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여행 갈 때는 가장 대표적인 정보수집 싸이트가 '태사랑' 이라고 있었거든요

1. 일본 여행 정보의 가장 대표적인 싸이트는 어디인가요.?

2.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일본 여행 책자도 추천해주세요^^

3. 쉬운 일본어 기초책 좀 추천


태국 여행 갈 때는 가장 대표적인 정보수집 싸이트가 '태사랑' 이라고 있었거든요


 아~ 맞아요~ 저도 태국갔을때 거기서 마니 정보 얻었는데요~^^ 더불어 주변 동남아정보까지~^^


1.일본 여행 정보의 가장 대표적인 싸이트는 어디인가요.?


 뭐니뭐니 해도 다음에 있는 카페인 '일본여행동호회'입니다. 통상

'J여동'으로 불리지요....

 네이버에서는 카페 검색하면 나오는 '일본여행카페', '일본여행자카페'

가 가장 정보의 퀄리티가 높죠~^^

 정보 괜찮은 일반적 사이트는...  http://www.jtour.com/

 www.jnto.or.kr 가 좋구요~


 글구 여행사들이 제공하는 정보 퀄리티도 좋아요~

 특히 여행박사 www.tourbaksa.co.kr

 재팬닥 www.japandoc.co.kr



2.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일본 여행 책자도 추천해주세요^^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오지만.... 전 두가지빼고 나머지는 세 수 정도

아래라고 봅니다~


 1) 100배 즐기기 시리즈 (일본, 도쿄 등) (중앙 M&B)

   한국인들이 가는 대표적인 여행지들 위주로 엄청 깔끔하고 정확

 하게 정보 제공~ 아마 일본 가시면 한국인들 중 절반은 이거 들고

 다닐듯~


 2) 론리플래닛 일본 (인그라픽스)

   거의 완벽한 정보.... 일본 전국을 커버하고... 특히 지도가 완벽~

 (미국 CIA에서 참고할 정도의 지도라네요~)



3) 시사일본어사에서 나오는 '일본어 첫걸음'

 혹은  '민나노 니홍고' 시리즈 추천합니다~^^..

 참고로 일본어 교재는 다락원이랑 시사일본어사가 제일 좋더군요~

Posted by Redvirus
,

싱가폴에 대한 기본적인 것은 아래 링크한 네이버의 내용만 읽어 보셔도 충분합니다.

여기저기 찾아보셔도 다들 카피하니 대부분 거기가 거깁니다.


http://100.naver.com/travelworld/nation.php?codestr=10040123_0_0_0_0_1




즐거운 허니문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도움이 되시는 방향으로 적어 보겠습니다.


싱가폴에서 1박을 하시는 것을 보니 추측컨데 예약을 늦게하셔서 발리직항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 참에 싱가폴도 구경하는 행운이 생겼구나' 생각하시면 정신건강에도 좋고 기분좋은 허니문이 되실 것입니다.^^


일단 예약하신 여행사에서 정해준 호텔까지 데려다 주실 것으로 믿고 공항과 호텔간 이동은 생략합니다.  (MRT를 이용하시는 게 편리)


정확한 시간 일정을 모르니 계획을 짜기가 애매합니다.





먼저, 일단 싱가폴을 가셨으니 싱가폴의 상징인 머라이언상은 보셔야겠죠? 머라이언상은 2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센토사섬(Sentosa Island, 섬전체를 인공적으로 관광지로 개발한 섬)에 있는  37m의 머라이언상(전망대 역할도 함)이고, 또 하나는 싱가포르강의 앤더슨교 옆에 위치한 머라이언공원에 있는 높이 8m인 머라이언상(뒤쪽엔 쬐끄만한 귀여운 애기(?) 머라이언이 하나 더 있음.^^ )이 있습니다.




주롱 새공원(제가 갔을 땐 S$68, 싱가포르에선 S$만 통용)은 세계 최대 규모의 야생조류 공원으로 현지인도 웨딩촬영하러 많이 옵니다. MRT타고가서 BUS를 타야하는데...194번 절대 안옴, 254번 권유, TAXI요금은 새공원에서 시내(오차드로드)까지 S$7.40 정도



보트키와  클라키(두 곳은 나란히 붙어 있음)는 꼭 들려 보시실 권합니다.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 들러 차나 생맥주 정도 마셔줘야 싱가폴에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신다면 야경이 멋지므로 반드시 야간에 가셔야 합니다.

클라키끝에 두사람의 몸을 미사일처럼 날려주는 놀이기구가 하나 있는데 기분이 짜릿해질만큼 꽤 재미있습니다.^^



시간이 하락한다면 보타닉가든을 둘어 보셔도 되지만  괜찮은 곳은 그 안에서 따로 입장료를 내야하니 빠듯한 일정을 고려해 보건데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이트사파리도 괜찮습니다.  요즘도 주말이면 그곳에서 구입한 나이트사파리 티셔츠를 입곤 합니다.^^



귀하디 귀한 허니문인데... 혹시라도 쇼핑을 위해 오차드로드로 가시거나 백화점을 기웃거리실 생각이시라면 아래 내용은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쇼핑은 돌아오실 때 면세점에서 하셔도 충분합니다.






호텔이 차이나타운과 가깝다면 차이나타운을 꼭 둘러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 곳에 가시면 다양한 중국음식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간단한 쇼핑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근처에는 중국음식점들(대다수의 여행안내서에서는 노점이라고 하지만 절대 노점아님. 언제적 애기를 하는지 한심.)이 많습니다. 음식을 가리지 않으신다면 샥스핀은 꼭 드셔 보세요.(엄청 쌉니다.^^). 개구리요리도 별미^^ㅋ



또 오시는 길에 근처 상점에서 육포를 사오시는 것도 좋습니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우리나라 육포처럼 빠짝 말린 것이 아니고 약간 녹녹한 것이 별미입니다. 냉장보관하시면 오래두고 먹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중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면 스리마리아만사원가는 작은 길에 있는 레스토랑이 맛이 훌륭합니다.



스리마리아만사원(차이나타운역에서 제기억으론 200m남짓)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사원으로 밖에서 조각상 사진만 찍고와도 기억에 남을듯...^^


'야쿤카야' 라는 토스트집이 있는데 꽤나 유명하여 방송촬영장소로 많이 이용됨.

연애인들 사진찍으면 스탭들이 찍지말라고 말림.-_-;;

계란 반숙(간장&후추)에 커피랑 토스트(사과쨈&버터)면 두분의 간식으로 충분.



그리고 어떤 여행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팁하나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차이나타운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면 차이나타운 포인트가 보입니다.

차이나타운 포인트(큰 건물에 Chinatown Point 라고 적혀 있음)에서  크로스 스트리트(Cross st.)를 따라 몇분 걷다보니 밤이면 열리는 노점카페(?)에서 꼬치(무척 달짝지근)랑 생맥주를 마시며 앞으로의 삶을 얘기하시면 나중에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노천카페(?)의 특징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비오지 않는 날 야간에만 열립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약도를 그려봅니다. 좀 어색하지만 이해하세요.^^

차이나타운역 을 나오면 가로로 큰길이 나있고 세로로 있는 길이 크로스 스트리트(Cross st.)입니다.
Cross st.옆에 작은 길이 있는데 그 길끝 오른쪽에 있는 것이 스리마리아만사원 입니다.

 

 

# Chinatown
   Point
 ㅣ        ㅣ                                                  *야쿤카야토스트    
 ㅣ        ㅣ-------------------------------------------------------
 ㅣ 역    ㅣ             Cross st.
 ㅣ        ㅣ-------------------------------------------------------
 ㅣ        ㅣ                                                          *노천카페
 ㅣ        ㅣ------*-----  *(이름은 생각안나지만 괜찮은 레스토랑)
 ㅣ        ㅣ------------*스리마리아만사원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육포가게(중국생과자들 많음)
 ㅣ        ㅣ

 ㅣ        ㅣ------------- #이 일대 모두가 차이나타운임
 ㅣ        ㅣ-------------
 ㅣ        ㅣ *중국음식점들(도로변에 즐비)

 ㅣ        ㅣ                  

 

 

 

 

 

 

요약하자면, 저의 여동생이 허니문을 간다면 이렇게 충고하겠습니다.

낮엔 머라이언공원이랑 주롱새공원을 둘러보고

밤엔 보트키와 클라키를 가라고 하겠습니다.

(디카는 꼭 배터리 충전 꼭 해서 가지고 가는 것은 상식! 호텔프론트에서 어댑터빌려 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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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폐 : 1 Rupee = 100 paisa.

- 환율 : Rs 51.80 : U$ 1 (Official Rate)
           Rs 54.80 : U$ 1 (Open Market Rate)

- 시간 : 5 hours ahead of GMT (한국보다는 4시간 늦다.) 중국과는 3시간 30분의 시차가 난다.



 

육로로 파키스탄 가기 : 아래 육로 배낭 여행 참고.








 스즈키-주요시내교통

Varan 1번 시내 버스  

앞-여성칸,뒤-남성칸

 이슬라마바드 거리    

 시내 거리              

거리                    


 각국 비자에 관한 정보 파퓰러 인 숙소내 여행 정보 책자 참고하면된다.

 대사관행 버스      

대사관출입자 가방보관소

 

 

 

 

 라왈핀디의            

 버스 터미널          

 길깃행 버스          

 터미널의 버스주차장

 터미널 입구          

 지프와 봉고            

 

봉고위 짐칸에 앉아서

 스카르두행 봉고    

 마샤 브룸 사설 터미널

 운행표              

  K2 사설 터미널      

 

 중간 휴게소            

 길깃 버스 터미널    

 길깃 버스 터미널    

 스즈키-주요교통수단

 버스 티켓 매표소    

 주유소                  

 

주유소 겸 터미널

 

 에어컨 고속버스    

 고속버스 휴게소    

 

 트럭                    

 트럭 히치            

 트럭 히치            

  화려한 트럭          

 버스                    

 버스                    

 말 달구지              

 

  기차역

  기차 철도

 나무 막대 다리      

 서스펜션 브릿지

 인디아나 죤스 다리  







 

 

 

 Regal Internet Inn 

 숙소내 여행정보책자

 


 파퓨러 인(Popular Inn) :
2인실 : 혼자 투숙 200루피
          2인 투숙 250루피/방당
도미토리 : 150루피

여행 정보 책자 3권 있음.

 파퓰러 인            

 숙소내 여행정보책자

 

 카라코람 인 숙소    

 와지르 호텔 숙소    

 케카산 호텔 숙소    

샹그릴라 리조트-고급

 티벳 모텔-중,고급

 호수와 방갈로      

 라카포쉬 B.C      

라카포쉬 캠핑장  

  Glacier Breeze G.H 

 메디나 G.H          

  객실-1인실

 휴게실                

 야쿱사장과 직원들  

여행 정보 책자

  여행 정보 책자

 

 투어리스트 인 입구

 Tourist Inn 대문    

 숙소입구의 빵집    

 리버 뷰 G.H          

  아시아 스타 호텔    

 Sky bridge Inn       

 파수 인(Passu Inn)

 식당 메뉴판        

 숙소 광고판          

올드 훈자 인 숙소

할아버지 식당

훈자 호텔-중,고급






 양꼬치 구이          

 라 미얜(拉麵) : 대-50루피
                       소-40루피
식사 시간 준수, 점심 식사 시간 :12:00~14:00

 중국 신쟝 식당      

 신쟝 누들              

 

 

 전통 빵(넌)집

방앗간의 밀가는 돌

  양봉

 야외 식당 공원            

 야외 식당      

재래 시장

  맥 도날드

피자 헛

 

숙소입구 지하 슈퍼  

 야시장                  

 서울 클럽-민박      

 내부 식당              

 서울 클럽-주소 등  

※ 서울클럽 연락처 :  e-mail: chosj22pk@hanmail.net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새 주소는 h,39. st.35 . F6/1.  Islamabad Pakistan
Phone : 0092-51-282-0205.   Mobile : 0092-300-525-6447,
Fax : 0092-51-227-0381

 메뉴판                

 음식                    

 파수 인(Passu Inn)

 식당 메뉴판        

 

 상해 식당              

 양꼬치 구이-저녁    

 씨없는 포도와 복숭아

 시아첸 레스토랑    

 시아첸 메뉴판          

 시아첸 볶음면        

 식당 간판              

 꼬치 구이              

 슈퍼                    

 

 식당                    

 야채와 과일          

 

 기름 과자            

 

  재래 시장

양어장

양어장의 물고기

 

 야채, 과일 가게        

 

 

 



















1. 일반사항

- 위치: 남아시아,아라비안해를 경계해 있으며 동쪽으로 인도와 이란,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북쪽으로는            중국을 접해있음.

- 지리적 좌표: 북위30,동경70

- 국토 면적 : 796,095 sq km
      전체: 803,940 sq km
      영토: 778,720 sq km
      영해: 25,220 sq km
      면적 비교- 캘리포니아 두 배 크기정도에 약간 못 미침,한반도 크기의 3.5배
      대륙 경계면적: 6,774 km
      인접국가들과의 경계: 아프가니스탄 2,430 km, 중국 523 km, 인도 2,912 km,이란 909 km
      해안선: 1,046 km
      최저점: 인도양 0m
      최고점:K2(Mt. Godwin-Ausren) 8,611m

     


- 지세: 동쪽으로 인더스 평야, 북부와 북서쪽으로 산악지역이며 서쪽으로 발루치스탄 고원지역임.
- 지형-특징: 중앙 아시아와 인도의 아(亞)대륙사이의 전통적인 침입통로역할을 했던 카이버 패스와
                  볼란패스를 끼고 있음.
 

                     

                 

                     


- 인구 : 1억4천3백만명 (1999 sample census)

-
인종 구성집단 : 펀잡인, 신드인, 바탄인, 발루치인, 무하지르(인도로부터의 이민자들과 그 자손들)


- 종교: 무슬림 97%(수니파77%, 시아파 20%), 크리스찬, 힌두인들, 기타종교 3%


- 주요 도시 (인구는 1998년도 통계치)
    Karachi : 8,761천 (실제는 1천4백만 명으로 추정)
    Lahore : 6,212천,
    Rawalpindi : 3,351천,
    Hyderabad : 2,840천
    Faisalabad : 5,340천,
    Islamabad : 799천

- 기후 : 아열대성 기후, 고산지역은 냉대 기후.
대체로 덥고 건조한 사막기후, 북서지역은 온난하며,
            북부지역은 냉한기후


   * 카라치 지역 (해안지역)
      。엄청 더운 계절 : 6월, 평균 최저28 ~ 최고34℃ (고온 다습한 기후로 무더움)
      。엄청 추운 계절 : 1월, 평균 최저13 ~ 최고 25℃ (겨울이라야 12~1월 2개월간)
      。건조한 계절 : 10월, 월평균 강우량 1 mm
      。습한 계절 : 7월, 월평균 강우량 81 mm

   * 라호르 지역 (내륙, 분지)
      。엄청 더운 계절 : 5월~6월, 평균 최저32 ~ 최고48℃ (고온 건조한 기후)
      。엄청 추운 계절 : 12~1월, 평균 최저5 ~ 최고 20℃
      。건조한 계절 : 11월, 월평균 강우량 5 mm
      。습한 계절 : 7월, 월평균 강우량 150 mm

-
언어 : 펀잡어 48%, 신디어12%, 시라이키어(펀잡어의 변형)10%, 푸시토어 8%, 우르두(공식 언어)8%,
            발루치어 3%, 힌드코어 2%, 브라후이어,영어(공식 문서와 정부관련부처에서 사용),기타


-
천연자원 : 토지, 상당한 천연가스 매장량 보유,
                  제한적이나마 페트롤늄, 질이 낮은 석탄, 철, 구리, 소금, 석회암
 

-
토지 이용
    가용 토지:27%
    경작지:1%
    목축지:6%
    임업, 삼림지:5%
    기타:61% (1993년 통계)
    관개토지: 171,100 sq km (1993년 통계)

- 자연재해: 잦은 지진, 남쪽과 서쪽은 종종 심한 정도로 발생함.
                7,8월의 심한 장마 이후 인더스강을 따라 범람함.

- 환경: 원천 하수로부터의 수질오염, 산업폐수, 제한적인 담수원,
           인구의 대다수가 적절한 음료를 가지지 못함, 토양 침식, 사막화, 산림 부족

-
도량형: Imperial system에서 Metric system으로 변화하는 중.

     1 seer = 0.933 kg
     1 maund = 40 seer = 37.32 kg.
     숫자는 흔히 1Lakh = 100,000, 1 Crore = 10M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1,00,000과 1,00,00,000으로
     표기 되고 있다. 1978년부터 Millions과 Billions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 회계연도 : 매년 7월 1일 ~ 익년 6월 30일


           



2. 경제

파키스탄은 국민총생산액(GNP)이 약645억불, 1인당 GNP가 652불(이상 2003/4회계년도 추정치)인 개발도상국가로서 GDP중 농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23.6%에 달하는 농업국임.
    - 49/50년도 54%에서 2002/2003년도에는 23.6%로 낮아짐.

공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4%임.
    - 69/70년도 16%에서 2002/2003년도 18.40%로 확대추세이며, 국영기업의 민영화, 민간투자의 증대로 향후 성장가능성 높음.

경제성장률은 90년대 4.4% 정도를 기록했으나 2000/2001년도에는 2.45%, 2001/2002년도 4.9%, 2002/3년도에는 5.8%의 성장율을 기록함.
  - 2003/4년도는 6.2%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

 2002/2003 회계연도 기간중 수입은 124억불, 수출은 113억불로서 연간 약 11억불의 무역적자를 보임.

소비자 물가는 2002/2003 회계연도 기간중 3.3% 상승을 기록, 인플레율이 2001/2년도 3.4%에 이어 최근 계속 한자리 숫자를 유지하고 있음.

천연자원은 상당량의 천연가스(176억㎥)와 원유(약1,900억 배럴) 등이 매장

경제발전의 제약 요인으로는 많은 인구, 높은 인구성장율, 낮은 교육수준과 기술부족, 낡은 교육제도, 영농기술의 후진성과 소작제도, 불충분한 사회간접자본 시설 등을 들 수 있음.



3. 정치제도

 
가. 정체 : 내각책임제
  나. 대 통 령 : 2001.6월 Pervez Musharraf 대통령 취임
  다. 행 정 부
     1) 수상 : Chaudhry Shujaat Hussain
     2) 행정부와 의회간의 견제, 균형장치
         ο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할 수 있으나 수상은 의회에서 선출
         ο 내각은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짐.
         ο 하원은 수상 불신임권을 가짐.
     3) 행정관료
         ο 직급에 따라 차관(Secretary), 차관보(Additional Secretary), 국장(Joint Secretary,             Director-General), 과장(Deputy Secretary, Director), 담당관(Assistant Director, Section             Officer) 등으로 구분
     4) 지방행정
         ο 4개주(Baluchistan, Punjab, Sindh, North-West Frontier Province)와
            소수종족연방보호지(FATA: 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  및 연방수도권지역(FCA:
            Federal Capital Area)으로 구성. 주에는 주지사(Governor), 주수상(Chief Minister) 및
            주의회(Provincial  Assembly) 설치


4
. 역사적 배경 Historical background

지정학적으로 중국, 인도, 이란, 중앙아시아의 연결 부분인 파키스탄은 고대로부터 아리안, 페르시안, 마케도니아(알렉산더 대왕), 중앙아시아, 훈, 투르크, 아랍, 모굴…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왔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 상인들이 17세기 초에 이 지역에 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한 영국은 모굴의 세력이 점차 쇠퇴함에따라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서 19세기 말에는 전 인도대륙을 점령하게 된다.

힌두의 지배와 억압을 벗어나 인도로부터 독립된 무슬림 국가를 세우자는 논의는 시인인 Muhammad Iqbal에 의하여 1930년에 처음으로 창안되고, 현재는 파키스탄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Muhammad Ali Jinnah가 이끄는 All India Muslim League에서 1940년 4월 23일 정식으로 채택됨.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4일 영국지배로부터 떨어져 나와 West Pakistan과 East Pakistan (방글라데시)으로 분리 독립을 이루게 된다.

현재의 파키스탄은 4개 지방정부 (Punjab, Sindh, Baluchistan 및 NWFP; North West Frontier Province)와 분쟁지역인 AJK; Ajad Zamu Kashmir 및 FCA; Federal Capital Area등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이다.

인도에서 분리독립 후 민정과 군정을 겪은 동서 파키스탄은 1970년 12월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총선을 실시하게되며, 동부에서는 Awami League가 압도적인 승리를, 서부에서는 Zulfikar Ali Bhutto의 Pakistan People's Party (PPP)가 다수당으로서 승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Bengali주도 정부에 반발하는 부토와 군부에 대항하여 1971년 3월 Awami League는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불복종 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를 군부(서파키스탄이 주도)가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의 Bengalis가 사상당하자 1971년 12월 폭동이 발발하게 되고, 마침내 인도군의 개입으로 방글라데시는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더다.

Zulfikar Ali Bhutto는 대통령이자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절름발이가 된 Pakistan의 계엄통치 수반으로 군림하다가 1973.4월 개헌으로 수상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1977년 3월 총선에서 쉽게 승리한 PPP당은 지방선거에서 반대당에 폭력전술을 구사하여 전국적인 소요 사태에 휩싸이게 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COAS Zia-ul-Haq는 1977. 7. 5일 Mr. Bhutto를 축출하고 계엄령을 발동하는 쿠데타를 감행하여 1979년 4월 4일 Mr. Bhutto는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당하였다. Zia장군은 표면상으로는 Islam화 정책이라는 파키스탄의 본래 목적을 달성한다는 구실하에 억압과 강력한 정책을 펼치지만, 실상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 자신의 통치기반을 넓히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인도, 파키스탄, 티벳의 미묘한 관계 - 그냥 참고 하세요.
 
"중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나라로는 인도(印度)가 있다. 중국에서 가장 보기 힘든 외국인중 하나가 인도인이다. 물론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2005년) 중국과 인도는 민관(民官) 모두 사이가 좋지 않으며, 티벳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망명 정부를 두고 있고, 중(中).인도(印度)간 국경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현재 고령(1935년 생)의 달라이 라마는 죽기 전까지 티벳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 중이며,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외교 방법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고 있다.

한가지 예를들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인도와 가장 가까운 네팔-파키스탄과의 협력 및 지원으로 인도를 핍박하고 있다. 한 파키스탄인은 본인이 중국인이라고 하자, 형제 국가에서 왔다며, 이슬람식으로 포옹하려 하였다.-본인은 해외여행시 중국인이라고 한다. 이는 그 나라와 중국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 이다.- 중,파키스탄의 관계는 민관(民官)모두 좋다고 할 수 있다. 파키스탄의 젖줄 인더스강(수트레지 강 포함)이 중국(티벳 서부)에서 발원해서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흘러 들기 때문에 수자원(水資源) 안보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티벳이 독립한다면 파키스탄은 그야말로 난처하게 되는데, 티벳(망명 정부가 인도에 있음)과 인도가 인더스 강의 상류를 완전히 장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도는 티벳이 독립하는데, 아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이는 인도의 거대한 강 상류가 중국(티벳)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한 인도가 수자원 문제로 중국에 발목 잡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본 사이트 중국 여행 정보 "중국이란? 참고 -








 K2                      

 서스펜션 다리-파수

 발티트 성-훈자

 KKH                    

 낭가 파르밧          

삿빠라 호수-스카르두



파키스탄 가는 길

(1)항공편

한국에서 파키스탄에 들어 오는 항공편은 주로 Bangkok/Singapore를 경유하여 Karachi나 Lahore로 들어 오는 길과,북경을 경유하여 Islamabad나 Karachi로 들어 오는 방법이 있다.
한국에서 라호르까지 가는 항공운임은(경유편)타이항공과 싱가폴항공이 84만원정도에 구입할수있다.

*SEL-BKK-LHE(KHI)-BKK-SEL : Thai항공이 주 3회
(화,목,일) 운항
*SEL-S'Pore-LHE(KHI)-S'Pore-SEL : S'Pore항공이 주 4회
(월,수,금,일) 운항
*SEL-PEK-ISB(KHI)-PEK-SEL : 파키스탄 국영항공사(PIA) 및
중국민항이 주 2회 각각 운항
*SEL-BKK-LHE-BKK-SEL :방콕까지 대한항공,방콕에서 라호르까지 파키스탄항공이 운항.

==> 다시한번 확실히 알아 보시기 바랍...


(2)육로

*중국 국경
중국의 Tashkurgan과 Pakistan의 Sost를 잇는 220km의
Khunjareb Pass는 해발 4,733M 고지대를 통과하는 국경도로이며,매년 5월1일에 개방하고 10월 31일 폐쇄한다.
(개인 여행객들은 11월 15일까지 통과 가능)
파키스탄 측에서 출국자는 08:30~11:00a.m까지,
입국자는 08:30~16:00까지 세관과 이민국 신고를 접수하고
있으며 PTDC가 운영하는 Bus, Jeep, Van등이 운행되고 있으며,운임은 1인당 U$ 23, 5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인도 국경
인도의 암리차르와 파키스탄의 라호르를 연결하는 Wagha Border는 08:30~14:30 까지 개방되어 외국인들의 출입은 자유롭다.(인도-파키스탄 간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외국인들의
국경출입은 가능하다고 함)
국경을 나와 NEW KHAN를 이용하면 단돈8루피에 라호르시내로,Lahore Railway Station에서 Wagha까지 Minibus(No.12)는 10루피,택시는 400 루피를 받으며 30분 정도 소요.

==> 지금은 변경이된것 같음... 국경에서 4번 버스가... 라호르 스테인션까지 가는데 요금은
라호르 스테이션까지 12루피 입니다... 2004.12월 현재


Lahore-Delhi간을 운행하는 Samjhota Express열차는 매주
월,목요일 11:00a.m에 Lahore를 출발하나 Check-in은
08:00a.m까지 마쳐야 하고, 엄청나게 긴 출입국 및 통관
절차로 Lahore-amritsar까지 6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1등석 500루피, 일반석 150루피.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 측의 비협조와 계약 불이행이 계속될 경우 열차 운행을 2000년4월 15일부터 중단하겠다는 통보를 하겠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므로 혹시 기차로 여행하려는 분들은 사전에 확인할 것.

'99.3월부터 Lahore-Delhi간 43석 규모의 냉방 고속버스인
Luxury Bus가 매주 4회 운행되고 있다. 매주 화,수,금,토요일
아침 6:00a.m에 lahore, Delhi에서 동시에 출발하며,
요금은 US 19$,파키스탄 루피 960Rs정도.
(아침, 점심 식사와 저녁 Tea Service포함),11시간 소요.
Lahore에서는 WAPDA건물 뒷편 Falleti's Hotel에서 출발한다.

*** Reservation ***
* Lahore
PTDC (Pakistan Tourism Development Corporation),
Falleti's Hotel, Egerton Road
Tel:92-42-6363946~50, Fax:92-42-6364819,
email:idp@ptdc.edunet.sdnpk.undp.org
* Delhi
DTC (Delhi Transport Corporation)
Tel:91-11-3317445, Fax:91-11-3315877,
email:dtc@nde.vsnl.net.in


*이란 국경
Iran의 Zahidan과 Pakistan의 Taftan을 연결하는 국경이
09:00~17:00까지 열려 있다. Quetta~Taftan간을 운행하는
Bus/Coach는 16~18시간이 소요되며(634km) 요금은 350~400루피
Zahidan~Quetta간 Express열차가 일주일에 한번 운행되며
Taftan을 경유 17시간이 소요된다. 요금은 1등석 500루피,
침대칸 650루피

(3)해상로
현재는 전혀 없다.
 






파키스탄의 공휴일(달력, 공휴일, 절기, 명절, 사회, 문화.)

파키스탄의 공휴일은 우리나라도 그러한 것 처럼 양력에 기초한 것과 음력에 기초한 것이 있다. 음력에 기초한 것은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고 양력에 기초한 것은 근대역사의 중요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먼저 음력으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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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ura-e-Muharram : Muharram 월의 열번째 날, 시아파 제1대 이맘, "알리(무함마드와 가장 가까웠던 종형제)"의 사망일, 이틀

Holy Prophet Muhammad의 탄생일 : Jamadi-ul-Awwal의 12번째 날, 하루

Eid-ul-Fitr : Shawwal-ul-Mukarram의 첫 번째 날. 한달의 금식이 끝난 다음 날, 이틀

Eid-ul-Azhar : Zilhaj 달의 10번째 날. 모든 사람들이 양, 소 혹은 염소 등을 준비해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이틀

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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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날(Pakistani Day) : 3월 23일, 1940년의 라호르 결의를 기념하는 날이자 1956년의 공화국 선포일을 기념, 하루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 8월 14일,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인도(8월 15일)보다 하루 일찍 독립을 선포하였다. 하루

국방의 날(Defence Day) : 9월 6일, 1965년 인도와의 전쟁을 기억하기 위한 날, 때에 따라서 공휴일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정부에서 공고하기 나름

무함마드 알리 지나의 사망일 : 9월 11일, 오래전에 공휴일이 었으나 폐지 됨. 개별적으로 기관 혹은 단체별로 기념 행사를 하기도 함.

무함마드 이끄발 박사의 탄생일(Iqbal's Day) : 11월 9일, 파키스탄 국가 형성의 사상적이 배경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

무함마드 알리 지나의 탄생일(Quaid-e-Azam's Day) : 12월 25일, 성탄절에 지나가 태어난 이유로 해서 무슬림 국가로는 유일하게 성탄절을 휴일로 한다.

공휴일은 우리나라보다 적지만 이들은 평상시에도 공휴일처럼 많이 쉴 수 있다.



파키스탄 이슬람력
달력, 이슬람력, 음력, 달, 절기, 사회, 문화


이슬람력은 달의 주기를 따라가는 음력으로 달이 사라졌다가 그믐 저녁에 초생달이 관측되면 그 익일이 다음 달의 첫째 날이 된다. 정확하게 달의 주기만을 따라가며 윤달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태양력과의 차이가 계속해서 벌어진다. 일년에 약 10일씩 앞당겨지기 때문에 이슬람력을 기준으로 하는 절기행사는 계절과 상관이 없다. 어느 경우에는 한여름에 맞이하다가도 약 20년 쯤되면 그 절기를 겨울에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음력으로 만월이 될 때 절기가 많다. 우리의 정서로는 대체로 보름달의 더 좋아하나 이들의 정서로는 초생달을 더 좋아한다. 기독교정신으로 설립된 국제 구호, 의료 단체인 적십자사(Red Cross)의 기호가 붉은 십자가인데 이에 대응하여 무슬림국가들에서는 적신월사(Red Crescent)라는 단체가 있어서 의료사업을 하고 있다. 모든 의료기관마다, 붉은 초생달을 기호로 삼고 있어서 앰뷸런스에도 적십자대신 붉은 초생달을 볼 수 있다.

대개의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들은 국기에 초생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들의 대부분의 중요한 절기가 초생달을 기준으로하는 전통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파키스탄의 이슬람력의 12달은 다음과 같다. 철자는 The News(파키스탄 최대발행 영자신문)에서 표기한 것을 따랐다.


1월 : Muharram-ul-Harram
다른 이슬람국가에서는 Muharram 달의 첫째날을 우리나라의 설날(구정)처럼 큰 명절로 지내기도 하나 파키스탄에서는 첫째날을 명절로 지키지 않는다. 대신 Ashura-e-Muharram 이라고 하는 Muharram 달의 9번째 날과 그 다음날을 공휴일로 쉰다. 이 날은 시아파의 제1대 이맘(영적인 지도자) 알리(모하메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브 아비 탈리브('Ali b Abi Talib), 칼리프로는 4대)가 피살된 후 그 아들 후세인이 카르발라 전투에서 동료들과 함께 몰살당한 것을 애도하는 날이다.

참조:
KCM 이슬람상식 참조 : http://kcm.co.kr/Bethany/a_code/islam.html
엠파스 모하람 : http://100.empas.com/entry.html/?i=251792&Ad=photorental



2월 : Safar-ul-Muzaffar

3월 : Rabi-ul-Awwal

4월 : Rabi-us-Sani

5월 : Jamadi-ul-Awwal
Jamadi-ul-Awwal의 12번째 날은 Holy Prophet Muhammad의 태어난 날이자 죽은 날로 공휴일이다. 파키스탄에서는 행사는 있기는 하나 시끌벅적하게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6월 : Jamadi-us-Sani

7월 : Rajab-ul-Murajjab

8월 : Sha'aban-ul-Muazzam

9월 : Ramazan-ul-Mubarrak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을 하는 달. 우리에게 라마단이라고 알려진 이 기간을 이 나라에서는 람잔 혹은 라마잔이라고 부른다. 부자들에게 배고픔을 경험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10월 : Shewwal-ul-Mukarram
Shewwal 달의 첫째날은 라마잔 금식이 끝난 날의 다음 날로 Eid-ul-Fitr (작은 이드)라고 한다. 대체로 이틀을 공휴일로 하며 온가족이 함께 모여 잔치를 하고 멀리 떨어져 있던 친척들이 모인다.

11월 : Ziqa'ad

12월 : Zilhaj
Zilhaj 달의 10번째 날은 Eid-ul-Azhar (큰 이드)라고 부르며 선조 아브라함이 알라의 명령대로 이스마엘을 바쳤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양, 소 혹은 염소 등을 준비해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기도시간
기도, 다섯기둥, 이슬람, 무슬림, 종교, 문화
파키스탄

이슬람의 다섯 기둥(Five Pillar) 중에 한가지로 하루에 다섯 번 드리는 기도가 있다. 모든 무슬림은 이 다섯 번 드리는 기도의 의무를 해야한다. 신문에 보면 이 다섯 번 드리는 기도의 시간도 나온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Jang Group의 영자신문 "The News"에 보면

Fair 4:15 am
Zohr 1:30 pm
Asr 5:30 pm
Maghrib 7:22 pm
Isha 9:15 pm

라는 식으로 기도시간이 공지되어 있다. 이 시간은 계절에 따라 (일출, 일몰 시간과 달의 모양에 따라) 바뀐다. 이 시간에 동네마다 있는 모스크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시작한다. 확성기를 이용해서 방송을 하기 때문에 무슬림이 아닌 사람에게는 짜증스럽게 들릴 수 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깔개를 깔고 메카(사우디아라비아 서부의 도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출생지)를 향해 기도한다. 모스크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모스크에 가서, 모스크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적당한 빈 공간을 찾아서 기도한다. 동네 곳곳에 모스크가 있지만 모스크가 약간 먼 곳(특히 상가지역 같은 경우)에는 기도시간에 사람들이 모이는 공터가 있다. 그 곳에서 주로 연장자이거나 몰비(이슬람교의 선생, 설교자)가 소리 높여 기도하고 그를 따라서 앉았다가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하면서 통일된 모습으로 기도를 한다.

기도하는 모습을 사진찍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으며(이슬라마바드의 사람들은 대체로 개방적이어서 별로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지역에따라 사진찍는 것이 위험스러울 수 있다), 구경하는 것을 말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도하며 절하는 사람들의 앞에 섬으로서 절을 받는 것 같은 위치에 서 있으면 안된다.



카슈미르(Kashmir)

인도 북서부에서 파키스탄 북동부에 이르는 산악지역. 총면적 22만 2400㎢. 파키스탄령 인구 약 390만(1997), 인도령 약 843만 5000(1994). 예로부터 인도와 티베트·중앙아시아 방면의 교통 요충지이다. 현재도 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러시아 연방(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도 가깝기 때문에 국경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분쟁의 결과 잠정국경선을 긋게 되었고, 총면적 가운데 약 40%가 파키스탄령이 되었는데, 이를 아자드(자유)카슈미르라고 한다. 나머지 13만 8000㎢가 인도의 잠무&카슈미르주로 되어 있으며 주도는 스리나가르(다만 겨울철에는 잠무로 이동)이다.

                       


1962년 중국·인도분쟁에 따라 인도쪽의 라다크주 9만 6000㎢ 가운데 동부의 린체탄고원 4만 2000㎢는 중국의 지배 아래 있으며 이를 악사이 친(Aksai chin)지방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힌두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나, 14세기에 이슬람권으로 넘어가 1587∼1752년 무굴제국에 편입되어 있었다. 52년 아프가니스탄 두라니왕조 아하마드샤왕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1819년 란지트싱이 카슈미르 계곡(스리나가르)을 지배하였으나 시크 왕국이 46년 시크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함으로써 카슈미르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귀속되었다. 같은해 잠무지방의 번왕(藩王) 그라브싱이 동인도회사로부터 구입하여 다시 힌두교도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것이 1947년 8월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 후의 <카슈미르문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카슈미르는 단지 카슈미르 계곡(Vale of Kashmir)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 주변의 광대한 여러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지형적 특징은 케이투(K2)·카셰르브룸 등 해발고도 8000m의 고봉과 히스파·바르트로 등 큰 빙하가 있는 카라코람과 낭가파르바트 및 눈&쿤을 비롯, 해발고도 6000∼7000m의 봉우리가 있는 대(大)히말라야의 2개의 큰 산맥이 북서남동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를 가로질러 인더스강과 그 지류인 쇼크강·체나브강 등이 종곡(縱谷)을 만들고 있다. 카라코람의 동쪽에는 티베트고원의 연장인 해발고도 4500m의 린체탄고원이 접하고 있다. 대히말라야의 서쪽에는 소히말라야인 해발고도 4000m의 피르판잘산맥이 평원부와의 지형경계를 이룬다. 다시 점이지대(隷移地帶)인 시왈리크구릉이 나란히 뻗어 있고, 잠무·푼치 부근으로부터 펀자브평원의 일부를 차지한다. 대히말라야와 피르판잘 사이에는 이 지방 중심지인 달걀꼴의 카슈미르 분지(스리나가르)가 있다.

스리나가르 분지

군사도시 까르길

  훈자의 고산 협곡


산악지대에는 과거에 독립 왕국을 이루었던 길기트·칠라스·아스톨·스카르두·레(Leh)등 소규모의 중심취락이 있으며, 협곡 연변과 고개를 넘는 교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카라코람산맥을 넘어 티베트·카쉬가르(카스,喀什)로 통하는 쿤제랍고개·민타카고개·히스파고개·카라코람고개 및 힌두쿠시산맥을 넘는 다르코트고개 등은 실크로드의 대상로로 유명하다. 또한 카슈미르분지와 평원을 연결하는 바니할고개는 악바르황제의 카슈미르원정으로 유명하다. 기후는 평원지역에서 북동쪽의 산악지대로 갈수록 내륙기후가 되고 연평균기온은 낮으며, 연강수량은 감소한다(잠무 16℃·1100㎜, 스리나가르 12℃·650㎜, 레(Leh) 5℃·100㎜). 다만 연강수량은 피르판잘 동쪽사면이 최대치 1500㎜를 나타낸다. 카라코람지방에서는 농작물·수목의 생육이 좋지 않고, 연료의 확보가 절실한 문제이다.

 레 전경                

반 사막 지역, 라다크

누브라계곡의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쌀이 최대의 농산물이다. 특히 캬슈미르분지에서는 쿠루라고 하는 관개수로가 발달하여 논벼의 집약적 재배가 이루어진다. 구릉·평원지역에서 옥수수와 밀의 이모작이 실시되고 산악지대 골짜기에서는 보리·메밀·콩류·면화도 생산하지만 그 양은 많지 않다. 전체적으로 식량은 자급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의존하고 있다. 그 밖에 양귀비·사프란·채소씨앗 등의 환금작물도 재배하고 있다. 소히말라야의 목재를 비롯해서 사과·호두·살구 등의 과실도 중요한 상품이다. 목축 특히 털을 얻기 위한 염소·면양 사육이 성하다. 소히말라야에서는 마르그(marg)라고 하는 산악초원을 이용한 이동목축, 물소 떼를 이끌고 우유를 팔면서 이동하는 반유목민 구자 등도 있다.

농업이 주산업

유목민

살구 열매


산악지역에서는 유목이 일반적이고, 소·면양 외에도 수송수단으로 쓰이는 야크를 사육하고 있다. 종교는 잠무주에서 힌두교도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인도령의 공용어도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우르두어이다. 산악지역에서는 아리아계·몽골계 등 민족도 다양하고, 불교도·라마교도도 있다. 아름다운 산악경관, 협곡의 경치와 약간 차갑고 서늘한 기후로 피서·휴양지로서의 관광산업이 기대되고 있다. 카슈미르분지에서는 주도 스리나가르를 비롯하여 광천(鑛泉)인 아난트나그, 하우스보트가 떠 있는 달호수, 산간 피서지인 구르마르그·소나마르그 등은 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파키스탄 KKH(Karakoram Highway)는....총 연장 1284k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KKH           







파키스탄 KKH 도시별 상세지도 보기
Johnthemap : http://www.johnthemap.co.uk/pages/index.html

[파키스탄 KKH 지도]

 

 



 파키스탄(중앙 아시아) 여행 정보 ( Click ) 참고...


[화려한  트럭]        



출처 : [기타] http://kailash96.com/neinpa_pakistan.htm
Posted by Redvirus
,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에 걸쳐 포르투갈인 등 유럽인이 내도하여 기독교 문화를 처음으로 나이지리아에 심었다. 영국은 노예무역 대신 상업 무역을 개척하기 위해 1861년 라고스를 무력 점령, 그 후 1890년에는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을, 또 1900년에는 남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을 각각 설치하여 1914년에 남북 보호령이 통일되어 영국령 나이지리아가 성립되었다.
그 후 연방 각료회의의 성립을 거쳐 1960년 10월,독일령의 카메룬 북부를 병합하면서 나이지리아는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독립하였다. 독립 후 3년을 거쳐 나이지리아는 1963년 10월 북부, 동부, 서부, 중서부의 4주로 구성되는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코코아, 코코넛, 낙화생, 야자 열매, 면화, 천연 고무 등으로 주로 수출되고 있다. 삼림은 국토 면적의 약 30%를 차지하고 사바나 삼림과 남부의 열대 다우림이 있어 원목의 산출량은 아프리카 제일이라 일컬어져 목제는 많이 수출되고 있다. 수산업면에서는 좋은 어장이 있어 어족 자원도 풍부하고 기니아만 어업외에 내륙부 하천,호수에도 담수어가 많다. 특히 기니아만의 나이지리아 앞바다의 새우자원은 서아프리카 제일의 자원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획득된 새우는 냉동되어 주로 일본,유럽에 수출되고 있다.

항공
우리나라에서 직항으로 오는 항공편은 없으며 유럽 대도시나 다른 지역을 경유하여 여행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 독일항공이나 영국항공, 네덜란드 항공, 혹은 나이지리아 항공을 이용하면 된다. 나이지리아의 국제공항은 라고스, 아부자, 카노, 포트 하코트에 있다.


면적 : 92만 3768㎢

수도 : 아부자(Abuja)

인구 : 1억 2663만 6000명 (2001년 기준)

종교 : 회교도가 약 45%(주로 북부 지역),기독교인이 약 35%(주로 라고스를 포함한 남,동부지역)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주요민족 : 위치상 대륙 횡단 이주로의 합류점에 놓여 있어, 민족과 문화가 매우 다양하며 전국에 250여 종족이 살고 있다. 각 종족 마다 고유의 관습과 전통, 언어를 갖고 있다.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종족이 하우사, 요루바, 이보, 풀라니, 이비비오, 카누리, 에도, 티브, 이조, 누페족으로 그중 풀라니 족, 요루바 족이다.

주요언어 : 나이지리아는 공용어로 영어, 하우사어, 요루바어, 이보어의 4개 언어를 정했지만 각 종족은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초등교육에선 각 부족의 언어로 교육이 인가되어있지만 고등교육은 영어로만 진행된다.

