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따뜻한 나라로서 프랑스 공화국 (La Republique Francaise)이 공식명칭이다.
과거 식민지 보유 측면에서 영국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자랑했던 프랑스는 아직도 외교적 차원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여전히 EU(유럽연합)을 주도하고 있으며, 100년 전쟁을 치뤘던 영국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지만, 양차 세계대전을 치뤘던 독일과는 사이가 좋다. 프랑스는 본토뿐만 아니라 5개의 해외 자치주(과달루프, 기아나,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셍 피에르 에 미크롱)와 해외영토(뉴칼레도니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왈리스-푸투나 제도, 마이요트 등)를 소유하고 있다.
항공
우리나라에서 프랑스로 가는 직항편은 파리이며 대한항공, 아시아나, 에어 프랑스가 운항하고 있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도 여행할 수 있으며 유럽의 대도시를 이용하여 파리 이외의 지방도시로의 여행도 가능하다.
면적 : 54만 3965㎢
수도 : 파리
인구 : 6735만명(2008년)
정치형태 : 대통령제
종교 : 천주교 83%, 개신교 2%, 유태교2%, 회교 5%
주요도시 : 파리, 리용, 마르세이유, 니스, 보르도 등
주요민족 : 골(Gaule)족으로 알려졌으나 역사적, 지리적으로 여러 민족이 유입 혼합되었다.
주요언어 : 프랑스 어
기후
프랑스는 해양성 기후, 대륙성 기후, 지중해성 기후의 유럽기후를 다 나타낸다. 여름에는 그다지 덥지 않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으며 농사짓기에 딱 좋은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15~20℃이고 7월 평균기온이 20℃로 가장 높으며 겨울 최저 평균기온은 2℃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800mm정도이다. 봄, 가을은 짧으며 이 시기 봄에서 여름 사이가 녹음이 짙은 북프랑스로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여름엔 30℃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만큼 여름날씨가 짜증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여름이라도 상당히 서늘한 때가 있기도 하다. 겨울철이 우기인데 낮엔 잔뜩 흐리다가 그냥 맞아도 될 정도로 밤에 이슬비가 촉촉히 내린다. 일교차가 크고 지역에 따라 기온이 많이 다르므로 미리 알아보고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Comment allez-vous?/Je vais bien, merci 꼬망 딸레 부?/쥬배 비앙, 멕시
의 미 : 안녕하십니까?/네, 좋습니다.
현지어 : Je ne parle pas francais 쥬느 빠흘르 빠 프랑새
의 미 : 나는 프랑스어를 잘 못 합니다.
현지어 : Combien? 꽁비앙?
의 미 : 얼마입니까?
현지어 : Quest-ce que c'est? 께 스 끄 쎄?
의 미 : 이것은 무엇입니까?
현지어 : Merci/Merci beaucoup 멕시/멕시 보꾸
의 미 : 감사합니다./대단히 감사합니다.
관광제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든 프랑스 요리 한가지 정도는 즐겨볼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요리로 푸아그라는 전재요리로 살이 통통한 거위 간을 이용하여 만든 요리이다. 에스카리고는 달팽이 요리로 전채요리로서 달팽이를 데친 것에 마늘, 파슬리, 버터를 넣어 구운 음식이다. 먹을 때에는 왼손으로 집게 같은 도구와 오른손은 꼬챙이로 내용물을 꺼내 먹는다. 쇠고기 포도주 찜은 일반적으로 가정집에서 흔히 먹는 음식으로 부르고뉴식 쇠고기 요리를 의미하는데 홍당무, 양파, 샐러리, 표고버섯, 향신료를 포도주에 버무려서 찐 음식이다.
프랑스 요리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북 프랑스는 음식을 조리 할 때 생크림, 우유,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많이 사용하고, 남 프랑스는 매콤한 고추, 토마토를 많이 사용한다. 또마뜨 파르씨는 동남부 지방인 프로방스의 전통음식으로 토마토의 윗부분을 잘라 속을 파낸 후 돼지고기와 양파를 다져 채운 후, 오븐에 구워 낸 것이다. 노르망디 지방의 전통음식인 물르 마리니에르는 홍합을 백포도주에 쪄낸 것으로 국물없이 바싹 익혀 알맹이만 소승에 찍어서 먹는다. 크레프 오 프뤼 드 메르는 부르타뉴 지방의 전통음식으로 우유, 계란, 밀가루를 섞어 얇게 부쳐서 각종 해물을 싸서 먹는다.
요리와 함께 식사예절을 익혀두어 세련된 여행을 하도록 한다.
식사를 할 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실례를 범하는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얘기나 주변의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묻는 다거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주의한다. 프랑스는 보르도 지방에 와인과 꼬냑으로 유명한 주류가 나오나 다른 음료를 마셔도 괜찮다
방문적기
프랑스 여행은 봄이 가장 좋다. 하지만 4월에도 겨울 같이 추워지기도 하고, 해안 휴양지들은 5월 중순이 되서야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한ㄷ. 겨울에도 쾌적하지만. 10월 말쯤 되면 좀 싸늘 한 감이 있다.
역사
로마가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았고, 결국 5세기 말 프랑크계 살리족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하였고, 서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을 차지하였다. 살리족은 6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지방을 장악하였고, 8세기에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이어지면서 중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카를 대제시대에는 로마교회와 상호협조 속에 학문과 예술을 꽃피는 계기로 서로마 황제란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카를대제 죽음으로 귀족과 왕가의 권력 싸움이 벌어졌으며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 초반에는 힘이 약했으나 1328년까지 존속하면서, 플랑드르ㆍ부르고뉴ㆍ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봉건적 지배체제를 확립함으로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은 1337-1453년 백년전쟁으로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유발시켰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서 굳게 자리하였으며,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하였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리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로 프랑스 영토는 오늘의 영토의 면적을 갖게 된다. 백년전쟁을 통하여 관료제의 정비, 조세개혁, 군창설 등으로서 국민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 속에 초기자본주의적 주의를 가슴속에 품는다. 하지만 도시 수공업자, 농민, 하급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신교 운동은 종교전쟁을 불러온다.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교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면서 결말을 이른다.
이 혼란 속에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에 올랐으나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낭트 칙령을 공포하고 위그노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 17세기 추기경 리슈리외와 마자랭같이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와을 보필하면서 유럽의 최강국으로 된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중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몄으며 태양왕을 자임함으로 프랑스의 절대왕권시대로 접어든다.
18세기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를 거듭하면서 프랑스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면서, 1789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부르봉왕조를 탄압시킨다. 이 후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부르봉왕조시대란 "앙시앵레집(구제도)시대를 무너뜨린다. 1789년에 루이왕조에 대한 불만을 느낀 신흥시민계급이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함으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맞게된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혁명 후 프랑스는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암투 속에 암흑정국을 빚어낸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정권이 이전되었고 나폴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하였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고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게된다. 이 후에 프랑스는 왕정의 반동정책과 신흥계급의 혁명적 열기로 1830년에 7월 혁명에서 1848년 2월혁명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기 프랑스 근대국가의 기초를 확립한 시기로 시민들의 봉기에 의한 선거권이 보장되었고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헌법이 성립된다.
공휴일/축제
신정(1.1)
부활절
노동절(5.1)
승전기념일(5.8)
승천일
성신강림일
혁명기념일(7.14)
성모승천일(8.15)
만성절(11.1)
휴전 기념일(11.11)
성탄절(12.25)
국제전화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대도시에서는 카드식 공중전화가 대부분이며 전화카드는 우체국의 전용창구나 담배가게에서 판다. 공중전화는 지하철역내, 현대식 버스 정거장, 카페안, 거리 등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주택가에는 상대적으로 공중전화가 적다.
수신자 부담 전화는 한국통신 0800-99-0082와 데이콤 0800-99-0182를 이용하면 된다. 한국교환원과 연결이 되므로 편리하다.
미용실
시네헤어숍16, rue Duvivier 75007 Paris / Tel. 01 47 53 03 36
쥬베 rue des Moines 75017 Paris / Tel. 01 42 29 33 82
Invites 13, rue Ginoux 75015 Paris / Tel. 01 45 77 99 98
이경연헤어숍 163 rue des S?vres 75015/ Tel. 01 43 06 45 91
강&리미용실 19 rue Daniel Stern 75015/ Tel. 01 45 78 60 33
머리허니 11 rue Edouard Manet 75015/ Tel. 01 44 24 82 25
블루헤어 22 Av F?lix Faure 75015/ Tel. 01 40 60 08 64
우편
우체국(LA POSTE)
-업무시간 : 평일 8시-19시(토요일은 12시까지)
-우표는 담배가게에서도 판매하며 우체통은 노란색으로 길거리나 건물벽에 부착되어 있음.
중앙우체국
-휴일없이 24시간 업무(국제전화, 전보 및 기타 우체국 업무)
-주소 : 52 rue du Louvre 75001 Paris(루브르 박물관 부근)
유용한전화번호
▣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주소 : 125, rue de Grenelle 75007 Paris (지하철 13번선 Varenne)
전화 : 01- 4753- 0101
▣ 긴급 연락처
경 찰 : 17
소방서 : 18
구급차(SAMU) : 15
SOS 의사 주간 : 1-4707-7777 / 야간 : 1-4337-7777
재불 한인회 : 1-4250-9966
KOTRA : 1-4225-0957
전압 및 주파수
220V, 50Hz. 2핀 방식에 간혹 접지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3개의 핀이 있는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콘센트에 접지를 위한 쇠막대가 달려 있는 경우가 있으니 플러그 손잡이 부분이 동그란 경우에는 미리 어댑터를 준비해야 한다.
