하고, 그의 일족을 종가로 하는 왕조 체제를 이룩하였으며,988년 비잔틴 정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키예프의 영토를 동서남북으로 크게 넓혀 나갔는데,그 경계는 서쪽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동쪽으로는 볼가 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블라지미르의 후계자들은 그 광대한 영토에서 오래도록 안정된 정치를 펴지는 못했다.

키예프가 쇠퇴하자 당시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던 노브고로드 공국은 키예프 대공의 지배권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하면서 키예프 공국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곧바로 블라지미르 공국에게 그 자리를 넘겨 주었다. 블라지미르 공국은 1108년 블라지미르 모노마흐에 의해서 건설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유리 돌고루키와 손자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의 통치에 이르러 정치적, 문화적으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수세대에 걸쳐 류릭 가문의 여러 공국들이 분열되어 서로 다툰 것이 원인이 되어, 1223년 키예프의 군대는 칼카 강변에서 몽고군 정찰대에게 궤멸, 1240년 키예프 공국은 몽고군에게 정복되었고,1480년까지 몽고의 지배를 받았다.
또한, 모스크바 공국 시기의 모스크바 공국(Grand Principality of Moscow)은 13세기 초 블라지미르 공국 내 하나의 왕자령으로 창건되었고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미하일 호로브리트 등의 공후들을 거치면서 영역을 넓혀 나갔으며, 14세기 초 이반 1세의 통치 시기에 이르러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후 15세기 초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맹주로 부상했는데, 이반 3세는 몽고군을 러시아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동슬라브의 전 영토를 통일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다. 그는 효과적으로 군사·외교 활동을 펴 모스크바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고, 체계적인 관료 정치와 토지 제도도 발전시켰다.
1533년 왕위에 오른 이반 4세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난폭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스로를 `짜르'라 칭하고, 대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자처하고, 구소련 시대 KGB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오프리츠니나(Oprichnina:이반 4세의 친위대)'를 자신의 직속 기관으로 두어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반 4세 이후 러시아는 혼란의 시기로 결국 1613년 류릭의 후손이 아닌 미하일 로마노프를 짜르로 선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862년부터 왕조를 이어 온 류릭 가문은 551년 만에 로마노프가에 그 지위를 양보하게 된다.

로마노프 정부가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고 경제와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1649년에는 대법전이 만들어졌는데, 이 법전은 교회를 국가의 관할하에 두었고, 농노제를 법제화하여 농민을 지주의 영원한 소유 재산으로 성문화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도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 구교도의 업악등 시련을 겪었다.
러시아 제국 시기 표트르 대제와 예카체리나 여제의 치세(17세기 말~18세기 말) 17세기 말 러시아는 대제 표트르 1세의 등장을 맞이하게 된다. 표트르는 스웨덴으로부터 획득한 땅에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그를 건설하고 그것은 러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서유럽 쪽으로 옮겨 갔음을 상징하였다. 표트르는 공식적으로 모스크바 공국의 짜르 체제를 바꾸어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였으며, 그 자신은 스웨덴과의 강화 조약 체결 때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표트르는 자신의 개인적 역할보다는 공적인 기능을 강조하고 근대적인 행정 체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강압적인 개혁은 민중의 강한 반발을 샀다.
표트르 대제 이후 1762년 궁정 혁명을 통하여 독일 태생의 러시아 황실의 며느리인 예카체리나가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재위 기간에 동부 폴란드, 옛 리투아니아 지역, 흑해연안, 크림반도 등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상당히 확장되었다.
18세기를 통해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토대를 확고히 한 러시아 제국은 19세기에 들어서,특히 나폴레옹을 물리친 이후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며 농민반란과 새로이 등장한 지식층(인텔리겐차)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면서 혁명이 일어나고 1차대전을 맞는다. 계속된 패전과 혼란 속에 레닌이 볼세비키혁명을 수립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1917년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전면적인 공산화를 시행하고 레닌 사후 스탈린으로 정권이 옮겨가면서 독재체제를 수립, 미국과 대치되는 강대국을 자리잡는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를 거치면서 기득권층의 부패와 모순이 지속되었으며 이들 사후 1986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페러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선언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재건되기 힘든 소련의 경제상태와 소수 민족국가들의 독립요구, 보수파와 개혁파와의 갈등은 깊어지고 1991년 보수파의 쿠테타로 소련 연방이 무녀졌다. 1992년 소련은 러시아를 비롯한 연방 약 15개국가가 독립하였다.