기후
남부 해안 일대의 기온은 32℃를 넘는 일이 드물지만 습도가 매우 높고,장마철이 거의 1년 내내 계속된다. 내륙지방은 4∼10월이 우기이고 11∼3월이 건기인데,여름 기온은 38℃를 넘을 때가 많다. 북부지방의 건기는 거의 8개월간 계속되는데, 이때 하마탄(harmatan:열풍)이라는 뜨겁고 먼지가 많은 사하라 사막의 바람이 계속 분다. 평균강우량은 지역에 따라 격차가 심해 해안 일대에서는 1,800∼3,000㎜ 이상이며, 북쪽 국경지대는 약 500㎜이다.

사회문화
나이지리아는 대가족 중심제이며 가족관계에 있어서의 의무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연장자를 공경하고 각 계층의 지도자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자제하며 어떤 조직에서나 가급적 합의를 이루려고 하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국민의 보건위생 상태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열악한 편이다. 주정부 소관인 공공의료, 보건 서비스는 대체로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부분의 병원이 충분한 의료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약품 또한 만성적인 부족현상을 보이고 있다. 상당수의 국민이 아직도 말라리아와 각종 수인성 질병, 결핵, 뇌척수막염, 기타 예방 가능한 질병들로 죽어가고 있다.
20세기 말 현재 나이지리아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51세, 여자가 54세로 비교적 낮은 수준이다.

공식적으로는 6년간의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반초등교육(UPE) 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교육개발 정책을 추진한 결과 1970∼80년에 크게 높아졌다. 중등학교 취학률은 여전히 낮은 수준인데, 그것은 중등교육 부문이 UPE 프로그램을 이수한 학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기술인력과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한 종합대학과 단과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대부분의 나이지리아 신문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연방정부나 주정부 소유이며, 몇몇 민간신문은 개인용이거나 당기관지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언론·출판의 자유는 나이지리아의 확고한 전통으로서, 정부의 검열 절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 또한 정부 소유로 되어 있다.

지리
남북 길이 1,050km,동서 길이가 1,130km이다. 서아프리카 연안 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이며,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수도는 1990년대 초까지는 라고스였으나,그뒤 연방 수도권 지역에 위치한 아부자 신도시로 이전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서남쪽으로 베냉 만,동남쪽으로 비아프라 만과 접해 있는데,이 둘은 모두 기니 만에 속해 있다. 한편 북쪽으로는 니제르,북동쪽으로는 차드 호,동쪽으로는 카메룬 그리고 서쪽으로는 베냉과 접해 있다.

아프리카 대륙고원은 남쪽과 동쪽에서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나이지리아는 바로 그 거대한 대륙고원의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해발 600∼1,200m의 높은 고원지대와 그 사이에 있는 낮은 지대들이 침식된 지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대부분이 주요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기니 만을 따라 발달된 해안지대는 완만한 기복을 이루는 평원으로 되어 있다. 서부 및 중북부 지역에는 높은 평원들과 그 사이에 발달된 얕은 계곡들이 넓게 나타나는데, 이들 곳곳에는 둥근 지붕 모양의 수많은 구릉과 길다란 산등성이들이 산재해 있다. 그 밖에 특히 눈에 띄는 기복 지형으로는 중부의 조스 고원과 동북부의 비우 고원을 꼽을 수 있으며, 두 고원은 모두 수많은 사화산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광대한 용암지표로 되어 있다.
전 국토의 3/5을 이루는 나이저, 베누에 강 유역은 나이지리아 수자원의 절대적인 몫을 차지한다. 차드 호 저지의 약 1/10이 나이지리아에 있다. 주요 강은 나이저 강과 나이저 강의 가장 큰 지류인 베누에 강이며,그밖에 소코토 강, 카두나 강, 공골라 강이 있다. 토양은 고원지대의 결정편암(結晶片巖)과 퇴적암에서 생겨난 침투성이 좋은 홍토(紅土)에서 해안 일대의 모래, 습지성 토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토양이 다공질이어서 비옥도가 낮은 것이 흠인데, 특히 강우량이 무척 많은 남부지역의 토양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나이지리아의 자연식생 분포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습지대, 열대우림지대, 그리고 나무가 곳곳에 산재한 사바나 지대로 구분된다. 나이지리아에는 침팬지, 고릴라, 아프리카 야생개, 표범, 코끼리, 기린, 사자, 악어, 뱀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살고 있다.
국토의 약 1/3이 경작 가능한 땅이며,2/5는 목초지로 이용 가능하다. 나이지리아의 석유매장량은 20세기 말 현재 아프리카 총매장량의 거의 1/3에 해당된다. 천연가스 매장량은 아프리카 대륙에 묻힌 천연가스의 거의 1/3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철광석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역사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카넴 제국이 차드 호 동서로 팽창해 하우사족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13세기에는 북부지역으로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원주민 사회와 종교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말 무렵에는 카넴 제국의 세력이 약해져 보르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한편 보르누 서쪽에서는 하우사족의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그중 주요 왕국은 카노, 자리아, 다우라, 카치나 왕국인데, 일찍이 고대부터 존재한 이 왕국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상호방위를 위해 연합했다. 이들은 카넴 제국, 수단의 송가이 왕국, 보르누, 케비 왕국에 차례로 정복당하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했다. 풀라니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하우사족의 영토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으나 일부는 도시에 정착해 하우사족과 한데 어울려 살았다.
19세기 초 풀라니족 토후들이 몇몇 지방의 지배자로 임명되었고,결국에는 서쪽의 간두에서 동쪽의 아다마와에 이르는 풀라니 제국(보르누는 제외)이 탄생했다. 보르누와 하우사 영토 이남에는 요루바 왕국과 베냉 왕국이 있었으며,이들은 지금의 나이지리아 서부지역과, 지금의 동부지역에 해당하는 이보족의 영토를 지배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이지리아 해안에 상륙한 것은 15세기의 일이었다. 그들은 베냉족을 노예로 잡아갔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 노예선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에 밀어닥쳤다. 대부분의 노예무역은 나이저 강 삼각주와 다른 강 기슭에 사는 여러 종족이나 소수의 족장들을 상대로 행해졌다. 노예들은 대부분 내륙지대에서 붙잡혔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폐지했으나, 다른 나라 선박들이 대서양을 통해 노예를 실어 나름으로써 계속 그 맥이 이어졌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저지했으며,영국 상선들은 야자유와 기타 생산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이지리아의 내륙오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몇몇 유럽 탐험가들에 의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은 1861년에 라고스를 합병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는 1886년 별개의 영국 식민지로 출발해,1914년 나이지리아 식민지 및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까지의 역사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연방 총리 직선과 형식적인 국가 수반을 골자로 하는 연방헌법을 채택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영국연방과 국제연합(UN) 회원국이 되었다. 그러나 1962∼63년에 실시된 말썽 많은 인구조사는 해묵은 종족·지역 간의 대립과 지역간 교육적,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표면화시켰다.
이 일환으로 정부가 붕괴되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는 혼란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내전이 계속되고 자국 이익에 눈이 먼 선진국의 무기 지원으로 더욱 혼란한 양상을 띠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고 1970년 종식되었다.
그 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혼란은 끝나지 않았으며 인구문제와 경제문제등을 안고있다.


유용한전화번호
• 한국 대사관
전화 : 2615353, 2615420
주소 : PLOT 934,IDEJO ST.VICTORIA ISLAND,LAGOS
• 한인회 남규봉(회장)
전화 : 492-2503,492-3238
• 경찰서 : 610743

전압 및 주파수
220∼240 V,50 HZ

치안
우범지역, 사진촬영 제한구역, 기타 여행제한 또는 주의가 요구되는 지역으로는 라고스 주변 상가 및 공장 밀집지대, 시장 등 인구 과밀지대가 우범지역이며 가급적 이들 지역에의 야간통행은 삼가토록 주의 요망되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가급적 무장경찰을 대동함이 바람직하다. 총기류 또는 대검,각목 등을 소지한 4-5명의 무장강도단이 교통 체증시 차량을 습격하기도 하며,금품을 탈취하거나 야간 인적이 드문 국도상에서 금품을 갈취하는 경우가 많다. 기타 각 지역의 폭력배, 소매치기, 불랑배 등이 있다(이들을 총칭 "area-boy"라 함) 다.
공항,호텔 등에서 도와주겠다고 하며 접근해 오는 사람들은 불순한 동기에 의한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하여야 하며 반드시 현지거주 연고자에게 사전연락을 취하여 공항도착시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각종 사기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어 매년 상당수 외국인들이 재산상,신체상의 피해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통화
나이지리아의 화폐단위는 나이라(Naira)로 미화 1달러는 113 나이라정도 된다.

주의사항
▣ 정변,국지적분쟁 등 정세변동에 따른 안전관련 문제로는 정치적으로 과도기에 처해 있으며 경제적인 혼란,사회불안 등으로 아프리카중 치안상태가 매우 취약한 지역중의 하나이며 라고스 등 남부 대도시는 위험 하다는 것이다. 무장강도에 의한 금품탈취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어 자동차를 이용,지방을 여행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여야 하며 야간외출이나 인적이 드문 곳을 여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테러와 관련해서는 정치적 목적을 갖은 조직화된 테러는 없으나,주로 금전 갈취를 목적으로 한 노상 강도 또는 주거침입 무장강도단의 활동이 심하다. 아울러 북한공관 주재 지역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 말라리아,장티푸스 및 식중독 등이 잘 걸리며 저녁 일몰 가까이 외출시에는 긴 소매를 입어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식수는 반드시 정수 후 끓여서 복용을 해야한다.

시차 : -8시간



▶ 오그보모소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에 걸쳐 포르투갈인 등 유럽인에 의해 기독교 문화를 갖고 있는 오그보모소는 영국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종래의 개개 부족의 내부 지배체제를 온존시키는 정책을 써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다양한 전통문화와 부족간의 대립을 내포하는 사회구조를 가지며,또 근대화가 앞선 남부와 뒤진 북부 사이에 지역적 중간지점쯤에 위치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코코아,코코넛,낙화생,야자 열매,면화,천연 고무 등으로 주로 수출되고 있으며,수산업면에서는 좋은 어장이 있어 어족 자원도 풍부하다.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이지만 아직 인력을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여 실업률이 높다. 오그보모소의 인구 성장률은 3.3%이다. 평균 수명은 50세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인 53세보다 낮으며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평균 수명이 매우 낮은 편이다. 그리고 이 곳의 정확안 인구 추정이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몇몇 부족들이 인구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인구 조사에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교육
문맹률이 49 %(1990)에 달하나,교육의 보급에 힘써 1976년에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하고 80년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오그보모소를 비롯한 나이지리아의 전지역에는 라고스대학을 포함하여 80개 대학이 있다.

산업
주요 농산물은 코코아,코코넛,낙화생,야자 열매,면화,천연 고무 등으로 주로 수출되고 있다. 합판이나 베니어판,가구 등 목재가공업은 처음부터 발달하였으나,펄프,제지공업은 비교적 늦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축산활동은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우유와 우육제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축산물은 자급자족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생산되는 가죽은 질이 좋아서 대부분 수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생산과 조립산업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제조업을 육성하려는 이유는 소비재의 수입 대체를 위해서다. 제조업의 주요 업종은 섬유,식료,담배,비누,세제,등 경공업 분야로 약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식료품,제분,제지,의약품,고무,타이어 시멘트 등의 부품 가공과 전기·전자제품 가공,유리 제조,비료공업이 있다. 제조업체는 외국과의 합작형태를 취하고 있는 곳이 많다. 그 중 가장 유망한 산업은 섬유산업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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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에서 이주해온 반투계의 오밤보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서양을 면하고 있는 서부는 해안선을 따라 국토의 1/5가 모두 나미브 사막에 덮혀 있기도 하다. 사막성 기후에 가깝기 때문에 한낮과 밤의 기온이 25도 가량이나 차이가 난다고 한다. 아직도 옛날 생활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은 지극히 원시적인 생활을 영유하고 있기도 하다. 나미비아라는 국명은 나미브 사막에서 채용한 것으로 사막의 이름 역시 이곳에서 살았던 푸슈만의 일파 나미브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은 지난 수세기 동안 강한 민족에게 쫒겨난 약소 민족들의 피난처가 된곳이기도 하다.

Namibie/Suidwes-Afrika. South West Africa(1968년까지의 공식 이름)라고도 한다. 남회귀선이 지나는 아프리카 서남부 해안에 위치한 국가이기도 하는 나미비아의 수도는 빈훅크이다. 원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990년 국제연합(UN)의 후원으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영토는 남북의 길이가 약 1,320km,중앙부의 동서 길이가 약 610km이다.

항공
국제공항은 빈트후크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유럽 대도시를 경유하여 여행할 수 있다.

면적 : 82만 1558㎢

수도 : 빈트후크(Windhoek)

인구 : 179만 8,000명 (2001년 기준)

정치형태 : 대통령 중심제

종교 : 백인을 비롯한 현지인의 90%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전통교를 믿는 10% 만큼이나 현지 전통교에 의한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주요민족 : 나미비아 현지의 원주민은 북방에서 이주해온 반투계의 오밤보 족이다. 이들은 나미비아의 북부에 주로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는 카방고 족 등의 흑인이 약 9%, Hereo 족이 약 8%, Damara족이 8%, 백인 6%, Nama족이 5%, 기타 14%의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약 6%에 불과한 백인들만이 도심에 밀집해 살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밖에 보어인, 독일인, 영국인 등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 수준 높은 도시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언어 : 아프리칸스어와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도심을 제외한 곳에서 현지 원주민들은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초,중학교에서는 아프리칸스어를 필수로 가르치고 있을 정도로 자국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러나 도심에서는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한편 독일어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백인의 경우는 오랜세월을 이곳에서 거주한 경우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백인의 60%가 아프리칸스어를 구사할줄 안다.

경제
나미비아에 값비싼 광물류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 나미브 사막 남부에는 충적광상에 의해 생긴 다이아몬드가, 나미브 사막 중앙부에는 우라늄, 주석, 텅스텐이 상당히 많이 묻혀있다. 또 북부에는 구리가 매장되어 있으며 최근 들어 금과 천연가스 생산량이 급증하고 있다. 이밖에도 납, 아연, 카드뮴, 리튬, 은 등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후
사막이 많은 곳 답게 나미비아의 기후는 사막성 기후에 가깝다. 여름에는 기온이 49도 이상 치솟다가도 밤이 되면 서늘해지는데,겨울에는 밤에 영하의 기온을 기록하기도 한다.또한 일교차가 매우 심해 밤과 낮에 거의 25도 이상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해안 지역은 한류의 영향으로 서늘하고 습기가 많은 편이고 내륙지방은 거노하고 높은 고원지대가 많아 비교적 서늘하다. 또한 강수량은 극히 소량인데 대부분이 증발해 버리므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부 지역이 연간 100mm이하 중부는 200mm에서 400mm에 불과하다.

지리
지형학상 서에서 동으로 크게 3개의 지역,즉 나미브 사막,중앙고원,칼라하리 사막으로 나뉜다. 불모지대로 생물이 살기에 부적합한 나미브 사막은 황량하게 바위가 노출되어 있고 모래언덕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지대로,대서양 해안을 따라서 1,900km나 길게 이어져 있다. 나미브 사막 너머로 북쪽 국경에서 남쪽 국경까지 펼쳐진 중앙고원은 해발 975∼1,980m의 고원지대로,고원 중앙에는 국토의 주요 분수령을 이루는 1,800∼2,500m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고원 동쪽으로 내려가면 모래와 석회암 노두(露頭)로 이루어진,해발 90m가 조금 못되는 칼라하리 사막이 나타난다. 연중 마르지 않는 오카방고 강,쿠네네 강,오렌지 강,잠베지 강 등은 모두 북쪽 국경과 남쪽 국경지대에 몰려 있다.

역사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아프리카 남서부에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전에는 코이코이족(호텐토트족)과 산족(부시먼),반투어를 쓰는 헤레로족이 살았다. 1480년대 말 포르투갈 해양탐험가들이 케이프크로스·월비스베이·디아스포인트의 해안지대를 탐험했다. 17,18세기와 19세기 초에는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이 해안지대 및 내륙지대 일부를 탐험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어선들이 풍부한 바다표범 및 고래어장에 끌려 서남아프리카 근해로 몰려들었다. 독일은 1840년대에 라인 강 선교회 파견을 계기로 이 지역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후 1860년대 들어 부족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이 자국의 선교사와 이주자들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통치권을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영국은 이 제안을 번번이 거부했다. 그러다 케이프 식민지가 1876년 부족장들과 맺은 조약에 따라 영국은 이곳을 식민통치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월비스베이와 일부 인근 지역만을 합병한다는 데 동의했다. 1884년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독일의 완전한 보호통치안을 내놓았고 결국 완전합병하게 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독일 농민들이 처음으로 서남아프리카에 정착한 것은 1892년이었다. 이듬해 독일인과 코이코이족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코이코이족의 봉기(1903)와 헤레로족의 봉기(1904)로 이어졌다. 독일은 이에 강경대응으로 맞서 봉기 당시 8만 명에 이르던 헤레로족이 진압 후에 1만 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908년에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후 유럽인 인구가 1913년에 이르러 1만 5,000명으로 증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남아프리카 연방(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군대를 파견,독일군을 격퇴하고 서남아프리카를 점령했다. 전후 국제연맹은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통치권을 남아프리카 연방에 위임했다. 처음에 이곳은 남아프리카 연방 식민지로 통치되다가 1926년 제한적이나마 국내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의회가 세워졌다.
국제연맹이 해체되자 남아프리카 연방은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받은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통치권을 새로 구성된 UN에 양도하는 것을 거부했다. 1946년 남아프리카 연방은 서남아프리카의 합병을 골자로 하는 안의 정식승인을 UN에 요청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서남아프리카인들이 합병을 원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UN은 결국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4년 UN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통치 종료를 의결하고 4년 후인 1968년에는 투표를 통해"이제부터 서남아프리카의 국명을 나미비아로 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통치권 포기는 물론 나미비아 흑인 대다수의 경제적 권리를 박탈한 기존 정책의 완화마저 거부했다. 이에 UN 안전보장이사회(1969)와 국제사법재판소(1970)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즉각적인 철수를 촉구했다. 1970년대 중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나미비아의 분할을 제안했으나 1960년대 이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에 대항해 게릴라 전을 벌여온 나미비아의 흑인 조직 남서아프리카국민기구(South Africa People's Organization/SWAPO)는 이를 거부했다. 1988년 오랜 갈등 끝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나미비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1989년 SWAPO는 새로 구성된 제헌 국회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90년 나미비아는 SWAPO가 지배하는 정부하에 마침내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통화
나미비아 달러(Nambia Dollar,N$)를 사용하며 미화 1달러는 나미비아 달러로 N$9정도 된다.

시차 : -9시간



▶ 빈트후크

평균고도는 1.65㎞이고 대략 오렌지 강으로부터 650㎞ 북쪽,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1,225㎞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프리카 남서부 나미비아의 수도로 나미비아 중앙부의 건조한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윈드후쿠는 나라의 매혹적인 수도이고,산들에 둘러싸여있고,나미비아의 다른 도시들처럼,Christuskirche,Alte Feste와 Tintenpalast(잉크 궁전)(이전의 식민지의 관리상의 건물)를 포함하는 독일의 식민지의 건축학의 몇 개의 예들을 가지고 있다.

코이코인족과 헤레로족이 최초의 정착민이며,1890년에 독일 정부가 현재의 도시가 있는 곳의 소유권을 주장하였고,1915년에는 남아프리카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여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계 및 독일게 백인 약 3만명외에 헤레로족 등의 흑인,레호보스 바스타라 라는 혼혈인이 거주하고 있다.

교육
거의가 공립학교이지만 남아공 교육위원회의 의견을 참고한 수업내용을 세우고 있다. 초등,중등교육은 초급초등학교 스탠다드 A∼1,상급초등학교는 스탠다드 2∼4,초급중학교는 스탠다드 5∼7,상급중학교 스탠다드 8∼10 년으로 나뉘어진다. 중등학교와 규모가 큰 아프리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고등학교 등이 있고 빈트훅크 단기대학이 있다.

산업
빈트후크는 나미비아의 대표적 상업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며,이 나라의 주요항구인 월비스베이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도로 및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또한 카라쿨(페르시아산 양) 방목지 가운데 위치하여 생가죽을 가공하고 운송하는 모피상들이 많고,양과 소고기 가공업도 주요산업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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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의 감비아는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세네갈에 둘러싸인 동서로 좁고 긴 나라이다.
이 지역은 1821년에 영국 식민지가 되었는데 1세기 반이 지난 1965년2월18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감비아라고 하는 국명은 이 나라를 흐르는 감비아 강을 기념해 이름지었다. 이 강의 물은 감비아 사람들의 생활에 매우 중요해서 감비아 국기에도 나타나 있다.
공식 이름은 감비아 공화국(Republic of the Gambia)이고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나라이다. 대서양에서 동쪽 내륙으로 475km 길게 뻗어 있다. 수도는 반줄이고 영토의 폭은 감비아 강을 따라 24∼48km이며, 주변이 거의 세네갈에 둘러싸여 있어 '국가 속의 국가'(고립영토) 형태를 띠고 있다.


면적 : 1만 689㎢

수도 : 반줄

인구 : 151만 1000명 (2002년 기준)

종교 : 회교도가 90%로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밖에 기독교 9% 등이다.

주요민족 : 만딩고 족이 40%가 넘고 그 외에 풀라족 20%, 월로프 족이 15%, 욜라족 10% 가량 된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영어이고 지역에 따라 딩고어, 월로프어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후
아열대기후이며, 매우 습하고 더운 계절(6∼10월)과 선선하고 건조한 계절(11∼4월)로 나뉘어진다.
연 강우량은 760∼1,400㎜이며, 여름에만 집중적으로 내린다. 연중 기온은 16∼43℃이며 4∼6월의 하루 기온은 32℃를 넘는다. 감비아의 고지대는 사바나(대초원)로 덮여 있고 저지대에는 여러 종류의 습지가 있으며,염분기가 있는 감비아 강 하류에는 맹그로브(열대의 습지에서 자라는 삼림성 수목) 습지가 발달되어 있다. 강가의 좁고 길다란 숲에는 새들이 서식하지만 어쩌다 건조해지는 사바나 삼림지나 감비아 강 일대에는 표범, 침팬지, 서아프리카 바다소(매너티), 몸집이 큰 서양 영양(일런드), 악어(2종)와 같은 큰 동물들이 발견된다.

지리
기니에서 발원한 감비아 강이 전국을 관통하여 흐르는데, 감비아 강은 해발 25∼75m의 낮은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흐르며 이 나라 경관을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동쪽으로는 협곡 사이에 넓고 낮은 언덕들이 있으며, 서쪽에는 보다 낮고 작은 모래언덕들이 지반의 함몰로 수시로 모양이 바뀌어 종종 모래평원이 생기기도 한다. 감비아 강의 중·상류 유역이 하류보다 토양이 비옥하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전국토의 1/6에 지나지 않으며,지르콘과 고령토가 약간 매장되어 있을 뿐 지하자원도 빈약하다.


역사
13세기경부터 생겨난 월로프족, 말링케족, 풀라니(풀라·풀베)족은 현재 감비아라고 불리는 지역 일대의 여러 곳에 정착하여 초창기 부족들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유럽인들의 진출은 1455년 포르투갈인들이 감비아 강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588년 포르투갈인들은 감비아 강에 대한 무역권을 영국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영구적인 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63년 영국은 감비아 강의 섬 하나를 그곳 족장에게서 사들여 제임스 요새를 건설했다. 1681년에는 프랑스가 제임스 요새 맞은편 북쪽 강기슭에 있는 알브레다에 정착,1779년에 영국군을 공격해 제임스 요새를 파괴시켰다. 4년 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감비아 강은 영국 소유가 되었고, 프랑스는 알브레다 고립영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영국은 1807년 노예제를 폐지하고 나서 계속되는 노예무역을 저지하기 위해 감비아 강 어귀에 배서스트 요새를 건설했다. 1857년 프랑스는 알브레다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했으며,1889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간에 감비아 국경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영국은 1894년 이 지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감비아는 1965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0년에는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 경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영연방의 한 공화국이 되었다. 1981년에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고, 다음 해에 자와라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1년의 쿠데타 직후 감비아와 세네갈 양국은 세네감비아라는 제한된 동맹관계를 수립하여 군사 및 안보의 통합, 경제 및 통화의 단일화,외교정책과 통신의 일원화를 꾀했으며,양국 연합단체들을 창설했다. 이와 같은 통합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각기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전압 및 주파수
230볼트 60hz를 사용한다.

통화
화폐단위는 달라시(Dalasi)로 미화 1달러는 16.55달라시 정도다.

주의사항
• 군부대 주변에서 사진 촬영은 자제 해야하며 단독 여행시 소지품 및 짐을 각별이 주의해야한다.
• 호텔 숙박시 귀중품 및 현금은 프론트에 맡기는게 낫다.
• 물건을 주고 받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기도하고 있는 사람 앞을 가로질러 가지 않도록 한다.

시차 : -9시간



▶ 반줄

감비아의 수도로 반줄은 감비아의 가장 서쪽에 대서양과 접해있다. 기니에서 시작되는 감비아 강이 감비아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데, 감비아 강은 해발 25∼75m의 낮은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서쪽방향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는 협곡 사이의 넓고 낮은 언덕들이 있으며, 서쪽에는 보다 낮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지방의 함몰로 수시로 모양이 바뀌어 종종 모래 평원이 생기기도 한다. 감비아 강의 중·상류 유역이 하류보다 토양이 비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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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서부, 대서양에 면한 나라로 정식명칭은 가봉 공화국(Gabonese Republic)이다.
수도는 리브르빌이고, 북쪽은 적도 기니와 카메룬, 남쪽과 동쪽은 콩고, 서쪽은 대서양(대서양 연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투메프린시페가 있음)과 접해 있다.

오고우에 강 유역의 90%가 이 나라에 속하며 가봉의 동쪽 2/3를 차지한다. 북쪽에 있는 올뢰은템 강 유역과 서쪽 또 남서쪽에 활모양의 고지가 경계를 이루는 해안평야가 있으며 오고우에 강은 람바레네 아래쪽에 있는 많은 호수의 물을 모아 해안평야 북쪽과 남쪽으로 가르는 삼각주를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해안평야 남쪽은 모래해변·해안사주·해안석호 등이 있는 콩고 남쪽과 이어져 있다. 해안평야 북쪽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쪽보다 더 넓고 해안선이 불규칙하며 해발 305∼610m에 이르는 고원지대이므로 오고우에 강 유역과 떨어져 있다.

면적 : 26만 7667㎢

수도 : 리브르빌

인구 : 약 132만여명 (2002년 기준)

정치형태 : 대통령 중심제로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다.

종교 :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가 70%가 넘고 나머지는 아프리카 토착신앙 혹은 전통신앙을 믿고 있다. 소수 회교인도 있다.

주요민족 : 가봉에는 언어가 다른 40여 인종집단(Fang,Echira,Adouma,Okande,Bateke)이 살고 있다. 팡족(族)은 오고우에 강 북쪽에 살며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더 큰 부족인 파우앵족에 속한다. 오고우에 강 남쪽에는 가장 큰 부족인 퓌뉘족, 시라족, 은제비족과 그들보다 수가 적은 테크족, 코타족이 살고 있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교육도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경제
이 나라의 GNP의 44%를 차지하고 총수출액 80%를 차지하는 석유가격이 최근 국제시장에서 급락하고 제2의 수출자원인 목재도 아시아의 금융위기등으로 수출이 격감, 경제적 어려움과 실업율 증가를 야기시키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98년 예산의 15%를 절감하고 국영기업 민영화추진등 경제구조 조정 작업을 추진중이며, 전력수도공사 98.1월 민영화를 실시하고 있다.

기후
전형적인 적도 열기와 습기로 특징지어진다. 연평균강우량은 리브르빌의 3,050㎜에서 북서 해안의 3,812㎜까지 다양하며,10월과 5월 사이 집중적으로 비가 오지 않는 건기 때에도 습도는 여전히 높다. 계절에 따른 기온변화는 거의 없으며, 연평균기온은 27℃이다.
면적의 2/3 정도가 빽빽한 열대우림지대로 이 나라 목재산업의 중추를 이루는 경재(硬材), 즉 오쿠메(okoume: 가봉의 마호가니)를 포함한 3,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같은 밀림식물들로 가봉은 동물의 천국을 이루어 영양, 원숭이, 열대조(鳥)·코끼리 등이 번성하고 있다. 광물자원은 종류는 적지만 중요하다. 가봉은 아프리카에서 에너지 자원의 보유량이 높은 나라로 석유매장량이 약 6,600만t, 천연가스가 140억㎥이며,수출할 수 있는 다량의 우라늄도 매장되어 있다.

지리
영토의 대부분이 오고우에 강 본지류(本支流)의 유역으로, 강유역의 90%가 이 나라에 속하며 가봉 면적의 동쪽 2/3를 차지한다. 오고우에 강 유역 대부분과 대서양 사이에 보다 작은 두 지역, 즉 북쪽에 있는 올뢰은템 강 유역과 서쪽과 남서쪽에 활 모양의 고지가 경계를 이루는 해안평야가 있다. 오고우에 강은 랑바레네 아래쪽에 있는 많은 호수의 물을 모아 해안평야를 북쪽과 남쪽으로 가르는 삼각주를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해안평야 남쪽과 오고우에 강 사이에 셸뤼 대산괴(大山塊)가 있으며,이 대산괴에는 해발 980m로 가봉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이뷘지 산이 있다. 해안평야 남쪽은 모래해변·해안사주(海岸)·해안석호 등이 있는 콩고 남쪽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해안평야 북쪽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쪽보다 더 넓고 해안선이 더 불규칙하며,해발 305∼610m에 이르는 잇달은 고원지대로 인해 오고우에 강 유역과 떨어져 있다. 이 고원지대는 북동쪽으로 뻗어 크리스탈 산맥과 만나 올뢰은템 강과 북서쪽에 있는 오고우에 강 유역을 나눈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가봉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와 초기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공유물들이 발견되어 왔다. 가봉 민족을 이룬 반투족의 대이동이 언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서력기원이 시작될 무렵으로 추측되고 있으며,피그미족이 원주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후 팡족이 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유럽 상인들의 출현으로 그들이 가봉 연안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18세기 후반부터이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1472년 포르투갈인이 가봉 삼각강(Gabon Estuary)에 처음 도착한 데 이어 프랑스·네덜란드·영국의 상인들이 들어와 연안의 강들에서 내륙 깊이까지 교역망을 설치하며 활약했다. 18∼19세기의 상당 기간은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프랑스인은 지역주민과 가장 성공적으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1839∼42년에 음퐁퀘족의 추장들로부터 처음으로 통치권을 양도받았다. 1843∼86년에 가봉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정부와 공동으로 프랑스 해군장교가 다스렸다. 1886년 가봉과 콩고를 포함하는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가 되었으며,20세기에 들어서 새로 세운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내의 단독 식민지가 되었다. 1898년 가봉은 인간과 자연자원을 극심하게 착취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특권회사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가봉의 끊임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들 회사는 1930년까지 완전 해체되지 않았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년 자유 프랑스(Free French)군은 비시 프랑스로부터 가봉을 인수했다. 1946년 가봉은 프랑스의 해외준주(海外準州)가 되어 준주 의회를 두었으며,1958년에는 프랑스 공동체(French Community)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그뒤 프랑스와 협력협정을 체결하고 1960년 8월 17일 독립을 선포했다. 불안정했던 초기에는 가봉의 초대 대통령 레옹 음바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통치 아래 안정된 성장과 번영을 이룩했다. 1967년 이후 계속된 봉고 대통령의 장기집권으로 1980년대초까지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가봉의 지속적인 번영으로 과격한 정치적 행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유용한전화번호
▣ 주 가봉공화국 대사관
주 소: B. P. 2620 Libreville,Gabon
TEL : 241-73-4000,241-73-4186 FAX:241-73-9905

▣ 재가봉 한인회:박상철 회장(74-5872)
▣ 한인교회(목사:최수영) Tel:75-5545
▣ 경찰서 : 13 혹은 17,16 76-0950
▣ 병원 : 76-3244(구급차)

전압 및 주파수
220V와 주파수 50 HZ를 사용한다.


치안
아프리카 전체와 비교한다면 가봉의 치안은 안전한 편이지만 외국인에게는 그다지 안전한 곳은 아니다. 범죄가 늘고 있고 특히나 밤에 혼자 다니거나 외진곳에 가는 일을 삼가한다.

통화
프랑스 프랑을 사용하며 1달러는 약 720프랑정도 된다.

한국으로 전화
00(국제전화 호출) + 82(한국 국가코드) + 2(0을 제외한 지역코드-예:서울)으로 한다.

현지로 전화
00X(1,2기타 국제전화 호출번호) + 241(가봉 국가코드) + 가입자 전화번호로 걸면된다.

주의사항
▣ 아프리카 타 지역에 비해 전반적으로 치안 상태가 양호하나, 야간 단독 여행은 가급적 자제해야하며 군부대 주변을 사진 촬영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단독 여행시 소지품 및 짐 분실 및 도난에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호텔 숙박시 귀중품 및 현금은 위탁 또는 휴대해야 한다.

▣ 상품구입시 관광객을 염탐하여 돈을 갈취하는 일이 있으므로 될수있는데로 적은돈을 가지고 다니도록 하며 수표는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관광객들에게 바가지 요금을 씌우는 경향이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 의복은 대개의 경우 캐쥬얼한 복장이 좋다. 그러나 짧은 바지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 지방의 고유옷이나, 비슷한 옷을 입도록 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도록 한다.

시차 : -8시간



▶ 리브로빌

가봉의 수도로 기니아의 만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국가 주요기관들이 있으며 석유와 합판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리브로빌은 프랑스로부터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 1843년에 정착한 곳으로 그때부터 리브로빌이라 불리우기 시작했다.
교육제도는 옛 지배국인 프랑스의 교육제도와 거의 비슷하다. 6년간의 초등교육, 4년간 또는 7년간의 중등교육 및 2년 이상의 고등교육으로 구성되어있다. 초등교육(6세∼11세)은 봉고 대통령의 교육정책으로 100%의 취학률을 달성하였으며 학교 수는 1,001개교, 학생 수는 220,000명이다. 중등교육은 1 cycle(12세∼16세)와 2cycle(17세∼18세)로 구분되며 보통 1cycle은 College, 2cycle은 Lycee라고 불린다. 초등교육에 이어 1cycle 까지가 의무교육이다. 중등교육 취학률은 26%, 고등교육 취학률은 3.5%이며 문맹률은 35%이다.

산업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산출량의 감소로 GNP의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농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지만 그 생산량은 내수에도 부족한 실정이다. 주요 농작물은 카사바이며 코코아,커피,고무는 전량 수출되며 설탕과 야자유는 국내에서 소비되고 남은 부분을 수출하고 있다.
세 곳의 국영 목장에서 목축업을 경영하고 있으며 가축수는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 연안해에서 새우를 주로 어획하여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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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이름은 가나 공화국(Republic of Ghana)이며, 아프리카 서부의 연안국(沿岸國)이다. 남쪽으로 대서양의 기니 만에 면한 가나는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아이버리코스트),북서쪽과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옛 이름은 오트볼타), 동쪽으로는 토고와 접해 있다.

가나의 국가명의 유래는 서기 300년경 로마 제국의 전성시대로서 아직 서구 제국의 아프리카 침략이 없었을즘 현재의 마리 공화국 부근의 니제르 강변에 가나란 독립국이 형성되어 약 700년간에 걸쳐 상당히 번영한 일이 있어 1957년 독립할 때 당시 GOLDCOAST란 이름을 이 가나라는 이름으로 변경한 것이다. 서아프리카 인류의 시초는 니제르 연안에 최초의 취락이 시작됐다는 것인데 후에 로마제국 멸망후 회교국 사라센의 아프리카 북동침략이 시작되어 이것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여 니제르강 부근의 가나국에도 미치어 주민촌은 회교도와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가나 지방에 정착, 부락을 형성한 것이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는 동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항구 테마 Tema와 함께 수도권을 형성하고 있다. 기니 만에 면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로서 덴마크, 네덜란드,영국 등의 아프리카 진출시 그 거점으로서 발전했다. 지금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내륙의 여러 산물의 집산지로서의 역할 외에 공업 지대로서 번창하고 있다. 시내는 과거 유럽 세력이 진출해 있던 때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아크라에는 수목이 많아서 꽤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나,곤청 거리와 사무실 거리,상점가 등이 있는 쪽은 사람들의 왕래도 많고 활기에 차 있다.
그러나 일반 아크라 시민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는 곳은 마쿨라 마켓 Makola Market이다. 시가의 중심인 중앙우체국 뒤에 있는데 '마켓 마미'들이 위세 좋게 외쳐대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갖가지 상품이 팔리고 있다. 이 마켓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는 미술관,호텔,영화관,고급주택 등이 늘어서 있다. 시내 동쪽,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는 오수 성(Osu Castle)이 있다. 1662년에 덴마크인이 세운 것으로서,현재는 정부청사로 쓰이고 있다. 바다에 면해 있는 독립광장은 블랙 스타 광장이라고도 불리는데, 독립기념아치가 세워져 있다. 이 광장에 면해 있는 스테이트 하우스와 함께 아프리카의 선구자로서 독립한 가나의 긍지를 나타내고 있다. 시내의 중앙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는 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가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항공
한국에는 직행편이 없어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다시 갈아 타야 한다. 경유 도시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영국항공, KLM 네덜란드 항공, 가나항공 (Ghana Airways)편을 이용하면 되는데 소요시간은 약 6∼8시간 정도이다.
아크라의 코도카 국제공항( Kotoka International Airport)은 아크라시의 북동쪽 11㎞에 있고,공항에서 시까지는 버스가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이때 택시를 타기 전에 요금을 미리 알아보고 타야 한다. 시내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린다.

훼리
해운은 국영인 블랙스타라인이 외국과의 항로를 운항하고 있다.


면적 : 23만 8533㎢

수도 : 아크라(Accra)

인구 : 약 2,050만명 (2003년 기준)

종교 : 개신교가 28%,카톨릭이 19%,회교가 16%이며 아프리카 정령숭배가 20%이다. 기독교는 남쪽 지역에서,그리고 도시에서 더 강하다. 수도에서 가까운 지역은 아주 작은 마을에도 무엇으로든 만든 작은 교회가 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교회는 좀더 드문 경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역자가 부족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이들은 몹시 가난하여 평소에 누렇고 시커멓고 헤어진 옷을 입다가도 주일이 되면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교회를 간다. 예배시간에도 모두들 찬양하며 천천히줄지어 나오며 춤을 춘다. 모슬렘은 북쪽지방에 강하며 대개 부족 전체가 모슬렘이며 개종하기가 무척 어렵다. 최근에 정부에서 모슬렘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올해 그들의하지 축제가 공휴일이 되기도 하였다.

주요민족 : 가나에는 매우 다양한 아프리카 부족 또는 소수민족이 있는데, 언어상으로는 적어도 75개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부족은 아칸족, 몰레다그바니족, 에웨족, 가단그베족, 구르마족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세계 평균치보다 높으며,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평균적인 수치이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젊은층이 많아 15세 미만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우며, 인구의 2/3 이상이 시골에 산다.

주요언어 : 아칸어,토우이어,환티어 그리고 아당다베어 등을 주로 많이 쓴다.

기후
열대성 기후로 두 기단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는 북동쪽에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이동해오는 흙먼지를 실은 고온 건조한 기단이고, 다른 하나는 남서쪽에서 대서양 남부를 가로질러 이동해오는 열대해양성 기단이다. 북부지방을 빼고는 4∼6월과 9∼11월에 걸쳐 2번의 우기(雨期)가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1,143∼1,270㎜이며, 연평균기온은 대서양 연안이 26℃이고, 내륙은 29℃이다. 1∼2월에는 '하마탄'이라는 건조한 북동풍이 분다.

지리
아프리카 서부의 연안국으로써 남쪽으로 대서양의 기니만에 면한 가나는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아이버리코스트),북서쪽과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 (옛 이름은 오트볼타),동쪽으로는 토고와 접해 있다. 해안선 약 1,000㎞,국토는 장방형에 가까운 모양인데 남북으로 길다.
가나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900m를 넘지 않는 낮은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서부,북서부,북부 끝은 개석(開析)된 준평원지대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볼타 분지이다. 남쪽과 북쪽, 그리고 약간 서쪽으로 분지의 끝부분이 융기되어 300∼600m높이의 좁은 고원지대가 생겨났고,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보통 황금해안(Gold Coast)이라고 부르는 남부의 해안평야는 대륙으로 50∼80㎞ 정도까지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 볼타 강 어귀 근처의 연안을 따라 수많은 석호(潟湖)와 습지가 발달해 있으며, 영토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볼타 강 유역은 면적 8,500㎢에 이르는 인공호인 볼타 호까지 있어 가나의 배 체계를 좌우한다. 프라 강,안코브라 강,타노 강과 같은 다른 강들도 남쪽 바다로 흘러든다.

식생은 남북으로 크게 3유형으로 나뉜다. 남동부 평야는 해안 사바나 지대로서 관목과 키가 큰 풀이 뒤섞여 있고,남부 삼림지대는 상록수와 열대반낙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북부 사바나 지대는 키가 큰 기니아 수수가 대부분인데 여러 종의 아카시아 같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 함께 흩어져 있다. 또한 사자, 표범, 하이에나, 영양, 코끼리, 물소, 침팬지, 원숭이, 하마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국토의 약 1/3이 숲으로 덮여 있고 농경에 적합한 땅은 1/8 정도이다. 지하자원으로는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금을 비롯하여 다이아몬드·망간·철·보크사이트·석유 등이 있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Jambo!
의 미 : 만났을 때

현지어 : Kwa heri.
의 미 : 헤어질때.