치안
치안은 안전한 편이지만 유럽의 웬만한 도시치고 소매치기가 없는 곳은 드물다. 파리역시 그런 곳 중의 하나다. 특정지역의 심야시간대를 빼고는 전반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특히 관광객이 집중되는 지역인 에펠탑, 개선문, 오페라,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 등은 소지품이나 귀중품을 항상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시내 보행 시에는 집시 등 제 3국인의 접근을 경계하고, 파리 시내 밤 관광의 경우 삐갈거리 등 유흥가 출입시 바가지 요금을 강요당하거나 또는 업소의 종업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출입을 자제하는 것이 특히 요망된다.
통화
유로화를 사용한다. 2008년 4월 현재 1유로는 1526원.
한국으로 전화
프랑스의 공중전화는 동전식과 카드식 2종류가 잇는데 요즘에는 거의 카드식 공중전화로 대체되었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 때는 00(국제접속번호)+82(한국 국가번호)+0을 뺀 지역 번호+상대방 전화번호를 누르거나 교환원을 원하거나 후불카드를 이용할 경우에는 한국통신 080-099-0082, 데이콤 0900-99-0182, 온세통신 0800-91-3648을 누르고 안내방송에 따른다.
주의사항
프랑스에서 팁은 Pourboire라고 함. 택시에서 수하물은 주행 요금과는 별도로 요금의 10-15% 정도 가산. 호텔계산서에도 대개 10-15%의 서비스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Service Compris'라고 표시되어 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도 요금에 서비스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미국식의 팁과는 다른 개념이다. 서비스를 받은 경우 거스름돈 중에서 잔돈(1-5유로)을 팁형식으로 지불하는 것이 관례이다.
비자
한국민은 프랑스와의 단기체류비자 면제협정에 의해 비자 없이 3개월간 체류할 수 있다.
버스
보통 기차가 다니지 않는 지역을 운행하므로 장거리보다 단거리 버스인 경우가 많다. 티켓은 차에 오를 때 운전기사로부터 구입한다.
철도
프랑스의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프랑스 철도패스는 유럽이나 러시아, 터키,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여행객은 이용할 수 없다. 여권의 영문이름과 동일하게 예약한 후 이용하고 발권한 후 6개월 이내에 사용해야 한다. 다만 사용하지 않은 패스에 대해서는 1년 안에 일정의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이 가능하다.
패스는 1개월이내에 3일동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8일을 더 연장할 수 있다. 물론 연장시 추가 요금을 내야하며 요금은 1등석 2등석의 여부 성인과 26세 미만등의 조건으로 구분된다. 2004년 현재 1등석 성인요금은 $220이며 26세미만은 $165이고 1등석을 하루 더 추가하면 성인으 $32을 내야한다. 요금은 매년 변경되므로 출발시 확인하는게 좋다.
택시
호텔 리셉션에서 호출이 가능하고, 공항, 기차역 및 시내 곳곳에 택시 정류장이 있다.
프랑스는 해양성 기후, 대륙성 기후, 지중해성 기후의 유럽기후를 다 나타낸다. 여름에는 그다지 덥지 않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으며 농사짓기에 딱 좋은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15~20℃이고 7월 평균기온이 20℃로 가장 높으며 겨울 최저 평균기온은 2℃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800mm정도이다. 봄, 가을은 짧으며 이 시기 봄에서 여름 사이가 녹음이 짙은 북프랑스로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여름엔 30℃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만큼 여름날씨가 짜증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여름이라도 상당히 서늘한 때가 있기도 하다. 겨울철이 우기인데 낮엔 잔뜩 흐리다가 그냥 맞아도 될 정도로 밤에 이슬비가 촉촉히 내린다. 일교차가 크고 지역에 따라 기온이 많이 다르므로 미리 알아보고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시차 : -8시간
▶ 니스 [Venice]
우리나라와 달리 햇빛을 보기 어려운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양도시가 바로 프랑스의 니스(Nice)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천사만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꼬따쥬르의 중심에 있는 도시로 사시사철 햇빛이 비추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아름다운 도시이다. 이곳의 아주길고도 아름답다운 해변과 깊고도 푸른바다를 본 관광객이라면 아마도 다시한번 이곳을 찾고 싶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교육
니스에는 1933년에 상트르위니베시테르메디테라네앙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1965년에는 법학과,과학과,문과를 갖춘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국제적인 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1933년에 설립되어 시인인 폴 발레리가 1대 총장을 지낸 상트르위니베시테르메디테라네앙대학교에서 현대문제와 언어학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산업
유럽에서 손꼽히는 관광도시인 니스의 관광사업은 여름, 겨울의 구별없이 니스의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을 자리잡은지 오래이다. 이외에 니스의 주요한 산업으로 식품가공업과 올리브 기름, 증류주, 향수 제조업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 도입된 신기술 산업인 전자 정밀기계업은 니스의 또다른 주요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 디종 [Dijon]
디종(Dijon)은 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중의 하나로 과거에 500여년동안 부르고뉴 공화국의 수도였던 이유에 시내의 중심부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역사가 있음에도 디종시내의 거리는 이러한 우아함이나 장엄한 분위기 보다는 신선하고 산뜻한 이미지가 많이 풍기는데, 그것은 이곳에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포도주 생산지역인 황금해안의 포도밭으로 이 일대를 여행하는 관광객의 출발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육
디종에 위치한 교육기관으로 가장 유명한것은 물론 디종 대학교이다. 1722년에 세워진 디종 대학교에는 의과대학과 법과대학 그리고 자연과학대학 및 문과대학이 있는 이 지역 최고의 종합대학이다. 1731년부터 주교구가 되었다.
산업
디종은 프랑스의 상업의 도시이자 관광의 도시이며 또한 교통통신의 중심지인 도시이다. 이러한것 이외에 이곳 디종은 주조업(鑄造業)과 자동차 산업, 기계및 전기 공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또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부르고뉴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리옹 [Lyon]
파리와 마르세유에 이은 프랑스 제3의 도시인 리옹(Lyon)은 고대로부터 프랑스의 요충지로 번영해 왔었다. 2000년의 오래된 도시인 만큼 리옹 시내 근교를 둘러보면 로마시대의 유적이라든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쉽게 보인다. 또한 이곳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식도락가들로 인하여 세계적인 식도락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손강의 서쪽이 구 시가지이며 론강 주변의 광활한 지역이 신 시가지다. 그리고 론강과 손강이 사이는 벨쿠르 광장과 시청사 등이 있는 리옹의 중심가이다.
산업
상업, 금융 의 중심. 이탈리아의 기술도입으로 시작된 직물 산업으로 번영하여 현재는 방직외에 화학, 기계 공업도 성장하여 매년 국제 견본시장도 개최하고 있다.
▶ 마르세이유 [Marseille]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지중해 최대의 항구 도시가 마르세유(Marseille)이다. 과거 마르세유는 그리스의 식민지였으나 훗날 상업도시로 번영해 왔던 곳으로 다른 항구 도시와 마찬가지로 항구도시만의 독특한 향수가 느껴지며 개방적인 곳이다. 마르세유에는 관광명소가 적은 편이지만, 매력적인 거리를 걸어다니다가 마르세유에서 유명한 부이야베스(생선스프류) 요리를 맛보는 것이 이곳 마르세유의 또하나의 매력이다.
▶ 보르도 [Bordeaux]
프랑스의 남서부 아키텐(Aquitaine) 지방 지롱드 주의 주도로서 갸론느(La Garonne)강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점령기 이래 육상 및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 화려한 건축물들이 많이 있어 과시적인 면모를 지닌 도시이다. 현재 보르도의 도로망은 19세기 초반에 건립된 껭꽁스 대광장(Esplanade des Quinconces)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으며, 18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많은 아름다운 도시로서 베르사이유와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워프(Anwerp)를 결합되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보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포도주라고 할 수 있다. 보르도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중요한 도시인데 보르도 포도주의 분류상 36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며, 각 지구마다 여러 개의 코뮌으로 나누어진다. 코뮌 내에는 샤토라고 불리는 포도원들에서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몇몇 샤토를 돌아보며 견학하고 시음도 해 볼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보르도는 대서양 연안의 항구 도시로서 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는 스페인이 있다. 보르도시는 프랑스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지롱드파, 몽테스키외, 몽테뉴와 같은 유명한 사상가들을 낳은 숭고한 정신이 깃든 도시이며, 르네상스 시대 문화와 예술을 간직한 도시이자 최첨단 항공 산업 및 우주산업 등이 발전한 초현대적인 도시이다.
교육
보르도에는 보르도대학교(Universites de Bordeaux)를 비롯하여 많은 교육기관이 있다. 보르도 대학교는 4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총 8만여명의 학생이 있다. 보르도 제1대학교에서는 과학,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과학을, 제2대학교에서는 의학, 약학, 심리학, 사회학 등을, 제3대학교에서는 문학, 철학, 역사, 언어 등을, 마지막으로 제4대학교에서는 법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담당한다.