국제전화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공중전화나 우체국의 전화에서는 상대방의 음성이 들리면 3번을 누르거나 수화기 모양의 버튼을 눌러 주어야만 통화가 된다. 전화국마다 약간씩 다르니 통화 전에 안내서를 잘 읽어보아야 한다.
*8-10-82(한국 국가번호)-지역번호(0제외)-전화번호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
*0 또는 9번(호텔마다 확인)-8-10-82(한국 국가번호)-지역번호(0제외)-전화번호

러시아의 국제전화카드를 사욜할 경우
국제전화카드는 지하철 근처의 가판대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사용 시간에 따라 종류는 여러가지이다. 국제전화카드를 이용하는 것이 우리 나라로 전화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 저렴한 방법이다.

전압 및 주파수
전압은 220V, 50Hz지만 우리나라 전기제품의 코드는 맞지 않아 현지에서 구입하거나 빌려서 쓴다.

치안
러시아는 치안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편으로 늦은 밤 혼자 외출이나 외진 곳은 다니지 않도록 한다.
급격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빈부의 차가 심해져 여행객을 노린 강도와 같은 범죄가 심심치않게 일어나고 있으니 소지품 관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호텔에서도 간혹 빈방을 터는 좀도둑이 있다고 하니 귀중품은 프론트 안전금고에 맡기도록 한다.

러시아 여행시 주의사항
-러시아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가급적 단체로 행동하고 개인행동은 자제한다. 단체일 경우에는 남녀가 혼성으로 다니는 것이 좋다.
-어두운 시간의 외출, 산책 등을 자제하고ㅡ 역, 카지노 및 호텔 주변 등 우범지대 방문을 자제한다.
-범죄발생 시에는 본인 또는 아내인을 통해 인근 경찰서 또는 대사관(총영사관)에 즉시 신고한다.
-노상에서 집시들이 접근할 떄는 아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생각하지 말고 피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 혼잡한 곳에서는 가방 등 소지품을 옆구리 또는 등 뒤에 두지 말고 몸 앞으로 놓아야 한다. 특히 여권 및 사증을 분실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서류들은 허리에 차는 작은 백에다 넣어두면 가장 안전하다.
-택시를 이용할 때에는 대기하고 있는 택시보다는 우연히 지나가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며, 만일의 경우에 대비 차량번호를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통화
러시아 화폐 단위는 루블(Rouble)이며 미화 1달러는 31루블 정도이다.

환전요령
환전은 미국 달러로 하는 것이 좋다. 공항, 은행, 호텔내의 환전소에서도 환전 가능하며 환전을 할 때에는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러시아에는 암달러상이 많은데 안전상 은행 또는 전문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이 바람직한다. 낡은 지폐, 손상된 지폐 및 낙서가 있는 지폐는 현지에서 루블로 환전이 불가능하니 주의하도록 하자.
환전의 단위는 100달러와 50달러 지폐를 기준으로 하되, 잔돈은 10달러짜리 약 10매, 5달러짜리 5매, 1달러짜리 30매 정도를 준비한다. 불법적인 환전을 하는 경우는 추바오디거나 형사처벌을 받을 수 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으로 전화
러시아에서 해외전화 연결번호는 810번이다. 호텔에서 전화할 경우엔 외부 접속 번호(주로 0이나 9로 호텔에 따라 다르다)를 누른후 810번을 눌러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나라로 전화할 경우엔 81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순으로 누른다.

현지로 전화
한국에서 러시아로 전화할때
*국제전화 사업자번호(001, 002 등)-7(러시아)-지역번호-전화번호


주의사항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출입국 신고가 까다로운 편이다. 신고서에 적은 것과 실제 소지 내용이 다른 경우 벌금을 물게되며 여행객의 짐을 조사하는 일도 자주 있는 편이다. 따라서 세관 신고서는 정확히 기재하고 특히 카메라나 컴퓨터등 고가 장비는 입국시 날인을 받아 두어야 출국시 문제가 없다.


비자
우리 나라와 러시아는 비자면제협정이 맺어 있지 않아 러시아에 입국을 하려면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 한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사전에 주한 러시아대사관 또는 부산총여사관을 통해 입국비자를 발급 받으면 된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비ㅣ자발급이 다소 까다로운 편이며, 관광비자를 발급 받으려해도 초청장이 있어야한다. 러시앙의 비자는 2001년부터 여권에 씰을 붙여준다. 비자의 확인할 내용은 러시아어로 표기되러 있응며 비자도 사람이 발행하는 것이라 실수가 있을 수 있으니 미연에 문제발생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확인해 두어야한다.