현지어 : Pole!
의 미 : 미안하다는 표현

현지어 : Asante sana.
의 미 : 감사하다는 표현

현지어 : Kaka,Ndugu.
의 미 : 사랑한다는 표현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가나라는 국명의 기원이 된 가나 제국(4∼11세기)은 오늘날의 말리 공화국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며,가나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다. 유럽인이 내항(內航)하기 전,이 영토내 각 부족의 역사에 관하여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금의 산지라는 매력에 끌려서 15세기 이전에 프랑스인을 비롯한 모험가들이 내항하였다는 설도 있으나,확실한 기록은 1470년 포르투갈인의 내항이 최초이며,그들은 1481∼82년에 지금의 케이프코스트 서쪽 엘미나에 성채(城砦)를 지어 금과 노예무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네덜란드,스웨덴,덴마크 등의 선박도 이 해안을 찾아와 성채를 만들었으며,18세기 중엽에는 약 40개의 성채가 해안에 늘어서 있었다. 가나 지구에서는 그때까지 많은 부족국가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고 있었으나,성채를 통한 연안무역과 노 무역으로 해안의 열대 우림 북쪽에 있었던 부족국가들은 차차 쇠퇴하여 갔다. 17세기말에는 아칸족의 아콰무 왕국이 연안무역으로 강력하여졌으나,이어 다른 아칸족의 연합국인 아샨티가 이를 누르고 점차 북쪽의 부족국가들을 정복 해 나갔다. 18세기 후반에 아샨티 왕국이 연안의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자,연안부족들은 영국,네덜란드,덴마크 등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1807년 이후 유럽 각국은 노예무역을 그만두고 다른 무역품을 구하게 되었으나,그 무렵에는 금의 산출도 감소되고 있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오늘날의 가나 공화국은 13세기까지 수단 서부에서 융성했던 고대 가나 제국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고대 가나 제국의 중심지는 지금의 가나에서 북서쪽으로 8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로 숲과 해안지대에 거주했던 아칸족이 13세기경 그들 최초의 국가를 세웠고,14세기에는 금을 쫓던 만딩고족 상인들이,16세기에는 콜라너트를 찾아다니던 하우사족 상인들이 지금의 가나 공화국 북부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15세기에 만딩고족은 남서쪽으로 이동해 오늘날의 가나 북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에 다곰바와 맘프루시라는 나라를 세웠다. 17세기에는 일찍이 아칸 왕국에 살았던 만데어(語)를 쓰는 또다른 부족이 더 북쪽으로 올라가 곤자 왕국을 세웠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이지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남동쪽에 가(Ga)와 에웨(Ewe)라는 나라를 세웠다. 가나 역사에서 가장 힘센 부족에 속하는 아칸족의 갈래인 트위어계 아샨티족은 중부 삼림지역에서 일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왕국을 세웠고,18∼19세기 전성기에는 영토가 동쪽의 토고 산맥에서 서쪽의 코모에 강까지 미쳤다.
유럽인들이 지금의 가나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황금해안에 상륙한 15세기초였다. 15세기 후반 이들은 노예무역의 본거지를 엘미나에 세웠으나,17세기에 와서는 포르투갈인이 독점하고 있던 노예시장이 네덜란드·영국·덴마크·스웨덴·프러시아 등의 교역상들에게 넘어갔고 18세기 중엽까지 황금해안에는 네덜란드·영국·덴마크 상인들이 주도하는 수많은 교역시장이 발달했다. 1874년 황금해안은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으며,1901년 아샨티 왕국과 북부 부족들도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제 1차 세계대전 후에는 동쪽에 이웃한구(舊)독일 식민지 토골란드의 서부가 영국을 시정전국으로 하는 국제연맹(유엔)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며,1919년부터는 골드 코스트의 일부가 되어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897년에 부족의 토지를 영국의 크라운란드(국유)로 하는 법안에 반대하는〈원주민 이익옹호협회〉가 결성되었는데,이는 추장층(酋長層)을 중심으로한 하나의 정치운동이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민족주의 정치결사는 1920년에 아크라에서 결성된〈 아프리카 민족회의〉이며,제 2차 세계대전 후 1947년에 단쿠아 박사를 중심으로〈통일 골드 코스트회의 UGCC〉가 결성되었다. 이때 서기장이 된 K. 은크루마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민족독립운동의 추진을 결심하고,1949년 6월에 〈회의인민당(會議 民黨,CPP)〉을 조직하였다. 영국이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안하자 은크루마를 비롯한 회의인민당 지도자들은 그것을 반대하다가 체포 투옥되었으나,1951년의 선거에서 은크루마는 옥중 입후보로 당선되어 자치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56년 서부 토골란드의 주민투표로 이 지역도 통합하기로 결정되자,1957년 3월 6일에 골드 코스트는 "가나"라는 국명으로 독립하였다. 가나는 다시 1960년 국민투표로〈가나공화국〉이 되었으며,은크루마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이렵부터 관념적인 범(汎)아프리카주의의 추구에 몰두하게 되었으며,1966년 2월 24일에 베트남의 평화 문제로 버마(미얀마),중공(중국),북베트남을 방문하는 동안에 본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그는 실각하고 헌법은 폐기되었으며,회의인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은크루마가 실각한 후에 정국은 극히 불안정하여졌고,국가 원수도 자주 바뀌었다. 즉 1966년 2월에 수립된 조셉 엥크라 장군의 군사정권은 67년 4월 쿠데타 미수사건을 거쳐,1969년 8월 총선거로 사회학자 코피 부시아 박사를 수상으로 하는 민간정권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제가 부활되어 1970년에는 에드워드 A. 애드 전(前) 최고재판소 장관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호전되지 않은 가운데 1972년 1월에 부시아 수상이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아체암퐁 중령(그후 장군이 됨)은 식량자금정책을 추진하였고,1974년에는 채권국회의(債權國會議)에서 누적된 대외채무의 장기상환협정을 맺었으며,1975년 경제건설 신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1976년 9월 민 에의 정권이양 방침을 발표하였고,1977년 1월에는 정권 이양준비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정치·경제의 안정화를 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체암퐁 군사정권의 부패는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어,1978년 7월 아체암퐁은 최고군사평의회(最高軍事評議會)의 의장직을 사임하고,프레드 아쿠포 장군이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아쿠포 군사정권은 재정 경제면에서 긴축정책을 쓰고,아체암퐁의 민정이양 계획도 계승하였다. 또〈정당령(政黨令)〉〈인민대표(수정)령〉〈대 령선거령〉등을 공포하였으며,제헌의회가 채택한 행정상의 실권을 가지는 대통령의 선거와 새 의회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1979년 7월 18일에 실시하기로 하였다. 1979년이 되자,공군 청년장교들의 아쿠포 군사정권 타도 모의가 발각되어,그 주모자 제리 로링스 공군대위가 체포되었는데 대위를 지지하는 군부 장병들은 6월 3일 밤에 그를 구출하고,그 다음 날인 4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들은 로링스 대위를 의장으로 하고,사병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되는 새 혁명평의회를 수립하였다. 혁명평의회는 아체암퐁 군사정권 하에서 요직을 지낸 부패한 고급장교들을 숙청하고,예정대로 6월 18일에 총선거,7월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일부로 대통령 힐라 리만이 이끄는 민간정부 출범하였다. 1992년 11월 국민투표에 의해 로링스는 재집권을 하게 되었다.

유용한전화번호
▣ 주 가나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
전화 : (233-21)77-6157,7533
주소 : No 3. Abokobi Road,East Cantonment,Accra,Ghana

▣ 긴급연락처
• 경찰,화재,구급차 요청 전화:999
• 전화고장:98
• 전기고장:77-4907(아크라)
• 수도고장:22-3237(아크라)
• 대사관 비상연락전화:024-32-1858

전압 및 주파수
전압 : 220V ~ 250V,주파수 : 50Hz

치안
일반적으로 전통 사회로 배양되어 왔으므로 밝고 온화하며 친절한 국민성에 의해 악질적인 범죄는 거의 발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점점 범죄가 발생되고 있는 추세이고 이전보다 공무원의 부패도 늘어가고 있다.

통화
세디(cedi)로 미화 1달러는 7,200세디 정도 되지만 인플레이션이 높아 변동이 잦다.

주의사항
▣ 군부대 주변에서 사진 촬영을 자제해야 하며, 단독 여행시 소지품 및 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 호텔 숙박시 귀중품 및 현금을 카운터에 위탁 하거나 또는 휴대하는것이 현명한 여행방법이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쉽게 살고 돈은 항상 잔돈으로 준비하도록 하며,술이나 돈의 경우는 반출이 엄격하므로 주위하도록 한다.

▣ 공식적인 경우에는 정장 차림이 필요하지만 대개의 경우 캐쥬얼한 복장이 좋다. 그러나 짧은 바지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공직 들은 공식적인 행사시 전통적인 켄구로스 의상을 입는 경우가 많 다. 지방의 남성은 보통 이 옷을 입고 있다. 옷의 문양은 입는 사람의 지위 와 목적과 자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여성은 보통 전통적으로 길게 두르는 스커트를 입고 머리에는 스카프를 두른다.

▣ 가나인은 생활환경을 청결하게 하는 위생관념이 희박하여 가나인의 주거지, 시장 등은 불결하다. 가나의 생수는 외국인에게 는 음료수로 부적합하므로 끓이거나 여과해서 먹어야 한다. 또 생야채를 먹을 때에는 반드시 깨끗이 씻어서 먹어야 한다. 수도 아크라의 외국인 거주 지역과 호텔에는 상하수도가 정비되어 있지만 단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전체적으로 치안이 안정적이지 못하므로 외진곳이나 밤에는 다니지 않도록 하고 가급적이면 혼자 다니지 않도록 한다.

시차 : -9시간



▶ 아크라

대서양 기미만에 접한 가나의 소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도시의 일부는 높이 8-12m 에 이르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위로는 기복이 다소 심한 아크라 평원이 펼쳐져 있다. 지형이 평평하여 홍수가 나기 쉽다. 또한 단층운동에 약새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아크라는 가나의 행정·경제·교육의 중심지이다. 대규모의 은행, 무역회사, 보험회사, 전기회사, 중앙우체국의 본점을 비롯해 대부분의 식료품이 집결되는 대규모 자유시장, 아크라 중앙도서관 등이 있다. 아크라의 중요한 건축물로는 요새를 비롯하여 과학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는 코를레부 종합병원, 성령대성당(로마 가톨릭), 성삼위 대성당(성공회), 감리교 대성당, 국립문서국, 국립박물관 등이 있으며, 과학 산업연구협회와 가나 과학기술원도 이곳에 있다. 가나대학교(1948)는 북쪽 레곤에 있으며, 그 밖에 축구경기장, 경마장 등이 있다.
'검은별 광장'에 있는 독립문은 의식 행렬에 사용된다. 도로포장이 잘 되어 있고 시내 버스 시설이 훌륭한 이 도시는 교통 중심지로 내륙의 쿠마시, 항구도시 테마와 철도로 연결된다. 테마는 27㎞ 동쪽에 있으며 아크라의 항구기능을 이어받고 있다. 아크라에는 또한 코토가 국제공항과 가공식품 공장, 제재소, 직물공장 등도 있다.




▶ 쿠마시

17~19세기에 번창했던 아샨티 왕국의 수도로 울창한 숲에 싸여 있어 정원도시로 불리고, 해안에서 220km쯤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데, 아크라 및 가나 제2의 항구가 있는 세콘디타코라디와 철도로 연결된, 중요한 상업도시이다.
시내에는 가나 최대의 시장이 있고, 박물관.미술관.민속공예품제작소.야외극장 등으로 이루어진 국립 문화 센터, 아샨티족 왕의 거처였던 마니아궁, 포트 쿠마시 등의 관광지가 있다. 쿠마시 주위에는 코코아 밭이 많고, 근교에는 목각품이나 손으로 짠 켄테라는 옷감 등 가나의 명산물을 생산하는 수공예 마을 본위레도 있다. 아크라에서는 철도 외에 버스도 다니고, 큰 호텔로 시티 호텔, 누롬, 캐터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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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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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는 마자르족(MAGYAR)이라고 하며, 언어학적으로 우랄어족에 속하는 민족이다. EURASIAN STEPPE에서 5세기경 서쪽으로 이주하여 대평야 지대에 정착하였고, 10세기경부터 기독 교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1241년 몽고의 침략이후 1918년까지 대부분 외세의 지배하에 있었다. 14세 기에는 오스만터키의 지배하에 있었고, 17세기 말부터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1848년 KOSSUTH의 지도하에 혁명이 시작되었다. 여행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부다페스트외에도 각지의 역사적문화 유산과 도나우.발라톤 호수 등의 자 연미이다. 향기 높은 민족 음악.연극은 말할 것도 없고, 자수.조각 등의 전통적인 민예, 특산물인 와 인, 풍부한 향토 요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헝가리는 대평원에 있다. 대평 원을 달리는 말과 소의 무리, 선명한 자수로 장식된 긴 망토를 두른 목동들, 지평선 아래로 저무는 석양에 비추어진 점점이 흩어진 진흙 우물은 한없이 낭만적이다.

헝가리 정치 형태는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고 있고,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총리가 국정 총괄.단원제 의회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386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경제면에서도 중동부 유럽의 선두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89년 체제 전환이후 경기침체, 인플레, 실업 급증, 재정적자, 외채 등 제반 문제가 있었으나 '98년 이후 전반적으로 경제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 명목 소득보다는 실질적인 삶의 질이 높은 나라로 평가되고 있고, 개방 이후 중동부 유럽에 투자된 외국 투자액의 절반 이상이 헝가리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었다. 대외관계는 현재 부다페스트에 약 60 여개국의 공관과 10여개의 국제기구가 파견나와 있는 상태이고, CEFTA의 중심국가이다. 현재 EU 및 NATO 가입,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 및 인접국 거주 헝가리계 소수민족 보호를 외교의 최대 현안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95년 슬로바키아와, 96년 루마니아와 각각 기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오랜 갈등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또한, 헝가리에 있는 도서관은 전국적으로 대형 1700개소, 중소형 10,000여개소에 이르며, 1802년 개관한 국립도서관의 경우 5백만권, 1826년 설립된 학술원 도서관은 1백 6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802년 국립박물관이 개관된 이래 전국적으로 400여 주요 박물관이 있으며, 1884년 개관한 오페라하우스, 국립극장을 비롯한 각종 대형 공연장도 29에 이른다. 문화면에서도 역시 전통민속과 서방 기독교 문화를 양대 기저로 한 헝가리의 문화 및 예술 활동은 서방 세계에 뒤지지 않고 있다. 세계적인 음악가 리스트, 바르토크, 코다이, 에르켈을 비롯 문카치.촌토발리등 세계적 미술가를 배출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집시 음악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수 있다.

헝가리의 관광사업은 90년대 들어 꾸준한 신장세를 거듭하여 현재 주요 외화가득원 역할을 하고 있다. 1997년의 경우 총 내방객은 약 4,000여 만명이며, 이중 관광 목적 입국자는 21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연간 관광 총 수입은 28억 4천만 달러이며, 헝가리인들의 해외관광 지출은 13억 달러에 그쳐 관광 수지는 15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부다페스트시, Balaton 호수 및 각 지방의 온천 요양소등이 있으며, 국가별 관광객수는 독일, 오스트리아등 인근 서구 국가가 가장 많고, 최근에는 미국, 프랑스 등의 관광객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1961년 교육체제 개선에 관한 교육 법령이 헝가리 교육제도의 기본이다.공산주의 시절 모든 교육은 국립이며, 무료였으나 90년 이후 사립교육이 부활되고 국립대학은 1995년부터 소액의 수업료를 부과하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 1년부터 16세까지의 교육은 의무 교육이다.
국기(國旗)는 적색, 백색, 녹색의 삼색기로, 적색은 피(또는 혁명), 백색은 평화(또는 순결), 녹색은 희망을 상징한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싸운 독립전쟁에서 처음으로 국기가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국기는 1948년 헌법으로 제정되었다. 공식국명(公式 國名)은 헝가리 공화국(THE REPUBLIC OF HUNGARY)이고, 공식적으로 지정된 국화는 없지만 '튜울립'이 헝가리를 대표한다. 상징동물은 '말'이다. 국가(國歌)의 경우,'HIMNUSZ'라고 불리우며, 1823년 쾰체이 페렌츠가 지은 시에 에르켈 폐렌츠가 곡을 붙였다. 오랜동안의 터어키,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및 제 1,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1956년의 헝가리 사태 등 많은 역경을 견디어온 헝가리인들의 마음이 잘 표현 되어 있다.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항공
공항은 부다페스트에 Felihegy I, II 가 있는데, 국립항공사인 MALEV를 비롯하여 많은 서유럽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으며 Felihegy II는 신공항으로 MALEV와 Lufthansa, Air France만 취항한다. MALEV 항공사는 서유럽의 주요도시 및 중동지역에 직항로를 개설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아직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으므로 헝가리에 가기 위해서는 프랑크푸르트나 파리 등지에서 환승해야 한다. 외국인이 항공권을 구입할 때에는 반드시 경화로 지불해야하고, 공항에서 시내중심가까지는 30분 간격으로 공항 미니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빈에서는 45분거리이고, 파리에서는 2시간, 런던에서는 2시간 20분 정도가 걸린다.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의 각 주요 도시 40개국에서 상호 정기편을 운항하고, 외국편은 국제공항 페리헤지 터미널 1에서, 말레프 헝가리 항공은 터미널2에서 발착한다.

훼리
헝가리는 내륙국이지만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하천교통이 활발하다. 다뉴브강이 체펠섬에는 자유항이 있으며 총 내륙수로는 1,688Km이다. 유람선은 비교적 비싼 편이며 표를 살 때에는 부두보다 IBUSZ(헝가리 국영여행사)에서 사는 것이 훨씬 싸다. 비엔나와 부다페스트를 왕복하는 쾌속정은 4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며, 왕복요금이 100달러이다. 소규모 상선대를 보유하고 있어 다뉴브강과 지중해를 연결해주며, 불가리아의 바르나항을 근거지로 하여 해상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5~9월 부다페스트~비인 간을 관광선이 운항한다.


면적 : 93,030km2

수도 : 부다페스트

인구 : 1994년 기준 1,245,000명

종교 : 카톨릭교(67.5%), 칼빈교(20%), 루터교(5%)로 이루어져 있다. 1600년 헝가리의 90%가 개신교였으나, 반종교 개혁과 그에 따른 차별대우의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차별대우, 공갈협박, 침투 등을 통하여 1948년과 1988년 사이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엄격한 통제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고, 1990년 이래로 종교의 자유가 생겨 나게 되었다. 그리고, 무종교/기타 12.5%, 유대교 0.8%, 회교 0.1%를 이루고 있으며, 기독교와 카톨릭교를 합한 종교가 86.6%를 차지한다.
40년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마르크스주의로 손상된 도덕적, 사회적, 영적 영향이 사회 그리고 더욱 안타깝게 교회를 황폐시켰다. 소수의 카톨릭과 개신교 지도자들은 담대히 주를 위해 고난을 받았지만, 반면에 공식 교회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권력자와 타협함으로써 단지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치적 자유로 사람들의 영적인 관심이 높아졌고 교회도 계속 성장하는 분위기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은 큰 집회를 원하지 않는다. 헝가리는 1939년과 1946-50년에 개혁교회와 다른 자유교회를 자극시켰던 신앙부흥이 있었다. 카톨릭, 침례교, 개혁교회와 자유교회 그리고 개혁교회 850명의 목사들 가운데 130명이 속해 있는 Pietist Bible Union에서 강한 카리스마틱과 갱신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독립 카리스마틱 회중이 성장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중보기도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헝가리인은 삶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스트레스, 비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낳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죄와 복음의 의미에 무지한 채 알콜중독, 자살, 신흥 사이비 종파와 신비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경향도 짙은 편이다.

주요민족 : 전체인구 중 마자르족이 약 96%를 차지하고 있고, 독일인이 1.6%, 슬로바키아인이 1.1%,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0.3%, 루마니아인이 0.2%, 그 밖에 집시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헝가리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자르족은 원래 우랄산맥 부근에 거주하고 있다가 헝가리로 이동해 오면서 여러 민족과 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특히 투르크계의 오노구르(Onogur)족과의 관계에서는 현재의 헝가리(Hungarian, Hongrois, Ungar)라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역사 속에서 슬라브족, 오스만 투르크족, 오스트리아 등과도 많은 접촉을 가져 민족 구성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마자르어이고 헝가리 인구의 약 99%가 사용한다. 마자르어는 핀란드어 및 에스토니아어를 포함한 우랄어족의 핀우고르군에 속한다. 일부지역에서는 독일어와 슬로바키아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일부 지식층은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으며 여행지에서는 독일어가 가장 잘 통하는 언어이다.

기후
대륙성, 해양성, 지중해성 기후가 혼합된 온대연평균 기온 10.5도이고, 연간 600 mm 정도로 적은 편이다.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 지중해의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는 연평균 기온 10℃ 전후의 온화한 대륙성 기후이다. 여름은 길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해 가장 추운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1℃이고, 가장 더운달인 7월의 평균기온은 21℃이다. 일교차가 크므로 여름이라도 재킷이나 스웨터를 가지고 가는 편이 좋다.
바람이 적게 불고 일조시간이 연평균 1,800시간으로 길다. 강수량은 적은 편이어서 연평균 강수량이 600mm이다. 지역별로 보면 트란스다누비아 고지가 연간 700mm 이상, 키슈올프드와 북부 산맥지대는 560~700mm, 노디올프드 지역은 560mm 이하의 강수량을 기록하고 있다.

지리
중부유럽의 동쪽, 다뉴브강 중류에 위치하는 내륙국으로서 동경 16°30′~ 22°30′, 북위 46°~ 48°에 걸쳐 있다.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남쪽으로 는 크로아티아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의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93,030㎢(한반도의 2/5) 이다.
국경의 전체 둘레길이는 약 869.9km이고 남북간의 길이는 268km, 동 간은 528km이다. 서쪽의 알프스의 지맥 및 북쪽의 카르파티아 산맥에 둘러싸인 분지로서 국토의 2/3가 해발 200m이하의 평야이다. 동부는 대부분 평지이 만 북서부는 구릉이나 낮은산들이 이어져 있어 헝가리는 지형적으로 2개의 저지대와 2개의 고지대의 4개 지역으로 나뉜다. 국토중앙에는 길이 420km의 다뉴브강과 그 지류인 길이 570km의 티사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류하고 있다. 이렇듯 헝가리에는 수자원이 풍부하지만 대부분 평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력발전에는 적당하지 않으며 일부 지역 에서는 다뉴브강이 범람하기도 한다. 동쪽으로는 헝가리 대평원(노디올ㅍ 드)이 넓게 자리하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그보다 작은 소평원(키슈올ㅍ드)이 있다. 이곳 평야지대는 물이 모자라고 사구와 초원도 있지만 관개사업으로 경지화되어 있기 때문에 헝가리의 주요 농업지대가 되고 있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Jo napot kivanok (요 너뽀뜨 끼반녹:정중한 인사)
의 미 : 안녕하십니까?

현지어 : Koszenem szepen (꾀쇠뇜 쎄뻰:정중한 답례)
의 미 : 감사합니다.

현지어 : : Bocsanat (보촤너트) / Elnezest (엘네제쉬뜨)
의 미 : 미안합니다.

현지어 : (식당,호텔 등에서 사람을 부를때):Legyen szives(레젠 씨베쉬)
의 미 : 여보세요?

현지어 : Mennyibe kerul ? (멘뉘베 께륄 ?)
의 미 : 얼마입니까?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헝가리의 초기 역사는 이들이 타지역으로부터 이주민인 관계로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부다페스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착 흔적은 부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서 부다 지역의 언덕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물은 도나우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현대적 의미의 도시 형성은 로마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는데, 지금의 오부다 지역인 Aquincum에서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5세기초 로마군이 헝가리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경계이면서 로마의 한 주였는데, 그 당시의 이름은 Pannonia 였다. 헝가리 민족이 유럽으로 이주하고 있던 당시 이 지역은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헝가리인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895-896년경 마침내 지금의 카르파티안 분지를 거의 정복했다.
헝가리인들은 이곳에서 아르파드를 지도자로 하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초기 건국당시는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부족들의 연합체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헝가리인들을 이곳으로 이주해 올 당시 그들은 7개 부족의 연합체적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되며 헝가리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냈던 마티아시왕의 통치 기간은 문화적으로 헝가리의 르네상스기에 해당된다. 이 당시 헝가리는 유럽의 문화,예술의 한 중심지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마티아시왕의 사후 헝가리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서 터키군에 대패한 이후 거의 150년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말 사보이 공국의 유진 왕자에 의하여 헝가리가 해방되었을때, 부다페스트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 상태도 최악이었다. 터키가 물러간 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이후로 약 150년간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학정과 폭정의 시대 였다. 헝가리인들은 속국인으로서 취급을 받았으며, 1839년 독립전쟁 발발당시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혹한 통치를 받아야 했다. 줄기차게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헝가리는 마침내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대타협(AUSGLEICH) 을 통하여 합스부르크-헝가리 이중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중왕국 형태의 정치체제는 50여년 동안 계속 되었다. 헝가리인들이 제국의 한 구성원으로써 대우를 받았으며, 헝가리인이 합스부르크 헝가리 제국의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헝가리는 독일.오스트리아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여 패전하게 되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부속 조약인 트리아농 조약에 의하여 전 국토의 2/3를 주변 국가에 할양하였다. 국경선의 변경으로 인하여 헝가리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거주 헝가리계 소수민족을 갖고 있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헝가리가 급부상하는 나치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 것도 1차 대전에서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려는 '실지회복주의'에 기인한 바 크다.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부다페스트는 전체지역의 70 % 이상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1967년까지 이를 모두 복구하여 오늘날의 부다페스트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1944년 12월 소련군에 점령 당하였으며, 1945년 동부 헝가리에 친소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1949년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사후 스탈린식 강압노선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후 약 3년간 온건노선의 나지 수상이 집권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및 중립 선언, 식량산업의 중시, 집단 농장화의 완화, 종교적 관용, 정치범 석방, 지하 강제 수용소 철폐 등의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스탈린식 강압주의의 라코시파와 대립을 일으켜, 경제파탄을 초래하였고 결국 1956년 부다페스트 폭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폭동은 점차 대규모로 발전하였고 반공, 반소의 경향을 보이며,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즉각 소련군이 개입하여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카다르를 당 제 1서기 및 수상으로 하는 친소정부를 수립하였다. 카다르 정부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계속 남아 있고, 소련과의 친밀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국민들의 불만해소 및 당의 신뢰회복을 위해 정치 및 경제적인 자유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동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 발전하였다.
1968년에는 1년 이상 준비를 해 온 경제 개혁 정책이 실시되었는데, 그 내용으로는 중앙 경제계획의 기능을 한정하고 대신 투자, 고용, 임금, 가격의 결정, 외국과의 무역 등에 있어서 기업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


유용한전화번호
시경찰국:107번
소방국은:105번
응급센터:104, (24시간 응급치료 318-8212)
자동차 고장신고는 369-1831/3714 또는 252-8000

전압 및 주파수
도량형에는 미터법을 사용하며, 표준 전압은 220V, 50Hz이고 총 전력사용량은 35THW이다. 전기보급은 난방용 전기까지 완비되어 있으며, 전기료는 매우 저렴하나 사유화 및 민간자본의 참여로 다소 오를 전망이다. 전력의 10% 정도를 CIS를 비롯한 인근국가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정부는 원할한 전력공급을 위해 전력생산의 효율화 및 시설용량 확대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치안
범죄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조직범죄 및 사업상의 채무에 관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으며, 헝가리는 부정한 자금이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그 밖에 관광지에서 소매치기, 자동차 도난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므로 주의하도록 한다.
최근 역, 대중 음식점, 대중교통 등에서 소매치기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 방문객은 소지품 관리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다.

통화
포린트(Ft)가 화폐 단위이며, 환율은 $1=약280Ft, 1Ft=한화 약 4원 정도이다

한국으로 전화
전화보급률이 인구 100명당 10대 수준으로 매우 낮은 상태에 있으나 통신 현대화사업의 일환으로 교환망을 갖추고 통신산업의 민간자본 참여를 허용 할 방침에 있어 전화보급률은 늘어날 전망이다. 전화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시내의 업무용 전화는 비교적 쉽게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시내전화는 노란색이고 시외, 국제전화는 빨간색을 이용한다. 시내전화 요금은 1분당 7/3포린트인데 18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는 7/6포린트로 더 싸다. 대로변이나 역 주변에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는데 5, 10, 20포린트 동 전으로 이용이 가능하고 이용방법은 동전을 넣기 전에 신호를 다린후 신호가 떨어지면 천천히 다이얼을 돌리면 된다.
최근에는 전화카드를 많이 쓰는 추세이며 우체국, 호텔, 담배가게 등지에서 판매되고 250, 600포린트 2 종이 있다. 시외전화는 먼저 06을 누르고 지역번호, 전화번호를 누르면 되고, 국제전 화는 먼저 00을 누르고 국가번호, 지역번호, 전화번호를 누르면 된다.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할 경우에는 00을 누르고 82를 누른후 지역번호(0을 뺀 다), 전화번호를 누르면 되며 통화요금은 1분당 325포린트이다. 1993년 10 월부터 수신자 부담 국제전화가 가능해졌는데, 한국으로의 번호는 00-800-82-11이다. 국제전화시 자동일 경우 00 82 (앞자리 0 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수신자부담/00 8000 8211(신용카드 사용가능)으로 하면 된다. 공중전화를 이용할 때에는 동전(10,20, 50, 100Ft 동전 사용) 또는 전화 카드(50 회분 1,000Ft, 120회분 2,000Ft)를 사용할 수 있고, 전화카드는 호텔,여행사, 우체국, 환전소, 신문가판대 등에서 구입하면 된다.

현지로 전화
한국에서 헝가리로 전화를 걸 때에는 001.002-36-1-전화 번호를 누르면 된다. 국제전화의 송수신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주의사항
<여행시 필요한 팁(TIP)>
헝가리의 대표적인 축제로는 부쇼야라슈(Busojaras)와 부활절(Husvet), 노동절(May Day), 승마의 날(Lovasnapok) 등을 들 수 있다. '부쇼야라슈'(Busojaras)란 매년 2월 중순의 일요일에 헝가리 남부의 도시 모하치(Mohacs)에서 열리는 축제이다. 축제때가 되면 수많은 사람이 모하치로 모여들며 10시 정도가 되면 자유의 거리, 세체니 광장 주변에서 가면을 쓰고 양의 털가죽을 입은 Buso가 행진을 시작하여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거리마다 과자, 민예품 등을 파는 노점이 들어서고, 곳곳에서 폭죽이 터져 온 도시 전체가 축제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축제는 밤이 되면 더욱 열기를 더해 광장에서는 캠프 파이어를 하고, 헝가리의 민속무용인 차르다슈(Csardas)도 공연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긴다. 그리고, '부활절'(Husvet)때 부다페스트에서는 부활절에 남자가 여자에게 향수를 뿌려주는 풍습이 있는 반면, 부다페스트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산악지방의 부야크(Bujak)라는 마을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민속의상을 입고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다. 특히 이 민속 의상은 화려한 무늬에 가느다란 주름이 많은 치마를 몇벌씩 겹쳐입는 매우 귀여운 의상이다. 또한, 5월 1일 '노동절'(May Day)이 되면 헝가리는 전국적으로 퍼레이드가 행해지며, 영웅광장 앞의 도자 죄르지(Dozsa Gyorgy)와 인민 공화국 거리는 퍼레이드 행렬로 활기에 넘친다. 거리는 호화스러운 플래카드, 장식을 한 자동차들로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된다. '승마의 날'(Lovasnapok)은 매년 7월의 첫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호르토바지라는 도시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축제이다. 우선 유럽 각국에서 참가해 온 마술 국제 경기가 열리고, 그 다음에 비로소 헝가리 목동들의 승마 곡예가 열리게 된다. 이 때 100마리 정도의 말을 한꺼번에 풀어놓고 자유롭게 날뛰게 한 다음, 목동들이 뒤 라나와 날뛰는 말들을 순식간에 몰아서 다시 데리고 들어가게 된다. 이어서 목동 1명이 나와 4마리의 말 위에서 선채로 달리는 곡예를 하는데 정말 볼 만하다.
부다페스트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 져있다. 특히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지 않고는 진짜 부다페스트를 보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다페스트 사람들은 부다페스트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부다페스트와 인근 지역의 관광명소는 도나우 강을 끼고 밀집되어 있다.

<국내 비자발급처>
기 관 명 : 헝가리 대사관 (EMBASSY OF THE PEPUBLIC OF HUNGARY)
주 소 : 용산구 동빙고동 1-103
전화번호 : 792-2105 (대표)
근무시간 : 월∼목요일 09:00 - 12:00 / 13:00 - 17:00 , 금요일 09:00 - 12:00 / 13:00 - 14:00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헝가리는 사증 면제 협정체결로 관광목적일 경우 90일까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 90 일이상 체류시 대사관에 개별 문의 바란다.
90일 이상 체제할 때에는 목적에 맞게 사전비자를 받고 입국하여야 하며, 90일을 초과하는 지사 주재, 유학 등의 경우에는 출국 전, 주한 헝가리대사관에서 각 목적에 맞는 사증을 받아 헝가리 입국 후 경찰서 외국인 담당 관서에서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증의 종류는 여행(Tourist), 방문(Visitor), 사업(Business), 노동(Employment), 자영업(Self-employment), 진료(Medical Treatment), 유학(Training), 경유(Transit) 등 8종으로 구분한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64년도 관광여행 간소화에 관한 뉴욕협약 당사국으로서, 출입국 절차는 매우 간편하고 편리하다. 입국 절차시 일반적인 여행객 휴대품 검사는 없는 편이다.
나. 입국 절차 (1) 일반적인 여행객 휴대품 검사는 없으며, 일반 휴대 물품(travel luggage)은 관세 면제(동 휴대 물품에는 개인 장신구, 비디오 카메라 1대, PC 1대, 카메라 2대(필름10롤), 비디오 카세트 테이프 10개, 라디오 1대 등이 포함) (2) 16세 이상의 경우 담배 250개비(또는 시가 50개비), 와인 2리터, 양주 1리터까지 허용 (3) 일반 상품(goods) 휴대 반입은 개당 5,000포린트(Ft) 상품인 경우 2개까지 허용 (4) 외국인은 최소한 헝가리 체류일당 1,000Ft 소지 요구. (5) 경화로의 재환전은 "환전 증명서" 제시 및 환전액의 50%까지 가능

<세관관련 사항(면세범위 등)>
일반 품은 연간 최고 5,000포린트까지 반입이 가능하고, 16세 이상의 경우 담배 250개비, 시가 50개비, 와인 2리터, 양주 1리터 까지 반입이 가능하다. 최근 출입국법의 강화로 외국인은 헝가리 체류일당 1,000포린트를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헝가리에 도착하면 24시간 이내에 해당지역 경찰서에 입국신고를 해야 하고, 호텔에 투숙할 경우에는 호텔측에서 이를 대신 해준다. 면세범위는 16세 이상의 여객


철도
동유럽 철도패스를 이용하면 보다 저렴하고 계획적인 여행을 할 수 있는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의 철도 시스템을 1개월 동안 정해진 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1등석과 2등석으로구분되며 5일권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5일을 추가할 수 있다.
1등석 5일권은 $226, 2등석은 $160이며 하루 연장할 때마다 1등석은 $26, 2등석으 $19을 추가로 지불한다. (가격은 2004년. 미국 달러 기준)


대륙성, 해양성, 지중해성 기후가 혼합된 온대연평균 기온 10.5도이고, 연간 600 mm 정도로 적은 편이다.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 지중해의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는 연평균 기온 10℃ 전후의 온화한 대륙성 기후이다. 여름은 길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해 가장 추운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1℃이고, 가장 더운달인 7월의 평균기온은 21℃이다. 일교차가 크므로 여름이라도 재킷이나 스웨터를 가지고 가는 편이 좋다.
바람이 적게 불고 일조시간이 연평균 1,800시간으로 길다. 강수량은 적은 편이어서 연평균 강수량이 600mm이다. 지역별로 보면 트란스다누비아 고지가 연간 700mm 이상, 키슈올프드와 북부 산맥지대는 560~700mm, 노디올프드 지역은 560mm 이하의 강수량을 기록하고 있다.



▶ 부다페스트 [Budapest]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공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있는 동구권국가 중 개혁의 바람이 가장 거칠게 불고 있는 곳이다. 부다와 페스트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과 여기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8개의 다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축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 등은 부다페스트를 '동유럽의 장미', '다뉴브의 진주로 불리우게 하며 아름다운 관광지로 만들고 있다.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건물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기도 했었지만 다시 재건되어 오늘날 인구 약 200만의 중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고 있다. 곳곳에서 민속음악 및 짚시음악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다.
인구는 210만명 정도로 전체인구의 1/5이 집중되어 있고 면적은 525㎢이다. 예로부터 국내, 국제적으로도 동서와 남북의 교량적 역할을 해왔으며 엔지니어링, 자동차, 섬유, 정밀 기계 공업 등이 발달한 헝가리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1873년 3개의 지역이 통합되어 생겨난 도시로서, 한때 중세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만큼 합스부크 왕조의 궁전 등 옛 건축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다뉴브강을 경계로 하여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으로 나뉜다. 최근에는 다른 지방도시들이 성장하면서 부다페스트에 대한 집중현상은 어느 정도 완화되고 있다.

교육
의무교육은 6∼14세까지 초등학교 8년동안이고, 고등학교는 인문계 4년 및 직업계 3년의 과정인데 이외에도 경제, 기술, 농업, 예술 등의 학교가 있다. 대학교는 전문대학 3∼4년, 일반대학 및 의과대학이다. 새 학기는 9월에 시작하고 겨울방학은 없다.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은 무료이고, 대학교에서는 월 2,000포린트씩 학비를 내야 하며 대학진학율은 9.7%이다.
현재 헝가리에는 종교대학, 특수대학을 포함하여 77개의 대학이 설립되어 있으며 졸업은 마지막 학기에 졸업논문과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가능하다. 헝가리의 대학은 정부에 의해 분야별로 특성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업
헝가리의 산업구조는 농.임업, 수산업부문의 비중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어 이 부문에 종사하는 인구수가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광업.제조업부문의 비중은 확대되어 왔다. 1993년 농.임업은 취업인구의 10.14%, 광업.제조업은 30.29%를 점유하였고 서비스업이 29.11%를 차지함으로써 서비스업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 광업.제조업은 투자부진, 경기침체 등으로 점차 비중이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수입이 증가하면서 경쟁력이 심화되어 앞으로 감소세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이고 있다. 서비스부문의 급속한 팽창은 제조업부문을 앞지를 전망이고, 노동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제조업부문의 고용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생산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헝가리는 세계 14대 관광국 중 하나로서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1989년 11월 해외여행시 1인당 외화경비 지급한도를 100달러에서 1992년 말까지 50달러로 낮출 예정이었으며 구입상품의 면세한도액은 1인당 200달러에서 100달러로 조정하였다. 1994년 관광수입은 1,428백만 달러, 관광지출은 925백만 달러로 503백만 달러의 관광수지 흑자를 기록하였다. 같은 해 입국한 관광객수는 41,330천명, 출국한 관광객수는 14,370천명 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 지중해의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는 연평균 기온 10℃ 전후의 온화한 대륙성 기후이 다. 여름은 길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해 가장 추운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1℃이고 가장 더운달인 7월의 평균기온은 21℃다. 일교차가 크므로 여름이라도 재킷이나 스웨터를 가지고 가는 편이 좋다. 바람이 적게 불고 일조시간이 연평균 1,800시간으로 길다. 강수량은 적은 편이어서 연평균 강수량이 600mm이다. 지역별로 보면 트란스다누비아 고지가 연간 700mm 이상, 키슈올프드와 북부 산맥지대는 560~700mm, 노디올프드 지역은 560mm 이하의 강수량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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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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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로 유명한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핀란드는 면적의 1/3이 북극권에 속한 빙하의 나라이다. 공식 명칭은 핀란드 공화국(Republic of Finland)이고, 핀란드어로는 Suom이다.
"핀란드"의 뜻은 원래 "호수의 나라"란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슬란드 다음으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이 나라는 육지의 71%가 울창한 냉대림으로 뒤덮여 있고, 그 사이로 6만여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산재해 있다. 핀란드는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계절의 차이가 분명하여 여름은 한밤중에도 태양을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물이 맑은 나라로 손꼽는다.
핀란드인들은 사우나를 즐기는 핀족으로서, 토요일 저녁이면 사우나로 일주일 동안의 지친 신체와 정신을 푼다. 이러한 사우나 시설은 주택 및 자기 집에 사우나 시설이 갖추어져있고, 새로운 집을 지을 때에는 개별 사우나를 설치한다.
면적은 338,148㎢으로 남북길이는 1,165km이고 동서 최대너비는 550km로 북쪽으로 스웨덴, 서쪽으로 보트니아 만, 남쪽으로 핀란드 만, 동쪽으로 러시아 연방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인구는5,145,000명으로, 인종은 파란 눈과 금발머리를 지닌 핀족, 스웨덴인, 사메족, 집시족이 살고 있다.
산업구조는 제조업 26.4%, 산림업 3%, 건설업6.4%, 농업2.9%, 전기ㆍ가스ㆍ수도2.6%, 도소매59.1%로 구성된다. 사회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혼합된 선진경제국으로서 국민총생산이 인구성장률보다 빨리 성장하고 있다. 농업은 국민총생산의 1/12 미만으로 남부지역에 제한되며, 경작지는 전국토의 1/12를 차지하여 보리ㆍ귀리ㆍ밀 등과 같은 곡물이 재배되고 사탕수수ㆍ감자ㆍ딸기ㆍ건포도 등이 생산되고 있다. 제재업은 핀란드의 주요산업이고, 임산품으로 목재, 합판, 종이, 펄프 등이 있고, 어업으로 해양에서 청어와 유럽 농어가 주요 어획 어종이다. 광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만 광산에서 중요 금속인 바나듐ㆍ수은ㆍ은ㆍ금 등이 포함되고, 철광ㆍ아연ㆍ구리ㆍ니켈ㆍ코발트 승이 매장되어 있다.

항공
핀란드항공은 핀란드 국영항공사로서 도쿄와 오사카, 싱가포르, 방콕, 베이징에서 헬싱키로 주2-3회 정규 운항하고 있다. 다른 주요도시에서 프랑크푸르트나 런던을 경유하여 헬싱키로 가는 연결편이 준비되어 있다. 거의 모든 유럽도시에서 핀란드로 정규 항공 서비스가 마련되어 있다.


면적 : 338,148km2

수도 : 투르쿠

인구 : 1997년 기준 5,145,000명

종교 : 복음주의 루터교 85.7%, 핀란드 그리스 정교회 1.1%, 무교 12.2%, 기타 1.0%로 구성된다. 국민의 대부분이 루터교를 믿고 있으며, 소수인원만이 핀란드의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였다.

주요민족 :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족과 발트 인종에 속한다. 파란눈과 금발머리를 소유한 핀란드인들은 핀족이 살고 있으며, 그 외에 스웨덴인, 사메족, 집시족들이 살고 있다. 사메라고 지칭하는 라프인들은 주로 라플란드 지방에 살고 있으며, 4400명의 집시족은 남부에 거주하고 있다.

주요언어 : 핀란드어 92.9%, 스웨덴어 5.7%, 기타 1.4%로 구성된다. 2개의 공식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국민에 대부분은 지역적 방을 섞으면서 핀란드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소수 사람만이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다. 라플란드에 살고 있는 라프족은 핀우그릭어를 사용하면서, 일부지역에서 순록떼를 모는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기후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따뜻하고, 겨울은 춥다. 핀란드 지역에 일부분은 북극권에 속하는 지역으로 극단적인 변화를 가지고 있어 겨울에는 -30℃까지 내려가고, 5-7월의 73일 동안 라플란드 지방에는 백야현상이 일어난다. 만류ㆍ발트해ㆍ저지대 특성이 결합한 기후로 온화하여 60˚이북에서는 농업이 잘 이루어진다. 연평균 기온은 5℃이며, 연 평균강우량은 660㎜이나 1/3정도가 눈이 내린다. 남동 핀란드 지역은 높은 기온을 보이며, 서부 해안선은 북유럽은 일조량이 많다.