또한 보르도에는 기계, 전기, 컴퓨터공학 등을 연구하는 연구소와 미디어,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소, 해양생물연구소(Institute of Marine Biology), 와인연구소(Faculty of Wine), 핵연구센터(Centre of Nuclear Studies)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기관들이 많이 있으며, 각 전문분야별 다양한 단과대학들이 있다.
산업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 집산지로서 보르도의 주요한 산업은 당연히 포도주 생산이다. 포도주 이외에도 보르도에는 많은 산업이 발달해 있는데, 최근에 첨단 과학공장이 포도밭에 건립되는 등 보르도는 항공, 우주, 군비산업의 본거지이다. 옛날부터 무역업이 성행하였으며, 전통적인 식품가공업과 가구산업, 정유업, 석유화학산업, 제약업 등의 산업시설 및 포드자동자 공장이 있다.
보르도는 일조시간이 길고 온난한 기후로서 대체로 우리 나라에 비해 겨울에는 따뜻하며, 여름에는 시원한 편이다. 연중 6-9월 사이가 가장 더울 때이며, 12월-2월 사이가 가장 추울 때이다. 연중 고른 강수량을 보이고 있다. 보르도 주변은 신의 선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포도주 제조에 적당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 몽셍미셀
프랑스 바스노르망디 지방 망슈(Manche) 주에 있는 잿빛의 모래땅에 떠 있는 작은 바위섬이며 중세에 수도원이 생긴 이래 순례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성역으로서 노르망디 해안에 있다. 몽생미셸은 바다에 둘러 싸여 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경이로운 해안중의 하나로서 노르망디(Mornandie)와 브르딴뉴(Breta훋) 사이, 꾸에농강(le Couesnon) 하구에 장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간에는 거대한 모래둑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만조일 때 섬이 되며, 육지와 900m 길이의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이 섬은 시시이 숲의 가운데 솟아있는 산이었는데, 커다란 해일로 인해 산이 육지와 떨어져 섬이 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몽 똥브(Mont-Tombe)로 불리웠던 섬에 8세기에 작은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시작된 몽생미셸은 13세기에 대형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순례지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중세 유럽 프랑스의 주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몽생미셸은 거의 원형으로서 원주가 약 900m이며 몽생미셸 만에 약 88m의 높이의 화강암 노두가 날카롭게 솟아 있다. 섬에서의 조망도 매우 아름다운 반면, 방파제에서 섬을 올려다 보았을 때의 광경도 매우 장엄하다. 또한 섬의 주변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수가 가장 커다랗게 오는 시기는 만월과 초생달의 36-48시간 후라고 하는데, 그 때의 조수간만의 차는 무려 15m 정도라고 한다.
몽생미셸에는 섬의 꼭대기에 대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입구에서 수도원까지는 대로(Grand Rue)로 연결되어 있다. 이 대수도원으로 향하는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에는 있는 건물들은 주로 호텔, 레스토랑이나 관광기념품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 15세기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건물도 있다. 이 건물들이나 성벽에 올라가면 섬주위의 모래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 베르사이유
프랑스 북부 광역 파리지방(Ile De France) 이블린 주의 주도로서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 떨어진 도시이다. 베르사이유시는 현재 파리시의 교외거주지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이다. 17세기에 루이 14세(Louis XIV)가 건립한 베르사이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도시로서,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서 외국 원수들이 방문했을 때 묵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찬란했던 절대왕권의 상징인 베르사이유궁은 화려함의 극치로서 17-18세기에 프랑스의 정치적 수도이자 통치 본부였다.
산업
베르사이유 시에는 육군 병원과 육군 공병/포병 학교가 있는 중요한 군사도시이기도 하며, 증류주 제조업, 피혁업, 시장용 원예업 등이 시의 주요한 산업이다.
▶ 샤모니 몽블랑 [Charmonix-Mont.Blanc]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인접하여 있는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로 몽블랑 기슭의 해발 1,038m에 위치한 도시이다. 1922년까지 공식적으로는 지명이 샤모니 였으나 이지역 사람들의 몽블랑에 대한 애착으로 지명을 '샤모니 몽블랑'으로 정식으로 변경하였다. 샤모니 몽블랑(Chamonix-Mont-Blanc)은 1924년 동계 올림픽을 시초로 각종 국제경기가 개최 되었으며, 스케이트 등 동계 스포츠시설이 잘 되어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알프스 등산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몽블랑 등의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에귀뒤미드 봉까지 올라가는 로프웨이가 있고 길이 11.5km의 몽블랑 터널을 통과하면 이탈리아 쪽으로 갈 수 있다. 한편 이곳 샤모니 몽블랑은 산악스포츠와 스키가 유명한 곳이어서 국립 스키학교와 등산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 스트라스부르 [Strasborg]
독일과의 국경이 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국경 도시인 이곳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라인강의 지류인 일 강에 에워싸인 아름다운 오래된 도시이다.
이 곳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에서도 자기나라 언어를 잃어 버린 상황이 묘사되어 나오는것 처럼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독일의 영향을 짙게 받아왔다. 그 예로 이곳은 독일의 영향을 받은 알사스 방언을 사용한다. 가끔 일상용어로 독일어를 사용하기도 한 이곳은 프량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즈'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Petite France는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이다. 이곳은 유럽의회의 소재지로 알려지면서 세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교육
Universities of Strasbourg Ⅰ, Ⅱ, and Ⅲ.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국립 자치고등교육기관으로 고등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1968년에 제정한 고등교육기본법에 따라 옛 스트라스부르대학교의 뒤를 이어 1970년 설립되었다. 원래 대학교는 1537년 스트라스부르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당시, 개신교에 의하여 독일 김나지움(고전중등학교)으로 설립되었다. 이 김나지움이 1566년 아카데미가 되었고 1621년 대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초기부터 종교개혁, 특히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인 장 칼뱅의 영향을 받았으며, 알자스 주(지금의 바랭)의 통치권을 두고 일어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계속된 분쟁의 영향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환영했지만 이 대학교는 1792년까지 계속 탄압을 받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독일에 양보했고 스트라스부르대학교는 독일대학교(1872~1918)가 되었다. 1919년 스트라스부르 시는 다시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대학교는 1896년의 포고령에 따라 프랑스의 자치대학교가 되었다. 1939~45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점령하에 있게 되자 이 대학교의 학부는 프랑스 중부에 있는 클레르몽페랑대학교로 옮겼다가 1945년 다시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다.
이 학교의 주요설립자인 요한 슈투름(1509~89)은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을 40년간 이끌었다. 학습과정에 등급을 매겨서 가르치는 그의 교육방법은 전유럽의 중등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시인·극작가·소설가·과학자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177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루이 파스퇴르(1822~95)는 1849년 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발효작용에 관한 연구를 했다.
독일의 철학자·의사·음악가·신학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1905~13년 이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슈바이처는 이 대학교에서 세인트토머스신학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이 대학교는 행정과 학문에서 각각 독립성을 지닌 많은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루이파스퇴르대학교(스트라스부르 제1대학교)는 의학대학과 과학대학이며 많은 연구소·관측소를 부설하고 있다. 인문과학대학교(스트라스부르 제2대학교)는 원래의 대학을 전환시킨 것이다. 어학·문학·철학·신학(가톨릭·개신교)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기타 관련연구소도 부설되어 있다. 그중에는 외국인 학생을 위한 프랑스 연구소도 있다. 스트라스부르 제3대학교는 법학·정치학·사회과학 대학교이다.
▶ 파리 [Paris]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며, 유럽 최대의 대도시권 가운데 하나인 도시로서 2,000여년 전 세느강(Seine River)의 시테섬에 세워졌다. 세느강(Seine River)은 파리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며 시를 강의 북쪽(Rive Droite, 하류를 바라볼 때 우안)과 강의 남쪽(Rive Gauche, 좌안),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북쪽은 상업이 성하고, 남쪽에는 소르본 대학교 등 교육 기관이 많아 문화 활동이 활발하다.
파리시는 영국 해협에 면한 세느강 어귀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75㎞ 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일드프랑스(Il de France) 지방에 속한 8개주 가운데 하나로서 파리분지로 알려진 비옥한 농업지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파리의 지형을 살펴보면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쪽에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고, 남쪽에 생트 쥰비에브 언덕 및 까이유 언덕, 서쪽에 샤이오 언덕, 그리고 동쪽에는 벨빌, 메닐몽땅, 샤론과 같은 언덕이 있다. 파리의 외곽은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여 '파리의 허파'라고 불리는 너도밤나무와 참나무의 거대한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난 몇 백년간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며, 현재도 세계의 예술, 패션, 유행 등을 선도하는 주요한 도시이다. 세계 각 국의 사람들은 파리를 일컬어 '예술의 도시', '패션의 도시', '빛의 도시', '낭만과 고독이 함께 숨쉬는 도시', '꿈과 사랑의 도시' 등으로 부르고 있다. 파리는 연간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 최대의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파리시는 2,000년의 찬란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중요한 교통망의 교차점에 있어 성장을 계속해왔다. 파리시는 크게 중심부의 시테섬과 세느강을 중심으로한 좌안과 우안으로 구분된다. 또한 파리는 각 구마다 고유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총 20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구들은 파리의 심장부에서부터 달팽이의 소용돌이꼴로 번호를 매겨, 제1구, 제2구 등으로 부른다.