※러시아 비자 특이사항
- 단수비자로서 지정된 입국일로부터 한 달간 유효
- 비자 발급 필요 서류
사진 1, 주소, 연락처, 여권(실사용여권-6개월이상 잔여기간, 2페이지 이상 잔연사증란)
-VISA FEE
2주 45,000원/ 1주 90,000원/ 1박 2일 140,000원/ 당일 160,000 (실제 소요 시간은 이클정도가 더 추가 된다)
* 수요일 , 토,일요일, 법정공휴일- 러시아 대사관 휴무일 (수요일은 초청장 발급이 가능)


전철
러시아 지하철의 특징은 지하의 깊은 곳을 운행하므로 플랫폼까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상당히 길며, 오르고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서 발을 디디는 데 조심해야 한다. 역 내부는 유럽 다른 국가의 지하철 역과는 다르게 정말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 지하철 입구에는 M이라는 표시가 있다.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항상 정해져 있으므로 나오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하철 역 내부에서 표를 파는데 한번 들어가서 타고 나오는 데 7루블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얼마나 멀리 가느냐는 요금과 상관없다. 무조건 티켓을 구입하여 표를 넣고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어느 거리의 역이든 갈 수 있다. 나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 타고 다녀도 된다. 정액권처럼 5번, 10번 사욜할 수 있는 표를 살수도 있다.
개찰구는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표를 넣고 통과한다. 나올 때는 표가 필요 없다.
지하철을 탈 때 주의할 점은 문이 급하게 열리고 닫힌다는 것이다.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와 마찬가지로 잘못하다가는 가방이나 옷, 다리 등이 문에 끼이게 된다. 그럴 경우 당황하지 말고 얼른 닫히는 문을 양손으로 힘을 줘 받치면 문이 다시 열린다.
차내에서는 다음에 정차할 역을 한 역 전에 러시아어로 방송한다. 러시아어를 모르면 정거장 수를 헤아려서 내릴 수밖에 없는데, 실수 하여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더하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한번 표를 넣은 이상 얼마든지 되돌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시간적 여유를 두고 지하철을 타도록하자.
지하철을 갈아타는 경우에도 오는 길과 가는 길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으니 무질서한 한국처럼 오는 길과 가는길을 혼동하지 말자. 한국보다는 지하철 에티켓이 엄격하게 살아 있는 곳이니 주의해야 한다.


러시아의 기후는 그 위치와 면적, 지형 등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광대한 영토의 대부분이 중위도 또는 고위도에 위치하고 한랭한 지역이 많을 뿐 아니라 해양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다. 러시아는 동서로 길 뿐 아니라 남북의 폭도 극히 넓어 남북의 기온차도 현저하게 크다.

흑해 연안의 얄타 지방은 1월의 평균 기온이 3.7℃인 반면,북쪽 끝의 첼류스킨 곶 지방은 더운 날이 거의 없다. 특히 베르호얀스크에서는 기온이 -67.8℃까지 내려간 일이 있어 북반구의 한극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대륙성 기후로서,모스크바 부근은 겨울 평균기온 영하 10도,여름 평균기온은 영상16도에 이른다.
서쪽의 유럽 러시아 지역은 여름인 7월의 경우 등온선 분포는 거의 위도와 평행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북극해 도서지방은 0 ℃,북극해안은 5∼10 ℃,시베리아 일대는 15 ℃ 전후, 유럽 러시아 지역은 20 ℃에 육박하는 기온분포를 보인다.
강수량 분포는 북위 60 ° 부근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떨어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대서양 기단의 진로가 북위 60 °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역의 강수량이 500 mm 이하인 가운데, 유럽 러시아와 동 시베리아에서는 500 mm,시베리아 중부 400 mm,북극해,카스피해 부근에서는 250 mm 이하의 강수량 분포를 보인다. 우랄산맥에는 지형성 강우가 빈발하는 편이며,지중해성 기후와 유사한 흑해 부근에서는 겨울 강우량이 많다. 또한 극동지역은 몬순성 강우가 많다.

러시아에서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5~7월의 초여름이다. 거의 매일 상쾌한 날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무르만스크에서는 백야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의 경우는 7~8월이 아주 좋다. 최상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때이다. 러시아는 여름다운 여름, 겨울다운 겨울을 느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이런 계절의 묘미를 즐기기 위해 여름여행과 겨울여행을 러시아에서 즐겨보자.


시차 : 1 ~ -6시간



▶ 모스크바 [Moscow]

모스크바는 광대한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정치, 경제, 사상의 중심이던 곳이다. 현재는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이 도시는 여전히 정치 및 산업, 문화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들로 가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이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서 가는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모스크바는 1991년 이후 러시아의 수도로 러시아에서 제일 큰 도시일 뿐만 아니라, 제일 유명한 문화기관 및 극장,영화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로 옮겨지기도 했으나 수공업과 상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러시아 혁명 후 다시 위치를 찾게 되었다. 역대 황제는 모스크바에서 대관식을 올리는 관례를 지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러시아의 2대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여 왔다.