지리
핀란드는 국토의 약70%가 숲이고, 15%정도가 농경지ㆍ거주지ㆍ도로로 이루어지며 호수는 전 국토의 약9%, 18만 7888개를 이룬다. 핀란드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해발 455-1,328m의 산봉우리들이 북서쪽 가장자리 소규모를 제외하고, 해발 180m의 저지대 산들을 이루고 있다. 고도가 낮은 지역인 서부와 남부 해안은 너비 32-96㎞이고, 고도는 18m가 안된다. 남서쪽 해안선에 올란드 제도를 이루고 있는 섬들은 해안 저지대의 연장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륙지역은 해발 45-180m이고, 북부 고지대는 경사지면서 저지대로 호수지역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큰 호수는 사이마아(Saimaa)이고, 크기는 4400㎢이며, 유럽에서 네 번째이다. 가장 높은 산은 할리아툰투리(Haliatunturi)로 해발 1328m이다. 지형은 빙퇴석으로 특성화, 호수와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사토와 모래 언덕의 불모지이지만 유틀란트 동부와 다른 도서지방은 비옥한 지형이다. 가장 긴 강은 552m로 케미요키이다.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핀란드의 기원을 찾아보면 우랄어족의 피노우그리아어계 집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우랄산맥 서쪽의 볼가강유역에서 거주하였으나, 기원전 500년경에 서진하기 시작하면서, 슬라브족 및 북부 게르만족과 차례로 조우하면서 유럽문화와 생활양식을 습득하면서 핀란드 땅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핀란드의 원시부족시대는 크게 3부족의 정립형태를 띄는데, 항상 성실하며, 생활력이 강한 하메인과 음악을 즐기는 카렐리아인, 밝고 명랑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사보인 등으로 3부족이 있었다. 그러나 이 3부족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도 못 한 체 자신들의 거주지이자 삶에 터전인 동ㆍ서양의 세력에 충돌의 장으로 변모하였고 외부세력의 식민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12세기 스웨덴 왕 에릭 9세와 웁살라 주교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군대를 진격하였고, 그 후 세력을 동쪽으로 뻗어 동방정교회세력이 강한 노브고로트공국=러시아지역과 충돌하게 되고, 이 전쟁의 결과로 두 나라 사이에는 파하키나사리조약이 성립되면서 1581년 핀란드는 대공국이 되었다가 1634년 핀란드는 스웨덴의 정식 식민지로 자래한다. 하지만 14세기 후반 북유럽 국가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국가엽합의 형태로 칼마르동맹을 형성한다. 하지만 곧 내부 분열로 붕괴되고, 독자전선을 걸었던 스웨덴의 쿠스타프 1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자국인 스웨덴과 핀란드까지 복음루터파로 개종시킨다.
1581년에 핀란드는 스웨덴에 의한 대공국으로 승격하지만 혹독한 식민정책에 반발한 국내귀족들은 핀란드 내의 귀족들을 일소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북방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1790년 카를 12세가 거느린 스웨덴과 핀란드 연합군은 표트르 1세의 러시아군과 폴타바에서 일전을 벌인 결과 핀란드군의 필사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군의 갑작스런 병력철수로 패배한다. 이러한 결과 스웨덴 17세기에 획득한 영토를 잃게된다. 1808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핀란드를 침범, 1809년 핀란드는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러시아황제는 식민지 핀란드에 종교권과 국가법 등 일정에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짜르체제에 대한 충성을 기본으로 한 강력한 러시아화를 꽤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식민정책이 강화될수록 핀란드 내의 민족적 자각과 독립의 소리가 고조되었다. 핀란드의 국가주의가 성장하게 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05년 러일전쟁에 러시아가 패하고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였고 핀란드는 독립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17년 12월 6일에 핀란드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독립 후 핀란드는 백위군과 적위군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상황을 겪었다. 도시의 자산계급이 중심이었던 백위군의 정국을 수습한 후 20년간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구소련과의 영토문제로 독일군을 지지하며 참전하나 대전 막바지에 전국이 불리해지자 구소련과 휴전조약을 체결하고 전선에서 이탈한다.
1941년 러시아, 핀란드 전쟁이 발발하였고 핀란드 인들은 러시아 영토로 진격하였고 1944년에 평화가 정착되면서 본래의 거주지로 귀환하게 된다. 참전의 대가로 영토의 12%를 구소련에게 빼앗기고 8억달러의 배상금까지 지불하였으나 막대한 경제적 고난을 겪었으나, 종전 후 소련과의 관계는 우호적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대전 후 중립노선을 고수하던 핀란드는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선진복지국가를 구현한다.

유용한전화번호
일반긴급요청 112,
화재신고 112,
경찰 112,
앰블런스 112,
Call Taxi 700 700,
분실물보관소 189 3180,
전화번호문의 118,
information 118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을 이용한다.

치안
핀란드는 범죄 발생률이 낮아 치안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중앙역, 호텔, 관광명소, 공항 등에서는 소지품 도난이 종종 발생하고 있기에 자신의 귀중품들은 잘 소지하고 다녀야 할 것이다.

통화
핀란드의 통화단위는 마르카(Markka)로 표기는 FIM이다. 그 보조단위르 페니(Penni)로 1마르카=100페니이다. 지폐는 FIM 10, 20, 50, 500, 1000 이며, 동전은 FIM 1, 5, 10과 10, 50페니가 있다.

한국으로 전화
호텔방에서 국제전화를 사용할 경우에는 일반가정의 5배에 이르기 때문에 공동전화를 이용하여 전화를 하는 것이 좋다.
990(국제선 호출)+82(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수신자 요금 부담으로 전화를 이용 할 경우에는 990-800-1234-8000, 0800-110828을 이용한다.

현지로 전화
001(002)+358(핀란드 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수신자 요금 부담으로 전화를 이용 할 경우에는 990-800-1234-8000, 0800-110828을 이용한다.

주의사항
<여행시 필요한 팁(TIP)>
핀란드에서는 팁문화가 일상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서비스를 받지 않았을 경우에는 팁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호텔, 레스토랑, 택시에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기에 특별한 팁을 주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호텔에서 짐을 들어다 객실까지 들어주는 포터에게는 팁으로 10마르카 정도 준다.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핀란드는 여권소지자의 경우 3개월 미만 체재할 경우 입국시에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하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입국시에는 자신의 여권을 소지한 후 입국심사대에 보여준 후 도장을 찍은 후 자신의 짐을 수하물 지역에서 찾은 후 세관심사대에 가서 세관신고서를 제출하고 약간의 검사를 거치면 된다.
출국시에는 72시간 전에 자신이 타고 갈 항공에 대하여 재확인을 해야하며,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을 밟는다. 해당항공 카운터에 가서 자신의 항공권을 준 후 보딩패스를 받은 후 입국과 역순으로 탑승수속을 밟는다. 자신이 탈 항공 게이트로 가서 보딩패스를 준 후 항공시간이 될 때까지 면세점이나 대기실에서 기다린 후 탑승시간이 되면 비행기에 탑승하면 된다.

<세관관련 사항(면세범위 등)>
외국인의 경우 성인 한 사람당 FIM 1,500=USD 270의 물건을 반입할 수 있다. 관광객의 면세허용량은 맥주 2ℓ와 와인 2ℓ또는 맥주 2ℓ와 와인 1ℓ, 스피리트 2ℓ로 주류는 18세 이상민 반입이 가능하다. 담배의 경우 200개피와 다른 담배 생산품 250g으로 16세 이상만 반입이 가능하다. 15kg미만의 육류나 육류가공품은 허가없이 반일할 수 있으며, 관광객이 재판매 목적이 아닌 사용할 목적으로 표유류나 가금류의 고기나 그 가공품을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에서 반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환전관련 사항>
공항, 은행, 환전소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공항에서 환전을 하는 것이 환율이 높고, 효율적이다. 또한 은행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은행에서 환전을 하여도 편리하게 환전이 가능할 것이다. 국제적인 신용카드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다이너스 클럽, 유러카드, 마스터 카드, 마스터차지 등의 신용카드를 호텔, 식당, 렌트카 회사, 백화점에서 사용할 수 있고, 여행자 수표도 은행과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외국인 금기사항>
핀란드는 스웨덴으로부터 655년, 러시아로부터 108년간 지배를 받은 후 1917년에 독립한 국가로서, 산업발전이 유럽대류보다 뒤떨어져 있지만 OECD회원국, EU회원국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국가로 얕보거나 우랄알타이어족을 사용하는 국가,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구권국가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어 사용하는데 있어 특별히 신경써야 할 것이다.
핀란드는 선물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판매촉진이나 홍보용으로 선물을 주는 것은 피하도록 한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에 작은 소품들은 마음을 전하는 것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는다.

<상품구입시 유의사항>
핀란드의 기념품으로는 유리, 보석, 세라믹, 수공예품, 패션잡화와 가구 등의 관심을 가지고 쇼핑을 하면 좋을 것이다.

<복장 및 의복 관련사항>
6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가 여행시즌으로 햇빛도 가장 많이 있고, 날씨도 따뜻한 기온을 유지한다.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30℃까지 기온이 내려간다. 이러한 겨울 날씨는 숨쉬기를 거북하게 할 정도이다. 1월 평균 기온은 -70℃, 7월 평균기온은 18℃이다.
여름철에 여행을 한다면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얇은 긴소매와 긴비지, 두툼한 옷가지들을 준비하여야 한다. 겨울은 영하권의 날씨로 상당히 춥기 때문에 겨울에 여행을 할 계획이라면 두터운 옷을 준비하고, 장갑, 목도리등은 필수로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철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 즉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철도패스로 스칸디나비아 철도패스가 있다. 2개월 동안 5일, 혹은 10일동안 2등석의 열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일정이 긴 여행객을 위해 21일짜리 패스도 있다.
패스는 성인, 60세 이상의 경로 26세 미만의 유스, 3가지로 구분되며 철도 무제한 이용과 함께 Best Western Hotel, Choice Hotel, Sokos Hotel, Backpackers Resorts 이용시 할인받을 수 있다.

2004년 기준 스칸디나비아 철도 패스는 성인 5일권이 $276. 10일은 $370, 연속 21일은 $430이며 유스는 5일권이 $192, 10일권은 $258, 21일권은 $299이다.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따뜻하고, 겨울은 춥다. 핀란드 지역에 일부분은 북극권에 속하는 지역으로 극단적인 변화를 가지고 있어 겨울에는 -30℃까지 내려가고, 5-7월의 73일 동안 라플란드 지방에는 백야현상이 일어난다. 만류ㆍ발트해ㆍ저지대 특성이 결합한 기후로 온화하여 60˚이북에서는 농업이 잘 이루어진다. 연평균 기온은 5℃이며, 연 평균강우량은 660㎜이나 1/3정도가 눈이 내린다. 남동 핀란드 지역은 높은 기온을 보이며, 서부 해안선은 북유럽은 일조량이 많다.

시차 : -7시간



▶ 로바니에미

로바니에미는 토르니오의 북동쪽, 케미 강과 아우나스 강이 만나는 북극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32,911명이다.

로바니에미는 핀란드 북부 라피 주의 주도로 교육과 상업, 행정의 서비스 중심지이며, 라플란드의 현관이며 교통·통신의 요충지이고,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944년 나치스 독일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계기로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설계를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가끔 "핀란드의 제 2의 수도"로 불려지기도 한다.
자작나무 숲, 잔디밭 등의 녹음으로 둘러싸여서 마치 공원 속에 도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손대지 않은 자연이 남아있는 라플란드의 입구에 잘 어울리는 청결한 도시이다. 또한 겨울 스포츠 시설도 많이 있다. 매년 겨울 로바니에미를 시발점으로 영하 40℃의 혹한 속 눈길을 2,000km 주파하는 자동차 경주도 열린다.
이 도시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매우 유명하며, 한해에 단 하나의 계절만을 가진 도시이다. 북부 핀란드에서 진정한 겨울을 맛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백야도 체험할 수 있다.
로바니에미 지역의 여행 서비스는 세 개의 공동체로 분포되어 있다. 로바니에미 마을의 자랑은 북극의 중심과 라플란드의 지역박물관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독특한 알크티쿰(Arktikum) 건물이다. 또한 로바니에미에서의 크리스마스는 북극권 전역에 걸쳐 그 해 내내 기념된다. 북부의 모든 동물들은 Rauna(라우나)에 있는 라우나 야생 공원에 서식하고 있다.

교육
로바니에미는 북극권에 위치해 있다. 유럽연합(EU)에서 네 개의 학부가 있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대학이 있다. 그리고 폭넓고 다양한 등급의 프로그램을 갖춘 다중 학제적인 로바니에미의 과학 기술 전문학교도 있다.

산업
로바니에미는 산업이 발달되어 있는 도시로, 라플란드 지역의 목재와 모피 무역의 중심지이다.




▶ 탐페레

헬싱키 북서쪽 약 18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18만 명이다.

핀란드 헤멘주에 있는 도시로 헬싱키 북쪽의 지협에 자리잡고 있다. 네시 호와 풰헤 호를 잇는 타메르 여울이 이 지협을 가로지르고 있다. 탐페레는 스웨덴어로는 탐메르포르스(Tammerfors)이다. 이 곳의 급속 성장은 알렉산더 황제(Tsar Alexander)1세가 스코틀랜드인인 제임스 핀레이슨(James Finlayson)이 전통 기술이 사양길에 오른 시골 지역의 노동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 직물 공장을 여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지방 무역의 세금부과를 철폐한 한 세기 이상 전부터 시작되었다.
호수에 둘러싸인 탐페레는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공업 중심지로 제재소와 기계공장 등이 밀집되어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내륙 도시이며, 또한 호수 연안의 항구이자 주요한 철도 교차점이기도 하다. 금속 세공과 신발 공장들은 활기에 찬 지역의 예술 현장을 장려함으로써 전 종업원에게 문화를 온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그들의 고용주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1918년 핀란드 독립전쟁에서 적군을 대파한 격전지로서 섬유, 제지, 제화, 철 공업, 차량 등의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문화·상업의 중심지이다. 공장들은 산업계획에 따라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워졌으며 대부분 수력을 동력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석탄가루와 연기로 인한 대기오염이 거의 없다. 낙차가 18msk 되는 두 호수를 이용한 수력발전으로 400군데의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15세기에 건립된 성당이 남아 있으며, 핀란드 사회과학대학, 퓨니키 야외극장이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레닌 박물관이 남아 있다. 레닌은 이곳에 장기간 머물면서 볼셰비키혁명을 준비하였으며, 1905년 이곳에서 스탈린을 만난 연유로 박물관이 세워졌다. 핀란드 내의 자유로운 락과 째즈 연주회, 풍부한 연극의 탄생과 최고의 현대 아트 콜렉션 등이 오늘날까지 그러한 전통을 유지해 오고 있다. 또한 이 도시는 헤멘린나와 연결되는 호수 유람 관광선 '실버라인'과 비라트로 연결되는 '시인의 길 항로'의 발착지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는 녹음에 파묻혀 공업도시의 삭막함과는 거리가 멀다. 4각으로 잘 정리된 건물들이 산뜻한 느낌을 준다.




▶ 투르쿠

투르쿠는 핀란드 발트해 남서부 코너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15만 6천명이다.

투르쿠는 핀란드 제 2의 도시로 투르쿠는 아우라 강 Aurajoki 하구의 양쪽 기슭에 자리잡은 도시이며, 이 주변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타운으로 선원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도시이다. 또한 투르쿠는 1812년에 그 지위를 잃고 1827년에는 무자비한 불길 속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지만 요즘에는 작고 상당히 사교적인 도시로, 역사와 문화, 호화로운 밤놀이로 꽉 차있다.
'투르쿠'라는 말은 시장 장터를 의미한다. 이말이 암시해주듯 이곳은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상업 중심지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훌륭한 쇼핑거리로 유명하다.
이곳이 핀란드의 서쪽에 위치해 있고, 스웨덴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 하다. 중세 초에 핀란드로 진출한 스웨덴은 바로 이곳에다 성과 교회를 세우고 핀란드 지배의 기지로 삼았다. 따라서 1812년에 핀란드가 제정 러시아로 양도되어 러시아에 가까운 헬싱키가 수도로 되기 전까지는 투르쿠야말로 핀란드의 수도였던 것이다. 사실 투르쿠는 오보 Abo라는 스웨덴이 지병으로도 불린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투르쿠는 서해안으로 넓게 펼 펼쳐진 스웨덴 문화권의 중심지이다. 수업이 모두 스웨덴어로 진행되는 대학도 있어서 스웨덴 본토 이상으로 옛스러운 스웨덴을 느낄 수 있다.

교육
투르쿠는 학생인구가 1만명이 넘는 대학도시로서 핀란드 최초의 대학이 1640년 이곳 투르쿠에 세워졌다. 두개국어를 쓰는 도시로 1918년에 세워진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대학교와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1922년에 세워진 대학교가 있으며, 이외에 여러 개의 고등교육기관, 미술관, 도서관, 박물관이 있다.

산업
투르크에는 대규모의 담배공장과 군함조선소가 있다. 또한 설탕정제·제철·목재·제분·도자기·방직 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 헬싱키 [Helsinki]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인구 50만이 넘는 헬싱키의 하늘은 가을하늘처럼 맑고 푸르다. 핀란드만에 돌출한 작은 곶과 그곳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림과 사우나의 나라인 핀란드의 수도로서 일찍부터 소련과 스웨덴, 독일 등을 잇는 대형선박이 드나들던 항구도시이다. 그러나 여름철의 유난히 긴 노을은 관광객의 어깨에도 내려앉아 이내 쓸쓸함으로 변해가고 만다. 또한 여름에는 백야라고 불리워져 연일 밤이 되어도 밝은 날이 계속 되어진다.
'북의 백도'라든가 '발트해의 소녀'라고 불리우는 친근한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는 핀란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며, 항구 정면으로는 대통령관저와 시청사, 대성당이 높은 수준의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울러 유럽 대륙 각 국의 수도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폴란드, 독일, 스웨덴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무역과 관광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스웨덴 부근 투르쿠에 수도가 있는 것을 싫어하여 1812년에 페테르스부르크(레닌 그라드)에 가까운 이곳으로 천도한 이래 수도로서, 또 무역항으로서 번창해왔다. 비행기가 헬싱키 공항에 가까워지면 '삼림과 호수의 나라'라는 대명사와 잘 어울리는 진초록 섬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섬의 울창하고 뻑뻑한 나무들 사이에 동화의 주인공들이 숨어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버릴 정도로 꿈을 유혹하는 평온한 풍경이다. 또 수많은 섬들을 지나 배로 헬싱키 항구에 입항하면 시청과 시장을 양팔에 안은 것 같은 모양의 백아의 대성당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왼쪽에 에스플라나디 공원의 풍요로운 신록 속에는 발트 해의 처녀 '바비스 아만다'의 동상이 가련하게 서있고 오른쪽에는 핀란드의 대표적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설계한 엔소그차이트 사의 흰 대리석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도시에 일단 내려서면 상상하고 있던 이른바 '유럽의 풍경'과는 다른 인상을 받을 것이다. 남유럽에 보이는 흰 벽이나 나란히 서있는 벽돌집, 독일의 뾰족탑 같은 것은 거의 볼 수가 없다. 대신 제정 러시아 시대의 네오 클래식한 건축물, 스웨덴 지배 시대의 잔유물, 그리고 수준높은 현대 건축이 각각의 시대를 주장하면서도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핀란드의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헬싱키는 19세기의 신 고전적인 건물과 현대의 건물들이 장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북부 특유의 음산함보다는 밝은 햇살의 투명한 분위기가 이색적이다. 스웨덴이 약 650년, 러시아에 약 100년 동안 지배받았으며, 또 수많은 전쟁에서 몇 번 국경선이 바뀌기도 했다. 그렇지만 핀란드의 민족혼을 잃지 않고, 당시의 지배국 러시아가 범슬라브 주의의 세력을 키워갈수록 그 혼은 더욱 강해져서 독립에의 의지를 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때를 같이 하여 독립을 얻었다. 슬픈 듯하면서도 강한 핀란드인의 역사를 이들 건축물이나 거리에서 느낄 수 있다.

교육
헬싱키에 있는 핀란드 최고(最高)의 국립 종합 대학인 헬싱키 대학은 핀란드가 스웨덴령(領)이던 1640년 크리스티나 여왕이 구도(舊都) 투르쿠에 설립한 것으로, 1827년 도시가 큰 화재로 소실되자 새로운 수도 헬싱키로 옮겨 재건하였다. 신학, 의학, 법학, 철학, 문학, 교육학, 사회과학, 어학, 농·임학 등의 학부가 있으며, 교수 용어는 핀란드 어와 스웨덴 어를 병용하고 있다.

산업
헬싱키의 경제활동과 발전은 우수한 항만시설, 내륙 여러 지역과 잘 연결된 철도·도로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결과 핀란드 총수입물량의 1/2 이상이 헬싱키 항구를 거쳐간다. 그러나 헬싱키를 거쳐가는 핀란드 수출 물량은 극히 소량에 불과한데, 그 이유는 핀란드 해안을 따라 대규모 수출 항구들이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헬싱키의 주요 산업은 식품·금속 가공·인쇄·섬유·의류 등이다. 베르트실레 조선소와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라비아 도자기 류 공장은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기후는 온난한 북극 온대성 기후로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위도를 나누는 기온이 높은 곳이다. 5∼8월이 여름이고 한국의 북부지방 정도의 여름 복장으로 충분하다. 여름 평균 기온이 13∼17℃ 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3∼4℃이나 국토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남부와 북부지방의 기후는 차이가 심하다. 북부지방은 9월부터 추워져 10∼12월이 초겨울, 1∼3월이 한겨울, 즉 6개월 간이 겨울이며 기온은 영하 30℃ 이하로 내려간다. 여름에는 73일간의 백야가 계속된다. 한 여름일 경우는 남부, 북부 모두 해가 지지 않는다. 한겨울에는 일조시간이 아주 짧아져 남부지방에서는 5∼6시간만 낮이고 북부지망에서는 50일간 해가 보이지 않는다. 연평균 강수량은 698m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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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따뜻한 나라로서 프랑스 공화국 (La Republique Francaise)이 공식명칭이다.
과거 식민지 보유 측면에서 영국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자랑했던 프랑스는 아직도 외교적 차원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여전히 EU(유럽연합)을 주도하고 있으며, 100년 전쟁을 치뤘던 영국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지만, 양차 세계대전을 치뤘던 독일과는 사이가 좋다. 프랑스는 본토뿐만 아니라 5개의 해외 자치주(과달루프, 기아나,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셍 피에르 에 미크롱)와 해외영토(뉴칼레도니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왈리스-푸투나 제도, 마이요트 등)를 소유하고 있다.

항공
우리나라에서 프랑스로 가는 직항편은 파리이며 대한항공, 아시아나, 에어 프랑스가 운항하고 있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도 여행할 수 있으며 유럽의 대도시를 이용하여 파리 이외의 지방도시로의 여행도 가능하다.

면적 : 54만 3965㎢

수도 : 파리

인구 : 6735만명(2008년)

정치형태 : 대통령제

종교 : 천주교 83%, 개신교 2%, 유태교2%, 회교 5%

주요도시 : 파리, 리용, 마르세이유, 니스, 보르도 등

주요민족 : 골(Gaule)족으로 알려졌으나 역사적, 지리적으로 여러 민족이 유입 혼합되었다.

주요언어 : 프랑스 어

기후
프랑스는 해양성 기후, 대륙성 기후, 지중해성 기후의 유럽기후를 다 나타낸다. 여름에는 그다지 덥지 않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으며 농사짓기에 딱 좋은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15~20℃이고 7월 평균기온이 20℃로 가장 높으며 겨울 최저 평균기온은 2℃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800mm정도이다. 봄, 가을은 짧으며 이 시기 봄에서 여름 사이가 녹음이 짙은 북프랑스로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여름엔 30℃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만큼 여름날씨가 짜증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여름이라도 상당히 서늘한 때가 있기도 하다. 겨울철이 우기인데 낮엔 잔뜩 흐리다가 그냥 맞아도 될 정도로 밤에 이슬비가 촉촉히 내린다. 일교차가 크고 지역에 따라 기온이 많이 다르므로 미리 알아보고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Comment allez-vous?/Je vais bien, merci 꼬망 딸레 부?/쥬배 비앙, 멕시
의 미 : 안녕하십니까?/네, 좋습니다.

현지어 : Je ne parle pas francais 쥬느 빠흘르 빠 프랑새
의 미 : 나는 프랑스어를 잘 못 합니다.

현지어 : Combien? 꽁비앙?
의 미 : 얼마입니까?

현지어 : Quest-ce que c'est? 께 스 끄 쎄?
의 미 : 이것은 무엇입니까?

현지어 : Merci/Merci beaucoup 멕시/멕시 보꾸
의 미 : 감사합니다./대단히 감사합니다.

관광제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든 프랑스 요리 한가지 정도는 즐겨볼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요리로 푸아그라는 전재요리로 살이 통통한 거위 간을 이용하여 만든 요리이다. 에스카리고는 달팽이 요리로 전채요리로서 달팽이를 데친 것에 마늘, 파슬리, 버터를 넣어 구운 음식이다. 먹을 때에는 왼손으로 집게 같은 도구와 오른손은 꼬챙이로 내용물을 꺼내 먹는다. 쇠고기 포도주 찜은 일반적으로 가정집에서 흔히 먹는 음식으로 부르고뉴식 쇠고기 요리를 의미하는데 홍당무, 양파, 샐러리, 표고버섯, 향신료를 포도주에 버무려서 찐 음식이다.

프랑스 요리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북 프랑스는 음식을 조리 할 때 생크림, 우유,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많이 사용하고, 남 프랑스는 매콤한 고추, 토마토를 많이 사용한다. 또마뜨 파르씨는 동남부 지방인 프로방스의 전통음식으로 토마토의 윗부분을 잘라 속을 파낸 후 돼지고기와 양파를 다져 채운 후, 오븐에 구워 낸 것이다. 노르망디 지방의 전통음식인 물르 마리니에르는 홍합을 백포도주에 쪄낸 것으로 국물없이 바싹 익혀 알맹이만 소승에 찍어서 먹는다. 크레프 오 프뤼 드 메르는 부르타뉴 지방의 전통음식으로 우유, 계란, 밀가루를 섞어 얇게 부쳐서 각종 해물을 싸서 먹는다.

요리와 함께 식사예절을 익혀두어 세련된 여행을 하도록 한다.
식사를 할 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실례를 범하는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얘기나 주변의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묻는 다거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주의한다. 프랑스는 보르도 지방에 와인과 꼬냑으로 유명한 주류가 나오나 다른 음료를 마셔도 괜찮다

방문적기
프랑스 여행은 봄이 가장 좋다. 하지만 4월에도 겨울 같이 추워지기도 하고, 해안 휴양지들은 5월 중순이 되서야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한ㄷ. 겨울에도 쾌적하지만. 10월 말쯤 되면 좀 싸늘 한 감이 있다.

역사
로마가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았고, 결국 5세기 말 프랑크계 살리족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하였고, 서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을 차지하였다. 살리족은 6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지방을 장악하였고, 8세기에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이어지면서 중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카를 대제시대에는 로마교회와 상호협조 속에 학문과 예술을 꽃피는 계기로 서로마 황제란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카를대제 죽음으로 귀족과 왕가의 권력 싸움이 벌어졌으며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 초반에는 힘이 약했으나 1328년까지 존속하면서, 플랑드르ㆍ부르고뉴ㆍ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봉건적 지배체제를 확립함으로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은 1337-1453년 백년전쟁으로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유발시켰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서 굳게 자리하였으며,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하였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리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로 프랑스 영토는 오늘의 영토의 면적을 갖게 된다. 백년전쟁을 통하여 관료제의 정비, 조세개혁, 군창설 등으로서 국민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 속에 초기자본주의적 주의를 가슴속에 품는다. 하지만 도시 수공업자, 농민, 하급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신교 운동은 종교전쟁을 불러온다.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교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면서 결말을 이른다.

이 혼란 속에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에 올랐으나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낭트 칙령을 공포하고 위그노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 17세기 추기경 리슈리외와 마자랭같이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와을 보필하면서 유럽의 최강국으로 된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중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몄으며 태양왕을 자임함으로 프랑스의 절대왕권시대로 접어든다.

18세기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를 거듭하면서 프랑스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면서, 1789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부르봉왕조를 탄압시킨다. 이 후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부르봉왕조시대란 "앙시앵레집(구제도)시대를 무너뜨린다. 1789년에 루이왕조에 대한 불만을 느낀 신흥시민계급이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함으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맞게된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혁명 후 프랑스는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암투 속에 암흑정국을 빚어낸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정권이 이전되었고 나폴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하였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고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게된다. 이 후에 프랑스는 왕정의 반동정책과 신흥계급의 혁명적 열기로 1830년에 7월 혁명에서 1848년 2월혁명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기 프랑스 근대국가의 기초를 확립한 시기로 시민들의 봉기에 의한 선거권이 보장되었고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헌법이 성립된다.

공휴일/축제
신정(1.1)
부활절
노동절(5.1)
승전기념일(5.8)
승천일
성신강림일
혁명기념일(7.14)
성모승천일(8.15)
만성절(11.1)
휴전 기념일(11.11)
성탄절(12.25)

국제전화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대도시에서는 카드식 공중전화가 대부분이며 전화카드는 우체국의 전용창구나 담배가게에서 판다. 공중전화는 지하철역내, 현대식 버스 정거장, 카페안, 거리 등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주택가에는 상대적으로 공중전화가 적다.
수신자 부담 전화는 한국통신 0800-99-0082와 데이콤 0800-99-0182를 이용하면 된다. 한국교환원과 연결이 되므로 편리하다.

미용실
시네헤어숍16, rue Duvivier 75007 Paris / Tel. 01 47 53 03 36

쥬베 rue des Moines 75017 Paris / Tel. 01 42 29 33 82

Invites 13, rue Ginoux 75015 Paris / Tel. 01 45 77 99 98

이경연헤어숍 163 rue des S?vres 75015/ Tel. 01 43 06 45 91

강&리미용실 19 rue Daniel Stern 75015/ Tel. 01 45 78 60 33

머리허니 11 rue Edouard Manet 75015/ Tel. 01 44 24 82 25

블루헤어 22 Av F?lix Faure 75015/ Tel. 01 40 60 08 64

우편
우체국(LA POSTE)
-업무시간 : 평일 8시-19시(토요일은 12시까지)
-우표는 담배가게에서도 판매하며 우체통은 노란색으로 길거리나 건물벽에 부착되어 있음.

중앙우체국
-휴일없이 24시간 업무(국제전화, 전보 및 기타 우체국 업무)
-주소 : 52 rue du Louvre 75001 Paris(루브르 박물관 부근)

유용한전화번호
▣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주소 : 125, rue de Grenelle 75007 Paris (지하철 13번선 Varenne)
전화 : 01- 4753- 0101
▣ 긴급 연락처
경 찰 : 17
소방서 : 18
구급차(SAMU) : 15
SOS 의사 주간 : 1-4707-7777 / 야간 : 1-4337-7777
재불 한인회 : 1-4250-9966
KOTRA : 1-4225-0957


전압 및 주파수
220V, 50Hz. 2핀 방식에 간혹 접지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3개의 핀이 있는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콘센트에 접지를 위한 쇠막대가 달려 있는 경우가 있으니 플러그 손잡이 부분이 동그란 경우에는 미리 어댑터를 준비해야 한다.


치안
치안은 안전한 편이지만 유럽의 웬만한 도시치고 소매치기가 없는 곳은 드물다. 파리역시 그런 곳 중의 하나다. 특정지역의 심야시간대를 빼고는 전반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특히 관광객이 집중되는 지역인 에펠탑, 개선문, 오페라,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 등은 소지품이나 귀중품을 항상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시내 보행 시에는 집시 등 제 3국인의 접근을 경계하고, 파리 시내 밤 관광의 경우 삐갈거리 등 유흥가 출입시 바가지 요금을 강요당하거나 또는 업소의 종업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출입을 자제하는 것이 특히 요망된다.

통화
유로화를 사용한다. 2008년 4월 현재 1유로는 1526원.

한국으로 전화
프랑스의 공중전화는 동전식과 카드식 2종류가 잇는데 요즘에는 거의 카드식 공중전화로 대체되었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 때는 00(국제접속번호)+82(한국 국가번호)+0을 뺀 지역 번호+상대방 전화번호를 누르거나 교환원을 원하거나 후불카드를 이용할 경우에는 한국통신 080-099-0082, 데이콤 0900-99-0182, 온세통신 0800-91-3648을 누르고 안내방송에 따른다.

주의사항
프랑스에서 팁은 Pourboire라고 함. 택시에서 수하물은 주행 요금과는 별도로 요금의 10-15% 정도 가산. 호텔계산서에도 대개 10-15%의 서비스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Service Compris'라고 표시되어 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도 요금에 서비스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미국식의 팁과는 다른 개념이다. 서비스를 받은 경우 거스름돈 중에서 잔돈(1-5유로)을 팁형식으로 지불하는 것이 관례이다.

비자
한국민은 프랑스와의 단기체류비자 면제협정에 의해 비자 없이 3개월간 체류할 수 있다.

버스
보통 기차가 다니지 않는 지역을 운행하므로 장거리보다 단거리 버스인 경우가 많다. 티켓은 차에 오를 때 운전기사로부터 구입한다.

철도
프랑스의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프랑스 철도패스는 유럽이나 러시아, 터키,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여행객은 이용할 수 없다. 여권의 영문이름과 동일하게 예약한 후 이용하고 발권한 후 6개월 이내에 사용해야 한다. 다만 사용하지 않은 패스에 대해서는 1년 안에 일정의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이 가능하다.
패스는 1개월이내에 3일동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8일을 더 연장할 수 있다. 물론 연장시 추가 요금을 내야하며 요금은 1등석 2등석의 여부 성인과 26세 미만등의 조건으로 구분된다. 2004년 현재 1등석 성인요금은 $220이며 26세미만은 $165이고 1등석을 하루 더 추가하면 성인으 $32을 내야한다. 요금은 매년 변경되므로 출발시 확인하는게 좋다.

택시
호텔 리셉션에서 호출이 가능하고, 공항, 기차역 및 시내 곳곳에 택시 정류장이 있다.

프랑스는 해양성 기후, 대륙성 기후, 지중해성 기후의 유럽기후를 다 나타낸다. 여름에는 그다지 덥지 않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으며 농사짓기에 딱 좋은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15~20℃이고 7월 평균기온이 20℃로 가장 높으며 겨울 최저 평균기온은 2℃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800mm정도이다. 봄, 가을은 짧으며 이 시기 봄에서 여름 사이가 녹음이 짙은 북프랑스로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여름엔 30℃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만큼 여름날씨가 짜증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여름이라도 상당히 서늘한 때가 있기도 하다. 겨울철이 우기인데 낮엔 잔뜩 흐리다가 그냥 맞아도 될 정도로 밤에 이슬비가 촉촉히 내린다. 일교차가 크고 지역에 따라 기온이 많이 다르므로 미리 알아보고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시차 : -8시간



▶ 니스 [Venice]

우리나라와 달리 햇빛을 보기 어려운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양도시가 바로 프랑스의 니스(Nice)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천사만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꼬따쥬르의 중심에 있는 도시로 사시사철 햇빛이 비추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아름다운 도시이다. 이곳의 아주길고도 아름답다운 해변과 깊고도 푸른바다를 본 관광객이라면 아마도 다시한번 이곳을 찾고 싶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교육
니스에는 1933년에 상트르위니베시테르메디테라네앙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1965년에는 법학과,과학과,문과를 갖춘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국제적인 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1933년에 설립되어 시인인 폴 발레리가 1대 총장을 지낸 상트르위니베시테르메디테라네앙대학교에서 현대문제와 언어학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산업
유럽에서 손꼽히는 관광도시인 니스의 관광사업은 여름, 겨울의 구별없이 니스의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을 자리잡은지 오래이다. 이외에 니스의 주요한 산업으로 식품가공업과 올리브 기름, 증류주, 향수 제조업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 도입된 신기술 산업인 전자 정밀기계업은 니스의 또다른 주요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 디종 [Dijon]

디종(Dijon)은 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중의 하나로 과거에 500여년동안 부르고뉴 공화국의 수도였던 이유에 시내의 중심부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역사가 있음에도 디종시내의 거리는 이러한 우아함이나 장엄한 분위기 보다는 신선하고 산뜻한 이미지가 많이 풍기는데, 그것은 이곳에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포도주 생산지역인 황금해안의 포도밭으로 이 일대를 여행하는 관광객의 출발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육
디종에 위치한 교육기관으로 가장 유명한것은 물론 디종 대학교이다. 1722년에 세워진 디종 대학교에는 의과대학과 법과대학 그리고 자연과학대학 및 문과대학이 있는 이 지역 최고의 종합대학이다. 1731년부터 주교구가 되었다.

산업
디종은 프랑스의 상업의 도시이자 관광의 도시이며 또한 교통통신의 중심지인 도시이다. 이러한것 이외에 이곳 디종은 주조업(鑄造業)과 자동차 산업, 기계및 전기 공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또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부르고뉴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리옹 [Lyon]

파리와 마르세유에 이은 프랑스 제3의 도시인 리옹(Lyon)은 고대로부터 프랑스의 요충지로 번영해 왔었다. 2000년의 오래된 도시인 만큼 리옹 시내 근교를 둘러보면 로마시대의 유적이라든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쉽게 보인다. 또한 이곳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식도락가들로 인하여 세계적인 식도락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손강의 서쪽이 구 시가지이며 론강 주변의 광활한 지역이 신 시가지다. 그리고 론강과 손강이 사이는 벨쿠르 광장과 시청사 등이 있는 리옹의 중심가이다.

산업
상업, 금융 의 중심. 이탈리아의 기술도입으로 시작된 직물 산업으로 번영하여 현재는 방직외에 화학, 기계 공업도 성장하여 매년 국제 견본시장도 개최하고 있다.




▶ 마르세이유 [Marseille]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지중해 최대의 항구 도시가 마르세유(Marseille)이다. 과거 마르세유는 그리스의 식민지였으나 훗날 상업도시로 번영해 왔던 곳으로 다른 항구 도시와 마찬가지로 항구도시만의 독특한 향수가 느껴지며 개방적인 곳이다. 마르세유에는 관광명소가 적은 편이지만, 매력적인 거리를 걸어다니다가 마르세유에서 유명한 부이야베스(생선스프류) 요리를 맛보는 것이 이곳 마르세유의 또하나의 매력이다.




▶ 보르도 [Bordeaux]

프랑스의 남서부 아키텐(Aquitaine) 지방 지롱드 주의 주도로서 갸론느(La Garonne)강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점령기 이래 육상 및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 화려한 건축물들이 많이 있어 과시적인 면모를 지닌 도시이다. 현재 보르도의 도로망은 19세기 초반에 건립된 껭꽁스 대광장(Esplanade des Quinconces)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으며, 18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많은 아름다운 도시로서 베르사이유와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워프(Anwerp)를 결합되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보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포도주라고 할 수 있다. 보르도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중요한 도시인데 보르도 포도주의 분류상 36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며, 각 지구마다 여러 개의 코뮌으로 나누어진다. 코뮌 내에는 샤토라고 불리는 포도원들에서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몇몇 샤토를 돌아보며 견학하고 시음도 해 볼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보르도는 대서양 연안의 항구 도시로서 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는 스페인이 있다. 보르도시는 프랑스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지롱드파, 몽테스키외, 몽테뉴와 같은 유명한 사상가들을 낳은 숭고한 정신이 깃든 도시이며, 르네상스 시대 문화와 예술을 간직한 도시이자 최첨단 항공 산업 및 우주산업 등이 발전한 초현대적인 도시이다.

교육
보르도에는 보르도대학교(Universites de Bordeaux)를 비롯하여 많은 교육기관이 있다. 보르도 대학교는 4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총 8만여명의 학생이 있다. 보르도 제1대학교에서는 과학,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과학을, 제2대학교에서는 의학, 약학, 심리학, 사회학 등을, 제3대학교에서는 문학, 철학, 역사, 언어 등을, 마지막으로 제4대학교에서는 법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담당한다.

또한 보르도에는 기계, 전기, 컴퓨터공학 등을 연구하는 연구소와 미디어,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소, 해양생물연구소(Institute of Marine Biology), 와인연구소(Faculty of Wine), 핵연구센터(Centre of Nuclear Studies)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기관들이 많이 있으며, 각 전문분야별 다양한 단과대학들이 있다.

산업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 집산지로서 보르도의 주요한 산업은 당연히 포도주 생산이다. 포도주 이외에도 보르도에는 많은 산업이 발달해 있는데, 최근에 첨단 과학공장이 포도밭에 건립되는 등 보르도는 항공, 우주, 군비산업의 본거지이다. 옛날부터 무역업이 성행하였으며, 전통적인 식품가공업과 가구산업, 정유업, 석유화학산업, 제약업 등의 산업시설 및 포드자동자 공장이 있다.

보르도는 일조시간이 길고 온난한 기후로서 대체로 우리 나라에 비해 겨울에는 따뜻하며, 여름에는 시원한 편이다. 연중 6-9월 사이가 가장 더울 때이며, 12월-2월 사이가 가장 추울 때이다. 연중 고른 강수량을 보이고 있다. 보르도 주변은 신의 선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포도주 제조에 적당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 몽셍미셀

프랑스 바스노르망디 지방 망슈(Manche) 주에 있는 잿빛의 모래땅에 떠 있는 작은 바위섬이며 중세에 수도원이 생긴 이래 순례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성역으로서 노르망디 해안에 있다. 몽생미셸은 바다에 둘러 싸여 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경이로운 해안중의 하나로서 노르망디(Mornandie)와 브르딴뉴(Breta훋) 사이, 꾸에농강(le Couesnon) 하구에 장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간에는 거대한 모래둑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만조일 때 섬이 되며, 육지와 900m 길이의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이 섬은 시시이 숲의 가운데 솟아있는 산이었는데, 커다란 해일로 인해 산이 육지와 떨어져 섬이 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몽 똥브(Mont-Tombe)로 불리웠던 섬에 8세기에 작은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시작된 몽생미셸은 13세기에 대형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순례지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중세 유럽 프랑스의 주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몽생미셸은 거의 원형으로서 원주가 약 900m이며 몽생미셸 만에 약 88m의 높이의 화강암 노두가 날카롭게 솟아 있다. 섬에서의 조망도 매우 아름다운 반면, 방파제에서 섬을 올려다 보았을 때의 광경도 매우 장엄하다. 또한 섬의 주변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수가 가장 커다랗게 오는 시기는 만월과 초생달의 36-48시간 후라고 하는데, 그 때의 조수간만의 차는 무려 15m 정도라고 한다.

몽생미셸에는 섬의 꼭대기에 대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입구에서 수도원까지는 대로(Grand Rue)로 연결되어 있다. 이 대수도원으로 향하는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에는 있는 건물들은 주로 호텔, 레스토랑이나 관광기념품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 15세기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건물도 있다. 이 건물들이나 성벽에 올라가면 섬주위의 모래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 베르사이유

프랑스 북부 광역 파리지방(Ile De France) 이블린 주의 주도로서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 떨어진 도시이다. 베르사이유시는 현재 파리시의 교외거주지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이다. 17세기에 루이 14세(Louis XIV)가 건립한 베르사이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도시로서,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서 외국 원수들이 방문했을 때 묵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찬란했던 절대왕권의 상징인 베르사이유궁은 화려함의 극치로서 17-18세기에 프랑스의 정치적 수도이자 통치 본부였다.

산업
베르사이유 시에는 육군 병원과 육군 공병/포병 학교가 있는 중요한 군사도시이기도 하며, 증류주 제조업, 피혁업, 시장용 원예업 등이 시의 주요한 산업이다.