파리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파리는 특히 밤이 더 아름답다고 하는데, 연인들이 밤새워 얘기를 나누는 세느강변,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한 불빛 등은 파리의 꿈과 낭만을 보여준다. 또한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숲이 우거져 있는 도시 중 하나로서 역사적인 건축물들과 현대식 빌딩 사이로 수많은 정원과 공원 등 녹지대가 조성되어 있다. 무수히 많은 역사적인 건축물 및 기념물, 박물관, 초현대적인 패션 및 예술 등이 어우러져 있는 파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봐야만 하는 도시이다.
교육
파리에는 프랑스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립학교가 대부분으로서 초등, 전기중등, 후기중등의 3단계가 있다. 파리는 오래전부터 세계 고등교육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여 왔는데, 현재 파리 제1대학교(Universite de Paris I/Universite Pantheon Sorbonne)부터 파리 제13대학교(Universite de Paris XII/Universite Paris Nord-Villetaneuse)까지 13개의 국립대학교가 있다. 그외에도 파리에서 유명한 교육기관으로서는 고등상업학교(Ecole des Hautes Etudes Commerciales/HEC), (Ecole Normale Superieure), 국립행정학교(Ecole Normale d'Administration/ENA) 등이 있다.
산업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재정적, 상업적 중심지로서 많은 국제적 기업들이 상업 및 금융, 서비스업부문에서 활동하는 본거지이다. 프랑스의 대기업들은 주로 거래은행 및 관련 정부부처가 있는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외국의 주요한 금융기관 및 서비스기업들이 파리에 지사를 두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공업을 위한 시설은 지방으로 이전되었지만 여전히 파리는 프랑스에서 주요한 공업도시이다.
파리의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서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도 꽤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약 10℃정도로서 가장 추울 때인 1월의 평균기온은 약 3℃, 가장 더울 때인 7-8월의 평균기온은 약 18℃이다. 파리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619mm로서 여름과 가을에 다소 많은 편이지만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연중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약 35일 정도이며, 평균 15일간 눈이 내린다.
공항안내
샤를 드골 국제공항(Roissy-Charles de Gaulle International Airport : CDG)은 시의 북동쪽으로 약 23㎞ 정도 떨어져 있는 국제공항으로서 세 개의 터미널이 있으며, CDG 1과 CDG 2 사이는 무료 셔틀버스와 에어프랑스의 코치(coach)가 운행한다.
드골 공항(Charles de Gaulle International Airport) : 에어프랑스의 리무진 버스가 15분 간격으로 공항과 파리 시내사이를 운행하고 있으며, 도시 고속철도(RER) 라인 B를 이용할 수 있다. 드골공항의 각 청사에서 도시 고속철도역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또한 파리 시티버스(RATP) 351번이 매 20분마다 샤를 드골 공항과 파리 동쪽의 나시옹 광장까지, 350번이 동역(Gard de l'Est)까지 운행하는데, 시내까지 약 50분 정도 소요된다. 3인 이상이 여행을 할 경우에는 택시를 타는 것도 편하고 경제적이다.
오를리 국제공항(Paris-Orly International Airport : ORY) : 시의 남쪽으로 14㎞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두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셔틀버스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파리의 다른 국제공항인 드골(Charles de Gaulle) 공항까지는 도시 고속철도(RER) B라인이 연결되어 있다.
오를리 공항(Paris Orly Internation Airport) : 오를리 공항에서 앵발리드까지 리무진 버스가 운행되는데,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또한 포르트 드 렁지스(Porte de Rungis)에서 오스테를리츠역(Gare d'Austerlitz)까지 운행하는 도시 고속철도(RER)가 있으며(라인 C), 파리 시티버스(RATP)와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버스
파리의 버스 노선은 매우 복잡하여 관광객이 이용하기에는 약간 어렵지만 다양한 노선망을 갖추고 있어서 파리 시내 전경을 감상하며 여행하기에 좋으며, 지하철과 버스 공용 승차권을 사용하므로 편리하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표를 파는 곳이 없으므로 지하철 매표소에서 사둬야만 한다. 파리의 버스는 내리거나 타고자 하는 승객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므로 주의해야 한다.
파리시내를 여행하다 다리가 아플 경우 버스표 한 장으로 시내관광을 나서도 괜찮은데, 샹 드 마르스에서 출발하는 69번 버스를 타면 루브르 박물관, 시청사, 생 폴 구역,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등 유명한 관광명소를 지나치며 볼 수 있다.
전철
메트로(Metro)라고 불리는 파리의 지하철은 13개 노선에 368개의 역이 있는 파리여행시 가장 빠르고 저렴한 교통수단이다. 파리의 지하철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서 노선이 다소 복잡하지만 노선을 번호와 빛깔로 구분할 수 있으며, 티켓은 역 주변 가게나 지하철 매표 창구에서 구입할 수 있다. 파리의 지하철은 문이 닫히는 것은 자동이나 열 때는 타거나 내릴 사람이 문을 수동으로 열어야 한다.
철도
도시 고속철도(RER)은 파리 시내와 교외를 연결하는 고속 전철로서 A, B, C, D 4개의 노선이 일 드 프랑스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철과는 달리 목적지마다 요금이 다르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A 노선은 파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노선으로서 유로 디즈니랜드로 갈 수 있으며, B 노선은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C 노선은 오를리 공항 및 베르사이유 시로 연결된다.
택시
택시(Taxi)는 아무 곳에서나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 타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택시정류장(Stasion de Taxi)에서 타야 한다. 주요한 교차로, 지하철역, RER역, 기차역 등에 택지정류장이 있다. 기사 옆 조수석에는 손님이 않을 수 없으므로 뒷좌석에 3명만 탈 수 있다. 파리 시내에서 택시타기 가장 좋은 곳은 샹젤리제 거리로서 이곳에서는 중앙선에 택시 정류장이 있어 택시들이 거리 한가운데 줄지어 있는 이색적인 풍경도 구경할 수 있다.
파리의 택시 요금체계는 탑승지역과 시간에 따라 A, B, C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지며, 보통 택시 요금의 10% 정도를 팁으로 준다. 또한 트렁크에 짐을 실을 경우 짐 한 개당 9프랑 정도의 할증요금이 추가되므로 큰 짐이 아니라면 직접 들고 타는 것이 좋다.
페리
파리시를 관광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세느강의 관광유람선은 바토 무슈(Bateaux-Mouches)와 바토 파리지앵(Bateaus-Parisiens)이 유명한데, 바토 무슈는 알마 교 오른쪽 선착장에서, 바토 파리지앵은 에펠탑 바로 옆의 이에나 교 왼쪽 선착장에서 각각 출발한다.
파리의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서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도 꽤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약 10℃정도로서 가장 추울 때인 1월의 평균기온은 약 3℃, 가장 더울 때인 7-8월의 평균기온은 약 18℃이다. 파리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619mm로서 여름과 가을에 다소 많은 편이지만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연중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약 35일 정도이며, 평균 15일간 눈이 내린다.
샹송
샹송이라고 하면 언뜻 프랑스의 대중가요를 연상하게 되나 음악사상으로는 11∼13세기의 단선율(單旋律) 샹송, 16세기의 다성적(多聲的) 샹송이 보다 중요하다.
샹송은 중세의 음유시인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등의 기사가요(騎士歌謠)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13세기에 전자는 남프랑스에서 프로방스어로, 후자는 북프랑스에서 옛 프랑스어로 십자군과 영웅들의 이야기, 세속적인 사랑 등을 그려 단선율의 가곡으로 만들어서 불렀다. 이 음유시인들의 가곡은 14세기에 이르자 다성음악의 기법을 도입, 아루스노바기(期)의 기욤 드 마쇼 등의 다성샹송을 낳고, 비를레 ·롱도 ·발라드 등 여러 음악형식의 정형이 확립되었다.
15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기욤 뒤파유, 질 방슈와 등도 이와 같은 정형에 바탕을 두고 궁정적인 전아한 사랑을 노래하였다.
16세기에 이르자 프랑스 샹송의 성격은 일변하여 서민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다. 곧 정형이 배격되고 자유스러운 형식에 비교적 단선율적이고 리드미컬하며, 약간 비속한 가사로 서민적인 생활감정을 여유 있게 노래하게 되었다. 클레망 잔느캥, 클로 드 세르미슈 등의 합창샹송, 특히 잔느캥의 《새의 노래》 《전쟁》 등의 의음(擬音)효과를 사용한 표제샹송은 유명하다. 이때의 샹송은 약 25년간 파리에서만 1,500곡이 출판되었다고 하니 그 보급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초 파리에서는 센강에 새로 가설한 퐁뇌프 다리에서 거리의 가수가 정부의 고관이나 귀족을 풍자하는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 그들은 노래를 직업으로 삼은 최초의 가수였고, 따라서 퐁뇌프 다리는 샹송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노래로 풍자하는 것을 샹소네라고 하며 그 작자 겸 가수를 샹소니에(여성의 경우는 샹소니엘)라고 불렀다. 샹소니에는 부르는 노래의 작곡은 다른 사람이 해도 상관없으나 가사만은 반드시 자작이어야 하고 풍자를 담아야 하며 재치가 넘쳐야 했다. 그래서 샹송가수 중에서도 샹소니에는 특별히 우대되었다.