모스크바의 인구는 약 1,000만 명이며, 도시 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순환도로의 길이는 109km에 이른다. 모스크바는 크렘린을 중심으로 하여, 맨 안쪽에는 볼바르노예 순화도로가 위치해 있고, 이 도로를 다시 사도보예 순환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마지막으로 3번째 자동차 순환도로가 불바르 순환도로와 사오보예 순화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로 되었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면 마치 과녁판과 같은 구조가 되기 때문에, 종종 모스크바를 '과녁도시'라고도 한다.

'러시아 인이라면 누구나 모스크바를 어머니처럼 느낀다'라고 톨스토이가 표현한 것처럼 모스크바는 이방인의 마음까지 강하게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로 90년에 공식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는 동떨어진 곳이라 생각되기도 했지만 모스크바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선입견을 버리게 될 것이다.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주요 관광명소인 크렘린, 붉은광장, 레닌묘소 등이 있어 옛 제국의 모습을 상상케 하며 바실리우스 대성당, 푸시킨 박물관, 모스크바대학 등은 신선한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러시아 국부의 82%가 이곳에 밀집되어 있는 만큼 고급외제차, 도로변의 화려한 광고판등 거리에는 서방 어느 대도시에도 손색없는 활력이 넘친다. 1997년에는 정도 850주년을 맞아 크렘린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요 건물 및 유적들의 대대적 보수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국민들은 건축상의 유산들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마천루 및 쇼핑몰, 교회 등에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새로운 유산을 만들고 있는 등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곳곳에서 개발과 재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다. 90년대 초만 해도 모스크바는 가장 러시아적인 도시이며 상트페테부르크(당시는 뻬쩨르부르크)는 가장 서구적인 도시라 하였는데 지금의 모스크바는 서구적인 모습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수렁에 빠진 거대한 러시아 경제를 구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정부와 각 사업체들은 외부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으며, 외국 정부의 원조나 조언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서도 서구 자본주의의 서비스와 상품들을 제공하고 있는 모스크바는 점점 국제적 사업활동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변화의 과정에서도 정신적, 물질적인 면에서 그 확고한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있다. 모스크바는 21세기를 맞아 제대로 재도약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육
모스크바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교육의 도시인만큼 많은 교육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특히 영화, 연극, 음악등 예술 쪽에서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문학교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우선 러시아를 가장 대표할 만한 최대의 종합대학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는(M.V 로모노소프 기념 국립 모스크바대학교는(Moskovskii gosudarstvennyi universeitet imeni M.V.Lomonosova:약칭 MGU)은 18세기 러시아 학자인 M.V 로모노소프가 러시아 학생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창설의 필요성을 원로원에 건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여제의 칙령으로 1755년 설립되었다. 300여년의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세계적 대학으로서 유럽 및 아시아, 아프리카의 180개 이상의 대학들과 교류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교는 붉은광장의 현재의 역사박물관 자리 부근에 위치했으며, 3개 학부(철학, 의학, 법학)로 출발하였다. 그 당시 학생은 귀족과 평민출신 지식인으로 구성되었고,학교에 관한 모든 사항은 교수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대학 내에서의 강의 내용은 1756년 만들어진 대학 내 서점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이 러시아에 퍼져나가도록 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엽의 사회적 변혁기에는 대학 안에서도 학생운동이 고조되었으며, 정부는 이를 탄압하여 1911년 대학을 폐쇄하였고,이에 항의하는 130명의 학자가 대학을 사임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대학은 완전히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및 농민의 자녀들이 실질적으로 대학에서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학부도 증폭 개설되어 82년에는 기계공학, 수학, 컴퓨터수학, 사이버네틱스, 물리학, 화학, 생물학, 토양학, 지리학, 지질학, 철학학, 역사학, 언어학, 저널리즘, 심리학, 경제학, 법학의 17학과와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 연구소를 비롯한 부속연구소와 도서관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학은 또한 몇 개의 대학 도서관을 합하면 80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중 200만 권이 외국어 서적이다. 일년에 평균 55,000여명이 이용하고 5백 5십만 여권의 책이 대출되고 있다. 연구소는 450여 개,대학 내 박물관이 3개,기타 대학 내 중고등 학교 과정 학생들이 모여서 추가로 수업 및 연구를 하는데 이 인원만 해도 매해 5,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입학경쟁이 치열하지만 학비는 무료이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을 받는다. 이 대학교는 10월 혁명 이후 크게 발전하여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 외 차이코프스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 그네신 국립 음악대학,러시아 민족우호대학,푸쉬킨 언어대학교, 모스크바 국립항공대학교 등등 나열하기 힘들정도로 많은 대학들이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비롯하여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러시아 국립영화학교,푸슈킨 연극전문대학,러시아 민족우호 대학, 모스크바 항공대학등에는 많은 한국의 유학생들이 수학하고 있다.