▶ 샤모니 몽블랑 [Charmonix-Mont.Blanc]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인접하여 있는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로 몽블랑 기슭의 해발 1,038m에 위치한 도시이다. 1922년까지 공식적으로는 지명이 샤모니 였으나 이지역 사람들의 몽블랑에 대한 애착으로 지명을 '샤모니 몽블랑'으로 정식으로 변경하였다. 샤모니 몽블랑(Chamonix-Mont-Blanc)은 1924년 동계 올림픽을 시초로 각종 국제경기가 개최 되었으며, 스케이트 등 동계 스포츠시설이 잘 되어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알프스 등산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몽블랑 등의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에귀뒤미드 봉까지 올라가는 로프웨이가 있고 길이 11.5km의 몽블랑 터널을 통과하면 이탈리아 쪽으로 갈 수 있다. 한편 이곳 샤모니 몽블랑은 산악스포츠와 스키가 유명한 곳이어서 국립 스키학교와 등산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 스트라스부르 [Strasborg]

독일과의 국경이 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국경 도시인 이곳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라인강의 지류인 일 강에 에워싸인 아름다운 오래된 도시이다.
이 곳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에서도 자기나라 언어를 잃어 버린 상황이 묘사되어 나오는것 처럼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독일의 영향을 짙게 받아왔다. 그 예로 이곳은 독일의 영향을 받은 알사스 방언을 사용한다. 가끔 일상용어로 독일어를 사용하기도 한 이곳은 프량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즈'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Petite France는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이다. 이곳은 유럽의회의 소재지로 알려지면서 세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교육
Universities of Strasbourg Ⅰ, Ⅱ, and Ⅲ.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국립 자치고등교육기관으로 고등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1968년에 제정한 고등교육기본법에 따라 옛 스트라스부르대학교의 뒤를 이어 1970년 설립되었다. 원래 대학교는 1537년 스트라스부르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당시, 개신교에 의하여 독일 김나지움(고전중등학교)으로 설립되었다. 이 김나지움이 1566년 아카데미가 되었고 1621년 대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초기부터 종교개혁, 특히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인 장 칼뱅의 영향을 받았으며, 알자스 주(지금의 바랭)의 통치권을 두고 일어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계속된 분쟁의 영향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환영했지만 이 대학교는 1792년까지 계속 탄압을 받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독일에 양보했고 스트라스부르대학교는 독일대학교(1872~1918)가 되었다. 1919년 스트라스부르 시는 다시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대학교는 1896년의 포고령에 따라 프랑스의 자치대학교가 되었다. 1939~45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점령하에 있게 되자 이 대학교의 학부는 프랑스 중부에 있는 클레르몽페랑대학교로 옮겼다가 1945년 다시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다.

이 학교의 주요설립자인 요한 슈투름(1509~89)은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을 40년간 이끌었다. 학습과정에 등급을 매겨서 가르치는 그의 교육방법은 전유럽의 중등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시인·극작가·소설가·과학자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177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루이 파스퇴르(1822~95)는 1849년 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발효작용에 관한 연구를 했다.
독일의 철학자·의사·음악가·신학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1905~13년 이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슈바이처는 이 대학교에서 세인트토머스신학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이 대학교는 행정과 학문에서 각각 독립성을 지닌 많은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루이파스퇴르대학교(스트라스부르 제1대학교)는 의학대학과 과학대학이며 많은 연구소·관측소를 부설하고 있다. 인문과학대학교(스트라스부르 제2대학교)는 원래의 대학을 전환시킨 것이다. 어학·문학·철학·신학(가톨릭·개신교)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기타 관련연구소도 부설되어 있다. 그중에는 외국인 학생을 위한 프랑스 연구소도 있다. 스트라스부르 제3대학교는 법학·정치학·사회과학 대학교이다.




▶ 파리 [Paris]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며, 유럽 최대의 대도시권 가운데 하나인 도시로서 2,000여년 전 세느강(Seine River)의 시테섬에 세워졌다. 세느강(Seine River)은 파리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며 시를 강의 북쪽(Rive Droite, 하류를 바라볼 때 우안)과 강의 남쪽(Rive Gauche, 좌안),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북쪽은 상업이 성하고, 남쪽에는 소르본 대학교 등 교육 기관이 많아 문화 활동이 활발하다.

파리시는 영국 해협에 면한 세느강 어귀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75㎞ 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일드프랑스(Il de France) 지방에 속한 8개주 가운데 하나로서 파리분지로 알려진 비옥한 농업지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파리의 지형을 살펴보면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쪽에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고, 남쪽에 생트 쥰비에브 언덕 및 까이유 언덕, 서쪽에 샤이오 언덕, 그리고 동쪽에는 벨빌, 메닐몽땅, 샤론과 같은 언덕이 있다. 파리의 외곽은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여 '파리의 허파'라고 불리는 너도밤나무와 참나무의 거대한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난 몇 백년간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며, 현재도 세계의 예술, 패션, 유행 등을 선도하는 주요한 도시이다. 세계 각 국의 사람들은 파리를 일컬어 '예술의 도시', '패션의 도시', '빛의 도시', '낭만과 고독이 함께 숨쉬는 도시', '꿈과 사랑의 도시' 등으로 부르고 있다. 파리는 연간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 최대의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파리시는 2,000년의 찬란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중요한 교통망의 교차점에 있어 성장을 계속해왔다. 파리시는 크게 중심부의 시테섬과 세느강을 중심으로한 좌안과 우안으로 구분된다. 또한 파리는 각 구마다 고유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총 20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구들은 파리의 심장부에서부터 달팽이의 소용돌이꼴로 번호를 매겨, 제1구, 제2구 등으로 부른다.

파리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파리는 특히 밤이 더 아름답다고 하는데, 연인들이 밤새워 얘기를 나누는 세느강변,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한 불빛 등은 파리의 꿈과 낭만을 보여준다. 또한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숲이 우거져 있는 도시 중 하나로서 역사적인 건축물들과 현대식 빌딩 사이로 수많은 정원과 공원 등 녹지대가 조성되어 있다. 무수히 많은 역사적인 건축물 및 기념물, 박물관, 초현대적인 패션 및 예술 등이 어우러져 있는 파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봐야만 하는 도시이다.

교육
파리에는 프랑스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립학교가 대부분으로서 초등, 전기중등, 후기중등의 3단계가 있다. 파리는 오래전부터 세계 고등교육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여 왔는데, 현재 파리 제1대학교(Universite de Paris I/Universite Pantheon Sorbonne)부터 파리 제13대학교(Universite de Paris XII/Universite Paris Nord-Villetaneuse)까지 13개의 국립대학교가 있다. 그외에도 파리에서 유명한 교육기관으로서는 고등상업학교(Ecole des Hautes Etudes Commerciales/HEC), (Ecole Normale Superieure), 국립행정학교(Ecole Normale d'Administration/ENA) 등이 있다.

산업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재정적, 상업적 중심지로서 많은 국제적 기업들이 상업 및 금융, 서비스업부문에서 활동하는 본거지이다. 프랑스의 대기업들은 주로 거래은행 및 관련 정부부처가 있는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외국의 주요한 금융기관 및 서비스기업들이 파리에 지사를 두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공업을 위한 시설은 지방으로 이전되었지만 여전히 파리는 프랑스에서 주요한 공업도시이다.

파리의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서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도 꽤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약 10℃정도로서 가장 추울 때인 1월의 평균기온은 약 3℃, 가장 더울 때인 7-8월의 평균기온은 약 18℃이다. 파리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619mm로서 여름과 가을에 다소 많은 편이지만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연중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약 35일 정도이며, 평균 15일간 눈이 내린다.


공항안내
샤를 드골 국제공항(Roissy-Charles de Gaulle International Airport : CDG)은 시의 북동쪽으로 약 23㎞ 정도 떨어져 있는 국제공항으로서 세 개의 터미널이 있으며, CDG 1과 CDG 2 사이는 무료 셔틀버스와 에어프랑스의 코치(coach)가 운행한다.
드골 공항(Charles de Gaulle International Airport) : 에어프랑스의 리무진 버스가 15분 간격으로 공항과 파리 시내사이를 운행하고 있으며, 도시 고속철도(RER) 라인 B를 이용할 수 있다. 드골공항의 각 청사에서 도시 고속철도역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또한 파리 시티버스(RATP) 351번이 매 20분마다 샤를 드골 공항과 파리 동쪽의 나시옹 광장까지, 350번이 동역(Gard de l'Est)까지 운행하는데, 시내까지 약 50분 정도 소요된다. 3인 이상이 여행을 할 경우에는 택시를 타는 것도 편하고 경제적이다.

오를리 국제공항(Paris-Orly International Airport : ORY) : 시의 남쪽으로 14㎞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두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셔틀버스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파리의 다른 국제공항인 드골(Charles de Gaulle) 공항까지는 도시 고속철도(RER) B라인이 연결되어 있다.
오를리 공항(Paris Orly Internation Airport) : 오를리 공항에서 앵발리드까지 리무진 버스가 운행되는데,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또한 포르트 드 렁지스(Porte de Rungis)에서 오스테를리츠역(Gare d'Austerlitz)까지 운행하는 도시 고속철도(RER)가 있으며(라인 C), 파리 시티버스(RATP)와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버스
파리의 버스 노선은 매우 복잡하여 관광객이 이용하기에는 약간 어렵지만 다양한 노선망을 갖추고 있어서 파리 시내 전경을 감상하며 여행하기에 좋으며, 지하철과 버스 공용 승차권을 사용하므로 편리하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표를 파는 곳이 없으므로 지하철 매표소에서 사둬야만 한다. 파리의 버스는 내리거나 타고자 하는 승객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므로 주의해야 한다.

파리시내를 여행하다 다리가 아플 경우 버스표 한 장으로 시내관광을 나서도 괜찮은데, 샹 드 마르스에서 출발하는 69번 버스를 타면 루브르 박물관, 시청사, 생 폴 구역,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등 유명한 관광명소를 지나치며 볼 수 있다.

전철
메트로(Metro)라고 불리는 파리의 지하철은 13개 노선에 368개의 역이 있는 파리여행시 가장 빠르고 저렴한 교통수단이다. 파리의 지하철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서 노선이 다소 복잡하지만 노선을 번호와 빛깔로 구분할 수 있으며, 티켓은 역 주변 가게나 지하철 매표 창구에서 구입할 수 있다. 파리의 지하철은 문이 닫히는 것은 자동이나 열 때는 타거나 내릴 사람이 문을 수동으로 열어야 한다.

철도
도시 고속철도(RER)은 파리 시내와 교외를 연결하는 고속 전철로서 A, B, C, D 4개의 노선이 일 드 프랑스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철과는 달리 목적지마다 요금이 다르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A 노선은 파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노선으로서 유로 디즈니랜드로 갈 수 있으며, B 노선은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C 노선은 오를리 공항 및 베르사이유 시로 연결된다.

택시
택시(Taxi)는 아무 곳에서나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 타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택시정류장(Stasion de Taxi)에서 타야 한다. 주요한 교차로, 지하철역, RER역, 기차역 등에 택지정류장이 있다. 기사 옆 조수석에는 손님이 않을 수 없으므로 뒷좌석에 3명만 탈 수 있다. 파리 시내에서 택시타기 가장 좋은 곳은 샹젤리제 거리로서 이곳에서는 중앙선에 택시 정류장이 있어 택시들이 거리 한가운데 줄지어 있는 이색적인 풍경도 구경할 수 있다.
파리의 택시 요금체계는 탑승지역과 시간에 따라 A, B, C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지며, 보통 택시 요금의 10% 정도를 팁으로 준다. 또한 트렁크에 짐을 실을 경우 짐 한 개당 9프랑 정도의 할증요금이 추가되므로 큰 짐이 아니라면 직접 들고 타는 것이 좋다.

페리
파리시를 관광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세느강의 관광유람선은 바토 무슈(Bateaux-Mouches)와 바토 파리지앵(Bateaus-Parisiens)이 유명한데, 바토 무슈는 알마 교 오른쪽 선착장에서, 바토 파리지앵은 에펠탑 바로 옆의 이에나 교 왼쪽 선착장에서 각각 출발한다.


파리의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서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도 꽤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약 10℃정도로서 가장 추울 때인 1월의 평균기온은 약 3℃, 가장 더울 때인 7-8월의 평균기온은 약 18℃이다. 파리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619mm로서 여름과 가을에 다소 많은 편이지만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연중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약 35일 정도이며, 평균 15일간 눈이 내린다.



샹송
 
샹송이라고 하면 언뜻 프랑스의 대중가요를 연상하게 되나 음악사상으로는 11∼13세기의 단선율(單旋律) 샹송, 16세기의 다성적(多聲的) 샹송이 보다 중요하다.

샹송은 중세의 음유시인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등의 기사가요(騎士歌謠)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13세기에 전자는 남프랑스에서 프로방스어로, 후자는 북프랑스에서 옛 프랑스어로 십자군과 영웅들의 이야기, 세속적인 사랑 등을 그려 단선율의 가곡으로 만들어서 불렀다. 이 음유시인들의 가곡은 14세기에 이르자 다성음악의 기법을 도입, 아루스노바기(期)의 기욤 드 마쇼 등의 다성샹송을 낳고, 비를레 ·롱도 ·발라드 등 여러 음악형식의 정형이 확립되었다.

15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기욤 뒤파유, 질 방슈와 등도 이와 같은 정형에 바탕을 두고 궁정적인 전아한 사랑을 노래하였다.

16세기에 이르자 프랑스 샹송의 성격은 일변하여 서민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다. 곧 정형이 배격되고 자유스러운 형식에 비교적 단선율적이고 리드미컬하며, 약간 비속한 가사로 서민적인 생활감정을 여유 있게 노래하게 되었다. 클레망 잔느캥, 클로 드 세르미슈 등의 합창샹송, 특히 잔느캥의 《새의 노래》 《전쟁》 등의 의음(擬音)효과를 사용한 표제샹송은 유명하다. 이때의 샹송은 약 25년간 파리에서만 1,500곡이 출판되었다고 하니 그 보급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초 파리에서는 센강에 새로 가설한 퐁뇌프 다리에서 거리의 가수가 정부의 고관이나 귀족을 풍자하는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 그들은 노래를 직업으로 삼은 최초의 가수였고, 따라서 퐁뇌프 다리는 샹송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노래로 풍자하는 것을 샹소네라고 하며 그 작자 겸 가수를 샹소니에(여성의 경우는 샹소니엘)라고 불렀다. 샹소니에는 부르는 노래의 작곡은 다른 사람이 해도 상관없으나 가사만은 반드시 자작이어야 하고 풍자를 담아야 하며 재치가 넘쳐야 했다. 그래서 샹송가수 중에서도 샹소니에는 특별히 우대되었다.

또한 샹송을 발전시킨 온상 구실을 한 것은 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던 찻집(카페 콩세르)이었다. 찻집은 프랑스혁명 후 파리 시민의 집합장소로 번창했는데, 1850년경 샹젤리제에 있던 ‘뚱뚱보 플루리’라는 찻집이 샹송으로 성공함으로써 카페 콩세르의 시초가 되었다. 찻집은 가수의 안정된 직장이 되고 스타의 탄생을 촉진하기도 했는데 이 때부터 노래의 테마나 가수의 스타일도 다양해졌다.

현대의 샹송은 19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여성가수 이베트 길베르는 샹송의 모범을 확립하였고, 샹소니에인 아리스티드 브뤼앙은 예술가의 집합장소인 샤느와르(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를 중심으로 하층계급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묘사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카지노 드 파리, 물랭 루주 등의 뮤직홀에서의 공연이 인기를 모았고, 1926년에는 《사 세 파리》 《발렌시아》 등을 창작하여 부른 미스탕게트와 모리스 슈발리에가 크게 활약하였다. 또 1930년에는 조세핀 베커가 《두 연인》을 히트시키고 뤼시엔 부아이에의 《사랑의 말을》이 제1회 디스크대상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매체로서의 레코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영화도 토키시대로 접어들어 《파리의 지붕 밑》(1930) 《파리제(祭)》(1933) 《마리넬라》(1936) 등 영화의 주제가인 샹송이 유행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는 현대 샹송의 개화기였다고 하나, 화려한 노래와 함께 세태를 반영한 어두운 노래도 많이 나왔고 리나 케티의 《기다리겠어요》가 평화에의 기대를 담았다 하여 크게 히트했다. 이본 조르주, 프레르, 다미아 등이 당시의 3대 샹송가수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감정을 담은 감상적인 노래가 유행하고, 종전(終戰)과 함께 《장미빛 인생》(1944) 《사랑의 찬가》(1949)를 자작하여 노래한 에디트 피아프, 《낙엽》의 이브 몽탕, 쥘리에트 그레코, 레코드에서 활약한 이베트 지로, 《파리의 아가씨》를 부른 자크린 프랑수아 등 새로운 스타들이 배출되었으며, 1950년 전후의 샹송계는 공전의 성황을 보였다.

샤를 트레네는 샹송에 재즈수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질베르 베코는 다이내믹한 창법으로 젊은 팬들을 사로잡았으며, 샤를 아즈나블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50년대 후반에는 로크조(調)의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전통적인 샹송은 그 기운이 꺾이기 시작하고 조니 아리디, 실비 바르탕 등이 로크조의 노래를 불러 인기를 모았다.

60년대에 접어들자 로크조를 소화한 내용 위주의 것이 만들어졌으며 이 무렵에는 아즈나블, 아다모, 앙리코 마시아스 등이 활약하였다.

샹송의 테마는 매우 넓으며 노래하는 창법도 다양하기 때문에 특별히 정해진 분류법은 없으나 편의상 몇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샹송 드 샤름(chanson de charme)은 매혹적인 샹송이라는 뜻. 주로 사랑을 노래한 달콤한 샹송이며 대표적 가수는 뤼시엔 부아이에, 티노 로시 등이다.

샹송 레알리스트(chanson raliste)는 현실적인 샹송이라는 뜻. 생활의 고통이나 인생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엮은 노래이며, 아리스티드 브뤼앙이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샹송 팡테지스트(chanson fantaisiste)는 환상적인 샹송이라는 뜻. 자유스럽고 공상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재기가 넘치고 익살스러운 점이 많다. 대표적 가수로는 모리스 슈발리에, 샤를 트레네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활약한 마리 뒤바, 린 쿠르베 등이다.

샹송 리테레르(chanson littraire)는 문학적인 샹송이라는 뜻. 유명한 예술적 시에 곡을 붙인 것과 일류시인의 시작품을 대상으로 한 것을 말한다.

샹송은 가사가 중시되며 이야기풍의 노래가 많다. 그리고 가사도 일상회화에서 쓰는 말이 사용되고 때로는 은어도 섞였다. 곡은 쿠플레(스토리 부분)와 루프랭(반복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양자가 서로 엇바뀌어 나타난다. 가수는 작사가 ·작곡가와 더불어 존중되고, 노래의 좋고 나쁨이나 음악적인 정확성보다 그 노래를 어떻게 해석하며 얼마나 개성적인 표현으로 청중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는가에 대해 평가하였다. 또한 어떤 곡을 처음 불러 히트시키는 것을 크레아숑이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러한 전통이 지켜져, 어떤 가수에 의해 크레아숑된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프레타포르테
 
오트쿠튀르와 함께 세계적인 양대 의상 박람회의 하나인 기성복 박람회이다. 프레타포르테는 기성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인데, 복식용어로는 고급기성복을 말한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에도 기성복은 있었다. 그러나 질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값도 싼 대중품이었으므로 멋쟁이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트쿠튀르의 옷은 너무 비쌌으므로 이렇게 오트쿠튀르 수준의 기성복을 원하는 수요층이 늘게 되자 생겨난 것이 바로 프레타포르테이다. 이 기성복 박람회는 파리, 뉴욕, 밀라노, 런던 등지에서 해마다 2번 열리는데 이 박람회를 통하여 세계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창작 의상을 소개하여 세계의 패션을 이끌어간다.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하는 디자이너로는 캘빈 클라인, 조르조 아르마니, 질 샌더, 톰 포드, 안나 수이, 미우치아 프라다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이며 한국에서는 이신우, 진태옥, 이영희, 홍미화 등이 참가하고 있다. 프레타포르테의 활성화로 인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오트쿠튀르 디자이너들도 좀더 현실적인 프레타포르테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또한 프레타포르테 딜럭스, 하이 프레타포르테, 뉴 프레타포르테 등 다양한 수요층을 위한 고급 기성복 시장이 형성되었다.

프레타포르테에서 출발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앤드 캐릭터 브랜드(Designer and character brand)를 생산할 수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는 특정 디자이너의 이름을 붙인 상품을 말하며, 캐릭터 브랜드는 개성을 짙게 표출한 상품이라는 뜻이다. 1980년경부터 이와 같은 브랜드가 직영점, FC(프랜차이즈 체인), 가맹점 등을 통해 단일품 판매를 추진하여 고객층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커다란 비즈니스로 성장하게 되었다.
 


파리컬렉션
 
파리의 각 '오트쿠튀르(haute couture:고급 양장점)'가 연 2회(11월과 7월) 개최하는 작품발표회이다. 각각 그달의 마지막 월요일에 개최되며, 원칙으로 2주간의 개최기간 중 약 100∼200점의 신작을 자기점포에서 발표한다. 이 기간에는 각국의 바이어·평론가\·보도관계자 등이 오며, 작품은 문장 또는 허용된 스케치로 보도된다.

1개월 후부터는 사진·실물로 세계에 발표되며, 한편에서는 바이어의 주문에 의한 제품화가 이루어진다. 또 전년도의 '오트쿠튀르'가 '프레타포르테(prt--porter:유명 디자이너에 의한 고급기성복)'로서 발표되기도 하는데, 지금은 처음부터 '프레타포르테'를 위해서 디자인되는 일도 있다.

오트쿠튀르는 본래, 고급 재봉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는 고급 의상점의 의미를 지닌다. 시초는 나폴레옹 3세 비(妃)의 전속 드레스 메이커인 워르트(Worth)였다. 1868년에 생겼으며 전임 디자이너가 있어 계절에 앞서 고객을 위한 새로운 창작 의상을 발표하면 이것이 전세계 유행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이 신작 모드 발표회를 파리 컬렉션이라 한다. 이러한 오트쿠튀르가 60여 개소나 있으며 파리 의상점조합 사무국(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에 속해 있다. 이러한 발표회가 처음 개최된 것은 1858년 C.F.워르트에 의해서였고, 현재 활약하는 유명한 디자이너는 C.디오르·P.카르댕·C.발렌시아가·H.de지방시·P.발맹·G.샤넬 등이 있다. 최근에는 고급 주문복을 위한 의상실보다 프레타 포르테(prte  porter), 즉 고급 기성복의 오트 쿠튀르가 많아지고 있다.
 


프랑스 미술가 
 푸케 
 
 푸생 
 
 로랭 
 
 르브룅 
 
 미냐르 
 
 부셰 
 
 프라고나르 
 
 샤르댕 
 
 다비드 
 
 앵그르 
 
 그로 
 
 제리코 
 
 들라크루아 
 
 밀레 
 
 루소 
 
 모네 
 
 르누아르 
 
 세잔 
 
 쿠르베 
 
 고갱 
 
 쇠라 
 
 마티스 
 


아름다운 중세 고성
 
슈농소성   
아제르리도성   
앙부아즈성   
슈베르니성   
샹보르성   
빌랑드리성 


역사 속의 인물 
  
  잔다르크   
  
  나폴레옹 1세   
  
  태양왕 루이14세   
  
  마리 앙투아네트   
  
  볼테르   
  
  빅토르 위고   
  
  샤를 드골   
  
  로베스피에르   
  
  몽테스키외 



테제베

TGV는 프랑스어 Train a Grand Vitesse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1964년 개통된 일본 신칸센[新幹線]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고속전철로 1981년 테제베 동남선이 개통되었다. 당시에는 생프로랑탱-리옹을 연결하는 데 그쳤으며, 1983년에 리옹-파리(390㎞) 노선이 완전 개통되었다. 

그뒤 1989년에 테제베 대서양선, 1993년에 북선이 개통되었다. 대서양선은 1990년 5월 미개업 노선에서 순간 시속 515.3㎞를 기록하였다. 동남선은 1994년 파리-발랑스(538㎞)로 노선이 연장되었다.

프랑스 제1, 2도시를 연결하는 테제베 동남선이 완전 개통된 지 1년 만인 1984년에 흑자를 내기 시작하였고, 항공기 승객을 앞질렀다. 프랑스 국철(SNCF)은 계속 늘어나는 여객을 수송하기 위해 2층 열차인 테제베 듀플렉스(Duplex)를 개발, 1996년 12월 개통하였다.

이것은 일반 테제베 동남선이 시속 270㎞인 데 비해 시속 300㎞로 더 빠르다. 또한 열차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차체를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하였으며, 동력차와 2층 객차 사이의 간격을 유선형으로 메워 공기 저항이 단층 열차보다 단지 4% 높을 뿐이다.

좌석은 일반 테제베가 377석인 데 비해 듀플렉스는 516석으로 수송량이 37% 이상 늘어났다. 또한 유지·보수, 전력 공급, 소요 인원 등의 운영비가 일반 테제베보다 15%나 절감된다. 앞으로 테제베 동남선은 모두 듀플렉스로 교체될 예정이다.

한편 테제베는 2000년대 초까지 프랑스의 주요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게 될 예정이며 에스파냐,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와도 연결되고 도버해협의 해저 터널에도 들어가게 된다. 여객 전용인 테제베는 동력방식이 동력집중식으로 앞뒤의 양단(兩端) 차를 동력차로 한다. 설계속도 270∼320㎞/h, 최고속도 250∼300㎞/h이다.

한국은 1992년 프랑스 국철 및 테제베와 계약을 맺고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 동남선이 열차 1편성마다 10량을 연결한 데 비해 한국형 테제베는 20량을 연결해 좌석이 935석으로 늘어남으로써 훨씬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게 된다. 2003년 12월 서울-대구 간 개통을 목표로 시험 운행 중이며, 2010년 서울-부산 간 노선이 완전 개통될 예정이다.
 



프랑스 혁명

이 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典型)이라고 불린다. 이 경우에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을 그대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인 것이다.

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 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 %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성직자들은 국왕의 사법관료 아성(牙城)인 파리 고등법원과도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 이 왕권 내부(또는 체제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확약하였다.

-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프랑스의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회되었다. 의원 총수는 약 600명으로 특권 2신분의 300명에 대하여 평민대표도 동수였다. 혁신을 갈망하는 자유주의 귀족이나 평민의원은 모든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사안(事案)을 머릿수 투표로써 결정하자고 주장하여 부별투표(部別投票)를 고집하는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대립하였다. 6월 13일 평민의원은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로 개조하는 결의를 하고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왕권은 이에 대해 위협과 방해를 가했으나, 미라보를 중심으로 한 평민의원의 과감한 용기에 눌려 6월 말에는 전대표가 합류, 국민의회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국민의회는 7월 초에 ‘헌법 제정의회’로 명칭을 바꾸고, 마침내 국민이 바라던 헌법과 의회정치 개설에 착수하였다. 그때 왕권이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불러들여 베르사유 주변에 집결시켰으므로 파리시민에게 극도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공포를 야기시킨 형세가 되었다.

- 바스티유감옥 습격
프랑스 왕권은 1789년 7월 11일 삼부회의 최고책임자인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혼란이 발생하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각 가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여 경계하였다. 7월 14일 약 1만 명의 시민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진압차 달려온 군대도 시민의 열렬한 열기에 위압되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성(城)은 함락되고 성내의 장병은 무참하게 살육당하였다.

- 봉건적 특권의 폐지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순식간에 지방으로 전해져 각지에 격렬한 농민반란을 유발하였다. 영주의 성관(城館)과 호적·토지대장의 보관소가 습격당하고 전국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사태를 우려한 헌법제정의회는 1789년 8월 4일 밤의 회의에서 노아유 자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의 폐지를 단행하였다. 프랑스에는 비로소 법 앞에 평등한 조건이 실현되어 전국민이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보증받는 형태가 되었다. 다만, 농민에 대하여는 10분의 1세와 부역은 폐지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영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을 돈으로 되사야 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헌법제정의회는 이러한 경우, 영주 ·지주층의 이해(利害)를 대변하였으므로 지주 부르주아 편향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8월 26일 의회는 라파예트 등이 기초한 ‘인권선언’을 가결하고, 인간의 자유·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신질서의 기본적 제원칙을 명시하여 혁명의 정의(正義)를 내외에 선양하였다. 이 ‘인권선언’은 부르주아적이기는 하였지만 근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일대 기념비로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국왕의 파리 귀환
프랑스 혁명 당시 근교농촌의 혼란도 있어 가을에는 파리의 식량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파리 하층시민의 부녀자들은 1789년 10월 5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행렬을 지어 베르사유를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뒤에는 남편과 직인들이, 또 그 뒤에는 국민군의 병사들이 뒤따랐다. 저녁 때 일행은 왕궁에 도착하여 루이 16세에게 파리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룻밤을 숙영(宿營)하고 다음날 왕궁으로 난입하였다. 국왕 일가는 시민에게 포위된 채,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귀환하였다. 의회도 파리로 옮겨졌으며, 이후 왕궁과 더불어 파리 시민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 국가소유재산의 경매
프랑스 혁명 당시 의회는 신체제의 건설에 착수하여 주(州)를 폐지하고 83개의 현(縣)을 설치하는 등 수많은 행정·사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삼부회 개최의 당면한 이유이기도 한 재정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1789년 10월 10일의 의회에서 주교인 탈레랑은 교회토지 재산의 국가관리를 주장하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의회는 즉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가 30억 리브르에 이르는 교회재산을 분할 매각해서 파산의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성직자에 대해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결국 ‘제례와 호적과 도의상의 관료’로서 국가가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는 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직자도 교회를 떠나서 국가와 의회에 새삼스럽게 선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많은 성직자가 선서를 거부하고 맡은 자리를 떠나갔다. 그들 비선서 성직자야말로 최초의 혁명진영에서의 이탈자이며 동시에 최초의 반혁명적 무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를 깊이 신앙하고 있는 시민과 농민을 혁명에서 이반(離反)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 바렌 도피사건
1791년 4월 초기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인 미라보가 급사하였다. 미라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파리에 갇혀서 불안했던 왕가 일족에게 더욱더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미라보는 혁명의 추진력이긴 하였어도 입헌왕정을 신조로 삼았고, 그 뛰어난 역량과 안목에 의해서 왕가에게는 더없는 지주(支柱)로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더욱이 그는 왕비에게 매수되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그의 사망 후 도피계획이 급속히 구체화되어 국왕 일가는 6월 20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탈출하여 비밀리에 마차로 동부 국경으로 향했으나, 불운하게도 국경 근방의 바렌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당하였다.

의회는 왕을 처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였으나 민중은 간단히 납득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파와 왕정파 간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파리에서는 왕정폐지론이 급격히 대두하여 자코뱅당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시민은 7월 17일 마르스 광장에서 공화정체 수립의 서명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에게 짓밟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 입법의회
1791년 프랑스 헌법제정의회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헌법(이른바 91년 헌법)을 9월 말에 제정한 뒤 해산하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1791년 헌법에서는 일원제(一院制)의 의회를 갖는 입헌왕정이 국시(國是)로 되었고, 참정권은 규정된 금액 이상의 직접세를 지불하는 성년 남자에 한해서 인정되었다. 입법의회에서는 우익(右翼)의 푀양파, 좌익의 지롱드파가 대립하였다.

지롱드파는 베르니오, 장소네, 귀아데 등 남서프랑스 출생의 변설가들과 브리소, 콩도르세 등 파리 출생 이론가의 집합체로서 지방의 무역상·기업가\·유산시민에 지반을 두고, 혁명의 혼란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 프랑스 경제의 교란을 획책하는 여러 외국의 음모를 경계하였다. 이들은 의회를 독려하여 91년 10월 말에 해외로 도피한 에미그레(망명 귀족)에 대하여 2개월 이내에 귀국하도록 명령을 발하였다. 의회는 망명 귀족의 배후에서 줄곧 프랑스를 견제하고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파급될 것을 두려워하는 유럽 열강의 획책과 공작을 무엇보다도 우려하였다. 사실 독일에서는 혁명열이 유행병처럼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 혁명전쟁의 개막
1792년 4월 프랑스는 반혁명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2국에게 선전포고하였다. 프랑스군은 라파예트, 뒤무리에 장군 휘하에 10만의 대군을 파견하였으면서도 연전연패하고, 더구나 일선 장교의 태업도 있고 해서 총붕괴의 형세에 처하였다. 이에 분격한 파리 시민은 연일 의회로 몰려와서 패전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고, 보수파 의원의 언동을 방해하였다.

6월 20일 시위로 들어간 수천의 군중은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왕을 포위하고 요구조건을 강력히 내세웠으나, 루이 16세의 의연한 태도에 눌려서 조용히 물러났다. 입법의회는 7월에 전국민에게 격문을 발표,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각지에서 청년들이 애국적 정열에 불타 의용군으로 참가함으로써 파리는 다시 소란해지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재차 시민봉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국왕과 왕비의 체포
1792년 8월 9일 밤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地區委員)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령하고 혁명의 코뮌(commune:自治市會)을 수립하였으며,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사살하고 전지구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8월 10일 이들의 호소에 호응한 수만의 시민이 집결하여 튈르리 궁전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왕궁의 스위스 용병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국왕 일가는 난을 피하여 입법의회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의회도 시민대중으로 포위당하여 국왕 일가는 코뮌에 인도되고, 왕권도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이후 약 1개월간 파리에는 정부·의회\·코뮌의 3권이 분립하여 시민생활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9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전진한다는 소식과 함께 사제(司祭)를 주로 하는 반혁명 용의자가 애국자의 손에 의해 대량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제1공화정의 형성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다음날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성립되었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정의 폐지, 공화정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이전의 좌익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서 우익으로 돌았고 좌익에는 새로이 산악파(山岳派)가 등장하였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처음부터 적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항쟁하였다. 지롱드파가 의회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경제·지방자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공화파라면, 산악파는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려는 과격파였다. 전자가 롤랑 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계몽된 신사의 단체라면, 후자는 파리의 코뮌 자코뱅 클럽을 보루로 하여 실력으로 계급투쟁을 관철하려고 하는 애국자의 당파였다.

- 루이16세의 처형
프랑스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은 특히 국왕의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파는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투표에서 패하여 마침내 산악파의 주도하에 국왕은 1793년 1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의 죽음은 지롱드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하의 프랑스에도 용이치 않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영국·네덜란드\·에스파냐·나폴리\·로마교황 등이 왕의 처형 사실을 알고 잇따라 참전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함께 대(對)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방데현(縣) 등 서부 후진지대에서는 왕당파의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 지롱드파의 패배
1793년 3월 말 프랑스는 지롱드파가 임명한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고, 의회에서도 사사건건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 산악파의 영수(領袖)에게 지롱드파가 기선(機先)을 빼앗기는 형세가 되었다. 초조해진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 단속의 명목으로 파리 코뮌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5월 31일 지롱드파의 부당한 체포에 격분한 시민은 대거(大擧) 공회를 포위하고 12인위원회의 폐지, 중앙혁명군의 징집, 귀족출신 장교의 퇴관, 반혁명 용의자의 체포, 노인과 불구자의 구제 등을 요구하였다.

6월 2일에는 더욱 많은 시민들이 공회로 몰려들었다. 회의장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지롱드·산악 양파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장내로 뛰어들어 시민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결과 지롱드파는 간부당원 29명이 의석을 잃고 공회에서 약체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산악파는 독주체제(獨走體制)를 형성하게 되었다.

- 마라의 암살
프랑스 산악파는 국민공회를 제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들 앞에 어려운 과제가 잇따라 출현하였다. 첫째로, 의석을 잃은 지롱드파 명사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으로 잠입하여 각지에서 반(反)산악파의 음모를 계획하였으며, 왕당파와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 파리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는 전쟁에 의해 발생한 물자의 결핍과 식료품의 등귀가 두드러졌으며, 극좌 파괴분자가 활약하였다.

산악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농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취하여, 봉건적 공과(貢課)의 무상폐지,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을 소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산악파의 핵심적 지도자인 마라가 자택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산악파도 권력에 안주(安住)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어 ‘방종한 자유의 폐기’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국민공회의 최고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출마하여 입법·행정\·통수의 지령본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인민의 이름에 의한 독재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 공포정치
1793년 8월 프랑스의 군사정세는 재차 악화되어 북동 국경지대의 프랑스군이 각 전선에서 부득이 후퇴하게 되자, 국내의 위장 왕당파나 지롱드파는 활개를 펴고 활동을 획책하였으며, 도시의 식량위기도 급속히 증대하였다. 파리에서는 최고가격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귀족과 함께 매점상인(買占商人), 악덕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당통까지도 부당소득자의 오명이 씌워졌다. 자코뱅당 좌파의 에베르는 9월 5일 시민을 동원해서 국민공회에 몰려가 ‘혁명의 무제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혁명 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청하였다.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의 ‘혁명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1793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먼저 반혁명의 이름 아래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 명사들이 처형되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롤랑 부인도 같은 운명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처럼 약 1년 동안에 1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프랑스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제는 정확히 성공을 거두어 1793년 말까지는 국내의 반항은 소탕되고 대외전쟁에서도 프랑스는 반격으로 나아갔으나, 산악파 내부에서는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코뱅 좌익의 에베르파를 보태어 우익 당통파와 로베스피에르파가 3파로 되어 대항하였다. 이들 중 에베르파는 1794년 3월 파리의 식량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을 동원해서 봉기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이어 4월에는 당통파가 숙청되었다. 로베스피에르파는 정권을 독점하기는 하였으나 인심을 얻지 못하여 겨우 3개월밖에 계속하지 못하였다.

공포정치하에서는 국민생활 자체가 동결되고, 모든 활력이 마비상태에 빠지는 반면, 관료통제가 새로운 퇴폐를 낳아 종전의 혁명가들도 권력의 남용자나 편승자로 바뀌어갔다. 로베스피에르를 미워하는 국민공회 의원은 그 동안 암암리에 밀모(密謀)를 진행시켜 7월 27일의 의회에서 그의 유죄를 선고하고, 다음날 그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테르미도르의 반동(反動)’이라 부른다.

- 부르주아공화정
프랑스에서의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은 혁명극의 종막을 의미하며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다. 특히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고 있던 상류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의 숙청과 동시에 산악파적 노농정책·통제경제는 모두 폐지되고, 상업시민의 자유로운 세기가 재현되었으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유의 도래는 생활비의 팽창을 초래하여 빈곤한 시민을 한층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는 이들 무산층과 우익 왕당파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政局) 가운데서 1795년 10월 왕당파는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국민공회가 위기에 이르렀을 때 이것을 진압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뒤 이탈리아 전쟁에서 군사적·정치적으로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에서 일약 저명인사로 명성을 떨쳤다.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였으나,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하여 정부를 쓰러뜨리고 집정정부(執政政府)를 수립하여 군사적 독재를 확립하게 되자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와인
 
포도주는 포도를 따서 곧 양조해야 하며, 설비도 별로 크게 들지 않으므로, 유럽에서는 원칙적으로 농가의 겸업 또는 농가와 직결한 소기업에서 제조한다. 각 양조가는 자기 집의 주명(酒銘)으로 선전·판매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의 성격이나 품질은 포도밭의 입지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주명에는 지방명이 흔히 쓰인다.

프랑스에서는 특별한 법률을 제정하여 명칭에 해당하는 지역을 한정하고, 지역 외의 술이 부당하게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며, 포도품종·전정법(剪定法)·주정도\·단위면적당 주수(株數)·양조량까지도 규정한다. 이 규제명칭을 아펠라시옹 도리진 콩트롤(appellation d’Origine contrle:관리생산지)이라고 하여 상표에 명기한다. 이것은 국내법이지만 조약에 의하여 외국에도 영향이 미치는 방침으로서 나라에 따라 그 취급법이 각각 다르다.

명주(銘酒)는 프랑스가 제일이며, 그 중에서도 보르도와 부르고뉴이다. 뱅 보르도 루주(Vin Bordeaux Rouge:영국명은 클라렛 Claret)는 선홍색(鮮紅色)으로 담백한 맛이 나며, 부르고뉴(Bourgogne:영국명은 버건디 Burgundy)의 적포도주는 암적색으로서 감칠맛이 진하다. 보르도 블랑(Bordeaux Blanc), 특히 소테른(Sauternes) 지역의 것은 포도를 오래도록 따지 않고 덩굴에 매달아 두었다가 반건(半乾)된 감미로운 것을 따서 만들므로 달콤한 미주로서 유명하다.
 



르샹피오나
 
프랑스의 프로축구 리그로, 193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축구협회(FFF:Fdration Fran??aise de Football)가 주관한다. 르샹피오나는 '선수권'을 뜻한다. 첫 시즌에는 Sochaux컵 대회의 두 번째 경기방식과 같이 20개팀이 2개조로 분할되어 각 조끼리 리그전을 벌인 뒤 조별 챔피언들이 결승전을 치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1933∼1934년 시즌부터는 풀 리그제가 채택되어 1부에 14개팀, 2부에 15개팀이 풀 리그전을 벌였다.

프랑스아마추어챔피언십(CFA:Champion of France Amateur)도 1934∼1935년 시즌부터 재개되어 3부 리그의 역할을 하였다. 1부 리그는 16개팀으로 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18개팀, 그뒤 1960년대에는 20개팀으로 늘어났으나 2002년 현재 이탈리아의 세리에A, 독일의 분데스리가와 마찬가지로 18개팀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 리그는 18개팀씩 2그룹으로 나뉘었는데, 1993년부터 단일그룹으로 바뀌었으며 현재 20개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게 점령당하였던 시절에는 점령지역인 북부와 자유지역인 남부로 나뉘어 지역 챔피언 경기가 열렸다. 1943년에는 프랑스컵 결승전에서 뇌물 수수혐의를 빌미로 나치 정부에 의해 모든 프로축구팀이 해체되었고 연고도시나 지역이름을 딴 16개 지역팀이 대신하였다.

그뒤 전국리그와 컵 경기가 열렸고 이어 프로리그도 재개되었다. 1971∼1972년 시즌부터 CFA는 16개팀씩 6개 그룹으로 이루어진 3부 리그로, 1978∼1979년에는 14개팀씩 8개 그룹으로 이루어진 4부 리그로 그 형태가 바뀌었으며 1992∼1993년까지 존속하였다.

매년 7월경에 시작하여 이듬해 5월까지 금요일과 토요일에 대부분의 경기를 벌이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기본으로 팀 당 총 34경기씩 치르고, 승리하면 3점, 무승부 1점, 지면 0점이 부여된다. 시즌이 끝나면 1부 리그 하위 3개팀과 2부 리그 상위 3개팀이 자리바꿈을 한다.

또한 세미 프로리그라 할 수 있는 3부 리그인 리그 나시오날레(Ligue Nationale)의 상위 3개팀은 2부 리그로 승격한다. 3부 리그 밑에는 CFA1과 CFA2가 있다. CFA1에서는 72개팀이 4개 그룹으로, CFA2에서는 108개팀이 8개 그룹으로 나뉘어 리그전을 벌인다. CFA1의 챔피언은 3부 리그로 승격한다.

동유럽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남아메리카 선수들이 고루 활약하고 있으며 특히 유럽 내에서 아프리카 축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리그 자체가 세계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올랭피크 드 마르세이유와 파리 생제르망 FC의 경우는 세계 유명한 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1988∼1989년 시즌부터 1992∼1993년 시즌까지 리그 5연패를 달성하였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이후 해마다 우승팀이 바뀌며 일대 혼전을 벌이고 있다. 1999∼2000년 시즌 우승팀인 AS 모나코는 2000∼2001년 시즌에는 리그 11위로 1부 잔류 마지노선이었던 마르세유보다 불과 승점 3점을 앞서며 겨우 2부 리그로의 탈락을 면하는 등 예측하기가 힘든 리그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늦게 시작된 까닭도 있지만 세리에 A의 유벤투스 FC, 프리메라리그의 레알 마드리드 등이 20회가 훨씬 넘는 우승경력을 가진 반면, 르샹피오나에서는 10회 우승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AS 생테디엔이 리그 내에서 최다 우승팀일 정도로 대대로 전력이 평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 밖에 8회 우승한 FC 낭트 아틀랑티크, 7회 우승한 AS 모나코, 6회 우승한 FC 지롱댕 보르도, 2회 우승한 파리 생제르맹 FC가 유명하다. 올랭피크 리옹은 최근 강팀으로 급부상하며 리그 우승을 노리고 있으며, AJ 오세르는 프랑스 내에서 유소년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클럽으로 많은 유망 신인 선수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릴 OSC는 1부로 올라오자마자 2000∼2001년 시즌에서 3위를 차지하며 일대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1997∼1998년 시즌에 1부 리그인 RC 스트라부스에서 우리나라의 서정원이 활약하였다.
 