또한 샹송을 발전시킨 온상 구실을 한 것은 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던 찻집(카페 콩세르)이었다. 찻집은 프랑스혁명 후 파리 시민의 집합장소로 번창했는데, 1850년경 샹젤리제에 있던 ‘뚱뚱보 플루리’라는 찻집이 샹송으로 성공함으로써 카페 콩세르의 시초가 되었다. 찻집은 가수의 안정된 직장이 되고 스타의 탄생을 촉진하기도 했는데 이 때부터 노래의 테마나 가수의 스타일도 다양해졌다.
현대의 샹송은 19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여성가수 이베트 길베르는 샹송의 모범을 확립하였고, 샹소니에인 아리스티드 브뤼앙은 예술가의 집합장소인 샤느와르(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를 중심으로 하층계급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묘사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카지노 드 파리, 물랭 루주 등의 뮤직홀에서의 공연이 인기를 모았고, 1926년에는 《사 세 파리》 《발렌시아》 등을 창작하여 부른 미스탕게트와 모리스 슈발리에가 크게 활약하였다. 또 1930년에는 조세핀 베커가 《두 연인》을 히트시키고 뤼시엔 부아이에의 《사랑의 말을》이 제1회 디스크대상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매체로서의 레코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영화도 토키시대로 접어들어 《파리의 지붕 밑》(1930) 《파리제(祭)》(1933) 《마리넬라》(1936) 등 영화의 주제가인 샹송이 유행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는 현대 샹송의 개화기였다고 하나, 화려한 노래와 함께 세태를 반영한 어두운 노래도 많이 나왔고 리나 케티의 《기다리겠어요》가 평화에의 기대를 담았다 하여 크게 히트했다. 이본 조르주, 프레르, 다미아 등이 당시의 3대 샹송가수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감정을 담은 감상적인 노래가 유행하고, 종전(終戰)과 함께 《장미빛 인생》(1944) 《사랑의 찬가》(1949)를 자작하여 노래한 에디트 피아프, 《낙엽》의 이브 몽탕, 쥘리에트 그레코, 레코드에서 활약한 이베트 지로, 《파리의 아가씨》를 부른 자크린 프랑수아 등 새로운 스타들이 배출되었으며, 1950년 전후의 샹송계는 공전의 성황을 보였다.
샤를 트레네는 샹송에 재즈수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질베르 베코는 다이내믹한 창법으로 젊은 팬들을 사로잡았으며, 샤를 아즈나블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50년대 후반에는 로크조(調)의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전통적인 샹송은 그 기운이 꺾이기 시작하고 조니 아리디, 실비 바르탕 등이 로크조의 노래를 불러 인기를 모았다.
60년대에 접어들자 로크조를 소화한 내용 위주의 것이 만들어졌으며 이 무렵에는 아즈나블, 아다모, 앙리코 마시아스 등이 활약하였다.
샹송의 테마는 매우 넓으며 노래하는 창법도 다양하기 때문에 특별히 정해진 분류법은 없으나 편의상 몇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샹송 드 샤름(chanson de charme)은 매혹적인 샹송이라는 뜻. 주로 사랑을 노래한 달콤한 샹송이며 대표적 가수는 뤼시엔 부아이에, 티노 로시 등이다.
샹송 레알리스트(chanson raliste)는 현실적인 샹송이라는 뜻. 생활의 고통이나 인생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엮은 노래이며, 아리스티드 브뤼앙이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샹송 팡테지스트(chanson fantaisiste)는 환상적인 샹송이라는 뜻. 자유스럽고 공상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재기가 넘치고 익살스러운 점이 많다. 대표적 가수로는 모리스 슈발리에, 샤를 트레네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활약한 마리 뒤바, 린 쿠르베 등이다.
샹송 리테레르(chanson littraire)는 문학적인 샹송이라는 뜻. 유명한 예술적 시에 곡을 붙인 것과 일류시인의 시작품을 대상으로 한 것을 말한다.
샹송은 가사가 중시되며 이야기풍의 노래가 많다. 그리고 가사도 일상회화에서 쓰는 말이 사용되고 때로는 은어도 섞였다. 곡은 쿠플레(스토리 부분)와 루프랭(반복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양자가 서로 엇바뀌어 나타난다. 가수는 작사가 ·작곡가와 더불어 존중되고, 노래의 좋고 나쁨이나 음악적인 정확성보다 그 노래를 어떻게 해석하며 얼마나 개성적인 표현으로 청중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는가에 대해 평가하였다. 또한 어떤 곡을 처음 불러 히트시키는 것을 크레아숑이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러한 전통이 지켜져, 어떤 가수에 의해 크레아숑된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프레타포르테
오트쿠튀르와 함께 세계적인 양대 의상 박람회의 하나인 기성복 박람회이다. 프레타포르테는 기성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인데, 복식용어로는 고급기성복을 말한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에도 기성복은 있었다. 그러나 질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값도 싼 대중품이었으므로 멋쟁이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트쿠튀르의 옷은 너무 비쌌으므로 이렇게 오트쿠튀르 수준의 기성복을 원하는 수요층이 늘게 되자 생겨난 것이 바로 프레타포르테이다. 이 기성복 박람회는 파리, 뉴욕, 밀라노, 런던 등지에서 해마다 2번 열리는데 이 박람회를 통하여 세계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창작 의상을 소개하여 세계의 패션을 이끌어간다.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하는 디자이너로는 캘빈 클라인, 조르조 아르마니, 질 샌더, 톰 포드, 안나 수이, 미우치아 프라다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이며 한국에서는 이신우, 진태옥, 이영희, 홍미화 등이 참가하고 있다. 프레타포르테의 활성화로 인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오트쿠튀르 디자이너들도 좀더 현실적인 프레타포르테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또한 프레타포르테 딜럭스, 하이 프레타포르테, 뉴 프레타포르테 등 다양한 수요층을 위한 고급 기성복 시장이 형성되었다.
프레타포르테에서 출발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앤드 캐릭터 브랜드(Designer and character brand)를 생산할 수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는 특정 디자이너의 이름을 붙인 상품을 말하며, 캐릭터 브랜드는 개성을 짙게 표출한 상품이라는 뜻이다. 1980년경부터 이와 같은 브랜드가 직영점, FC(프랜차이즈 체인), 가맹점 등을 통해 단일품 판매를 추진하여 고객층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커다란 비즈니스로 성장하게 되었다.
파리컬렉션
파리의 각 '오트쿠튀르(haute couture:고급 양장점)'가 연 2회(11월과 7월) 개최하는 작품발표회이다. 각각 그달의 마지막 월요일에 개최되며, 원칙으로 2주간의 개최기간 중 약 100∼200점의 신작을 자기점포에서 발표한다. 이 기간에는 각국의 바이어·평론가\·보도관계자 등이 오며, 작품은 문장 또는 허용된 스케치로 보도된다.
1개월 후부터는 사진·실물로 세계에 발표되며, 한편에서는 바이어의 주문에 의한 제품화가 이루어진다. 또 전년도의 '오트쿠튀르'가 '프레타포르테(prt--porter:유명 디자이너에 의한 고급기성복)'로서 발표되기도 하는데, 지금은 처음부터 '프레타포르테'를 위해서 디자인되는 일도 있다.
오트쿠튀르는 본래, 고급 재봉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는 고급 의상점의 의미를 지닌다. 시초는 나폴레옹 3세 비(妃)의 전속 드레스 메이커인 워르트(Worth)였다. 1868년에 생겼으며 전임 디자이너가 있어 계절에 앞서 고객을 위한 새로운 창작 의상을 발표하면 이것이 전세계 유행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이 신작 모드 발표회를 파리 컬렉션이라 한다. 이러한 오트쿠튀르가 60여 개소나 있으며 파리 의상점조합 사무국(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에 속해 있다. 이러한 발표회가 처음 개최된 것은 1858년 C.F.워르트에 의해서였고, 현재 활약하는 유명한 디자이너는 C.디오르·P.카르댕·C.발렌시아가·H.de지방시·P.발맹·G.샤넬 등이 있다. 최근에는 고급 주문복을 위한 의상실보다 프레타 포르테(prte porter), 즉 고급 기성복의 오트 쿠튀르가 많아지고 있다.
프랑스 미술가
푸케
푸생
로랭
르브룅
미냐르
부셰
프라고나르
샤르댕
다비드
앵그르
그로
제리코
들라크루아
밀레
루소
모네
르누아르
세잔
쿠르베
고갱
쇠라
마티스
아름다운 중세 고성
슈농소성
아제르리도성
앙부아즈성
슈베르니성
샹보르성
빌랑드리성
역사 속의 인물
잔다르크
나폴레옹 1세
태양왕 루이14세
마리 앙투아네트
볼테르
빅토르 위고
샤를 드골
로베스피에르
몽테스키외
테제베
TGV는 프랑스어 Train a Grand Vitesse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1964년 개통된 일본 신칸센[新幹線]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고속전철로 1981년 테제베 동남선이 개통되었다. 당시에는 생프로랑탱-리옹을 연결하는 데 그쳤으며, 1983년에 리옹-파리(390㎞) 노선이 완전 개통되었다.
그뒤 1989년에 테제베 대서양선, 1993년에 북선이 개통되었다. 대서양선은 1990년 5월 미개업 노선에서 순간 시속 515.3㎞를 기록하였다. 동남선은 1994년 파리-발랑스(538㎞)로 노선이 연장되었다.