통화
러시아 화폐의 단위는 루블(Rouble),1루블은 100코페이카(Kopeck)이다. 현재는 1,5,10,50 코페이카와 1,2,5루블짜리 주화 5,10,50,100,500,1000,5000 루블 지폐가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코페이카는 우리나라의 1원이나 5원처럼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대륙성 기후로 해마다 기후변동이 심하다. 겨울은 10월 말 첫눈이 내리면서 시작되어 4월 초까지 계속된다. 햇빛을 보기 거의 힘들고 쉴새없이 눈이 내린다. 보통 눈이 내리는 날은 영하 15 ∼ 20℃이고, 해가 나는 날은 그보다 더 춥다. 1월 평균 기온은 -11℃정도. 상대적으로 봄·가을이 짧으며 4월 말부터 기온이 올라가 서서히 여름에 들어선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날씨는 워낙 변덕스럽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 이러다 갑자기 눈이 오기도 한다. 심지어 5월에도 눈이 날릴 정도이다.
5월은 본격적인 봄이다. 추위의 기습, 또는 이상기온을 대비해 따뜻한 외투를 항상 입고, 안엔 차근차근 벗고 다닐 수 있도록 짧은 소매 옷과,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것이 좋다.
6, 7, 8월은 가장 행복한 계절이다. 사람들은 긴 휴가를 떠나고 소나기를 뿌리고 지나가지만 청명한 하늘과 구름들을 볼 수 있다. 기온은 이상기온이 아니라면 18 ∼ 25℃ 정도이고 가장 더울 때는 30 ∼ 31℃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7월 평균 기온은 19℃정도이다. 연평균 기온은 4.4℃. 연간 강수량은 570㎜,여름과 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적설량은 400㎜정도이다.




▶ 블라디보스톡 [Vladivostok]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을 지닌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중요한 항구 도시이다. 1860년 6월 20일에 창립되었고 1880년에 시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표트르 벨리키(포트르 대제)만을 아루르스키만과 우수리스키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으로 개인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국제 심포지움과 학술 회의가 자주 열리고,태평양 함대의 모함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함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지금은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내 중심에 예전에 일제 시대 때 한국인들이 이주해서 산 장소가 있으며 그곳을 지금은 '페르바야 레치카'라고 부른다.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은 한국 근대사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어서 지금도 각 대학의 도서관 문서 보관소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시차는 GMT보다 10시간 빠르고 모스크바보다는 3시간 빠르다. 따라서 우리나라보다 1시간 빠르다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러시아 땅으로 북한의 최북단과 인접해 있는 항구도시다. 이곳은 극동지구 최대도시로 인구가 65만여명에 이르며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의해 생겨난 곳이다. 군항, 산업항, 어항 으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조선, 수산가공등 공업중심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자지하고 있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8-1922년에 걸쳐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이라 불리는 점령하에 수많은 러시아 주민들이 무고한 피를 흘려야만 했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항구로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여객선과 화물선은 대개 러시아 극동지역의 다른 항구를 이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무르만스크에서 러시아 북극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북해항로의 동쪽 종점이며,첼류스킨 곶 동쪽에 있는 북극해 연안 항구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보급기지이다. 1950년대초 외국 선박의 블라디보스토크 출입이 금지되어, 오늘날 국제 해상무역은 대부분 블라디보스토크 동쪽의 나홋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수출품은 석유, 석탄, 곡물이며 석유제품과 생선이 주요수입품이다. 극동지역의 다른 항구에서 잡거나 가공한 생선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서 다른 지역으로 수송된다. 러시아 북극 포경선단의 기지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연방의 행정지구인 연해주의 주도이다. 정식 행정명칭은 '프리모르스키'주(Primorsky Kray) 인데, 프리는 연안이라는 뜻이고, 모르스키는 '바다'라는 듯이다.

교육
러시아 연방 극동지역의 교육·문화 중심지로서 극동과학 센터와 극동공립대학교(1920)·의과대학·예술대학·공과대학·상과대학·선박공학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들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음악협회와 교향악단 및 극단,지방 역사박물관과 태평양함대 역사박물관 및 수많은 도서관이 있다.