프랑스 요리
 
벨 에포크(belle poque:프랑스에 있어서 1871∼1914년의 산업혁명에 의한 호경기시대)를 대표하는 미식가인 큐르논스키는 그의 편저 《프랑스 요리와 포도주》에서 프랑스 요리를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고전적 고급요리:수백 년 동안에 부호(富豪)와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돈과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발달한 요리이다. 이에는 재능 있는 요리사와 값비싼 재료가 필요하며, 과거의 숙수(熟手:요리장)들이 이룩해 놓은 예술적인 요리이다. 글라스 드 비앙드(glace de viande:진한 고깃국물)를 토대로 한 소스를 사용하는 요리도 포함된다.

② 가정요리:프랑스의 가정주부가 통상적으로 만드는 요리이다. 대표적인 것에 포토푀(pot-au-feu:고기와 채소를 푹 끓인 요리)가 있다.


③ 지방요리:프랑스 요리의 보고(寶庫)이며, 각 지방의 특산물을 살린 유명한 요리가 오랜 세월을 두고 개발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부지방의 부야베스(bouillabaisse) 등인데, 이것은 현재 고급 프랑스 요리로 간주되고 있다.

④ 즉흥요리:갓 잡은 물고기 ·들새 등을 즉석에서 조리해 먹는 요리로 정교하지는 못하다. 트뤼트 오자망드(truites aux amandes:송어아몬드구이)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프랑스 요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요리에도 해당되며, 어떠한 종류에도 엄밀한 구별을 짓기는 힘들다.


역사

프랑스는 옛날 골(Gaul)인이 살던 토지였다. 골인의 음식맛은 거칠었으며, 그 후에 골에 이동해 온 프랑크족(族)은 그대로 골의 음식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고대 로마 요리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땅의 산물로 고대 로마 문화의 기술을 빌어 만들어 낸 것이 프랑스 요리의 출발점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이미 세련되지는 못했을망정,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재료와 요리법이 연구되어 있었음이 아피큐스의 《요리법》이나, 아테나이오스의 《학자의 향연(饗宴)》 등으로 증명된다. 중세에 와서 전쟁과 역병(疫病), 기근(飢饉)이 계속되자 프랑스 요리는 수도원에서나 겨우 만들어졌다가, 생활이 나아지면서 점차 그 지방 특유의 요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앙리 2세에게 출가했을 때 프랑스 요리사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그녀는 당시의 선진국 이탈리아에서 고상한 방법과 함께 다수의 요리사 및 신기한 재료들을 프랑스에 가져왔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식습관에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모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전반세기에서 두드러진 것은 앙리 4세의 요리장 라바렌의 출현이고, 후반세기에서는 루이 14세의 탄생이다. 그가 좋아한 요리는 섬세하고 맛있는 것보다 식욕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른바 섭정시대(攝政時代:루이 15세 재위 연간 중 1715∼42)에 들어와서 프랑스 요리는 완성에 도달하고, 웅장하고 화려함보다도 아름다움이 칭송을 받게 된다. 이어서 루이 15세의 친정시대(親政時代)에도 미식(美食)을 좋아하여 왕 스스로가 요리를 만들 때도 있었고, 부엌에 드나드는 귀족도 나타났으며, 요리에 귀족들의 이름이 붙여졌던 시대이다.

그 다음 시대에 프랑스 요리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할 만한 A.카렘이 나타났다. 그는 요리사라는 직업을 예술가의 영역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있어 그 자신이 위대한 요리사 ·과자장인(菓子匠人)일 뿐만 아니라 이론가이기도 하여 많은 저작(著作)을 남겼다. 프랑스 요리가 프랑스 요리다워진 것은 그가 출현한 뒤부터이다. 카렘의 후계자인 U.뒤부아도 많은 저작을 남겼다.

다음으로 프랑스 요리 발전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A.에스코피에가 등장한다. 그는 요리의 실질적 향상과 영양의 문제를 받아들여 먹을 수 없는 장식 등을 폐지하고 요리를 근대화시켰다. 그의 저작에는 현대 프랑스 요리의 규범으로 알려진 《요리안내:Le Guide Culinaire》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의 요리전문가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현대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에스코피에의 요리도 재료비를 생각할 경우, 옛날 왕후 ·귀족이 없는 현재에는 제작이 불가능하다. 카렘 이후 프랑스 요리의 대세는 더욱 간소화를 지향하였으며, P.몽타녜에 의해 현대화되었으며 F.푸앙에 의해 완성되었다.

특징

프랑스는 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하고 있어서 기후가 온화하며, 농산물 ·축산물 ·수산물이 모두 풍부하여 요리에 좋은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 요리의 특징은 소재를 충분히 살리고 합리적이며 고도의 기술을 구사하여 섬세한 맛을 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맛을 내는 데 있어서는 전통적인 포도주 ·향신료 ·소스가 큰 구실을 한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제일의 특산물인 포도주는 요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포도주는 생선요리에, 적포도주는 육류요리에, 중간색인 분홍색포도주는 양쪽 요리에 적합하다고 한다. 이 밖에 마시는 목적 이외에 요리의 맛을 돋우기 위한 조미료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향신료는 원형의 잎이나 알갱이를 그라인더로 갈아 조리할 때 방금 간 것을 사용한다. 주로 파슬리의 줄기나 후추 ·로리에 ·셀러리 ·너트메그 ·사프란 등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3~4가지씩 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미묘한 맛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고 있다.

프랑스 요리는 소스를 주로 하여 소재를 맛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스가 중요한 구실을 하며, 많은 종류가 사용된다. 흔히 시판되는 소스(우스터 소스)를 쓰지 않고, 그 요리에 적합한 맛의 소스를 요리의 일부로서 만들어 사용한다. 이러한 조미료를 요리 종류에 따라 알맞게 골라 구사함으로써 프랑스 요리의 미묘한 맛을 창출해 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에는 달팽이 요리인 에스카르고(escargo) 요리, 특수한 조건에서 사육한 거위의 간으로 조리한 푸아 그라(foie gras), 흑갈색의 송로(松露:바닷가 솔밭 모래 속에 나는 버섯)로 만든 트뤼프(truffes) 요리, 생굴 요리 등이 있다.

메뉴

메뉴를 짤 때는 오르되브르에서 디저트까지 재료 ·빛깔 ·맛 등에 변화를 주면서 전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우선 오르되브르와 아페리티프로 식욕을 돋우고 다음에 수프를 낸다.

정찬인 경우는 반드시 맑은 수프(콩소메)를 내고, 다음에 단백질이나 지방이 풍부한 실질적인 생선요리 ·육류요리 등을 낸다. 이때 생선요리와 육류요리의 조리법이나 소스를 각각 다르게 하여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육류요리 다음에 소르베(sorbet:양주가 든 얼음과자) ·로티(rti:들새구이) 등의 순이다. 그 밖에 채소요리, 디저트, 과일, 애프터 디너커피 등을 차례로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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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Nepal)은 남아시아 히말라야산맥 중앙부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네팔왕국이다. 면적 14만 800㎢. 인구 2646만 9569명(2003). 수도는 카트만두.

인도와 중국(티베트자치구) 사이에 있다. 역사적으로 위 두 나라와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정치적으로도 국제적 완충지대이다. 변화가 심한 자연환경과 복잡한 민족·종교를 가진다.

 



 








한국에서 네팔 비자 받을 수 있음 - 여행사 대행.

항공으로 카트만두의 트리뷰반 공항으로 입국시 공항에서 네팔 비자 받을 수 있음.

중국 → 네팔 : 북경, 라싸, 혹은 티벳의 네팔 국경 코다리에서 비자 받을 수 있음.

인도 → 네팔 : 델리 혹은 각 국경(수나울리, 반바사, 카카르비타)에서 비자 받을 수 있음.

※ 공항이나 국경에서 비자 신청시 여권, 여권용 사진 2장, 수수료(30$)




US$ 1 = 73 루피 [ 2004. 6월 현재 ]
             
중국 화폐(인민폐(人民幣 : 런 민 삐) : 1元 = 7.9 루피 [04년 6월 현재]
             
인도 1 루피 = 네팔 1.6 루피 [04년 6월 현재]

             



 시 차 : 한국보다 3시간15 분 느림
 
 한국에서 네팔 항공 이동 :





 한국에서 네팔 육로 이동 :

 1. 인천 → 천진 → 북경 → 란조우 → 꺼얼무 → 라싸 → 시가체 → 짱무 → 코다리 → 카트만두
 2. 인천 → 천진 → 북경 → 성도 → 참도 → 라싸 → 시가체 → 짱무 → 코다리 → 카트만두
 3. 인천 → 천진 → 북경 → 쿤밍 → 샹그릴라 → 망캉 → 라싸 → 시가체 → 짱무 → 코다리 → 카트만두
 4. 인천 → 천진 → 북경 → 우루무치 → 카쉬가르 → 이에청 → 아리 → 라체→짱무→코다리→카트만두
 5. 인천 → 천진 → 북경 → 쿤밍 → 하노이 → 호치민 시티 → 앙코르 왓 → 방콕 → 카트만두

 

 
 



 육로로 네팔 가기 : 아래 육로 배낭 여행 참고.







항공 교통 :

                               국제선 (INT'L FLIGHT SCHEDULE)

출발지

도착지

출발일

항공편명

출발시간

도착시간

요금($)

요금(NPR)

카트만두(KTM)

방콕(BANKOK)

월,수,금
Daily

RA
TG

08:35
13:50

13:15
18:05

223 $
230 $

13225 루피
14306 루피

카트만두(KTM)

뭄바이(MUMBAI)

월,금

RA

14:00

16:20

210 $
190 $

14306 루피

카트만두(KTM)

델리(DELHI)

Daily

RA
IC

17:00
13:00

18:15
14:15

110 $
145 $

6145 루피

카트만두(KTM)

방갈로르 - 인도(BANGLORE)

목,일

RA

09:00

11:00

213 $
196 $

14306 루피

카트만두(KTM)

캘커타(KOLKATA)

수,토

IC

16:00

17:00

99 $

5150 루피

카트만두(KTM)

바라나시(VARANASI)

월,수,금,토

IC

15:00

15:45

75 $
59 $

3280 루피

카트만두(KTM)

고아(GOA)

월,금

RA+IC

14:00

+1 09:30

300 $


카트만두(KTM)

오사카(OSAKA)

화,토

RA

23:45

+1 11:55

600 $

27330 루피

카트만두(KTM)

동경(TOKYO)

Daily

TG

13:50

24:00

698 $

27330 루피

카트만두(KTM)

런던(LONDON)

Daily

QR,GF

09:15

18:45

550 $


카트만두(KTM)

홍콩(HONGKONG)

화,목,토

RA

09:30

15:00

350 $

18330 루피

카트만두(KTM)

라싸(LHASA)

화,토

CNA

08:00

11:00

276 $


카트만두(KTM)

프랑크푸르트(FRANKFRUT)

Daily

QR,GF

09:15

21:00

550 $


카트만두(KTM)

암스텔담(AMSTERDAM)

Daily

QR,GF

09:15

19:50

600 $


카트만두(KTM)

뉴욕(NEWYORK)

월,수,금

RA+KC

08:15

+1 09:15

680 $


카트만두(KTM)

시드니(SYDNEY)

Daily

TG

13:50

+1 07:00

570 $


※ 항공 요금 지불은 달러와 외화, 신용카드로 가능하며, 네팔 루피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예약 취소했을 경우에는 네팔 루피로 환불해 준다.
RA : 로얄 네팔 항공, IC : 인디안 항공 RA와 IC는 30세 이하에게는 30% 할인 해줌. - 2004년 7월



네팔 국내 항공 노선 :

국내선 (DOMESTIC SCHEDULE)

출발지

도착지

출발일

항공편명

출발시간

도착시간

요금($)

요금(NPR)

카트만두(KTM)

포카라(PKR)

 매일 20 여 편 운항

STA701

09:30

10:00

편도 63+2
왕복 126+4

편도 1530
왕복 3060

카트만두(KTM)

포카라(PKR)

BHA

 

67+2

편도 1860

카트만두(KTM)

히말라야 항공 투어Mountain Flight

Daily

BHA
F5/G1

07:00
07:30

08:00
08:30

109+2
104+2

4950 루피
4950 루피

카트만두(KTM)

루클라(LUKLA)
- 에베레스트 트레킹

Daily

G1,ST

08:00

08:45

91 $

2025 루피

카트만두(KTM)

네팔간즈(NEPALGANJ)

Daily

BHA

15:05

16:00

109 $

3150 루피

카트만두(KTM)

바이라하와(BHAIRAHAWA)

Daily

BHA

09:15

09:45

81 $


카트만두(KTM)

자낙푸르
(Janapur)





69 $


카트만두(KTM)

바랏푸르





63 $


카트만두(KTM)

심라





55 $


※ 히말라야 산맥을 항공으로 투어하는 마운틴 플라이트(Mountain Flight)는 카트만두 공항을 출발해서 1시간 정도 비행 후 다시 되돌아 온다. 매일 여러 편이 운항한다. 웅장한 히말라야의 고산 설봉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적합한 여행 상품이다.



  포카라 공항

  포카라 공항


 운항 정보-국제선  

국내선              

 

※ 성비수기, 날씨 등의 영향으로 운행 스케줄 변동이 심하므로 반드시 사전 예약 확인.



네팔은 철도가 없어 버스가 주요 교통 수단이다. 도시 근교로 운행하는 단거리 버스와 장거리 버스가 있다. 승차감은 불편하지만 대신 도로변으로 펼쳐지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으므로 배낭 여행자라면 버스를 이용하는게 좋다.

주요 장거리 버스 노선은 카트만두(Kathmandu) ↔ 포카라(Pokhara)와 카트만두(Kathmandu) ↔ 치트완 ( Chitwan), 포카라(Pokhara) ↔ 치트완 (Chitwan)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카트만두(타멜)나 포카라의 여행사에서 버스표를 구입한다.

여행사에서는 버스표를 판매할 뿐만 아니라 당일 버스 승차 지점까지 데려다 주므로 매우 편리하다. 주요 교통 수단인 버스외에도 릭샤와 오토 릭샤, 택시, 자전거, 오토바이, 코끼리, 나룻배 등등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교통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


삼륜 인력거 - 릭샤

  버스                    

 택시                    

 삼륜차-합승 템포

삼륜 전통차-템포

  택시

 트럭

 주유소

 자전거 렌트

보우트 렌트

보우트 렌트

오토바이 렌트

 래프팅 고무 보트

 현지인 버스 터미널

버스

중간 휴게소(식당)

 중형 버스

 사설 여행사 터미널

  마차

 코끼리

 나룻배

버스와 중간 휴게소

 버스 내부

 트레킹(도보)            






 포탈라 G.H 겸 식당  

  호텔 짱

장성 빈관(호텔)

 카트만두 G.H

 카르마 호텔

 카르마 호텔

정글 사파리 파크 입구

내부 숙소

 실내

안나푸르나 호텔(카지노)

제이비제이 호텔

내부 시설

 숙소 간판

니르바나 호텔 정원

기리 게스트 하우스



 암릿 게스트 하우스








뚝배기 집 - 포카라

 피제리아 식당

 과일

 상점(슈퍼)

 생수

호텔 짱 입구

음식

메뉴판

 쉼터 한국 식당

한국 사랑 식당

 아리랑 식당

경복궁 한국 식당

한국 소풍 식당

축제 한국 식당

브라세리 식당

메뉴판

음식

 안나푸르나 식당

길링체 티벳 식당

패스트 푸드


※ 개인 여행자 및 트레킹 여행자는 기타 간식 및 비상 식량 준비.





아열대 몬순기후(우기는 6 - 9 월, 1 월 평균 기온 : 11℃, 7월평균기온 : 25℃ )

















  pc방


 + 트레킹

네팔 트레킹은 카트만두의 타멜(Thamel) 거리에 있는 여행사에서 시작된다. 거의 대부분 여행사에서 네팔의 모든 트레킹 여행 상품을 취급하고 있으며, 여행자는 최소 3~4군데의 여행사에 들러 요금과 조건, 요금에 포함된 사항과 불포함 사항, 장비 대여, 항공료 등을 꼼꼼히 비교해 본 후 선택하면 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포카라에 도착해서 현지 여행사를 비교 해 본 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운항 정보-국제선  

 국내선              

 요금표

항공 요금과 버스요금

트레킹 여행 상품

포함사항과 불포함사항


 네팔 트레킹, 항공, 공항, 운항 시간, 퍼밋, 트레킹 지도 등 여행 정보(Click)


 +네팔 트레킹 지역 :

에베레스트 트레킹

안나푸르나 트레킹

랑탕 트레킹 지도

Rolwaling 트레킹

다울라기리 트레킹

마칼루 트레킹 지도


칸첸중가 트레킹

시킴 지도




안나푸르나 트레킹 비용 (BUDGET TREKKING IN ANNAPURNA)
 

Trekking Route

Duration

 Nature of trekking

 요금 / 하루당

 퍼밋(Permit)

 

 Jomsom Trek

 7 ~ 14 일

 touristic

 1215 루피

 2000 루피

 

 ABC & MBC Trek

 8 ~ 12 일

 touristic

 1300 루피

 2000 루피

 

 Pun hill Trek

 3 ~ 5 일

 touristic

 1300 루피

 2000 루피

 

 Round Anapurna Trek

 16 ~ 21 일

 touristic

 1300 루피

 2000 루피

 

 Millennium Trek

 7 ~ 10 일

 Non touristic

 1380 루피

 N I L L

 

 Royal Trek

 2 ~  5 일

 Non touristic

 1250 루피

 N I L L

 

 Panchase Trek

 2 ~  4 일

 Non touristic

 1300 루피

 N I L L

 

 Sirubari Trek

 3 일

 Non touristic

 1400 루피

 N I L L

 

 Round Dhaulagiri Trek

 14 ~ 21 일

 Non touristic

 2700 루피

 2000 루피

 

 High camp Trek

 12 ~ 14 일

 Non touristic

 2700 루피

 2000 루피

 

 Dhampus Trek

 2 ~  4 일

 Non touristic

 1300 루피

 N I L L

 

 Namun Bhanjyang Trek

 12 ~ 14 일

 Non touristic

 2700 루피

 2000 루피

 



 포카라 시내의 한 여행사 트레킹 상품이다. 몇 군데 여행사에 들러 가격 비교를 한 후 결정하는 것이 좋으며, 성, 비수기에 따라 요금 차이가 난다. 좌사진처럼 여행 경비에 포함된 사항과 주의 사항 등을 꼼꼼히 읽어보고 선택하는 것이 좋다.
보다 저렴한 히말라야 트레킹을 즐기고 싶다면 티벳으로 가면 된다. 티벳에 도착하면 사방으로 설산이 펼쳐진다. 여행사나 가이드 도움없이 자유로운 트레킹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1. 일반사항

   수도 : 카트만두(인구 103만)  

   인구 : 2,320만명(2004 현재)

   면적 : 147,181㎢(한반도의 2/3)

   민족구성 : 아리안족(80%), 티벳, 몽골족, 기타 소수민족

   종교 : 힌두교(87%), 불교(8%), 회교(4%)

   국 경 일 : 7. 7, 국왕생일

   주요언어 : 네팔어( 공통어 )외 10 여개 소수 부족어(지식층 영어구사)

   국토면적 : 14.7 만 ㎢ ( 한반도의 2/3 )

   지 형 :

      - 북부 히말라야 산악지대( 해발 2 천 - 8 천미터 )

      - 중부 고원지대( 해발 6 백 - 2천미터, 전국토의 68 % )

      - 남부 열대평원지대( 해발 600 미터 이하 )

 [Nepal]

 [Kathmandu elevation]


 
  기 후 : 아열대 몬순기후(우기는 6 - 9 월, 1 월 평균 기온 : 11℃, 7월평균기온 : 25℃ )

   화 폐 : 루피( US$ 1 = 70.99 루피 )( 2004. 12월 현재 )

   시 차 : 한국보다 3시간15 분 느림
 
 

2. 정치현황

   정부형태 : 입헌군주제(양원제)

   의회구성

       - 상원 60석, 하원 205석(임기5년)

       - 하원: 02.5월 국왕이 수상 건의에 따라 하원을 해산한 이후 현재까지 해산 상태

   주요인사 성명 및 소속정당

      - 국 왕 : 갸넨드라(Gyanendra  Bir Bikram Shah Dev)

      - 수  상  : Sher Bahadur Deuba(2004.6.2)

      - 외교장관 : Sher Bahadur Deuba(수상이 외교장관 겸직)

                    * P.S. Mahat 외무담당 국무장관이 사실상 외무장관직 수행
 

3. 경제현황

   회계연도 : 7.1∼익년 6.30

   실질GDP(03/04) : 42.6억달러(3.7%성장)  

   1인당GNP(03/04) : 184달러

   수출입현황(03/04)

       - 수    출  :    7.2억 달러(5.6% 증가)

       - 수    입  :   19억 달러(11.9% 증가)

       - 무역수지  :    11.8억 달러 적자
 

4. 한국과의 관계

   1974.5.15 외교관계 수립(2004년 수교 30주년)

   교역현황           (단위:백만달러)


교역

2001

2002

2003

수출:

14.5

17.7

30.5

수입:

1.2  

0.9

1.1

총교역액:

15.7

18.6

31.6

      - 주요 수출품 : 섬유류, 전기 전자제품, 기계류, 철강, 금속제품

      - 주요 수입품 : 양탄자류, 원피, 귀금속, 주화

   교민현황 : 약 195명(2004.7월)

      - KOICA 파견 33명, 선교사 및 NGO 가족 104명 등이 교민 대부분 차지,영주교민 없음.

   북한과의 관계 : 74.5 수교(황영환 대사 부임 04.8월)

      97.3  최우진 외교부 부부장

      98.11  Rai 상공장관

      00.8   김수학 보건상

      01.10  Thapa 외무차관

      02.4   네팔 하원대표단

      03.7   김영일 부상
 


5. 최근 국내정세 및 특기사항

국왕, 중도보수 정당인 네팔의회당, 네팔공산당등 3대세력에 의해 정치주도
 - 3대세력의 이질성과 비타협성이 지속적인 정치불안 조성

2001.6.1 왕궁 총격사건으로 Birendra국왕 및 Dipendra 왕세자 등이 사망함에 따라 Gyanendra국왕 즉위(6.4)

01.7월 정국불안으로  Koirala 수상이 사임하고 Deuba 수상이 취임

01.11.26 Gyanendra국왕, 전국에 비상사태 선포, 극좌게릴라 Maoist 진압 위해 군 동원

02.5.22 국왕, 국회 해산 및 11.13 총선 시행 결정

02.10.4 국왕, Deuba 수상 전격해임 및 내각 해산, 총선 무기한 연기

02.10.7 국왕, 민주당 대표 Chand를 신임 수상으로 한 새내각 구성

03.6.4 국왕, 민주당 중앙위원 Thapa를 신임 수상으로 한 새내각 구성

03.1.30 Maoist측, Thapa 정부와 휴전 선언, 세차례(4.27, 5.9, 8.17)의 평화협상 개최

- 03.8.27 평화협상 결렬, Maoist 폭력활동 다시 강화

04.6.2 국왕, Deuba 전 수상을 신임수상으로 임명하고 2005.4월까지 총선거 실시 추진 지시
- 04.7.5 새내각 구성







※ 우편

당지에서 외국으로, 또는 외국에서 당지로 수발신되는 우편물이 중도 분실 되는 사례가 많음
보통 당지에서 발송한 우편물이 외국에 도달하는 데에는 10- 20일 소요 되며, 외국에서 당지로 우편물 발송시는 P.O.Box 를 이용하여야 함


※전화

시내 곳곳에 공중전화가 있으며 사설 전화 이용점에서 국제전화 및 인터넷 이용 가능함
카투만두 및 대도시 일원에서는 휴대폰 이용이 가능한바, 가입비로 예치금(약140불) 포함 약200불이며 한달 사용료는 보통 20-35불 정도임



※공휴일

주재국 공휴일에는 매년 10월 및 11월의 다사인( 1주일 정도 )과 티할 ( 3일 )을 비롯, 각종 힌두신을 경배하는 축제일 등이 있으나, 그 기준이 네팔력이기 때문에 양력 기준으로는 매년 조금씩 다름.

참고로 2003년도 주재국 공휴일은 아래와 같음

- 1. 11        Unity day
- 1. 26        Spring day
- 1. 30        Martyr's day
- 2. 18        Lord Shiva Day
- 2. 19        Democracy day
- 3. 6          Color day
- 3. 30        Lord Rama's Birthday
- 4. 13        Nepalese New Year Day
- 5. 4          Lord Buddha's Birthday
- 7. 7          HM The king's Birthday
- 9. 6           Lord Krishna's Day
- 9. 27         Living Godess Festival
- 10.20~25   Dasain Festival
- 11. 8         Nepal Constitution Day
- 11.12~14  Tihar Festival



제 목 : 의료.건강 최종갱신일: 2004-12-21  

주재국 입국시 일반적인 경우에 예방 접종을 요구하지는 않음. 주재국의 위생보건 환경을 감안, 생수(mineral water) 또는 밀봉된 청량음료를 마셔야 함. 카투만두에 우리나라 정부 파견의사 및 국제협력의사가 상주하고 있어 필요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의료시설이 미비하여 수술을 요하는 치료시는 긴급 귀국하는 것이 바람직함.

처음 네팔을 방문하는 여행객의 경우 물갈이, 음식 등으로 대부분이 설사 등으로 고생(길게는 일주일)하는 경우가 있으니 비상약품을 준비하고 밖에서 식사할 경우 가급적이면 깨끗한 식당을 이용함이 바람직



제 목 : 출입국 관련 최종갱신일: 2004-12-21  

※입국사증(비자)
카투만두 공항이나 주한네팔명예영사관(명예영사:이인정, 위치: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 산악문화회관 5층, 전화 : 558-3331, 팩스:569-9437) 에서 네팔 입국사증(사진 2매, 수수료 US $30) 취득 가능.

※관광비자의 경우 1개월씩 체류 연장하여 최대 연간 150일까지 체류 가능

출국 : 출국시 공항세 1,100 루피( 15 미불 정도 )를 납부하여야 하며 골동품 및 천연약재( 웅담, 사향 )는 반출 금지

- 특히 네팔에서 인도등 인근국을 여행하고 네팔로 다시 입국코자 할 경우에는 반드시 네팔 출국전에 재입국 허가 사증을 취득 한 후 출국

※항공여행의 경우 수하물 분실시 책임소재(배상범위)에 대해 가끔 분쟁이 있으므로 알선여행사 및 항공권 구매시 사전철저 확인



제 목 : 여행자 안전( 치안 상태 ) 최종갱신일: 2004-12-21  

카투만두, 포카라 등 대도시는 비교적 치안이 양호한 편이나, 특히 중서부 지역 등 지방은 지하 공산당 조직인 Maoist 의 준동으로 치안이 불안한 상태임
- 특히 최근들어 Maoist 들의 폭력이 외국인도 상대로 하는 등 극렬화되고 있어, 가급적 지방으로의 여행은 삼가함이 바람직

트레킹시에도 단체 트레킹을 권장하며 개인 또는 여성들만의 트레킹은 위험함. 대도시의 경우에도 야간 외출 시에는 조심해야 하며 사고 발생시 주재국 경찰의조력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스스로 신변 안전에 주의하여야 함. 주재국에는 북한대사관이 상주하고 있어 아국 대사관과 혼동할 수 있으므로 주의 요함.

지방 또는 인근국(인도) 여행시 장거리 버스를 이용할 경우 및 값싼 유숙소에 투숙할 경우 소매치기 또는 절도범이 가끔 있으니 주의를 요함. 주재국 항공(네팔항공) 또는 국내선을 이용할 경우, 사전 예고 없이 결항, 지연 등 항공일정 변경이 잦으니 손해배상, 타항공으로의 교체가능 여부등을 필히 사전에 확인 후 항공권 구매

최근 마오이스트에 의한 미국 문화원 공격 등 그 동안 공격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대사관 및 유관시설에 대한 공격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특히 미국 관련 시설에 대한 접근 시 특별히 신변 안전에 유의할 필요가 큼. 2003.1.1 정부측과 Maoist측은 03.1.30 제2차 휴전, 8.17 제3차 협상이 개시되었으나, 8.27 Maoist 반군측이 일방적으로 휴전상태 및 협상종결을 선언함에 따라 양측간 교전상태 악화



※마약, 한약재

카투만두 중심가 Tamel 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마약을 구입 권유를 하는 행상이 많으니 각별한 주의 요함. 웅담, 사향 등의 한약재 구입을 종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가짜이며 반출이 불가능함



※주재국 관습

가급적 주재국 관습을 존중하고 우리나라의 관습과 다른 점이 있더라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함. 카투만두 소재 한국 식당에 근무하는 종업원들은 어느 정도 우리말 구사가 가능하므로 그들 앞에서 주재국을 비방 또는 멸시할 경우 분쟁의 소지가 됨



※여행 또는 트레킹

여행사와 트레킹 또는 여행계약을 하는 경우 계약 내용을 문서화함으로써 사후 분쟁 소지를 방지하는 것이 바람직함


※외국인에 대한 가격 이중제
주재국, 특히 관광지인 경우 외국인에게는 호텔숙박료, 항공료, 입장료, 병원 진료비 등을 합법적으로 네팔인(인도인)보다 비싸게 받는 경우가 있으니 사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함.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산을 트레킹하는 등반객들이 사고를 당할 경우 (긴급헬기구조시 5,000불이상 비용 부담) 및 예기치 않은 사고 등 만일의 사고의 대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해외여행자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필요함    



카투만두 시내

Hanuman Dhoka( 구왕궁 ) : 시내 중심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카투만두의 마지막 왕조인 Malla 왕조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Kumari 등 관광 거리가 있음


Swayambhu Nath Temple : 라마불교 사원


Pashupati Nath Temple : 세계 4 대 힌두 사원중의 하나이며 사원내에 화장터가 있음



※교외 관광지

Naghar Khot
카투만두로부터 동북쪽 30 Km 지점에 위치한 히말라야 일출 관광 명소


Dulikhel
카투만두 동쪽 약 40 Km 지점에 위치. 히말라야 Langtang 지역 정경 조망


Hatibhan
히말라야 Ganesh Himal 및 카투만두 시내 정경 관광


지방관광지

포카라

안나푸르나봉 입구에 위치한 네팔 최고 관광지( 카투만두에서 비행기로 30분,자동차로 5시간 소요 )


룸비니

카투만두 서남쪽 400 Km 지점에 위치한 석가 탄신지(카트만두에서 비행기로 1시간, 자동차로 9시간 소요)




인도와 네팔을 통해 열린 국경


인도와 네팔을 통해 열린 국경은 우선 소나울리를 대표적으로 꼽을수 있으나,
국경 이동과 함께 멋진 풍광을 즐기려는 여행자들은 다르질링 부근의 카카르비타나 우타르칸트에 속해 있는 반바사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일반 여행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두가지 통로(소나울리와 카카르비타)와
요즘들어 몇몇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반바사를 통한 통로,
이렇게 세곳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1)소나울리를 통해 네팔로 가기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선택하는 코스입니다.
인도에서 네팔국경인 소나울리로 가는 경우는 대부분 바라나시에서 연결이 되는데, 버스의 경우는 10~ 12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바라나시 버스스탠드 출발 /오디너리)
기차로는 소나울리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소나울리에서 버스로 4시간 정도의 거리인 고락푸르까지 기차가 다니고 있습니다.
(5104 Intercity Exp / 5시간 소요)

소나울리 국경을 통과한후, 소나울리에서 북쪽으로 4Km떨어진 '바이와라'라는 곳으로 가면
2001년 9월에 새로만든 버스 스탠드가 나옵니다.
이 곳에서 오전6시-오후1시, 오후4시-오후8시 까지의 시간대에
매 시간당 카트만두로 연결할수 있습니다.
(포카라의 경우는 이른 오전과 늦은 오후 4차례의 버스가 다닙니다.)
대략 7~9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소나울리와 바이와라 사이에는 수많은 사이클 릭샤들이 연결하고 있는데, 흥정이 쉽지 않습니다.
합승지프와 템포들도 이 구간을 연결하는데 4네팔루피면 연결할수 있습니다.
사이클릭샤는 최소한 30네팔루피는 줘야 흥정이 가능합니다.

바라나시에 있는 U.P주정부 사무소에서는
바라나시에서 네팔의 카트만두로 바로 연결하는 300루피짜리 버스를 매일 연결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 방법 보다는 따로 따로 연결하는 시스템을 선호합니다.
(네팔국경을 넘어가면서 버스는 바뀌는데, 대부분의 경우 좋지 않은 버스들이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을 선택하면 버스 역시 자기 입맛대로 고를수 있음은 물론이지요.)


(2)카카르비타를 통해 네팔가기

소나울리에 비해서는 쪼금 한적한 국경입니다.
캘커타나 다르질링쪽에서 네팔로 넘어가기에 가장 유리한 국경인데,
우선 캘커타나 다르질링에서 실리구리로 갑니다.
(캘커타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면 뉴잘패구리라는 역에서 세워 줄 것입니다.
이 역을 나오면 먼저 지프, 릭샤, 버스의 순으로 대기(?)하고 있는데 버스를 잡아타고 실리구리로 갑니다.)
실리구리에서도 버스정거장에 내립니다.
실리구리에서 국경인 카카르비타까지는 대략 35Km,
성수기가 아니라면 정규로 왕복하는 버스도 없습니다. (그나마 버스는 Border까지는 가지도 않습니다.)
택시들이나 오토릭샤들이 되도 않는 가격을 부르는데 이중 가장 저렴하게 가는 방법은 합승 지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오토릭샤보다 더 싸고 더 빠릅니다.
소나울리에 비해 복잡하지도 않고, 인간들도 사악(?)하지 않으며,
특히 인도-네팔 국경 사이의 다리(밑에는 유유히 강이 흐르고......)를 통해 국경을 건너노라면
한국에 사는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환경의 이들 나라에 대해 분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고 환타님이 그럽니다..

(3)반바사를 통해 네팔가기

2000년 1~3월 여행을 하면서 이용해 본 곳입니다.
다람살라나 리쉬케쉬, 우타르 칸트지역에서 네팔을 넘어가고자 할 때 유리하고,
무엇보다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 빼어난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호사가라면
무엇보다 적극 권장할 만한 길입니다.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의 끝자락을 배경으로 강이 흐르고, 댐을 걸어서 건너야 인도측 오피스가 있습니다.
반바사에서 국경까지 대략 6키로 정도의 길인데, 사이클 릭샤타고 가면 거의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사실 이곳은 사이클 릭샤밖에 없습니다. 6키로라는 거리가 걷기도 상당히 고된 거리이고 사이클 릭샤 외의 교통수단이 없는 관계로 상당히 호되게 가격을 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이클 릭샤가 정지하는 곳은 댐 바로 앞으로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댐을 건너가야 하는데, 댐을 건너가면 바로 인도측 이미그레이션 오피스가 보입니다.

출국신고를 한 다음에 네팔오피스를 가기위해서는 다시한번 사이클 릭샤를 이용해야 합니다. (여기 거리도 대략 3~4키로정도 됩니다.)

역시 호된 가격을 부르는데, 20~30정도는 생각을 해야 하지않을까 싶습니다.
네팔 이미그레이션오피스를 지나 네팔쪽 마을인 마헨드라나가르까지도 대략 10키로의 길인데, 사이클릭샤들은 100루피를 부르고 있지만, 여기부터는 템포가 있습니다.

마헨드라나가르 자체에는 그다지 머물만한 숙소가 없습니다.
그나마 제일 좋은 데가 '스위트드림'이라는 중급숙소인데, 더블이 400 네팔루피쯤 합니다. 그냥 잠만 자면 좋은 사람들은 처음에 200을 부르지만 결국 100에 흥정이 되고야 마는 숙소가 버스 정거장 앞에 3개가 있습니다.
(동네가 조그말고 사람들이 아직 외국인 구경을 많이 해본적이 없는 곳이라, 무지 친절합니다.)

마헨드라나가르에서 포카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대가 있고 오후 2시 30분 출발입니다.(19시간)
카트만두는 오후 1 , 2 , 3시 출발이고, 대략 17시간이 걸립니다.
가는 길 역시 왼쪽 히말라야, 오른쪽 평원, 양쪽이 극단적인 풍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앉아도 손해는 없습니다.
가다보면 버스가 강도 건너고(거의 사파리....) 출발한지 5시간째부터는 국립공원도 하나 지나갑니다.
국립공원 하나, 공짜로보는 거니 손해날일은 없겠지요. (단 무지 어두워서 별밖에 안보임.)
서부 네팔쪽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도시화) 곳이 아니라서,
별보는 맛 역시 각별한데, 내가 본거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별무리들을 보실수 있으니 놓치지 마시기를..

단 마오이스트 게릴라들 때문인지, 검문은 좀 심한데, 외국인은 소 닭보듯 그냥 지나갑니다.


자~ 이제 반바사로 접근하는 법~!
만약 다람살라쪽에서(마날리, 쉼라등..) 바로 넘어 갈려면, 차라리 델리로 도로 오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12시간)

델리에서 반바사나 나이니탈, 알모라, 코사니등의 우타르 칸트지역으로 가는 버스 스탠드는 카쉬미르게이트 부근의 ISBT가 아니라 아난드 비하르 ISBT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오후 6시, 7시, 8시, 세대의 버스가 있습니다.(12시간 소요)

리쉬케쉬 쪽에서 갈려면, 우선 하르드와르로 나와서,
'모라바다드'행 버스를 타야 합니다.(4시간 소요)
모라바다드에 가면 반바사 행 버스가 오전과 오후 4차례가 있는데,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말고 '루드라뿌르'로 가면 됩니다.

어차피 모라바다드에서 반바사가는 차는 루드라뿌르를 거치는데,
모라바다드-루드라뿌르는 매 시간마다 한대씩 있습니다.(2시간)
루드라뿌르에서 반바사 가는 버스역시 매 시간마다 있는데, 3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아마 시간을 계산한다면 바라나시-고락뿌르 거쳐서 카트만두 들어가는거나 비슷하게 시간이 걸릴듯 싶은데.......

데라둔에서는 반바사로 바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습니다.(12시간 소요)
델리에서 기차를 이용하실 분은 바일레리라는 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은 되는데요. 이 기차는 대부분 럭나우쪽으로 가는 기차입니다.(아직 기차는 안타봐서...)
역으로 네팔에서 인도로 올때는, 카트만두의 경우 뉴 버스 팍에서 오후 1,2,3시에 버스가 있습니다.(소요시간, 가격 동일)

포카라의 경우는 레이크사이드쪽의 디럭스 버스 정거장이 아닌, 로컬 정류장이 있습니다.
연속되는 16~19시간의 버스여행이 부담스러우시다면, 그리고 버스가 너무 없다면,
우선 네팔간지(12시간 소요), 나당가디(5시간 소요)로 가서,
하루정도 쉬고 다시 마헨드라나가르(네팔쪽 국경이름...)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동수단
네팔을 가기 위한 도시로 역 앞 길 건너에 몇 개의 호텔과 식당이 있고 값도 싸다.
여행사도 많고 흥정을 잘 한다면 여행사를 통해 네팔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소나울리 행(localBus)45Rs 버스가 많이 있다.역맞은편에서 탄다.(3시간 30분소요)
Boarder 출국, 입국 모두 걸어서 가능(릭샤 왈라가 멀다고 하지만 절대로멀지않다.)하다.
네팔비자는 간단한 서식 작성 후 US$30만 지불하면 무사통과

Boarder에서 싯타르타 버스파크까지 마을버스(7Rs)혹은 사이클 릭샤로 이동, 포카라나 카투만두, 룸비니등으로 가는 버스, 포카라행 (6:45/8:00저녁)2대 (190Rs)네팔 루피, 10-11시간 소요

※ 네팔에서 인도 루피 사용가능 단, 500인도 루피는 사용이 안된다.
가능한곳도 있으나 힘들다.
인디아 루피10 = 네팔 16루피


▶네팔로 가는길
국경을 넘는데는 3가지가 있다.
하르드와르 - 밤바사 - 네팔
고락푸르 - 소나울리 - 네팔
다질링 - 깔까르비타(실리구리) - 네팔

* 네팔(카투만두)에서 깔까르비타 막차 3시25분(450Rs) 16시간소요- 실리구리 행(8Rs) 1시간정도-다질링 (버스40Rs) 4시간, 짚(47Rs) 3시간

▶이동수단
카투만두에서 투어리스트버스(220Rs) 6시간
소나울리에서 버스(190Rs) 11시간


▶먹거리
김치 하우스 -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주인 '치주'가 한국말을 잘해서 트레킹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값이 비싸다.(100-300Rs) ACAP Office 못 가서 있다.
홍금보 아저씨네 - 한국에서 보다 더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곳
빵집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 숙소
포카라는 트레킹 객이 많기 때문에 lake side가 발달 숙소가 많고, 깨끗하다.
United Hotel 150-200Rs 조용하고 깨끗하다.
싼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도 많다.


* 볼거리
페와호수 산책, 배 타기
lake side 구경, 쇼핑
David's fall(Cave) - David's fall 맞은 편으로 동굴로 들어가면 David's fall로 통한다.
비싸다.(250Rs)
티벳 난민촌 방문- 다람살라를 갔었다면 굳이 갈 필요없음
Hungry Eye Restaurant :민속춤, 공연(오후7시-8:45까지)을 보며 식사를 한다.
공연을 보기 위해 따로 돈을 낼 필요는 없지만 음식값이 비싸다.
공연이 끝나고 현지인 들과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 슈퍼마켓이 많지만 가게마다 가격차가 나므로 싼 곳을 이용한다.
인도처럼 심하게 가격흥정을 하지 않는다.
비가 갑자기 오기 때문에 우산은 필수이다.
포카라 내에서 버스나 교통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 오토바이 대여, 인원을 맞춘다면 택시도 좋음(택시는 바가지가 심하다.)


* 트레킹

- Permit 받기
퍼밋은 Permit Office (10-3:30까지 休 토요일)
간단한 서식과 2000Rs

- Route 결정
코스는 보통 라운딩(15-20일 그 이상)과 ABC행(6-7일)과 Poon hill 방면(7일)크게 세 경우가 있다.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지도를 참고해서 올라가면 된다.

- 장비
장비는 트레킹 예정일의 날씨와 산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렉 사이드 길 따라 lent shop 도열해 있다. 가격은 정찰제이나 장비의 신구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특별한 장비 필요 없으며 가장 가볍게 가져 가는게 상책이다.