프랑스 제1, 2도시를 연결하는 테제베 동남선이 완전 개통된 지 1년 만인 1984년에 흑자를 내기 시작하였고, 항공기 승객을 앞질렀다. 프랑스 국철(SNCF)은 계속 늘어나는 여객을 수송하기 위해 2층 열차인 테제베 듀플렉스(Duplex)를 개발, 1996년 12월 개통하였다.
이것은 일반 테제베 동남선이 시속 270㎞인 데 비해 시속 300㎞로 더 빠르다. 또한 열차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차체를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하였으며, 동력차와 2층 객차 사이의 간격을 유선형으로 메워 공기 저항이 단층 열차보다 단지 4% 높을 뿐이다.
좌석은 일반 테제베가 377석인 데 비해 듀플렉스는 516석으로 수송량이 37% 이상 늘어났다. 또한 유지·보수, 전력 공급, 소요 인원 등의 운영비가 일반 테제베보다 15%나 절감된다. 앞으로 테제베 동남선은 모두 듀플렉스로 교체될 예정이다.
한편 테제베는 2000년대 초까지 프랑스의 주요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게 될 예정이며 에스파냐,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와도 연결되고 도버해협의 해저 터널에도 들어가게 된다. 여객 전용인 테제베는 동력방식이 동력집중식으로 앞뒤의 양단(兩端) 차를 동력차로 한다. 설계속도 270∼320㎞/h, 최고속도 250∼300㎞/h이다.
한국은 1992년 프랑스 국철 및 테제베와 계약을 맺고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 동남선이 열차 1편성마다 10량을 연결한 데 비해 한국형 테제베는 20량을 연결해 좌석이 935석으로 늘어남으로써 훨씬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게 된다. 2003년 12월 서울-대구 간 개통을 목표로 시험 운행 중이며, 2010년 서울-부산 간 노선이 완전 개통될 예정이다.
프랑스 혁명
이 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典型)이라고 불린다. 이 경우에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을 그대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인 것이다.
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 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 %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성직자들은 국왕의 사법관료 아성(牙城)인 파리 고등법원과도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 이 왕권 내부(또는 체제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확약하였다.
-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프랑스의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회되었다. 의원 총수는 약 600명으로 특권 2신분의 300명에 대하여 평민대표도 동수였다. 혁신을 갈망하는 자유주의 귀족이나 평민의원은 모든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사안(事案)을 머릿수 투표로써 결정하자고 주장하여 부별투표(部別投票)를 고집하는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대립하였다. 6월 13일 평민의원은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로 개조하는 결의를 하고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왕권은 이에 대해 위협과 방해를 가했으나, 미라보를 중심으로 한 평민의원의 과감한 용기에 눌려 6월 말에는 전대표가 합류, 국민의회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국민의회는 7월 초에 ‘헌법 제정의회’로 명칭을 바꾸고, 마침내 국민이 바라던 헌법과 의회정치 개설에 착수하였다. 그때 왕권이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불러들여 베르사유 주변에 집결시켰으므로 파리시민에게 극도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공포를 야기시킨 형세가 되었다.
- 바스티유감옥 습격
프랑스 왕권은 1789년 7월 11일 삼부회의 최고책임자인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혼란이 발생하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각 가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여 경계하였다. 7월 14일 약 1만 명의 시민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진압차 달려온 군대도 시민의 열렬한 열기에 위압되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성(城)은 함락되고 성내의 장병은 무참하게 살육당하였다.
- 봉건적 특권의 폐지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순식간에 지방으로 전해져 각지에 격렬한 농민반란을 유발하였다. 영주의 성관(城館)과 호적·토지대장의 보관소가 습격당하고 전국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사태를 우려한 헌법제정의회는 1789년 8월 4일 밤의 회의에서 노아유 자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의 폐지를 단행하였다. 프랑스에는 비로소 법 앞에 평등한 조건이 실현되어 전국민이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보증받는 형태가 되었다. 다만, 농민에 대하여는 10분의 1세와 부역은 폐지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영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을 돈으로 되사야 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헌법제정의회는 이러한 경우, 영주 ·지주층의 이해(利害)를 대변하였으므로 지주 부르주아 편향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8월 26일 의회는 라파예트 등이 기초한 ‘인권선언’을 가결하고, 인간의 자유·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신질서의 기본적 제원칙을 명시하여 혁명의 정의(正義)를 내외에 선양하였다. 이 ‘인권선언’은 부르주아적이기는 하였지만 근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일대 기념비로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국왕의 파리 귀환
프랑스 혁명 당시 근교농촌의 혼란도 있어 가을에는 파리의 식량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파리 하층시민의 부녀자들은 1789년 10월 5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행렬을 지어 베르사유를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뒤에는 남편과 직인들이, 또 그 뒤에는 국민군의 병사들이 뒤따랐다. 저녁 때 일행은 왕궁에 도착하여 루이 16세에게 파리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룻밤을 숙영(宿營)하고 다음날 왕궁으로 난입하였다. 국왕 일가는 시민에게 포위된 채,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귀환하였다. 의회도 파리로 옮겨졌으며, 이후 왕궁과 더불어 파리 시민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 국가소유재산의 경매
프랑스 혁명 당시 의회는 신체제의 건설에 착수하여 주(州)를 폐지하고 83개의 현(縣)을 설치하는 등 수많은 행정·사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삼부회 개최의 당면한 이유이기도 한 재정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1789년 10월 10일의 의회에서 주교인 탈레랑은 교회토지 재산의 국가관리를 주장하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의회는 즉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가 30억 리브르에 이르는 교회재산을 분할 매각해서 파산의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성직자에 대해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결국 ‘제례와 호적과 도의상의 관료’로서 국가가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는 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직자도 교회를 떠나서 국가와 의회에 새삼스럽게 선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많은 성직자가 선서를 거부하고 맡은 자리를 떠나갔다. 그들 비선서 성직자야말로 최초의 혁명진영에서의 이탈자이며 동시에 최초의 반혁명적 무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를 깊이 신앙하고 있는 시민과 농민을 혁명에서 이반(離反)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 바렌 도피사건
1791년 4월 초기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인 미라보가 급사하였다. 미라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파리에 갇혀서 불안했던 왕가 일족에게 더욱더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미라보는 혁명의 추진력이긴 하였어도 입헌왕정을 신조로 삼았고, 그 뛰어난 역량과 안목에 의해서 왕가에게는 더없는 지주(支柱)로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더욱이 그는 왕비에게 매수되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그의 사망 후 도피계획이 급속히 구체화되어 국왕 일가는 6월 20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탈출하여 비밀리에 마차로 동부 국경으로 향했으나, 불운하게도 국경 근방의 바렌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당하였다.
의회는 왕을 처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였으나 민중은 간단히 납득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파와 왕정파 간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파리에서는 왕정폐지론이 급격히 대두하여 자코뱅당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시민은 7월 17일 마르스 광장에서 공화정체 수립의 서명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에게 짓밟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 입법의회
1791년 프랑스 헌법제정의회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헌법(이른바 91년 헌법)을 9월 말에 제정한 뒤 해산하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1791년 헌법에서는 일원제(一院制)의 의회를 갖는 입헌왕정이 국시(國是)로 되었고, 참정권은 규정된 금액 이상의 직접세를 지불하는 성년 남자에 한해서 인정되었다. 입법의회에서는 우익(右翼)의 푀양파, 좌익의 지롱드파가 대립하였다.
지롱드파는 베르니오, 장소네, 귀아데 등 남서프랑스 출생의 변설가들과 브리소, 콩도르세 등 파리 출생 이론가의 집합체로서 지방의 무역상·기업가\·유산시민에 지반을 두고, 혁명의 혼란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 프랑스 경제의 교란을 획책하는 여러 외국의 음모를 경계하였다. 이들은 의회를 독려하여 91년 10월 말에 해외로 도피한 에미그레(망명 귀족)에 대하여 2개월 이내에 귀국하도록 명령을 발하였다. 의회는 망명 귀족의 배후에서 줄곧 프랑스를 견제하고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파급될 것을 두려워하는 유럽 열강의 획책과 공작을 무엇보다도 우려하였다. 사실 독일에서는 혁명열이 유행병처럼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 혁명전쟁의 개막
1792년 4월 프랑스는 반혁명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2국에게 선전포고하였다. 프랑스군은 라파예트, 뒤무리에 장군 휘하에 10만의 대군을 파견하였으면서도 연전연패하고, 더구나 일선 장교의 태업도 있고 해서 총붕괴의 형세에 처하였다. 이에 분격한 파리 시민은 연일 의회로 몰려와서 패전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고, 보수파 의원의 언동을 방해하였다.