산업
블라디보스톡의 공업기반은 공산혁명이 일어난 뒤 매우 다양해졌다. 대규모 선박 수리소 이외에 철도 공작창과 광산장비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경공업으로는 기계, 라디오, 공장, 목재 가공공장(특히 가구와 합판공장), 도자기 공장, 의약품 공장 등의 경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선, 육류 가공, 제분을 중심으로 식료품 산업과 조립식 건축자재 생산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연해주의 주요 산업은 수산업, 해산물의 가공, 임산업, 비철금속공업, 건설재료공업등이며 그중에 수. 임산업은 주요한 외화 획득원이 된다. 블라디보스톡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흐토카(nakhodka)시가 자유경제구로 되어 있기에 그 여파로 블라디보스톡시는 무역, 금융의 중심지로 변하고 있다.

몬슨기후로써,겨울은 짧고 겨울의 평균 기온이 -12도 정도로 매우 춥다. 여름은 비가 많이 오며 평균기온이 14~21도 정도이다. 연간 강수량은 600~900mm이다. 연안을 따라 차가운 해류가 흐르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낀다. 여름철에는 바닷바람으로 습기가 자주 차며 안개와 비도 잦다.




▶ 사할린 [Yuzhno-Sakhalinsk]

러시아연방 사할린주를 이루는 섬으로 면적 7만 6,400 ㎢이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의 섬으로, 오호츠크해와 동해에 둘러싸여 있고, 대륙과의 사이에는 최단거리 약 8 km의 타타르 해협이 있다. 동으로는 길게 뻗은 쿠릴열도가 있는데, 현재 약 40여개의 활화산이 형성되어 관광자원이 많으며 인근에는 세계 4대 어장중의 하나인 북서태평양 어장이 자리잡고 있어 러시아 어업 전진기지로서 유명하며,남으로는 항공기로 불과 40-50분 거리에 일본 홋카이도가 인접하여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남부에는 서 사할린산맥과 동 사할린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그 사이에 길쭉한 평야가 자리잡고 있다. 북부는 북단의 슈미트 반도에만 산지가 있다. 북부에는 낙엽송 ·가문비나무 등이 많고,중부와 남부에는 전나무류가 많다. 또 북부의 해안지대에는 툰드라가 있다.
섬의 남부는 평야지대가 많으나 중부 이후에는 산악지역으로 산림자원, 지하자원, 수산자원이 아주 풍부한 지방이다. 특히 사할린의 북쪽은 천연가스가 풍부하며, 1999년 7월부터는 원유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러시아의 보고로 통하는 지역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러시아인이며, 한국인은 소수민족 중 최대이다. 한국 교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에 의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 및 군수공장에서 혹사당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다. 원주민은 아이누, 길랴크(니브히), 오로크인(人)이며, 소수의 일본인이 있다. 교통은 코르사코프와 모스칼보를 잇는 남북선이 이용되며,대안(對岸)의 바니노와 사할린의 여러 연안항구 사이에는 정기선이 다닌다.

산업
게,청어,대구,연어잡이가 해안지방에서는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이며 그밖의 지역에서는 북부의 석유채굴, 남부의 석탄채광, 제지업, 제재업 등이 기반을 이룬다. 자원은 석탄과 천연가스가 주를 이루며, 산업구조는 러시아 전체 산업 생산량 중 51위로 식료품생산 46%,연료산업 20%이다.
농업구조는 러시아 전체 농업생산량 중 70위이고 사료가 71%를 차지한다. 섬의 60 %가 숲이기 때문에 목재 가공과 펄프 제조가 주요공업이며, 수산업도 활발하다. 석유와 석탄도 러시아연방 극동의 주요산업을 이루며,북부의 오하 유전으로부터 콤소몰리스크, 하바로프스크에 송유된다. 농산물은 자급자족을 할 수 없으나, 감자밭과 목초지가 많다. 축산으로는 순록, 젖소, 여우 등이 사육된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몬순기후대에 속하며,여름에는 오호츠크해의 저온다습한 기온대,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시베리아기단의 영향을 받는다.
지리적인 위치와는 다른 특이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여름은 7월-9월(약 3개월)이며 겨울은 10월-4월 (약 7개월) 이며 나머지는 짧은 봄과 가을이 있다. 겨울에는 강풍을 동반한 폭설로 천지가 눈으로 쌓여 있어 이듬해 4월이 되어야 눈이 녹고 여름에는 한국의 가을날씨와 비슷한 기상으로 자연을 한 껏 즐길 수 있는 시즌이다. 천식과 기관지가 나쁜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말한 '유럽을 향해 열린 창'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 2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힘과 영과을 차지하기 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그 역할을 담당했었다.1703년 피터 대제에 의해 건설된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로 시작해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란 이름을 거쳐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되었다. 1703년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네바강 하류 습지대에 건설된 뻬뜨로파블로스끄 요새의 완공과 함께 탄생된 이 도시는 1712년 모스크바를 제치고 나라의 심장부로 등장하면서 두 세기에 걸쳐 제정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 예술,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러시아 여느 도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수많은 외국인들로 붐비는 모스크바와는 대조적으로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은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이다.