- 출발
보통 나야폴까지 택시(600Rs)4명타면 150Rs씩 1시간 30분소요
아니면 렉사이드에서 Bag lung Bus Park 까지 택시(60-80Rs) 버스로 나야폴(80Rs) 3시간정도

- 고도가 높아질수록 물가도 올라간다.
숙소는 200RS 도미토리75Rs 통일



*네팔로 가기 위한 도시가 고락푸르 라고 한다.. 네팔은 옛날 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였는데.. ㅋㅋ 나는 인도에 가서 살아야된다문 티벳이랑 네팔 그쪽을 넘나들 수 있는 북인도에서 살고 싶다. 네팔은.. 그냥 막연한 동경이지만 동경이 있는 곳이고. 티벳은.. 마음이 아픈 곳. 티벳은.. 라마불교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울리는 곳이다ㅠ_ㅠ*


+ 네팔 출입국 장소

카트만두의 트리부반국제공항
카카르비타(자파 - 네팔동쪽, 인도 국경)
비르간지(파사 - 네팔 중앙지역, 인도 국경)
코다리(신두팔촉 - 북쪽, 티벳 국경)
벨라히야(바에아화 - 루판데히, 인도 국경지역의 서쪽)
잠무나하(네팔간지 - 반케, 인도 국경지역의 중앙 서쪽)
모하나(당가디 - 카일아일, 인도 국경지역의 서쪽끝지역)
가다차우키(마헨드라나가르 - 칸차안푸르, 인도 국경지역의 서쪽끝지역)


인도에서 네팔로 가는 길

네팔과 인디아 사이를 오가는 전통적인 육로는 아직도 많이 이용된다.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교통수단으로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버스이다.

주요 국경 검문소는 수나울리-바이라와(Sunauli-Bhairawa), 비르간지-락사울바자르(Birganj-Raxaul Bazaar), 카카르비따-실링구리(Kakarbhitta-Siliguri) 등 세 곳이 있다. 수나울리 국경 검문소는 인도의 바라나시(Varanasi)로부터, 비르간지는 캘커타에서 그리고 카카르비따는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각각 네팔로 건너올 때 가장 편리한 곳들이다.

드물게 네팔 극서지역에 있는 마헨드레나가르-반바싸(Mahendrenagar-Banbassa) 검문소를 통해 네팔에 들어오는 여행자들도 있는데 이곳은 바라나시를 들르지 않고 델리(Dehli)에서 직접 네팔로 건너갈 때 편리한 방법이다.

네팔과 티벳을 오갈 때는 코다리(Kodari)를 거치는데 그룹으로 편성된 경우는 건널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북쪽으로 건너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몬순 기간 동안에는 주기적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길을 이용할 수 없으므로 이 루트를 통해 이동할 계획이 있다면 대안도 미리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가지 방법들 (1) 고락뿌르를 통해 소나울리로 가기

델리 -->고락뿌르 -->소나울리 --> 포카라나 카트만두로

델리나 자이뿌르쪽에 계시는 분들은 델리에서 고락뿌르로 기차를
델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그다음날 오후쯤에야 고락뿌르에 도착
이 기차가 럭나우를 거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힘드시다면 럭나우에서 쉬시고 버스로 고락뿌르까지 가는방법...

고락뿌르에 도착하시면 다시 국경마을 소나울리로 가는 버스를 찾으셔야해요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유리가 여행할 때만 해도 고락뿌르에서 소나울리가는 버스를 찾는게 힘들었어요.왜냐구요? 고락뿌르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서 말이죠^^;;

고락뿌르에 도착하면 근 근방에 호텔이름이 붙은 4~5층짜리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 근처에 넓은 대로가 보이는데 "네팔" 또는 "소나울리" 라고 물어보면 버스정류장을 찾는데 도움이 될꺼에요
버스는 한시간에 한 대씩 .소나울리까지 걸리는 시간은 저도 정확하게 생각이 안나는데 4~5시간 정도

소나울리에 도착하시면 먼저 사람들에게 "이미그레이션 오피스"를 물어보세요 그러면 금방 가르쳐주거든요.인도측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인데요 거기 가셔서 인도를 빠져나간다는 도장을 받으시구요(여권을 보여주고 도장받아야합니다)

그리고나서 나오면 국경같지 않은 국경(?)이 보입니다.뚜벅뚜벅 넘어 네팔측 이미그레이션 오피스를 가셔야해요. 거기서 네팔비자를 신청하는 서류를 쓰시고 여권과 돈을 지불하면 비자를 받으실수 있어

요기서 잠깐~!!

싱글 비자
단수비자 2개월 체류 가능 30$

멀티플 비자
60일 이내 한 번 더 재 방문 55$ (30$ +25$)
두 번 재방문 70 $ (30 + 40)

비자는 소나울리나 카트만두에 입국해서 받을수도 있고 한국에서도 받아서 갈수있습니다.
주한 네팔 영사관 (전화번호: :02-555-9040)

소나울리에서 숙소는 유명한 네팔 게스트 하우스(더블에 50루피 화장실 포함)로 가세요.
포카라나 카트만두로 이동하실 분들은 국경넘느라 피곤했을텐데 하룻밤 주무시고 아침에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여름철 우기에 네팔에 도착하셨다면 밤차는 위험하니깐 될 수 있으면 피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들 (1) 레 나닥/리쉬케쉬 지역에서 네팔 넘어가기

1.레/라닥을 주축으로 한 북인도 여행을 마치고 그쪽에서 네팔로 들어가시고자 한다면 델리로 나오셔서 올드델리 버스 스탠드에서 인도쪽 국경 반바사까지 버스로 이동하셔야해요~
반바사 가는 버스를 갈아타는 지점은 할드와니. 리쉬케쉬에서 할드와니 가는 버스 있답니다

2.반바사 버스 스탠드에서 사이클 릭샤로 긴 다리도 건너고 한 10여분 떨어진 곳에 허름한 인도쪽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서 출국 도장을 받으세요

3.다시 릭샤로 5분정도 네팔국경 마헨드레나가르로 이동해서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서 네팔비자를 받은뒤 조금 떨어져 있는 마헨드레나가르 버스 스탠드에서 네팔간지까지 버스로 이동한뒤 네팔 어디건 가시면 됩니다.(포카라,카트만두 등)

그러나 이코스는 정말 힘든 코스입니다. 버스 여행 말이죠.
그리고 나오실때는 여러곳에 국경이 있으니 상황대로 나오시면 되겠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 (1) 다르질링지역에서 네팔 넘어가기

:다르질링에서 산을 타고 직접 네팔로 넘어 가는 것은 불법으로 나중 발각 됐을 시 매우 난처한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_-;;

보통, 다르질링에서 합승짚차로 실리구리까지 내려온 뒤, 여기서 다시 네팔의 국경도시인 "카카르비타"까지 간 다음,다시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고 장장 14시간 정도 걸려 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 시간 선택을 잘 하셔야 합니다.(카트만두에 밤에 도착하지 않기 위해 카카르비타에서 밤차를 탈 것을 권함)

델리 근방을 돌아보고 "바라나시"에서 버스로 다이렉트로(약 8시간 소요) 소나울리까지 간 뒤, 네팔의 룸비니,포카라,카트만두를 돌아보고 다이렉트로 네팔 동쪽의 국경 카카르비타로 가서 바로 국경을 넘고 실리구리를 거쳐 다르질링으로 가시면 되요.

이 코스는, 일단 카트만두에서 카카르비타까지의 여정이 견딜만하고 네팔을 가로로 관통하는 의의도 있고,만일 오후 5시 쯤 출발하는 카카르비타행 버스를 카트만두 버스스탠드에서 타시면 다이렉트로 다음날 해 지기 전에 다르질링에 도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다르질링을 거쳐 다시 실리구리로 내려온 뒤 켈커타로 가시면 됩니다.
다시 델리로 가는 건 다이렉트로 가는 특별열차를 타시면 시간 절약되겠네요~!!

*최근에 네팔 동쪽 "카카르비타"를 통해 왕래하는 것이 별로 안좋은 소식이 들려오므로 가급적 안전한 "소나울리"를 통해 왕래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굳이 일정때문에 어쩔수 없이 통과한다면 날이 환한 대낮에 통과하는 것이 좋습니다.(특히 여자분은 가지마세요..유리가 말려요~)


여행 마치고 인도로 돌아오기

네팔 여행을 다 끝내면 이제 인도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남습니다.
카트만두를 여행의 끝도시로 잡으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인도와의 교통편이 훨씬 다양하고 좋기 때문이죠.

물론 나라얀 아저씨네 숙소(디키게스트 하우스-네팔에서 유명한 한국인 우대 숙소)에 묵는다면 나라얀 아저씨가 알아서 해주겠지만요.
일단 조인트티켓(joint ticket)을 끊으면 편한데 카트만두-소나울리-럭나우-바라나시등 연결이 다양합니다.

가격도 저렴할 뿐아니라 연결시간을 맞춰주기 때문에 좋습니다.물론 버스죠.
또 국경에서의 인도입국 도장을 받아야하므로 버스가 그곳에 들렀다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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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

오스트리아와 체코 두곳다 여행하기 무척이나 좋은 도시인거 같습니다.


우선 아는 선에서 소개드리죠.


1. 민박집

프라하 영은이네- 1박 15유로, 식사도 좋고 주인내외분들도 무척이나 친절해서 가족같이 지낼수 있어요

                           시내에서 지하철 7정거장정도의 거리.

프라하 뽀뽀네 - 1박 20유로. 식사좋고 아기자기한 숙소. 여자분들이 무척이나 좋아할만한 곳

                          구시가 광장 바로 옆이라 관광하기 좋음.

비엔나하임 - 1박 20유로, 주인 누님 괭장히 인정많고 투숙객 모두가 가족같은 분위기.

비엔나 마노아 - 아파트형 펜션. 취사가능한 독립된 원룸아파트. 2명이상 가면 추천


가격은 모두 지난 3월기준이니 7월에는 조금더 비싸겠네요.


2. 볼거리(건축물등은 워낙 유명하니 제외시킵니다)

체코 - 시내의 재즈바에서 열리는 각종 재즈 공연들. 200~300코룬. 밤 9시~12시

       -  국립음악당에서 열리는 실내악 공연(일본드라마 "노다메칸타빌레"를 보셨다면 강추)

       - 마리오네트 공연은 비추(개인적으로 좀 지겨웠음)

      - 카를교에서 열리는 수많은 거리공연들.


오스트리아 - 할슈타트 강추!!( 호수가에 위치한 옆서같은 마을)

                 - 빈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오페라( 돈이 있으시다면 좌석을, 없으시다면 5유로 내외의 입석!!)

                 - 슈테판 대성당 미사때 성가대로 나오는 빈소년합창단 노래 감상

                 - 빈필교향악단 연주감상( 한국에 오면 40만원 가량하는 공연을 단돈 만원으로 감상가능)

                 - 시내 거리에서 열리는 갖가지 연주들(피아노, 클라리넷, 성악, 글라스연주 등)

                  - 벨베데레 궁전에 전시되어있는 '쿠스타프 클림트'작품 감상


3. 먹거리

 체코 - 물값보다 싼 흑맥주 강추!!

         - 꼴레뇨 라고 불리우는 돼지 무릎요리

         - 길거리에서 파는 시나몬 롤 과 팔뚝만한 소시지, 피자튀김(?)강추


 오스트리아 - 비엔나 커피라 불리는 멜랑주, 아인슈패너 등의 커피

                   - 초콜렛 케익의 지존, 자허토르테!

                   - 각종 립 요리. 저렴한 가격에 엄청난 양의 립을 먹을수 있음.



작년 12월에 한번, 올해 3월에 한번 다녀왔었는데 기억나는 데로 적어봤습니다.

프라하에서 빈으로 이동할때는 버스타시면 되요. 요금은 국제학생증 있으면 10유로, 없으시면 12유로정도

합니다. 시간은 5시간정도 걸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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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que Terre 친퀘테레 지역


중세 시대에 terra 는 마을을 의미 했으며,

Cinque Terre(5개 마을) 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 되었습니다.

Punta Mesco에서 시작해서  다섯개의 마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마을이 Monterosso al Mare로 하나의 긴 해변과 산책길이 역사가 오래된

중심가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두번째 마을은 Vernazza로 강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친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에 의해

험한 바다로 부터 자연적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친쿼테레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이 착륙 장소 입니다.


세번째 마을은 Corniglia로 친쿼테레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내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언덕 주변은 포도원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시골풍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다섯번째 마을인 Manarola 와 Riomaggiore는 바위 위에 건설된 도시 이며

여기에 있는 집들은 바다에서 바라보면 여러색의 모자이크가 일어나듯 보입니다.

친쿼테레 다섯 마을중 가장 대표적인 도시들입니다.


The Via dell'Amore (Lovers' Way:연인들의 길)은 Riomaggiore - Manarola 사이에

바다에 면해있는 절벽을 따라 생겨난 친퀘테레에서 가장 유명한 오솔길 입이다.


Cinque Terre 친퀘테레 가는 길
 

친퀘테레 여행은 어떻게 보면 5개 마을을 여행하는 것을 의미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유적지와 문화등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 어쩌면 아름다운 경치에 빠지게 되어

다른 것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은채 어느새엔가 마을을 다 지나 칠수도 있습니다.


일단 친퀘테레를 보려고 생각 하셨다면 그전에 어디에서 시작 할건지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밀라노에서 쇼핑을 하거나, 축구(AC밀란,인터밀란)를 보거나 , 시내 관광을 하실 분은

밀라노에서 제노바로 해서 들어가는 것이 편하겠지요..


아니면, 로마에서 부터 올라 오신다면 피렌체-피사를 거쳐서 오시는 방법이 있을겁니다.

(피렌체를 볼 생각이 없으시다면, 로마에서 피사를 거쳐 La Spezia로 직접가는 열차도 있습니다.

 하지만 완행 이라는 것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또다른 방법은 베네치아에서 Parima를 거쳐 밀라노-제네바 또는

La Spezia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든  La Spezia 또는 제노바에서 시작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제노바(Genova)에서 약 130 km

라스피에차(La Spezia) 에서 약 10 km



일반적으로 기차를 많이 이용 하며, 여름 성수기에는 열차 편수가 자주 있는 편입니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서 피사를 거쳐 라 스페찌아로 가는 (Genova line)은 모든 역에 정차 합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완행열차 입니다.)


이태리 국내 열차 소요 시간 :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서 조회를 했으며, 여름의 성수기에는 열차 편수가 더 많을 겁니다.)


Firenze - Pisa : 약 1:30분 소요 (20분~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Firenze - La Spezia Centrale(피사경유) : 약 2:30분소요

            (약 1시간 간격으로 드물게 열차 있으며, 피사에서 환승하는 경우도 있슴)


Pisa - La Spezia Centrale : 1시간~1:30분 소요(20 ~ 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Milano - Firenze : 2:30 ~ 3:30 소요(10~30분 간격으로 열차 있슴)

Milano - Parma   : 1:15 ~ 1:40 소요(10분 ~ 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Milano - Genova : 1:30~2:00 소요(10~50분 간격으로 열차 있슴)


Parma - La Spezia Centrale : 2:30분 정도 소요

            (약2시간에 1대간격으로 열차가 있으며,PONTREM역에서 환승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친퀘테레 열차 소요 시간 :

(노란색이 친퀘테레 5개 마을 입니다.)


Genova - Levanto                      : 약 1:30분 소요(30분~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Levanto - Monterosso al Mare   : 약 5분 소요 (30분 간격으로 열차 있슴)

Monterosso al Mare - Vernazza : 약 15분~20분 소요(30분~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Vernazza - Corniglia                   : 약 15분 ~ 20분소요(약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Corniglia - Manarola                   : 약 5분~10분 소요(약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Manarola - Riomaggiore             : 약 10분 소요(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La Spezia에는 기차역이 2곳이 있습니다.


Riomaggiore - La Spezia Centrale   : 약 15분 소요 (20분~1시간 간격으로 열차 있슴)

Riomaggiore - La Spezia Migliarina : 약20분 소요 (20~1시간 간격으로 열차가 있슴)


[The Blue Path (Cinque Terre) 지역 정보]

[5 TERRE CARDS - 친쿼테레 카드 정보]

[Cinque Terre 친퀘테레 지도]

출처 : 친구야 배낭여행 가자.!!! http://cafe.naver.com/next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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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정식 국명은 영문으로는 'REPUBLIC OF POLAND'이고, 한국말로는 폴란드 공화국이다. 또, 폴란드어로는 'POLSKA RZECZPOSPOLITA'이다. 폴란드라는 말의 어원은 폴란드어로 폴스카인데, 폴스카란 '밭' 또는 '숲 속의 풀밭', '낮은 땅' 을 뜻하고 있다. 폴란드가 처음 국기를 제작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10세기말이고, 현재의 국기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이다. 폴란드의 국기 모습을 보면 직사각형이 정 가운데가 한 개의 수평선에 의해 나누어져 있으며, 전체가 크게 두 개로 양분되어져 있다. 폴란드의 국기는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흰색과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색깔의 배분을 살펴보면 위쪽은 흰색으로 되어 있고 아래쪽은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폴란드에서는 흰색과 붉은색을 국가의 상징 색깔로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폴란드가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되어 지배당하기 시작했던 1795년부터 1918년까지 국민들이 꾸준하게 독립투쟁을 벌여 왔으며, 특히 1831년 11월에 일어난 대대적인 독립투쟁을 계기로 하여 흰색과 붉은색을 국가의 상징색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각 색깔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흰색은 평화를 뜻하고 있으며 붉은색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며 흘린 피와 자유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 국기는 상징색들을 이용하여 제작되게 되었다. 현재의 폴란드의 국기가 모습이 확정된 것은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의 독립이 정식으로 인정되고「폴란드 공화국」으로 탄생하면서부터이며, 폴란드 국기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국기로는 인도네시아 국기와 모나코 국기가 있다. 이들 국가의 국기는 폴란드 국기와 반대로 위쪽은 붉은색이고 아래쪽은 흰색으로 되어 있다.
폴란드의 국화는 순박함을 자랑하고 있는 데이지 꽃이다. 폴란드 국민들은 데이지꽃 외에도 카네이션도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축하와 기쁨을 나타낼 때 주로 이용하고 있다. 수도는 바르샤바(WARSAW)인데, 이 도시에는 약 2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폴란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동유럽의 파리’로 불려지고 있고, 동유럽에서 제일 가는 도시이다. 폴란드는 동유럽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총면적을 세계적으로 비교해 보면 멕시코보다 조금 작은 국토를 가지고 있다. 폴란드의 국경의 길이는 총 3,114㎞ 에 달한다.
폴란드에는 삼림이 국토면적의 25%를 차지하고 있는데, 서유럽의 활엽수림에서 동유럽의 침엽수림으로 옮겨가는 중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목의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요 수목으로는 소나무, 낙엽송, 너도밤나무, 참나무, 자작나무, 고도가 높은 곳에는 가문비나무가 있다. 카르파티아 산맥 중에서도 고지대에는 아고산성, 고산성 식생이 분포되고 있다. 식생은 폴란드 남부 지역의 타트라 산지는 알프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동부 지역에서는 스텝 지역이 나타나게 된다. 폴란드의 북부 지방은 최근까지도 빙하 지대였고 일부가 사구(砂丘)로 되어 있다. 남부 지방은 빙하에 의해서 생긴 퇴석(堆石)과 호소(湖沼)가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중부와 남부의 일부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며 포드졸 토양으로 되어 있으며 원래 소택지로 비옥한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

폴란드의 경제정책은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면서부터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폴란드는 생필품의 가격의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육류와 일부 식료품의 수입을 자유화하였으며, 임금을 인상하고 가격을 인상하는 인플레 억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외환보유고의 증가가 통화를 팽창하게 하는 주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는 금리를 인하하고 환율을 조정하는 정책을 주요 정책으로 하고 있다. 폴란드는 세부적으로는 경제구조를 사유화시키고 국영 기업의 비율을 50%이하로 줄이고 1995년까지는 20%로 줄이려 하고 있다. 임금과 고용을 안정시키고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키려 하며, 농경지를 사유화시키고 국가 보조금을 GDP의 6%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다. 그리고, 사회 간접시설을 늘리고 도매업 부문을 사유화하며 식품가공업의 독점을 해제하는 것을 진행하고 있다.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외침을 받은 수난의 역사였지만, 예술적으로 보면 자존심이 강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폴란드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반기를 처음으로 든 나라로 사회주의 국가였을 때도 종교적으로 가톨릭교를 확고히 믿고 발전시켜 나갔다. 폴란드는 역사 이래로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으며,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폴란드에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음악분야에서 세계적인 작곡가인 쇼팽이 있으며, 과학분야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라듐을 발명한 퀴리부인이 있고, 문학분야에는 노벨상을 받은 헨리 시엔키에비츠, 레이몬트, 체스와프 미와시가 있고 종교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있다. 폴란드의 교육적인 면을 볼 때, 대학생들은 수학과 철학분야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경제와 기술분야에 인재들이 많이 몰리고 있으며, 종합대학이 11개, 기술대 학이 18개, 의과 대학이 11개, 사범 대학이 10개, 농업 대학이 9개, 경제 대학이 6개, 예술 대학이 17개, 체육 대학이 2개, 해양 대학이 2개, 가톨릭 대학이 2개가 있다. 폴란드의 의대생들의 2/3는 여성이고, 치과나 약학과는 대부분이 여성이다. 폴란드에서 유명한 대학은 바르샤바대학으로 1818년에 설립되었으며, 전통이 매우 깊은 학교이다. 야키엘로대학은 1364년에 설립되었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중의 하나이며 과학자인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하였다. 폴란드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56%는 초등교육을 이수하였고 전체 인구 중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은 33%정도이다. 한편 폴란드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학교도 존재한다.

항공
폴란드는 2004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직항으로 운항하는 항공사는 없기 때문에 유럽이 대도시나 러시아를 경유하여 갈 수 있다. 폴란드의 국제공항은 수도인 바르샤바, 오테치, 그다니스크, 크라코프등에 있다.

바르샤바 공항은 제 1터미널과 제 2터미널로 구분되어 있다. 제 1터미널은 국제선 시설이고,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출입국 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제 2터미널은 폴란드 국내선시설이지만 동유럽 국가들의 항공기가 도착하게 된다. 폴란드의 국영항공사인 LOT(폴란드 항공)은 유럽의 여러 도시와 노선이 연결되어 있으며, 유럽 각국의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다.

훼리
발트해에는 그다니스크와 그디니아에 항만시설을 잘 갖추고 있고, 이곳에서 무역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국제항구로는 그다니스크, 그디니아, 슈췌친, 슈비노우이쉬에가 있다.
폴란드는 선편을 이용하여 여행할 수 있는데 PLO(폴란드 항공운사)에서 선박여행을 실시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항구나 수도의 대리점에서 관련자료를 얻을 수 있다. PZB(폴란드 선박공사)에서는 현대화된 페리호를 통하여 덴마크, 독일, 스웨덴, 핀란드와 연계되어 있다.

면적 : 31,2683km2

수도 : 바르샤바

종교 : 폴란드 민족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가톨릭교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 인구 95%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 폴란드 국민들 모두는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그 밖에는 이슬람교, 그리스 정교회, 프로테스탄교, 유대교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교는 폴란드인들에게 줄곧 신봉되어져 왔으며 1979년에는 크라코프의 추기경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주요민족 : 폴란드인이 97.6%, 독일인이 1.3%, 우크라이나인이 0.6%, 벨로루시인이 0.5% 으로 대체로 단일 민족으로 볼 수있는데 폴란드인 이외의 인종은 2차대전 이후에 유입되었다.

주요언어 : 언어는 국민의 98%가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후
폴란드의 기후는 전국적으로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아 폴란드의 기후는 서유럽의 습도가 높은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가 교차하고 있으며 두 기후를 동시에 영향을 받고 있다.
여름은 덥고 때때로 30℃를 넘을 경우도 있으나 밤에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서늘한 편이다. 여름철의 기온은 지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중부 지방의 기온이 가장 높은 편이고 남부와 북부는 비교적 낮은 기온을 나타내고 있다.
가을은 폴란드의 사계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서, 하늘이 높고 푸르며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따뜻한 편이다. 가을에도 밤에는 매우 서늘하고, 겨울은 추워서 0℃ 이하일 때가 대부분이다. 폴란드에는 눈이 많이 오는데 특히 남부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와서 남부 지역 산맥들이 겨울 내내 눈으로 휘덮히게 된다. 동부 지방에도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평균 60일∼70일은 눈을 구경할 수 있다. 폴란드의 하천들은 2-3개월간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도 많다.

지리
중부 유럽에 자리잡고 있는 지도상에는 동유럽으로 표시되어 있다. 폴란드는 북위 49°- 54°50′이며 동경 14°7′- 24°8′에 위치 하고 있다. 폴란드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나라들은 먼저 동쪽으로는 부그 강을 경계로 하여 리투아니아 공화국과 벨라루시 공화국, 러시아 공화국,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이웃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을 경계로 하여서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카르파티안 산맥을 경계로 하여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데티 산맥을 경계로 하여 체토 공화국이 있다. 북쪽은 발트해와 접하고 있다. 폴란드의 국토의 모양은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폴란드 국토의 대부분은 제 4 빙하기에 속하고 있으며 토의 대부분인 90%가 계곡이 있는 넓은 저지대로 북유럽 평원에 속해 있는 저지대이며 호 수가 여러 곳에 있으며 전체 국토면적의 75% 이상이 해발 200m 이하이다. 폴란드 국토는 전체적으로 평평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역사
6세기경, 지금의 폴란드 북서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서슬라브인은 10세기께 폴라니족에 의해 통일된다. 그리고 이들은 966년, 폴라니족 피아스트(Piast) 왕조의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025년 볼레스와프가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기반을 다지며 지금의 폴란드와 유사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주변 세력의 팽창으로 안정적으로 국가가 발전하지는 못했다. 게르만족은 포메라니아 지방에 진출, 정착하였으며 보헤미아 왕국은 실레지아 지방을, 프로이센(프러시아)은 북부 지역을 각각 점령하며 국가의 기반을 위협하였다. 이에 1226년 마조비아 공은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불러들여 북동부의 프로이센을 진압하였다. 1241년과 1259년에 연이어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아 폴란드 남부 지방이 황폐화되는 등 피아스트 왕국은 1320년 통일될 때까지 외세의 침입에 따른 국권의 수호에 힘을 쏟아야 했다.

14~17세기는 폴란드의 전성기로 기록된다. 특히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르 3세는 문화의 부흥과 개혁에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등의 도시가 이 때 세워졌다. 왕위를 상속할 자식이 없이 카지미르 3세가 죽자 왕위는 헝가리의 야드비가 공주에게 계승되었고, 야드비가 공주는 1386년에 리투아니아의 왕자와 결혼하여 양국은 야기에워(JagieLLo) 왕조로 통합되었다. 이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는데,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 기사단의 팽창에 함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0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연합군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물리쳤고 1454년에 시작된 13년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그들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1525년에 폴란드의 속지가 되었고, 1490년에 카지미르 4세는 헝가리의 왕위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폴란드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문화와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역사적 부흥기를 맞았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저작을 내놓았으며, 종교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교조적인 중세의 종교 행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여 1569년에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는데, 이로써 폴란드는 남쪽의 흑해에서 북쪽의 발틱 해에 이르는 대국가를 건설하며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 귀족 계급의 권력화가 이루어져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왕이 선출되는 등, 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왕들은 귀족 계급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에 힘을 쏟았다. 스테판 바토리 왕은 군사력을 강화시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얀 소비에츠키 왕도 투르크 군의 빈 봉쇄를 종식시키고 퇴각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한편, 이 시기에 폴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이 농노제와 예수이트 교단의 카톨릭화 정책 등, 폴란드의 지배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은 폴란드의 통제에서 벗어나 러시아에 예속되었고, 1655년 프로이센은 스웨덴과의 전쟁 패배로 폴란드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와 귀족의 동의 없이 왕은 어떠한 권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1652년에는 귀족 회의에 거부권까지 부여되어 폴란드는 정치 공황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불안과 함께 러시아, 스웨덴, 터키와의 전쟁 등으로 폴란드는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까지 받으며 급격히 쇠퇴해 갔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왕은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간의 분쟁으로 야기된 러시아와의 갈등과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개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를 이용하여 주변 강대국들은 폴란드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고 마침내 1772년에 폴란드 분할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분할되었다. 분할이 되자 폴란드 정치인들은 고질적인 귀족 회의의 거부권을 폐지하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정치,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고, 1791년 5월 3일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초기에는 터키와 스웨덴의 침공을 우려한 러시아가 폴란드의 개혁을 지원하여 성과가 있었으나 기득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귀족 연합 세력이 러시아에 개입 요청, 러시아는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그 결과 폴란드는 1793년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해 2차 분할이 단행되었다.

2차 폴란드 분할이 일어난 후, 폴란드 내에서는 거국적인 봉기가 발생하였다. 특히 타데우시 코쉬치우스코(Tadeusz K ciuszko)는 농도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조직하여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력 앞에는 역부족이었고,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다시 바르샤바를 침공하여 1795년에 3차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여 폴란드의 나머지 영토마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으로 분할되었다. 이 때부터 폴란드는 1919년에 독립할 때까지 120년 동안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폴란드가 완전히 분할된 때는 독립 투쟁의 시기였다. 1797년 폴란드 군단이 이탈리아에서 창단되었고,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가세하였으며 세 차례의 무장 봉기, 즉 러시아에 대항한 1830~1831년 혁명, 프로이센에 대항한 1848년 혁명, 그리고 1863~ 1864년에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어난 1월 봉기 등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병참 기지로 프로이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 내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움으로써 폴란드인은 한 줄기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에 패배하여 철수함으로써 붕괴되고 그 결과 1815년, 빈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러시아 황제에 귀속되어 반자치 국가인 폴란드 왕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세 차례의 민중 봉기를 지나고 나서 반자치 국가였던 폴란드 왕국은 붕괴되고 완전히 러시아에 흡수당하고 말았다. 1864년 봉기를 끝으로 민중 봉기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농민 계층을 중심으로 민족 의식은 꾸준히 이어져 갔으며 경제·사회 제도도 부분적으로나마 발전되어 나갔다. 특히 프로이센 점령 지역은 독일의 산업화로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점령 지역은 발전은 늦었지만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자치권이 인정되어 활발한 민족 운동과 정치 활동이 전개되었다.
해외에 망명해 있던 폴란드인들도 독립을 위한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며 점차 정파나 정당의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1882년에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적 정당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가 비밀리에 조직되었고, 1883년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a)가 이끄는 좌파 그룹들이 '폴란드 왕국 사회 민주주의'를 조직하여 폴란드의 독립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들과 협력하는 국제 공산주의의 산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우스드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사회당의 일부 세력이 1908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정당에 가세하여 폴란드 최초의 공산당인 '폴란드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독립에의 의지를 키우던 폴란드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멸망,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몰락, 그리고 독일 제국의 패망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1918년 자력이 아닌 외부의 힘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전압 및 주파수
220V에 50Hz의 전기 규격을 사용한다.

치안
비교적 안전한 편이나, 최근 살인, 마약밀수, 인신매매등 강력 조직범죄 빈발한다. 버스나 전차등 사람이 많은 곳에서의 소매치기와 야간 기차에서의 강도 주의가 요망된다. 특히 국경을 넘는 야간 기차에는 강력한 마취제를 살포한 뒤, 강탈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Skin Head족 등 불량배들과 마피아가 있긴 있으나, 일반적으로 거리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우범지역은 기차역, 야간의 Old Town, 비스와강 동쪽 북부 프라가 (Praga)지역 등이다.

낮에는 소매치기가 많은 편이므로 혼잡한 버스나 전차, 기차안과 승하차시에 주의하여야 하고,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기 쉽다. 밤에는 바르샤바 중앙역과 도심지에서 강도를 만날 수 있으므로 혼자서 다니지 않는 것이 좋으며, 한적한 거리는 다니지 않는 편이 좋다.

통화
폴란드의 통화는 졸티(Zloty)로 미화 1달러가 약 4졸티 정도 된다.

주의사항
• 폴란드를 여행하는데 별다른 제한이 없으나 국립공원에서는 환경보호를 위하여 교통규제가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하고 호텔에 숙박할 경우에는 여권을 갖고 있는 것이 좋다. 또한 폴란드 졸티화를 외국으로 반출하는 것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므로 주의하고 폴란드 열차에는 여행객들을 목표로 하는 범죄조직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 겨울철 의복으로는 두터운 외투와 모자가 필요하고, 여름에는 우의가 필요하며 밤에는 서늘하므로 긴팔의 상의가 있어야 한다. 여름에는 면직물의 의류가 적당하다.

• 석회질이 많아소 물위에 뜨는 등 수질이 매우 나쁘므로, 수돗물은 먹을 수가 없으며, 마실 물은 미네랄워터를 구입하여 마시는 것이 좋다.

• 바르샤바 역에는 화장실이 있지만 대개 잠겨 있으므로 열차안에서 해결하여야 한다. 폴란드의 화장실 표시는 남자는 빨간색이고 ▽ 표시가 있고, 여자는 파란색이고 ○ 표시가 되어 있다. 화장실에는 휴지가 구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팁 제도는 일반적으로 10%정도의 팁을 주며, 주로 음식점, 호텔, 이용원, 카페 등에서 팁을 기대한다. 이 나라의 특산품으로는 폴란드의 특산품인 호박(Amber)과 전통 술 보드카가 유명하다. 그리고, 손으로 수를 놓은 폴란드 특산 식탁보도 이색적인 기념품이 될 수 있다.

철도
폴란드에서는 동유럽 철도패스를 이용할 수 있다. 동유럽 철도패스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의 철도 시스템을 1개월 동안 정해진 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1등석과 2등석으로구분되며 5일권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5일을 추가할 수 있다.
1등석 5일권은 $226, 2등석은 $160이며 하루 연장할 때마다 1등석은 $26, 2등석으 $19을 추가로 지불한다. (가격은 2004년. 미국 달러 기준)

폴란드의 기후는 전국적으로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아 폴란드의 기후는 서유럽의 습도가 높은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가 교차하고 있으며 두 기후를 동시에 영향을 받고 있다.
여름은 덥고 때때로 30℃를 넘을 경우도 있으나 밤에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서늘한 편이다. 여름철의 기온은 지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중부 지방의 기온이 가장 높은 편이고 남부와 북부는 비교적 낮은 기온을 나타내고 있다.
가을은 폴란드의 사계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서, 하늘이 높고 푸르며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따뜻한 편이다. 가을에도 밤에는 매우 서늘하고, 겨울은 추워서 0℃ 이하일 때가 대부분이다. 폴란드에는 눈이 많이 오는데 특히 남부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와서 남부 지역 산맥들이 겨울 내내 눈으로 휘덮히게 된다. 동부 지방에도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평균 60일∼70일은 눈을 구경할 수 있다. 폴란드의 하천들은 2-3개월간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도 많다.




▶ 바르샤바

폴란드의 수도이자 바르샤바주의 주도로 인구는 약 165만명이며 바르샤바평야의 중심부인 비슬라강의 중류 양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르샤바는 중요한 2개의 통로, 즉 유럽 평원을 가로지르는 동서통로와 발트 해와 남유럽을 연결하는 통로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교통, 통신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동유럽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의 요충지입니다.
13세기에 바르샤바에 도시가 건설되고, 14세기부터는 그 지방을 차지한 여러 제추령의 중심도시가 되어오다가 1596년부터 지그문트 3세에 의해 폴란드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1795년에는 프러시아에 통제를 받으며 폴란드 왕국으로 명백을 겨우 유지하였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수도로 다시 환원되었습니다.
바르샤바는 1914년 세계 1차 대전 때, 독일에 점령당했다가 독립을 되찾았지만, 세계 2차 대전 때는 나치로부터 처절한 보복을 당했습니다. 그로인해 바르샤바 주민의 3분의 2가 살해당했고 시내 대부분의 80%가 파괴되었으나 바르샤바 시민들은 그들의 역사적인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면서 현대적인 도시로 복원해 냈습니다.
폴란드는 여전히 도로확장, 교회, 대저택의 개조, 고원 지역의 확대 등으로 도시의 현대화에 힘쓰고 있으며, 바르샤바에는 폴란드 국회와 그외의 정치기관들, 정부 단체들이 있으며 폴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중심지가 바로 바르샤바입니다. 또한,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많은 화랑과 극장, 박물관등이 있으며 역사동후회, 쇼팽 협회같은 많은 문화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습니다.
바르샤바는 교외선, 고속도로, 전차등의 대도시권과 통하는 교통망이 잘 되어 있는데, 이처럼 바르샤바는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철도, 도로교통의 요지이면서 볼거리가 많아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도시입니다.

교육
174년의 역사를 가진 바르샤바 대학은 폴란드에서 크라쿠프의 야기에오 대학 다음으로 오래되었고 1818년에 창설되었습니다. 폴란드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교정에는 나무와 꽃들로 가득하고 여름에는 마치 큰 저택의 정원같은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대학안에는 코페르니쿠스 상과 미츠키에비치 상, 1830년에 세워진 코슈스코 상이 있는데 세계 2차 대전때 많이 손상되었다가 현재는 보건된 상태입니다.
바르샤바 대학은 거대한 도서관을 갖추고 있고, 많은 연구소와 산업체를 통해 자연과학 및 사회 과학 연구를 조성하는 '폴란드 국립과학학술원'의 활동이 바로 이 바르샤바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활발한 연구활동의 중심지로 특히 핵물리학과 기생충학과 분야의 연구가 돋보이는 곳입니다.

산업
산업은 다양하며 노동력의 약 3분의 1이 국영제조회사에 고용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협동 산업체, 중소 민간기업, 국영도매상에 종사하며, 전기공학, 야금, 인쇄업, 화학제품, 섬유, 의류, 식품 등의 제조업이 경제를 주도합니다. 또한, 바르샤바는 고도로 전문화된 원예 및 채소 재배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 크라카우 [Krakow]

크라카우라는 지명은 바베르 구릉에 요새를 구축했던 슬라브 종족의 전설적 지배자 크라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1038년 폴란드의 수도로 지정된 후 558년간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폴란드의 수도였으며, 현재에도 폴란드의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로서 1978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12대 유적지로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유럽의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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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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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의 통칭은 포르투갈(Portugal)이나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 공화국(The Portuguese Republic)이다. 포르투갈이라는 국명은 국가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 포르투(Portucale)에서 유래했다. 포르투는 무어족에 의해 황폐화된 남부 Galicia 지방을 재조직하고 평정하기 위한 행정의 중심지로서, Douro강 어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 연안을 이루고 있는 포르투갈은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대서양의 관문'이다. 현재의 국가는 1957년 7월에 만들어져 같은 해 11월에 관보 제 199호를 통해 공포되었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서단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스페인에 등을 대고 전면은 대서양에 임하 고 있다. 국토 면적이 9만 2,082 평방 Km 밖에 안되는 소국이지만, 일찍부터 해외에 진출하여 광대 한 식민지를 획득,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의 지탄을 받아 가면서 계속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 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광업을 주 상업으로 하는 나라이며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에 서는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포르투갈 문화예술은 풍부한 역사적 전통과 함께 민간 문화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민간 문화 재단인 글벤키안문화재단(Gulbenkian Foundation)은 풍부한 재원과 경험 많은 운영진을 보유하고, 포르투갈 문화예술의 진흥과 국제문화 교류증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포르투갈의 문학은 초기부터 발전한 다양하고 풍부한 서정시와 중세 이후에야 발전한 국민 서사시, 그리고 역사적 저술 등은 풍부한 편이나 극이나 전기, 수필 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19세기까지 포르투갈의 문학은 거의 알려지지도 연구되지도 않았으며 처음부터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에는 프로방스의 영향을 받다가 17세기에는 스페인의 문학이 문학적 표준이 되었고,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에도 영국 및 독일의 영향도 많았다. 특히 2세기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대부분의 포르투갈 작가들은 두 언어를 함께 사용했으며, 스페인 문학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스페인어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프르투갈 문학은 스페인의 문학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16세기의 질 빈센트의 희곡들과 함께 15세기 루이스 데 카몽드(Luis de Camoes)가 쓴 포르투갈의 역사서인 '오스 루시아다스'는 근대문학의 서사시들 가운데 가장 국민적인 작품이다. 소설의 경향은 19∼20세기초의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변천해 왔는데,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가로는 조세 마리아 에사 데 케이로스(Jose Maria Eca de Queiros)와 아킬리누 리베이루(Aquillino Ribeiro) 등이 있다.

그외에도, 포르투갈의 음악활동은 굴벤키안 재단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국립방송 교향악단인 National Broadcasting Symphony Orchestra와 포르토 교향악단, 리스본시향을 비롯한 여러 교향악단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민속음악과 전통민요의 일종인 파두(Fado) 등도 음악적인 표현양식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양대 예술사 방면중에 미술의 회화 부문은 15세기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초기 Nuno Goncalves파에 이어 플랑드로파의 영향을 받은 미술이 많았고, 이후 20세기에는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성 비센테의 제단화'를 그린 누노 콘살베스와 비제우파의 그랑바스코가 있다. 장식 미술로는 유약을 입힌 타일(Azulejos)이 유명하며, 16세기와 17세기에 지은 건물에는 청색과 백색등의 타일이 많이 사용되었다. 조각부문은 12∼13세기의 거대한 무덤에 주로 새긴 조각들이 많으며 18세기 후반의 바로크식 목조각 등도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용 역시 다채로운 민속무용이 각 지방의 종교적 축제에서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 지방무용으로는 Vira, Chuia, Corridihno, Tirana, Fandango 등이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약간의 낯설음과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나라 바로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15세기에는 세계 최강의 해양대국으로 유럽에 군림했었다. 브라질을 식민지화 하여 남아메리카에 언어의 섬을 만들기도 했던 포르투갈. 현재는 유럽 후진국에 속하지만, 그 덕분에 싼 물가는 여행자에게 고마울 뿐이다. 드라마에 삽입되곤 하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Barco Negro’로 알려진 전통 가요 ‘파두Fado’의 애절한 선율로, 어쩌면 포르투갈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해진 나라일지도 모른다.

항공
한국에서 가는 직항편은 없고 유럽 주요 도시에서 연결되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한다. 리스본과 포르토 등 주요 도시에는 국제공항이 있으며, 특히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리스본행 비행기가 매일 3∼4편이 있다. 파리와 로마, 런던,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코페하겐 등지에서도 리스본까지 취항하는 항공편이 매일 있다.


면적 : 약 92,000㎢

수도 : 리스본

인구 : 약 1,050만명

종교 : 인구의 99%가 카도릭을 믿는다.

주요민족 : 포르투갈인은 이베리아족, 켈트족, 게르만족, 무어족, 로마족이 혼합되어 있으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지중해 민족인 켈트와 라틴계 민족이다. 그외에 소수민족으로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이주하여 아조레스와 마데이라에 주로 거주하는 아프리카계가 있다.
포르투갈인들의 신체적 특징은 지중해주변 민족들과 유사한 편이다. 키는 유럽인들의 평균키보다 약간 작고 갈색 눈에 검은 색의 곱슬머리, 파르스름하거나 갈색피부를 가지고 있다.

주요언어 : 언어는 포르투갈어(portuguese)가 공용어와 상용어로 사용되며 스페인어와의 유사성으로 인해 국민 대부분이 스페인어의 이해가 가능하다. 또 기존에 폐쇄적이었으나 최근 구라파 여러국과의 급속적인 교류로 인해 영어와 불어의 사용이 가능한 지식인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

관광제안
이탈리아에는 칸초네, 프랑스에는 샹송, 스페인에는 플라멩고, 그리고 포르투갈에는 파도가 있다. 파도는 라틴어로 'Fatum'에서 나온 말로 '운명', '숙명'이라는 뜻으로 신의명령에 의해 이미 예정된 인생은 변경할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마 포르투갈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파도가 포르투갈 국민들의 삶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인도항의 발견을 기점으로 '발견의 시대' 또는 '대 항해의 시대'라 지칭되는 15 ∼ 16세기, 두 세기에 걸쳐 유럽세계의 정신적, 문화적, 공간적 개방 운동을 선도하며 자신이 속한 유럽 세계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만나도록 하여 인류역사의 새로운 지평선을 그었으나, 그 화려했던 해양대국으로서의 영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지금은 조그마한 유럽의 빈국으로 남아있다.