6월 20일 시위로 들어간 수천의 군중은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왕을 포위하고 요구조건을 강력히 내세웠으나, 루이 16세의 의연한 태도에 눌려서 조용히 물러났다. 입법의회는 7월에 전국민에게 격문을 발표,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각지에서 청년들이 애국적 정열에 불타 의용군으로 참가함으로써 파리는 다시 소란해지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재차 시민봉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국왕과 왕비의 체포
1792년 8월 9일 밤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地區委員)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령하고 혁명의 코뮌(commune:自治市會)을 수립하였으며,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사살하고 전지구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8월 10일 이들의 호소에 호응한 수만의 시민이 집결하여 튈르리 궁전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왕궁의 스위스 용병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국왕 일가는 난을 피하여 입법의회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의회도 시민대중으로 포위당하여 국왕 일가는 코뮌에 인도되고, 왕권도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이후 약 1개월간 파리에는 정부·의회\·코뮌의 3권이 분립하여 시민생활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9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전진한다는 소식과 함께 사제(司祭)를 주로 하는 반혁명 용의자가 애국자의 손에 의해 대량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제1공화정의 형성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다음날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성립되었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정의 폐지, 공화정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이전의 좌익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서 우익으로 돌았고 좌익에는 새로이 산악파(山岳派)가 등장하였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처음부터 적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항쟁하였다. 지롱드파가 의회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경제·지방자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공화파라면, 산악파는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려는 과격파였다. 전자가 롤랑 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계몽된 신사의 단체라면, 후자는 파리의 코뮌 자코뱅 클럽을 보루로 하여 실력으로 계급투쟁을 관철하려고 하는 애국자의 당파였다.
- 루이16세의 처형
프랑스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은 특히 국왕의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파는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투표에서 패하여 마침내 산악파의 주도하에 국왕은 1793년 1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의 죽음은 지롱드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하의 프랑스에도 용이치 않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영국·네덜란드\·에스파냐·나폴리\·로마교황 등이 왕의 처형 사실을 알고 잇따라 참전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함께 대(對)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방데현(縣) 등 서부 후진지대에서는 왕당파의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 지롱드파의 패배
1793년 3월 말 프랑스는 지롱드파가 임명한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고, 의회에서도 사사건건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 산악파의 영수(領袖)에게 지롱드파가 기선(機先)을 빼앗기는 형세가 되었다. 초조해진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 단속의 명목으로 파리 코뮌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5월 31일 지롱드파의 부당한 체포에 격분한 시민은 대거(大擧) 공회를 포위하고 12인위원회의 폐지, 중앙혁명군의 징집, 귀족출신 장교의 퇴관, 반혁명 용의자의 체포, 노인과 불구자의 구제 등을 요구하였다.
6월 2일에는 더욱 많은 시민들이 공회로 몰려들었다. 회의장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지롱드·산악 양파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장내로 뛰어들어 시민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결과 지롱드파는 간부당원 29명이 의석을 잃고 공회에서 약체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산악파는 독주체제(獨走體制)를 형성하게 되었다.
- 마라의 암살
프랑스 산악파는 국민공회를 제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들 앞에 어려운 과제가 잇따라 출현하였다. 첫째로, 의석을 잃은 지롱드파 명사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으로 잠입하여 각지에서 반(反)산악파의 음모를 계획하였으며, 왕당파와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 파리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는 전쟁에 의해 발생한 물자의 결핍과 식료품의 등귀가 두드러졌으며, 극좌 파괴분자가 활약하였다.
산악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농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취하여, 봉건적 공과(貢課)의 무상폐지,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을 소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산악파의 핵심적 지도자인 마라가 자택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산악파도 권력에 안주(安住)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어 ‘방종한 자유의 폐기’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국민공회의 최고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출마하여 입법·행정\·통수의 지령본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인민의 이름에 의한 독재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 공포정치
1793년 8월 프랑스의 군사정세는 재차 악화되어 북동 국경지대의 프랑스군이 각 전선에서 부득이 후퇴하게 되자, 국내의 위장 왕당파나 지롱드파는 활개를 펴고 활동을 획책하였으며, 도시의 식량위기도 급속히 증대하였다. 파리에서는 최고가격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귀족과 함께 매점상인(買占商人), 악덕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당통까지도 부당소득자의 오명이 씌워졌다. 자코뱅당 좌파의 에베르는 9월 5일 시민을 동원해서 국민공회에 몰려가 ‘혁명의 무제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혁명 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청하였다.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의 ‘혁명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1793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먼저 반혁명의 이름 아래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 명사들이 처형되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롤랑 부인도 같은 운명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처럼 약 1년 동안에 1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프랑스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제는 정확히 성공을 거두어 1793년 말까지는 국내의 반항은 소탕되고 대외전쟁에서도 프랑스는 반격으로 나아갔으나, 산악파 내부에서는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코뱅 좌익의 에베르파를 보태어 우익 당통파와 로베스피에르파가 3파로 되어 대항하였다. 이들 중 에베르파는 1794년 3월 파리의 식량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을 동원해서 봉기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이어 4월에는 당통파가 숙청되었다. 로베스피에르파는 정권을 독점하기는 하였으나 인심을 얻지 못하여 겨우 3개월밖에 계속하지 못하였다.
공포정치하에서는 국민생활 자체가 동결되고, 모든 활력이 마비상태에 빠지는 반면, 관료통제가 새로운 퇴폐를 낳아 종전의 혁명가들도 권력의 남용자나 편승자로 바뀌어갔다. 로베스피에르를 미워하는 국민공회 의원은 그 동안 암암리에 밀모(密謀)를 진행시켜 7월 27일의 의회에서 그의 유죄를 선고하고, 다음날 그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테르미도르의 반동(反動)’이라 부른다.
- 부르주아공화정
프랑스에서의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은 혁명극의 종막을 의미하며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다. 특히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고 있던 상류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의 숙청과 동시에 산악파적 노농정책·통제경제는 모두 폐지되고, 상업시민의 자유로운 세기가 재현되었으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유의 도래는 생활비의 팽창을 초래하여 빈곤한 시민을 한층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는 이들 무산층과 우익 왕당파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政局) 가운데서 1795년 10월 왕당파는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국민공회가 위기에 이르렀을 때 이것을 진압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뒤 이탈리아 전쟁에서 군사적·정치적으로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에서 일약 저명인사로 명성을 떨쳤다.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였으나,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하여 정부를 쓰러뜨리고 집정정부(執政政府)를 수립하여 군사적 독재를 확립하게 되자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와인
포도주는 포도를 따서 곧 양조해야 하며, 설비도 별로 크게 들지 않으므로, 유럽에서는 원칙적으로 농가의 겸업 또는 농가와 직결한 소기업에서 제조한다. 각 양조가는 자기 집의 주명(酒銘)으로 선전·판매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의 성격이나 품질은 포도밭의 입지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주명에는 지방명이 흔히 쓰인다.
프랑스에서는 특별한 법률을 제정하여 명칭에 해당하는 지역을 한정하고, 지역 외의 술이 부당하게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며, 포도품종·전정법(剪定法)·주정도\·단위면적당 주수(株數)·양조량까지도 규정한다. 이 규제명칭을 아펠라시옹 도리진 콩트롤(appellation d’Origine contrle:관리생산지)이라고 하여 상표에 명기한다. 이것은 국내법이지만 조약에 의하여 외국에도 영향이 미치는 방침으로서 나라에 따라 그 취급법이 각각 다르다.
명주(銘酒)는 프랑스가 제일이며, 그 중에서도 보르도와 부르고뉴이다. 뱅 보르도 루주(Vin Bordeaux Rouge:영국명은 클라렛 Claret)는 선홍색(鮮紅色)으로 담백한 맛이 나며, 부르고뉴(Bourgogne:영국명은 버건디 Burgundy)의 적포도주는 암적색으로서 감칠맛이 진하다. 보르도 블랑(Bordeaux Blanc), 특히 소테른(Sauternes) 지역의 것은 포도를 오래도록 따지 않고 덩굴에 매달아 두었다가 반건(半乾)된 감미로운 것을 따서 만들므로 달콤한 미주로서 유명하다.
르샹피오나
프랑스의 프로축구 리그로, 193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축구협회(FFF:Fdration Fran??aise de Football)가 주관한다. 르샹피오나는 '선수권'을 뜻한다. 첫 시즌에는 Sochaux컵 대회의 두 번째 경기방식과 같이 20개팀이 2개조로 분할되어 각 조끼리 리그전을 벌인 뒤 조별 챔피언들이 결승전을 치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1933∼1934년 시즌부터는 풀 리그제가 채택되어 1부에 14개팀, 2부에 15개팀이 풀 리그전을 벌였다.
프랑스아마추어챔피언십(CFA:Champion of France Amateur)도 1934∼1935년 시즌부터 재개되어 3부 리그의 역할을 하였다. 1부 리그는 16개팀으로 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18개팀, 그뒤 1960년대에는 20개팀으로 늘어났으나 2002년 현재 이탈리아의 세리에A, 독일의 분데스리가와 마찬가지로 18개팀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 리그는 18개팀씩 2그룹으로 나뉘었는데, 1993년부터 단일그룹으로 바뀌었으며 현재 20개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게 점령당하였던 시절에는 점령지역인 북부와 자유지역인 남부로 나뉘어 지역 챔피언 경기가 열렸다. 1943년에는 프랑스컵 결승전에서 뇌물 수수혐의를 빌미로 나치 정부에 의해 모든 프로축구팀이 해체되었고 연고도시나 지역이름을 딴 16개 지역팀이 대신하였다.
그뒤 전국리그와 컵 경기가 열렸고 이어 프로리그도 재개되었다. 1971∼1972년 시즌부터 CFA는 16개팀씩 6개 그룹으로 이루어진 3부 리그로, 1978∼1979년에는 14개팀씩 8개 그룹으로 이루어진 4부 리그로 그 형태가 바뀌었으며 1992∼1993년까지 존속하였다.