30개가 넘는 네바 강 위의 섬을 다리로 연결하느라 생긴 수많은 운하들로 인해 북구의 암스텔담, 베네치아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또한 성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여행자들은 18, 19세기 바로크의 아름답고 화려한 건축, 에카테레나 여제가 모아 놓은 수많은 예술품들을 만난다.
성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두 도시는 경쟁 도시로 흔히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도인 모스크바가 유럽에서 제일 아시아적인 느낌이 강한 도시라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가장 유럽의 느낌이 강한 도시라 하겠다. 모스크바에 비해 도시 역사는 짧지만, 2차대전 중 모스크바가 건물 대다수가 파괴되는 곤욕을 치러야 했던 데 반해, 페테르부르크는 죽은이의 살을 베어먹어야 할 만큼 참혹한 판국에서도 독일군의 봉쇄 전략에 끝까지 대항해 도시를 지킨 시민들의 그 유명한 9백일 항전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18 ∼19세기 바로크풍의 건물들이 예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뽐내고 있다.

이 도시는 많은 전설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86개의 강과 운하, 101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포함하면 623개)로 연결된 물의 도시이기 때문에 '북방의 베네치아', '제 2의 암스텔담'이라고 불리었다. 도시 면적의 1/10이 수면이고, 늪지대를 매립해서 건립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들이 붙여진 것이다. 곳곳에 들어선 공원, 광장, 궁터 그리고 질서정연한 도시계획 때문에 '북쪽의 파리'라고도 하며 백야인 여름에는 북국의 오아시스로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준다.
이곳은 유럽에서도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일찍부터 유럽의 건축양식과 문화·문화, 예술, 사상 등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러시아 제정을 붕괴한 동란의 진원지이며, 10월혁명의 발상지로서 세계사에 사회주의 혁명의 도시로 각인돼 있다. 도시의 모습은 르네상스시대이래 서구적인 도시계획의 표준형으로서 기하학적이며 직선적이었는데, 중세 풍의 도로가 구불구불하게 있는 비뚤어진 모양의 비조직적인 형태는 러시아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격변하는 러시아 역사의 전개를 그대로 반영하듯이 이 도시의 이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건립될 당시 조선과 항해술이 발달하고 선진국으로 흠모의 대상이었던 네덜란드에 푹 빠진 표르트 대제는 네덜란드 식으로 지은 이름을 성 삐제르부르크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곧 독일식의 성 페테르부르크로 바뀌어 제정 시대 내내 수도로서 역할 해 왔으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불법 침공에 저항하는 뜻으로 적국의 이름 형태를 버리고 뻬뜨로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그 후 레닌이 사망한(1924) 이후 혁명운동 본거지였던 이 도시를 가리키는 뜻에서 레닌그라드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91년 11월 7일 소련연방의 해체와 함께 찾아온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본래 이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되었다. 제정과 사회주의 체제,그리고 공화국이라고 하는 세가지의 다른 역사와 문화를 알기에 좋은 여행지이다.

산업
19세기 후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화려한 궁정문화와 함께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을 향하는 산업도시로서의 본격적인 성장을 했다. 그러한 성장은 무엇보다 당시의 새로운 교통·통신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181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증기선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건조되었고,1837년에는 지금의 푸쉬킨 시와 여름궁전을 잇는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그 뒤 1841년 모스크바까지의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1862년에는 러시아 내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부설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이러한 성장은 1861년 알렉산드로 2세가 단행한 농노해방에 힘입은바 크다. 농노해방에 형식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봉건지주의 속박에서 벗어난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당시러시아 최대 공업도시이자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도시의 인구는 1864년 53만 9,400명에서 1900년에는 150만으로 늘어났고 10월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에는 250만으로 급증했다. 이러한 인구급증은 당연히 공업발전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원활하게 했고,도시의 산업발전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챠르의 전제 정치에 대한 혁명의 온상이 되었다. 국가 기간산업의 집중과 공업의 발달로 1914년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공장 노동자가 25만에 달했다. 이들의 작업 환경은 더럽고 비위생적이었으며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야 했다.

현재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도시로 전체 고용인구의 절반 이상이 공업과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공업은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의 비중이 큰데,특히 기계공업 분야가 발달하여 시 공업생산의 1/2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화학공업은 비료·타이어·합성고무·페인트·플라스틱·약품 등을 생산한다. 그밖에 냉장고·라디오·텔레비전 등 가전제품 중심의 소비재공업과 자동차공업 및 조선 업이 발달하였다. 반면에 에너지의 기반이 미약하여 멀리 떨어진 북방의 보르쿠타·페초라탄전의 석탄,에스토니아의 석유·가스,모스크바 방면으로부터의 파이프라인에 의한 송유, 볼가 및 우랄 방면으로부터의 장거리 송전 등에 크게 의존한다.

위도상 상당히 북쪽에 있지만, 대서양의 영향으로 남쪽에 있는 모스크바보다 오히려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봄과 여름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6월 하순 백야제가 개최될 무렵에는 한밤중에도 하늘에 빛이 남아 있어 밖에서 신문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으며 새벽 3시가 지나면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7월 평균 기온은 17℃정도이고, 북극권에 가까운 까닭에 겨울철에는 밤이 길지만 여름 초기에는 백야가 계속된다.
가을은 봄과 마찬가지로 짧고,10월이 되면 겨울을 알리는 추위가 시작된다.
1월 상순에서 2월까지가 가장 추운 시기로 1월 평균 기온이 -7℃정도로 영하 10 ∼ 20℃까지 내려가는 경우도 많다. 눈이 덮여 있는 날이 연평균 132일 이나되고 이 도시에서 흐르는 네바 강은 보통 11월에 얼어붙기 시작해서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풀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58m로서 여름철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다.

피의 사원




▶ 이르쿠츠크 [IRKUTSK]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우는 이르쿠츠크는 앙가라 강과 이르쿠트 강의 합류지에서 앙가라 강변을 끼고 있다. 1652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처음 식민지로 만들 당시에 세운 월동 야영지에서 비롯되었으며, 1661년에는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곳은 시스바이칼리아와 러시아에서 중국과 몽골로 가는 무역로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했다. 1686년 시가 되었으며 1898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들어선 뒤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앙가라 강의 이르쿠츠크 수력발전소가 이 도시 내에 있으며 그 저수지는 위로 바이칼 호에까지 이어진다. 강변의 제방이 아름다우며 가로수가 줄지어 있는 거리에 많은 목재 가옥들이 남아 있다. 동시베리아와 러시아 연방 극동지방의 행정·문화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 이르쿠츠크국립대학교(1918)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시베리아 지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육·연구 기관들이 있다.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는 이르쿠츠크 거리에는 구형 자동차와 신형 자동차,시가 전차가 거리를 걷는 사람의 마음을 경쾌하게 만든다. 최근 들어서는 외국 투자 자본이 많이 들어오면서 물가 상승률이 많이 올랐다. 일본과 프랑스,미국 합작 자본으로 지하자원을 개발한다는 러시아의 공식 발표에 외국인 또한 상당히 많이 체류하고 있다. 한국과 시간대가 같다.

특히 여름철에는 러시아의 부호들이 지중해성 쾌적한 기후와 고풍스런 중세기풍의 분위기에 이끌려 이 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으며,1997년 이후 몽골을 경유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혹심한 대륙성기후로 11월 부터 3월까지의 날씨는 가히 살인적이다라고 할 만 하 다. 6월부터 8월까지의 평균 기온은 약 15도 정도이고 전체적으로 강수량은 매우적다. 1년 중에서 가장 많이 내린다는 7월에도 겨우 100mm정도이다. 그리고 특히 겨울에는 평균 20mm미만이 강수량을 보인다.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 하바로프스크 [khabarovsk]

러시아 연방 동쪽 말단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지역의 행정중심도시. 아무르 강이 우수리 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약간 하류 쪽에 있다. 17세기 중엽 아무르 강 유역을 여러 번 탐험했던 러시아 탐험가 E.P.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현대적인 도시는 1858년에 군사전초기지로 세워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아무르 강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로서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줄곧 극동 지방의 중심지였으며,한때는 베링 해협까지 이르는 극동 지방 전역을 관할하기도 했다.

아무르 강 쪽으로 가파르게 경사진 산등성이 및 작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름다운 강변 공원과 산책로를 갖추었으며,단층 목조 주택들이 나란히 있어 독특한 경관을 형성한다. 주요한 산업 중심지로서 대부분의 산업은 상류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기계 및 기계조립,정유,목재,가구제작,경공업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종합기술대학·농업대학·의과대학·사범대학·철도공학대학이 있으며,과학연구소가 여럿 있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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