매년 7월경에 시작하여 이듬해 5월까지 금요일과 토요일에 대부분의 경기를 벌이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기본으로 팀 당 총 34경기씩 치르고, 승리하면 3점, 무승부 1점, 지면 0점이 부여된다. 시즌이 끝나면 1부 리그 하위 3개팀과 2부 리그 상위 3개팀이 자리바꿈을 한다.
또한 세미 프로리그라 할 수 있는 3부 리그인 리그 나시오날레(Ligue Nationale)의 상위 3개팀은 2부 리그로 승격한다. 3부 리그 밑에는 CFA1과 CFA2가 있다. CFA1에서는 72개팀이 4개 그룹으로, CFA2에서는 108개팀이 8개 그룹으로 나뉘어 리그전을 벌인다. CFA1의 챔피언은 3부 리그로 승격한다.
동유럽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남아메리카 선수들이 고루 활약하고 있으며 특히 유럽 내에서 아프리카 축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리그 자체가 세계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올랭피크 드 마르세이유와 파리 생제르망 FC의 경우는 세계 유명한 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1988∼1989년 시즌부터 1992∼1993년 시즌까지 리그 5연패를 달성하였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이후 해마다 우승팀이 바뀌며 일대 혼전을 벌이고 있다. 1999∼2000년 시즌 우승팀인 AS 모나코는 2000∼2001년 시즌에는 리그 11위로 1부 잔류 마지노선이었던 마르세유보다 불과 승점 3점을 앞서며 겨우 2부 리그로의 탈락을 면하는 등 예측하기가 힘든 리그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늦게 시작된 까닭도 있지만 세리에 A의 유벤투스 FC, 프리메라리그의 레알 마드리드 등이 20회가 훨씬 넘는 우승경력을 가진 반면, 르샹피오나에서는 10회 우승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AS 생테디엔이 리그 내에서 최다 우승팀일 정도로 대대로 전력이 평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 밖에 8회 우승한 FC 낭트 아틀랑티크, 7회 우승한 AS 모나코, 6회 우승한 FC 지롱댕 보르도, 2회 우승한 파리 생제르맹 FC가 유명하다. 올랭피크 리옹은 최근 강팀으로 급부상하며 리그 우승을 노리고 있으며, AJ 오세르는 프랑스 내에서 유소년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클럽으로 많은 유망 신인 선수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릴 OSC는 1부로 올라오자마자 2000∼2001년 시즌에서 3위를 차지하며 일대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1997∼1998년 시즌에 1부 리그인 RC 스트라부스에서 우리나라의 서정원이 활약하였다.
프랑스 요리
벨 에포크(belle poque:프랑스에 있어서 1871∼1914년의 산업혁명에 의한 호경기시대)를 대표하는 미식가인 큐르논스키는 그의 편저 《프랑스 요리와 포도주》에서 프랑스 요리를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고전적 고급요리:수백 년 동안에 부호(富豪)와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돈과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발달한 요리이다. 이에는 재능 있는 요리사와 값비싼 재료가 필요하며, 과거의 숙수(熟手:요리장)들이 이룩해 놓은 예술적인 요리이다. 글라스 드 비앙드(glace de viande:진한 고깃국물)를 토대로 한 소스를 사용하는 요리도 포함된다.
② 가정요리:프랑스의 가정주부가 통상적으로 만드는 요리이다. 대표적인 것에 포토푀(pot-au-feu:고기와 채소를 푹 끓인 요리)가 있다.
③ 지방요리:프랑스 요리의 보고(寶庫)이며, 각 지방의 특산물을 살린 유명한 요리가 오랜 세월을 두고 개발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부지방의 부야베스(bouillabaisse) 등인데, 이것은 현재 고급 프랑스 요리로 간주되고 있다.
④ 즉흥요리:갓 잡은 물고기 ·들새 등을 즉석에서 조리해 먹는 요리로 정교하지는 못하다. 트뤼트 오자망드(truites aux amandes:송어아몬드구이)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프랑스 요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요리에도 해당되며, 어떠한 종류에도 엄밀한 구별을 짓기는 힘들다.
역사
프랑스는 옛날 골(Gaul)인이 살던 토지였다. 골인의 음식맛은 거칠었으며, 그 후에 골에 이동해 온 프랑크족(族)은 그대로 골의 음식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고대 로마 요리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땅의 산물로 고대 로마 문화의 기술을 빌어 만들어 낸 것이 프랑스 요리의 출발점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이미 세련되지는 못했을망정,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재료와 요리법이 연구되어 있었음이 아피큐스의 《요리법》이나, 아테나이오스의 《학자의 향연(饗宴)》 등으로 증명된다. 중세에 와서 전쟁과 역병(疫病), 기근(飢饉)이 계속되자 프랑스 요리는 수도원에서나 겨우 만들어졌다가, 생활이 나아지면서 점차 그 지방 특유의 요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앙리 2세에게 출가했을 때 프랑스 요리사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그녀는 당시의 선진국 이탈리아에서 고상한 방법과 함께 다수의 요리사 및 신기한 재료들을 프랑스에 가져왔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식습관에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모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전반세기에서 두드러진 것은 앙리 4세의 요리장 라바렌의 출현이고, 후반세기에서는 루이 14세의 탄생이다. 그가 좋아한 요리는 섬세하고 맛있는 것보다 식욕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른바 섭정시대(攝政時代:루이 15세 재위 연간 중 1715∼42)에 들어와서 프랑스 요리는 완성에 도달하고, 웅장하고 화려함보다도 아름다움이 칭송을 받게 된다. 이어서 루이 15세의 친정시대(親政時代)에도 미식(美食)을 좋아하여 왕 스스로가 요리를 만들 때도 있었고, 부엌에 드나드는 귀족도 나타났으며, 요리에 귀족들의 이름이 붙여졌던 시대이다.
그 다음 시대에 프랑스 요리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할 만한 A.카렘이 나타났다. 그는 요리사라는 직업을 예술가의 영역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있어 그 자신이 위대한 요리사 ·과자장인(菓子匠人)일 뿐만 아니라 이론가이기도 하여 많은 저작(著作)을 남겼다. 프랑스 요리가 프랑스 요리다워진 것은 그가 출현한 뒤부터이다. 카렘의 후계자인 U.뒤부아도 많은 저작을 남겼다.
다음으로 프랑스 요리 발전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A.에스코피에가 등장한다. 그는 요리의 실질적 향상과 영양의 문제를 받아들여 먹을 수 없는 장식 등을 폐지하고 요리를 근대화시켰다. 그의 저작에는 현대 프랑스 요리의 규범으로 알려진 《요리안내:Le Guide Culinaire》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의 요리전문가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현대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에스코피에의 요리도 재료비를 생각할 경우, 옛날 왕후 ·귀족이 없는 현재에는 제작이 불가능하다. 카렘 이후 프랑스 요리의 대세는 더욱 간소화를 지향하였으며, P.몽타녜에 의해 현대화되었으며 F.푸앙에 의해 완성되었다.
특징
프랑스는 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하고 있어서 기후가 온화하며, 농산물 ·축산물 ·수산물이 모두 풍부하여 요리에 좋은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 요리의 특징은 소재를 충분히 살리고 합리적이며 고도의 기술을 구사하여 섬세한 맛을 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맛을 내는 데 있어서는 전통적인 포도주 ·향신료 ·소스가 큰 구실을 한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제일의 특산물인 포도주는 요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포도주는 생선요리에, 적포도주는 육류요리에, 중간색인 분홍색포도주는 양쪽 요리에 적합하다고 한다. 이 밖에 마시는 목적 이외에 요리의 맛을 돋우기 위한 조미료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향신료는 원형의 잎이나 알갱이를 그라인더로 갈아 조리할 때 방금 간 것을 사용한다. 주로 파슬리의 줄기나 후추 ·로리에 ·셀러리 ·너트메그 ·사프란 등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3~4가지씩 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미묘한 맛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고 있다.
프랑스 요리는 소스를 주로 하여 소재를 맛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스가 중요한 구실을 하며, 많은 종류가 사용된다. 흔히 시판되는 소스(우스터 소스)를 쓰지 않고, 그 요리에 적합한 맛의 소스를 요리의 일부로서 만들어 사용한다. 이러한 조미료를 요리 종류에 따라 알맞게 골라 구사함으로써 프랑스 요리의 미묘한 맛을 창출해 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에는 달팽이 요리인 에스카르고(escargo) 요리, 특수한 조건에서 사육한 거위의 간으로 조리한 푸아 그라(foie gras), 흑갈색의 송로(松露:바닷가 솔밭 모래 속에 나는 버섯)로 만든 트뤼프(truffes) 요리, 생굴 요리 등이 있다.
메뉴
메뉴를 짤 때는 오르되브르에서 디저트까지 재료 ·빛깔 ·맛 등에 변화를 주면서 전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우선 오르되브르와 아페리티프로 식욕을 돋우고 다음에 수프를 낸다.
정찬인 경우는 반드시 맑은 수프(콩소메)를 내고, 다음에 단백질이나 지방이 풍부한 실질적인 생선요리 ·육류요리 등을 낸다. 이때 생선요리와 육류요리의 조리법이나 소스를 각각 다르게 하여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육류요리 다음에 소르베(sorbet:양주가 든 얼음과자) ·로티(rti:들새구이) 등의 순이다. 그 밖에 채소요리, 디저트, 과일, 애프터 디너커피 등을 차례로 낸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