파두는 이렇게 최강의 해양대국에서 서유럽의 최빈국으로 전락한 포르투갈의 흥망성쇠, 그 자체인 음악으로 주로 불행한 사랑, 이별의 고통, 슬픈 운명을 노래하고 있는 멜랑콜리한 노래이다. 그래서 항상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감도는 달빛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분위기에서 불러진다. 검은 드레스 위에 역시 검은 숄을 걸친 채 곧게 서서 온몸으로 열창하는 파두 가수(Fadista)의 애조 띤 목소리는 심금을 울리며 전율을 느낄 정도로 애잔하다. 가끔은 생각에 잠긴 듯 살포시 눈을 감은 채, 또는 기쁨을 연상케 하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랑과 질투와 별리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파두 가수의 노래는 비록 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쉽게 황홀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전통적으로 두명의 기타리스트가 팅겨대는 기타와 여리면서 애절한 음만이 가수의 목소리를 떠받쳐주고 있는데, 이는 파두 가수와 청중들간의 가슴 뭉클한 교감을 쉽게 나누게 해준다.

파도는 포르투갈의 토속적인 음악, 그리고 아랍인의 음악기법(포르투갈은 아랍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이 어우러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파도의 기원이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중세에까지 거슬러간다고 여기고 있다. 혹자는 리스본을 드나들던 선원들에 의해 19세기 브라질에서 유래하여 리스본의 부랑자계층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고 하나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실제 초기에는 리스본 항구 선창가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점차 시민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귀족계층이 참여하게 되면서 현재의 파도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이 넘치는 도시인 리스본의 호젓한 밤거리를 거닐다 어렴풋이 애잔하게 들려오는 파도음악을 듣게 되면 남편이나 애인, 또는 자식을 기약할 길 없는 머나먼 바다로 내보낸 여인네들의 슬픔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 하다.

이러한 파도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 가슴 속 감정을 뽑아내는 '멜리스마' 창법, 만돌린 비슷하게 생겼으며 청아하고 감칠 맛 나는 음색의 '기타하(Guitarra-12줄의 포르투갈 고유 기타)' 반주, 그리고 이별과 운명을 즐겨 다루는 가사가 그것이다. 파도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한'에 해당하는 포르투갈 특유의 '사우다드(Saudade)'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포르투갈의 정서인 사우다드가 곁들인 파도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 밤 리스본의 알파마 Alfama나 바이루 알투 Bairro Alto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곳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곳으로 옛 리스본의 풍치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의 미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민의 애환이 서려 있어 그런지 왠지 모르게 이국적인 낯선 눈길에도 정겨운 느낌을 준다. 포르투갈의 영화로웠던 시절과 국민들의 애환이 서린 파도를 접하며 포르투갈의 문화를 이해해보자.

역사
이베리아 반도에 사람이 거주한 켈트족은 적어도 50만년 전의 일이지만 포르투갈에서 발견된 독특한 최초의 문화는 약 기원전 5500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750년경에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면서 원주민과의 혼인으로 켈트이베리아인이 생겨나 현 포르투갈 국민의 원조가 되었다. 그후 그리이스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2세기경 시저 및 아우구스투스의 원정으로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화가 시작되어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에 로마 문화의 영향이 매우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5세기초부터는 서고트족이 이주해 와 711년, 무어족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반도를 통치하였다. 12세기 무어족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아폰수 엔리케(Afonso Henriques)가 포르투갈의 왕이 되었으며, 1249년에는 Algarve지역을 통합함으로써 현재의포르투갈 국경의 기초를 이루었다. 13세기 중반에서 14세기초에 이르는 평화의 시기에 포르투갈은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을 거듭했고, 국가조직의 정비와 민족적 동질성 확립에 주력하였다. 1383년 왕위가 아비스의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아비스 왕조의 군주정치 하에 포르투갈은 유럽최초의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아비스 왕조의 군주들은 탐험주의를 적극권장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가시작되어 인도항로 발견, 아메리카해안 조사, 브라질 발견 등 항로개척과 더불어 해외식민과 무역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스페인과 경합하였다.
1494년에는 스페인과 Tordesillas조약을 체결하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와 미의 동부를, 스페인은 북미와 남미의 대부분을 각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였다. 1580년 아비스 가문의 세바스찬 왕이 북아프리카 원정중 전사한 뒤 왕위는 혼인을 통해 스페인에게 넘어갔고 이후 60년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직, 간접으로 받게 되었다. 17세기중반이후 포르투갈은 식민정책의 축을 인도양에서 대서양 로 이동하여 브라질을 비롯하여 라이베리아,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활동을 강화하였다.
스페인의 통치자들이 포르투갈을 소홀히 한 틈을 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1640년 포르투갈 왕위는 다시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의 가문에 이양되었으나 영국에의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다. 19세기초 나폴레옹전쟁으로 세 차례의 침공을 받은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19세기 중엽 브라질의 독립으로 국력은 더욱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입법주의자와 절대전제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격렬한 내란이 일어나고 정치적 불안의 계속으로 군주제가 전복된후 공화국이 수립된 1910년 혁명때까지 브라간사 왕조는 존속하였다.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1926년 무혈 쿠데타로 카르마나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살라자르를 재무상으로 기용, 재정의 전권을 맡기고 극단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 3년만에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1932년에는 안토니오 데 살라자르(Antonio de Oliveira Salszar)가 수상으로 임명된 뒤 1933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공화제적 조합국가의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살라자르는 비밀경찰을 창설하고 검열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국민연합당이외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등 장기 1인 독제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의 New Satate 건설추진 정책은 정치적 안정은 이룩하였으나 경제, 사회적 발전은 부진하였다고 한다. 1968년 9월, 살라자르가 신병으로 사임하고 카에타노가 후임이 되었으나 국내 반체제파의 불만이 고조됨과 동시에 아프리카 식민지 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세계 최후의 식민지 제국이라고 불리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카에타노 정권의 탄압정책은 여러 차례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74년 9월 민주화를 목표로 군부소장 장교등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1976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그 이후 민주정치의 불안정기로 들어가게 된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의 압력으로 74년 9월 사임하고 고메스 장군이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76년 4월에 제정된 새 헌법에 따라, 같은 해 6월 총선거가 실시되어 안토니오 에아네스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또한 그 직전에 실시된 4.25 총선 결과에 따라 소아레스 사회당 소수 단독 내각이 제 1차 합헌정부로 출범하였으며, 그 이후 85년 11월 제 10차 합헌 정부까지 매년 정권이 교체 되는 등 민주정치의 외양은 유지되었으나 불안정한 국면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7년이후 사회민주당의 승리로 포루투칼을 이 정당이 지배하게 된다. 1986년 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Soares 전 수상이 1926년 이래, 최초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87년 7월 및 91년 10월에 제 11차 및 제 12차 합헌정부가 파코실바(Cavaco Silva) 수상의 사회민주당 단독정부로 각각 수립된 이래 포르투갈 민주화의 길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제전화
한국으로 전화를 하려면,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는 다일얼링 순서는 0또는9번(외부전화 접속, 호텔마다 확인요) + + 82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공항또는 시내의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를 이용할 때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를 누르면 된다.

유용한전화번호
▣ 포루투칼 대사관
주소 : EMBAIXADA DA REPUBLICA DA CEREIA AV.5 DE OUTUBRO, 68-7 APARTADO 1031 1000 LISBOA CODEX PORTUGAL
전화:793-7200/3

▣ 긴급연락처(경찰서, 병원 등)
경찰서는 : 1150
화재 신고 및 구급차 호출은 : 352-222
응급 앰블런스 : 301-7777
리스본 대학 병원:796-1181

전압 및 주파수
220볼트/50Hz

주의사항
▣ 다른 유럽국가 처럼 수도물 대신 미네랄 워터를 사 마시는것이 안전하다.

▣ 노동의 허가없이 취업하였을 경우는 불법취업법의 적용을 받게 되며, 그외에도 매춘방지법이나 마약소지법 등도 여행자가 포르투갈에서 특히 주의할 법규중의 하나이다.

▣ 시내에서 출입이 금지된 지역은 군시설 및 항만시설, 그리고 출입국을 제외한 세관의 출입국 관리 카운터 내부은 출입을 할 수 없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은 원칙적으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 많다. 거리에서 특정인의 사진을 찰영하는 것도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기타 유의할 점으로는 공공공장소에서의 고성방가나 자동차의 난폭한 운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 포르투갈의 토산품에는 금은세공품과 향토인형, 도자기나 장식타일, 레이스제품 등을 비롯한 수공예품과 민속제품이 있고, 코르크제품이나 와인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품들이다. 일반 상점들은 보통 오전 9시∼오후 1시까지와 오후 3시∼7시까지 영업하며, 토요일은 오전 9시∼오후 1시까지만 영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명관광지에는 일요일이나 축제일에도 영업하기도 한다. 구입한 대부분의 상품에는 17% 정도의 부가세(VAT)가 가산된다.

▣ 포르투갈은 물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싸므로 쇼핑하기에 부담이 없다. 기념품으로는 코르크나 작은 도자기 공예품, 포도주(포트 와인) 등이 좋다. 기념품 가게를 다니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코르크 판에 포르투갈 관광 명소를 그려 놓은 아줄레주를 붙여 놓은 벽걸이가 있는데 선물용으로 아주 좋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것을 냄비 받침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적합한 선물일 것이다. 포르투갈의 상징인 닭모양의 포도주 병따개 등도 특징 있고 부담 없는 기념품이 될 수 있다.
주로 이곳 사람들은 단정한 정장을 입는다. 포르투갈 신사들은 극장에 갈때도 자켓과 넥타이를 맨다. 더운 포루투칼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루투칼 동료가 먼저 자켓을 벗지 않는 다면, 미리 먼저 벗어선 큰 실례가 될 것이다. 포르투갈의 Business Women은 한벌의 정장보다는 온화한 색의 옷을 입는다.

▣ 기후가 온화하여 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적고, 옷의 착용도 편리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리므로 레인코트를 준비하는 것이 편리하다. 신사복이나 정장의 구입은 쉬운편이나 와이셔츠나 내의 양말등의 면류는 지참하는 것이 좋다. 부인복의 경우 실크제품은 대개가 수제품이므로 고가이고, 필요시에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그밖의 의류품이나 구두 등은 현지 조달이 가능하다.


시차 : -9시간



▶ 리스본 [Lisbon]

이곳은 대륙의 끝. 여기서부터 바다가 시작되다」라는 포루투갈의 대표적인 시인 까몽이쓰의 표현대로 유럽 대륙 최서단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나라 포루투갈. 유럽에 속해 있으면서도 왠지 북아프리카 분위기가 느껴지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건설했다는 전설 속의 도시이다. 이를 가리켜 오디세우스의 도시-오리시포, 현지인들은 리스보아 Lisboa라 부른다.

리스본은 B.C 12세기에 페키아인에 의하여 항구도시로 역사상에 처음 등장했다. 이 후 그리스·로마·이슬람·스페인에 지배가 차례로 이어지는 오욕의 세월을 경험한다. 1249년 국토 회복에 성공한 알폰소 3세가 리스본 천도를 명하면서 포루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탄생하였다. 그러다 1755년 대 참사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리스본의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 속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살라자르의 우익 독재정권에서 출발하여 '빨간 카네이션'으로 상징되는 '리스본의 봄'의 주창자 안또니오 스삘놀라의 쿠테타가 있었던 1974년까지 경찰국가 하에 전 국민이 신음해야 했다. 오늘날 도시 곳곳에 남겨진 오래된 건물들은 이런 과거사를 전해준다.

땡땡 소리를 내는 낡은 전차 소리, 물건을 사라고 소리지르는 거리의 상인, 높은 언덕 위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 저 아래로 하얗게 반짝이며 흐르는 떼주 강. 이 모든 것들이 주는 느낌이 안쓰러우면서 따뜻한 리스본은 오래된 도시지만 젊은 느낌을 준다. 영화로웠던 과거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가 하면 씩씩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의 기상도 엿보인다. 인파와 소음, 교통체증으로 부산하긴 하지만 낮은 스카이라인과 떼주 강의 산들산들한 미풍 때문에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네모 반듯한 대로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밤이 되면 골목 어딘가의 선술집에서 구슬픈 파도 가락이 흘러나오고 아침이면 거리마다 축복을 담은 햇살이 따사롭다. 이곳의 꾸밈없는 진솔한 분위기와 군데군데 독특하게 멋을 부린 맵시가 돋보이는 산뜻한 건축양식이 매력적이다. 리스본이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이런 매력과 물가가 싸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리스본은 현대 도시의 냉소주의와 성급함이 남아 있지만 그곳 사람들의 친절함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리스본의 옛 파사데그 Facades 양식들은 재개발의 열풍속에 사라져 가고 있으니, 아르 데코 Art Deco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두르는 것이 좋다.

교육
포루투갈의 의무교육제도는 7세 ∼ 10세까지를 대상으로 한 4년의 초등교육과 11세 ∼ 12세 대상의 예비교육 과정 2년, 그리고 13 ∼ 15세를 대상으로 한 중등교육의 통일 과정으로 3년이 있어 총 9년간을 의무교육연한으로 정하고 있다. 보충과정으로 16 ∼ 17세를 대상으로 한 2년이 더 있으며 보충과정 2년 중 후반기 1년에 대해 대학과정 진학희망자는 대학예비과정을 수료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인 종합대학과정은 4년제에서 6년제가 있으며 문학부 등은 4년이고 법학부는 5년, 의학부는 6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과정을 마친 뒤에는 학사자격을 취득하게 되며 기술대학과정은 3년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포루투갈어 학습기관에는 사설 어학원이 많다. 리스본 시내에 있는 Centro International de Linguas는 레슨 회수별로 12과, 20과, 50과로 나눈 3가지 코스가 있으며 오디오 등 설비도 갖추고 있다. Centro Audio-Visual de Linguas는 초급, 중급, 고급과정으로 분류되어 레슨회수별로는 8주간에 80과를 교육하거나 8주간에 48과를 교육하는 과정, 또 5주간에 20과를 교육하는 과정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디오와 비디오를 이용한 학습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고 어학실습실을 통한 연습과 강의를 조합하여 가르치고 있다. 각 개인별 레슨이나 10명 이내의 레슨은 International House를 통해 하기도 하는데, 기간은 4주간과 3주간의 2종류가 있다.

종합대학으로는 리스본 종합대학교 Universidade de Lisboa가 있다. 1911년 지금의 대학교로 복원되었다. 1290년에 세워진 중세 리스본 대학교가 그 기원으로 코임브라대학교와 역사를 함께 한다. 포르투갈과 알가르베를 합친 후, 디니스 왕은 유럽 전역에서 오는 학자를 입학시켜 공인된 학위를 주는 일반 연구소에 기금을 냈다. 그후 이 대학은 코임브라로 여러 번 옮겼다가 리스본으로 되돌아왔다. 1377 ∼ 1537년까지 리스본에 있다가 다시 코임브라로옮겨져서 지금까지 계속 그곳에 있다. 1911년에 지금의 자매 대학교가 리스본에 세워졌다. 현재 과학·문학·법학·약학·의학·심리학·교육학 등의 학부가 있다. 외국인이 입학할 때는 엄격한 심사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코임브라 대학과 함께 하계특강이 매년 열리고 있기도 하다.

산업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중앙부는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 지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어 상업·행정기관이 이곳에 집중한다.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 서부는 신 시가지이고 또 최근의 시가지 확장은 북부로 펼쳐 나가고 있다. 독·부두 등 항만시설은 떼주 강 우안을 따라 30Km에 걸치고, 그 북동부에 곡물·냉장창고 및 시멘트·정유·철강·코르크제품 등 공장이 자리한다. 어항은 벨렘 서쪽에, 대서양 각지를 잇는 여객항은 시 중심부에 위치한다. 1966년에 떼주 강에 가로놓인 현수교가 완공되어 강의 좌안에도 철강·화학·조선 등 대공장이 건설되어 발전하고 있다.

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특히 5 ∼ 9월은 별로 덥지도 않고 쾌청한 날씨를 보여 여행하기 아주 좋다. 연평균 기온이 12 ∼ 18℃로 일년내내 날씨가 좋아 아무때나 떠나도 괜찮지만 11 ∼ 12월 에는 비가 자주 오므로 유의하자. 1 ∼ 2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봄과 비슷하다.




▶ 포르투

포르투는 포트와인의 원산지로 잘 알려진 포루투갈 북부의 주도이다. 도우로 강 하구에 펼쳐진 인구 40만의 포루투갈 제 2의 대도시로 포루투갈 상공업 중심 도시며 대항해 시대 때는 해양 무역의 거점 도시로 큰 번영을 구가한 곳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포루투갈 최대의 상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포르투 인들은 스페인 세력과 무어인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1800년대에는 나폴레옹의 세력까지 물리쳐 '난공 불락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포루투갈의 도시 중에서도 자의식이 가장 강한 도시로 평가받고 있는 포르투는 수도인 리스본과 팽팽한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공업 도시이면서도 역사적 유물을 잘 보존하여 문화와 예술이 살아 있다. 수도 리스본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인 데 반해 포르투는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부유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한가로운 시골 풍의 작은 도시가 이어지는 다른 지방을 여행하다 이곳에 들어서면 비로소 '도희에 왔구나'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우로 강 건너편 포도주 공장지대 빌라 노바 데 가이아 Vila Nova de Gaia에 가면 수많은 와인통이 쌓여있는데 무료로 구경도 하면서 와인을 맛 볼 수 있다.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걷다 보면 활기찬 상업 지구가 눈에 띄는가 하면 조용하고 한가로운 공원도 곳곳에 있어서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포르투는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들과는 달리 가장 유럽적인 포르투갈의 도시이다. 이 도시의 중심에 있는 건물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건축물들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유명한 포트와인을 숙성시키는 포도주 창고를 비롯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 등은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포르투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은 리베이라Ribeira 지역으로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3개의 다리가 협곡에 놓여 있으며, 타일로 된 집들이 도로에 가득차 있다.

산업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도우루 강 하구에 가까우며 예로부터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포도주의 수출로 가장 유명한데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따와 포트 와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포트 와인은 발효시킬 때 브랜디를 혼합해 알코올 함량을 높인 후 숙성시킨다. 포트 와인 교역이 처음 시작된 때는1678년이며,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메수엔 조약(1703)의 규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교역이 수립되었다. 1906년의 법령은 도루 주에서 생산되고 포르투에서 수출되는 알코올 함량 16.5% 이상의 포도주를 포트 와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구의 1/3 이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업과 수산업이 주요 산업이다. 온난습윤성 기후와 전반적으로 비옥한 토양 덕분에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겨울곡물과 여름곡물, 채소, 묘목재배(코르크나무·올리브)를 포함하는 혼합농업으로 대가족 단위의 농가는 1에이커에 못 미치는 작은 구획으로 분할된 작은 토지를 경작하며 생활하고 있다. 목재 및 그와 관련된 합성수지산업, 시큼하고 거품이 약간 이는 비뉴베르데 포도주 생산이 오지 계곡에 사는 농부들의 유일한 소득원이다. 포르투 바로 북서쪽에 마토시뉴스의 대서양 연안에는 수심이 깊은 인공 항인 포르투데레이숑스가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많은 주택사업을 포함해서 대규모의 도시개발 계획이 실행되어 환경이 개선되었다. 해안 고속도로와 나란히 뻗어 있는 해안철도는 포르투와 리스본 사이를 운행하는 전동열차이다. 철도와 간선도로로 동쪽의 브라간사까지 연결되어 있다. 도루 강에 있는 크레스투마 수력발전소가 포르투에서 3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통조림이 있으며 그밖에 도기·주물·방적·피혁·양모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금세공도 활발하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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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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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97%가 아나톨리아 반도로 서남 아시아에 속해 있고 3%는 유럽 대륙의 동남부 트라키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 두 대륙을 잇는 도시로 동서 문화의 접점이 되고 있다. 정식 국명은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로마시대와 기독교 문화를 거쳐 오스만 투르크와 이슬람의 문화를 지낸 곳으로 국토 곳곳의 수많은 역사 유적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다는 이유로 유럽에서는 동양 처럼, 동양에서는 유럽 처럼 인식되기도 하며 선진국의 유럽에 비해 여러가지 면에서 뒤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북쪽으로 흑해, 동쪽으로 그루이야, 아르메니아, 이란이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이라크, 시리아,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6.25 파병을 통해 '형제의 나라'로 칭해지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항공
이스탄불 국제 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2004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아나 항공과 터키항공이 직항으로 운항하고 있다.


면적 : 788,695㎢

수도 : 앙카라

인구 : 약 6,900만명

종교 :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터키사람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여자들은 머리 스카프를 하지 않고, 남자들은 술을 마신다.(하지만 돼지고기는 누구도 손대지 않는다.)

주요민족 : 터키인88%, 쿠르드족10-20%, 아랍인1.5%, 기타0.3%로 구성된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터키어이며 시골이나 동남부 이주민들 사이에서는 쿠르드 언어도 사용된다.

기후
에게해 및 지중해 연안은 겨울이 온화하고 비가 많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뜨겁다.
넓은 영토에서 다양한 기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여행시기 언제 어느지역을 가는지에 따라 준비물을 달리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대륙의 내륙은 대륙성 기후로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해안지방은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다만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보온에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이 짧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엔 비나 눈이 잦은 우기성 기후를 보인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메르하바! Merhaba!
의 미: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아무때나 하는 인사)

현지어 : 이이 권레르
의 미 : 좋은 날입니다! (낮,오후인사)

현지어 : 테셱퀴르 에데림 (사으올룬)
의 미 : 고맙습니다.

현지어: 리자 에데림 (Rica ederim)
의 미: 천만에요.

현지어 : 아페데르시니즈 (Affedersiniz)
의 미 : 실례합니다.

현지어 : 에벳(Evet)
의 미 : 네.

현지어 : 하이으르(Hayir)
의 미 : 아니오.

관광제안
터키의 요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더욱 맛있는 요리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침은 빵 두 조각에 수프와 차를 마시는 정도로 한다. 차는 홍차맛과 비슷하지만 끓이는 시간과 넣는 향료에 따라서 맛이 다르다. 빵은 에크멕과 피데라고 하는 두 종류의 빵이 있는데, 바게트 모양과 비슷한 피데가 식탁에 자주 오르는 편이다. 식당에서 에크멕이 자주 오른다. 점심은 육류에 샐러드를 곁들여서 먹는다. 저녁은 가족이 함께 음식을 먹는다. 음식은 수프, 육류 음식, 밥, 마카로니, 만두의 일종인 뵤렉을 먹고, 후식으로는 과일, 과자를 먹는다.

터키 요리는 향신료와 향미 야채가 많이 들어간다. 대표적인 소스는 토마토 소스인데 음식점에 가면 빨간 빛깔의 요리가 눈에 띄는데, 이것은 익힌 토마토를 넣고 끓인 양고기와 콩 요리이다. 딜이라는 향채나 고추를 넣어 매운맛을 내고, 고추는 양파와 함께 고기 요리에 넣는다. 흰색 치즈와 요구르트도 빠질 수 없는 향신료이다. 대표적인 요리는 케밥과 쿄프테로 케밥은 고기 산적의 일종으로 소금과 후춧가루를 사용한다. 섭조개 요리는 섭조개가 아닌 팔라프(밥에 고기, 새우를 넣고 버터로 볶은 음식)가 가득 들어 있으며 먹을 때 레몬 즙을 곁들여 먹는다.

방문적기
일반적으로 4~5월, 9~10월이 가장 여행하기 좋은 시기이다. 특히 7.8월에는 더위와 많은 인파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인데 이스탄불은 더욱 심하다.

역사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점으로 터키 민족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 여러 민족들이 교류하였으며,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BC 6000년경 아나톨리아 원주민의 정착지로 농경취락유적을 발견하여 이곳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BC 3000년경 청동기 문화, 1650년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인들이 점령하면서 히타이트왕국 세워졌고, 이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철기문명을 꽃피운다.

히타이왕국은 강성한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다가 BC 1200년경에 트로이전쟁을 통하여 트로이가 그리스에 멸망할 무렵에 히타이트왕국도 프라키아에서 이주한 트라기아인에게 멸망당한다. BC 8세기 그리스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고, 밀레투스ㆍ크니도스ㆍ시노프 같은 도시들이 형성되었고 BC 730년 내륙에 리디아왕국이 자리잡았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BC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하여 점령당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의 식민도시들과 소아시아 지역을 거듭 점령한다. 200여년 정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다가 폰토스왕국 등 소왕국들에 의한 이전투구가 거듭되었다가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에 있다가 BC 1세기 로마 제국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로마 식민통치는 300여 년 간 계속되고, 395년 로마 제국이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스탄불의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에 속한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웃의 이슬람 제국의 위협에도 11세기까지 계속 유지된다. 11세기 셀주크투르크족은 점차 세력을 중앙아시아에서 비잔틴 제국을 제압하면서 아나토리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지만 14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당하고,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해 영토확장에 앞장선다.
13-14세기 오스만족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을 영토로 삼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에 포함된 국가들을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은 수도를 이스탄불로 개층하고, 유프라테스 강, 헝가리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16세기 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및 동유럽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한다. 오스만제국은 술탄 술래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후 정치적, 행정적, 재정적으로 퇴보를 거듭한다. 1718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하였고, 러시아에서는 1783년 크리미아를 합병시켰다.

19세기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하면서 통치권을 잃었고, 19세기 말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 분쟁으로 지방자치를 허용했던 비이슬람 종교자치제가 붕괴되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학살이라는 비극과, 패전으로 해외 영토를 잃고, 연합군측의 터키불할론을 야기했다.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의 케말 파샤 장군이 이끈 군부와 지식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술탄국왕을 해외로 추방함으로써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케말 파샤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를 단행하였고 근대화정책을 추진, 경제, 정치, 대외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케말 파샤는 "터키의 아버지"로 추앙 받게 된다.

1938년 케말 파샤의 사망으로 불안정한 정세와 경제는 어두운 조짐을 보였지만 의회정치 및 다당제을 정착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유지하였고, 1952년 NATO에 가입, 1953년 발칸 협정의 조인국이 되었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맺었다. 1959년 그리스와 키프로스 분쟁을 해소하는 한편 1960년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불안한 정세를 보였으나 1961년 터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1963년에 유럽 공동시장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국제전화
터키의 국제전화 요금은 세금 때문에 엄청나게 비싼 편이다. 가장 저렴하게 통화하려면 심야 또는 일요일을 이용해야 한다.
터키의 공중전화는 연결이 나쁘기 때문에 전화를 사용할 때에는 수화기들어 신호음을 확인 한 후에 다이얼을 돌린다. 터키의 우체국을 PTT라고 하는 황색 간판으로 표시된다. PTT의 국제전화를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전화를 사용할 있다.

00(국제전화)+82(한국 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수신자 부담을 이용한 전화번호는 00800-828282을 이용한다.

유용한전화번호
▣ 주 터키 상주대사관
주소:Cinnah Caddesi(진나 자데시) Alacam Sokak No. 5 06690 Cankaya(창카야), Ankara, Turkey
전화: 312-468-4822∼3 FAX: 312-468-2279

▣ 긴급연락처
화재 110
구급 112
민영전화회사(시내) 115,
전화번호 안내 118, 민영전화회사(시외)131,
경찰 155,
헌병 156,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
우리나라와 플러그 방식이 달라 220V 플러그가 110V처럼 납작하게 생겼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전자제품을 사용하려면 별도의 어댑터가 필요하다.

치안
터키는 치안이 양호한 편으로 범죄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편이지만 여행자를 상대로하여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대도시인 이스탄불, 앙카라, 카파도키아, 이즈미르 등에서 수면제를 이용한 범죄 발생을 볼 수 있다. 친절하게 접근하여 수면제를 넣은 음료수를 넣은 후 관광객에게 마시게 한 후에 금품을 가져가는 수법이므로 호의적인 친절에 대하여 잘 살핀 후에 받아들인다.

통화
터키 리라를 사용한다. 2004년 1월 현재 100터키 리라는 0.09원이다. 계산하기 쉽게 터키리라로 표시된 금액에서 0을 세개 빼면 비슷한 금액이다.
터키 리라는 고액권에 계속해서 발행되므로 소액권은 거의 쓸모없어지고 물건 값에 '0'이 많이 붙으므로 여행객은 환율계산에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용요금 계산시에도 0이 많아 여행객이 혼란스러운 것을 악용하는 현지인도 있으니 주의한다.

현지로 전화
- 국제자동전화식별번호 + 90 (터키 국가번호) + 지역번호 + 상대방 전화번호

- 주요도시 지역번호
앙카라 312
이스탄불 212/216

주의사항
▣ 터키 남성들은 동양여자에 대하여 사교적인 편으로 추근거리거나 말을 건네는 경우가 있지만 화를 내어 싸움을 일으키지 말고, 못 들은 채한다. 터키 국부로 아타튀르크는 신격화되어 있으므로 욕설, 비판, 훼손해서는 안 된다.

▣ 기념품을 사는 경우에 백화점, 상점에서 가격에 대하여 정찰제를 고집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부가가치세로 10-15%을 포함하고 있어 5% 할인을 받을 수 있다.

▣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나라가 터키이다. 여름에는 얇은 옷인 여름 옷을 준비하고, 겨울철에는 우리나라 겨울보다 따뜻하지만 동부로 갈수록 점점 추워지기 때문에 두터운 옷을 준비한 것이 좋다.

▣ 터키인에게 식사를 초대 받았을때는 최연장자가 "아피에 올순(Afiyet olsun: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먹지 않는다.

버스
터키의 도시에서 대중교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시내버스이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것과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 두가지가 있는데 요금은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개인회사의 버스는 안내원이 요금을 직접 받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은 버스표를 요금함에 넣는다.

터키의 독특한 교통수단으로 '돌무시'라는 것이 있다. 대략 15명 내외가 탈수 있는 미니버스로 정류장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 손님이 있으면 세우고 내려준다. 돌무시는 거리에 따라 요금을 다르게 받으며 일반 버스보다는 저렴하다.

터키 내에서 장거리로 이동할 때 국내선 외에 주로 이용되는 것이 시외 장거리 버스인데 유럽의 기차보다도 나은 수준이다. 버스는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버스 회사에 따라 다양한 스케줄을 제공한다. 먼 거리를 이동하므로 시간과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해 야간 버스를 이용하는 배낭여행객이 많은 편이다.

전철
전철은 이스탄불에만 있으며 노선이 다양하지못해 대부분의 여행객은 전철보다는 버스를 이용한다. 요금은 대중교통 수단 중 가장 저렴한 편에 들며 역 근처에서 토큰을 구입해서 이용한다.

택시
터키의 택시는 현지의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이용해 볼 만하다. 하지만 길에서 택시를 잡기는 쉽지 않으며 관광지 주변에 서 있거나 혹은 숙소에서 전화로 불러서 이용한다.

택시와 돌무시 버스의 중간형태로 돌무시 택시가 있는데 대략 10명정도가 탑승 할 수 있으며 요금은 돌무시 버스보다 비싸고 택시보다는 저렴하다. 손님을 태울 때는 아무곳에서나 서지만 일단 손님을 태우면 목적지까지 직행한다.

에게해 및 지중해 연안은 겨울이 온화하고 비가 많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뜨겁다.
넓은 영토에서 다양한 기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여행시기 언제 어느지역을 가는지에 따라 준비물을 달리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대륙의 내륙은 대륙성 기후로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해안지방은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다만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보온에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이 짧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엔 비나 눈이 잦은 우기성 기후를 보인다.

시차 : -7시간



▶ 앙카라 [Ankara]

1923년 10월 13일 아타투르크 대통령에 의해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앙카라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 지기 시작 했다. 아타투르크는 통일 국가의 균등한 발전을 위해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쳐 있는 이스탄불 대신 내륙 깊숙히 위치한 앙카를 선택한 것이다. 초기엔 불과 6만 명의 인구였지만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각종 국가 기관과 각국의 대사관 영사관등을 정책적으로 앙카라로 이전하는 등 계획적인 발전을 꾀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후 앙카라는 급속도로 개발되었다.
현재는 가장 현대적이고 상업적 기능 도시로 시가지에는 국회의사당, 정부기관, 외국공관 등이 있고 앙카라대학, 중동공과대학, 고고박물관, 민속박물관 등도있다. 도로,철도교통의 요충지이자 터키 내륙 여행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 잊혀졌던 역사적인 도시인 앙카라는 일대의 아나톨리아 고대문명의 발자취를 찾아 볼수있다. 확장된 도로와 시내의 모습들은 타지역과는 다른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문명의 도시인 만큼 시내 곳곳에서 유서깊은 유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앙카라의 주변은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이 둘러싸고 있으며 해발 고도 약 850m의 고원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자원으로 아나톨리아 지방 최고의 비옥한 농지와 숲이 펼쳐져 있다.

산업
농업분야에 있어서는 터키 전반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요 작물은 밀, 쌀, 면화, 다매, 헤이질넛, 과일 등이다. 그리고 주요 가축 사업에 있어서는 양이 그 비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유수의 면화와 양모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관광 사업은 여름과 겨울의 휴양지 개발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추세이며, 현재 앙카라의 전반적인 산업은 농업제품, 치금, 섬유, 자동차와 농장기기의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에페소

에페소는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도시 전체에 유물이 산재해 있다. 사실 에페소는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도시의 기원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과 문화가 이곳을 지나갔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유적 도시가 되었다.

에페소는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에서 에페소로 옮긴 덕에 많은 건축이 이루어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이후 아우구스트스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기원 후에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7세기 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 갔으며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의 에페소는 역사 유적과 건축, 기독교 성지순례를 하는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에게해의 한가로움과 지중해의 여유로움까지 즐길 수 있는 여행지다. 이스탄불이나 앙카라등 대도시에서 멀어 여행하기 쉽지는 않지만 도시 곳곳에 산재한 유적들과 한적함으로 점점 더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다.




▶ 이스탄불 [Istanbul]

터키 최대의 도시.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하였고,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지명인 이스탄불로 불리워지기까지 약 1600여 년 동안의 문화와 역사, 왕조의 흥망이 살아 숨쉬고 있다. 초기 정착민인 그리스의 미케네인 Mycenaeans네 의해 형성된 비잔티움은 A.D305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재건되었다. 이후 오스만 Osman제국이 이곳을 점령하여 이슬람을 널리 포교하고 수도를 확대하여 이스탄불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 터키의 수도는 이스탄불이 아닌 앙카라 Ankara이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출범 하면서 초기 대통령인 아타투르크 Ataturk가 지나온 역사를 거울삼아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수세기를 걸쳐 이스탄불은 터키의 심장으로 남아 있으며 아름다움을 간직한 대도시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상업과 문화의 교류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으며,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스탄불은 골든 혼(Golden horn:Halic)하구를 경계로 신시가와 구시가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스크의 둥근 돔과 청탑이 모여 있는 구시가와 신시가의 고급 호텔, 송신타워 등은 대조를 이룬다.

산업
주요 업종은 금속, 기계, 섬유, 약품, 식료품, 의류, 피혁, 제지, 전기기기 등이고 전통적인 중소공장이 옛 시가지와 시슐리지구 등에 집중되어 있다. 이 밖에 옛날에는 해운을 이용한 골든혼 연안이 훌륭한 공업지역이었으나, 최근에는 도로수송을 이용하여 아시아 쪽에서는 앙카라로 통하는 국도(國道), 유럽 쪽에서는 에디르네로 통하는 국도를 따라 근대적인 공장이 진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들어 관광산업의 역할이 이스탄불의 산업과 경제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로부터 보스포루스해협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현재도 에미뇌뉘지구와 카라쾨이 등을 거점으로 해상교통과 무역활동이 활발하다.

여행계획
10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역사유적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건축양식이나 종교등도 달라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는 곳이다. 이스탄불을 효과적으로 여행하려면 무엇보다도 건축이나 종교, 역사에 대한 지식기반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이해가 쉬우며, 볼 것들이 많으므로 시간적으로도 충분한 것이 좋다.
이스탄불에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쉬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 성 소피아 (아야소프야) 성당(현재 박물관),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등의 각 시대별 궁과 성당을 비롯해 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 미술관등이 큰 볼거리로 꼽힌다. 또한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션 시장 역시 관광객이 많은 곳이며 밤에는 배꼽 춤이라 불리는 발리 댄스를 관람할 것을 권한다.

여행상식
▣ 여행상식 1
종점인 아나돌루 카바우 Anadolu Kavagi에서 돌아가는 배편을 놓쳤다 해도 걱정하지 말자. 위스규다르까지 시내버스로 간 뒤 이곳에서 다시 에미노뉴 까지 배로 건너면 된다. 택시는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을 부른다. 택시 이외는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거짓말하며 다가오므로 주의해야 한다.

▣ 여행상식 2
이스티크랄 거리는 주로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곳이기 때문에 터무니 없이 가격이 비싸다. 한밤중엔 특히 Bar나 Belly Dance를 볼수있는 클럽등에 가게 된면 터무니없는 값을 지불하게 될것이니 적당히 싼것을 마시고 돈을 지불하고 나오는 것이 좋다.

▣ 즐길거리/활동거리 1
이스탄불에서 하루 정도는 바다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흑해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마르마라해 까지 이어지는 바다를 가르며 가가운 근교까지 페리를 타고 나가 바다의 한가운데서 이스탄불을 조망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관광 포인트 중의 하나이다. 이 주변의 신선하고 맛있는 바다요리 전문점 에서 멋있는 경치를 감상하며 먹는 것도 이스탄불 여행의 묘미 이다.

▣ 즐길거리/활동거리 2
쇼핑은 구시가의 서민적인 바자르와 신시가의 패션의 거리, 쇼핑센타로 구분할 수 있다. 구시가는 어디를 봐도 고급 상점은 눈에 띄지않는다. 값비싼 물건 보다 주로 터키의 전통 민속품과 일상 생활용품들이 맣으며 정가가 없으므로 흥정할수 있다. 하지만 질적인 면에선 떨어지기 때문에 싸게 산다하더라도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즐길거리/활동거리 3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터키 카펫은 그랜드 바자르와 신시가의 쇼핑가에 전문점이 많으며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사이에 있는 Haseki hurrem 터키식 목욕탕내에는 정부관할의 카펫점이 있다.

▣ 즐길거리/활동거리 4
대형 쇼핑센터는 현대적이고 세련됐다. 백화점은 대부분 이스탄불 외곽에 자리해 있기 때문에 관광객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터키 국산 유명브랜드를 위주로 하는 각종 매장이 꽉 차 있다. 맨 윗층에는 패스트푸드점이 모여 있고 영화관도 있다.




▶ 카파토키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었을 듯한, 오직 신의 능력과 자연의 조화로만 보이는 카파도키아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함으로써 여행자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이 지역의 특수한 지평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에게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7세기 말경의 아랍인들의 침략을 피해 그들은 이곳에 굴을 파고 거주하면서 암굴 속에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남겨 놓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카파도키아는 히타이트 왕조의 중심지였다. 지리적으로 터키의 가장 중부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1,000미터 구릉이 이어지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지진과 화산폭발로 버섯 모양의 바위나 종교의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없던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바위에 굴을 파서 만든 교회가 그대로 남아있다. 헤아릴 수 없는 뾰족한 기암괴석들이 이어진 카파도키아는 1천만 년전에 일어났던 화산활동과 지진, 비바람이 만들어낸 자연의 걸작품을 안고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앙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지역의 총괄적인 이름으로 하나의 지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므로 지도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 카이세리, 네브쉐히르, 괴뢰메등이 있는 지역을 일컫는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270km가량 떨어져 있다.

이곳의 기후는 건조하고 각박하지만 오래전 활화산이었을 당시 용암이 덮은 계곡에 비와 바람으로 침식하여 버섯 모양의 독특한 볼거리를 만들었다. 마치 달 표면처럼 구멍이 뚫린 바위와 버섯 모양으로 높이 올라 앉은 바위들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과거에는 이런 바위를 파고 들어가 교회 혹은 거주지를 만들어 살았으며 요즘은 이런 지형을 이용해 특별한 호텔을 운영하기도 한다.




▶ 파묵깔레

파묵칼레는 목화솜으로 이루어진 성이란 뜻으로 도시는 온통 눈이 내린것 같이 새하얀 모습이다. 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리면서 층층이 바위를 지금의 하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역사적으로도 치유와 휴양을 위해 많은 위인들이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지나친 개발로 온천수가 줄어들어 터키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계획성을 갖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온천수가 흘러 나오는 지역 이외에도 곳곳에 고대 유적들이 들어서 있어 원형극장이나 신전등 당시의 건축물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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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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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는 북서쪽으로 슬로베니아, 북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 남쪽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아드리아 해와 면하고 있다. 공식명칭은 크로아티아 공화국(Republic of Croatia)이다.

면적은 56,610㎢으로 한반도의 1/4정도에 해당하며 인구 4,774,000으로 그중 86만명이 자그레브에 거주하며, 도시에서 50%가 거주한다. 인종은 크로아티아인 78.1%, 세르비아인 12.1%, 이슬람교도 0.9%, 헝가리인 0.5%, 슬로베니아인 0.5%, 기타 7.9%로 구성된다.
수도는 자그레브로 메드베드니차 산의 경사면과 사바 강의 범람원에 걸쳐 있으며, 탁 트인 광장과 공원이 많이 있다. 이 곳은 크로아티아의 문화적 중심지이며, 과학ㆍ예술와 1669년에 설립 된 자그레브대학교가 위치한 교육도시이다. 미술관에는 여러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중세시대의 건물들이 보존되고 있다. 주요도시는 스플리트, 리예카가 있다.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농업과 가축사육에 기반을 둔다. 슬라보니아의 판노니아 평원에서는 곡물을 비록한 콩ㆍ감자ㆍ사탕무ㆍ대마ㆍ과일 등이 주요작물이며, 연안의 섬에서는 포도재배가 활발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이 급속으로 발달하면서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이스트라와 달마치야에서 어업 및 항해업이 활발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해운업과 관광업이 발달하였으며, 석유ㆍ석탄ㆍ보크사이트를 기반으로 한 공업개발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주요 산업으로 식품가공ㆍ섬유ㆍ포도주ㆍ천연 가스 산업 등이 주요 산업으로 차지하고 있다.

항공
크로아티아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비엔나, 모스크바, 뮌헨 등을 유럽 주요항공을 경유하는 항공편이 존재하므로 경유편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크로아티아에 가는 소요시간은 총14-16시간 정도이다.

면적 : 5,6610km2

수도 : 자그레브

인구 : 1997년 기준 4,774,000명

종교 : 로마 가톨릭교 72.1%, 동방정교회 14.1%, 이슬람교 1.3%, 기타 12.5%로 구성되어 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대부분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주요민족 : 크로아티아인 78.1%, 세르비아인 12.1%, 이슬람교도 0.9%, 헝가리인 0.5%, 슬로베니아인 0.5%, 기타 7.9%로 구성된다.
크로아티아는 대부분이 크로아티아인이고, 소수민족으로 큰 집단으로 세르비아인, 그 외 소수집단은 슬라브계 회교도,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이 있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크로아티아어이다.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불가리아어처럼 크로아티아어는 남슬라브어에 속하며, 1991년 이전에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묶여 하나의 단일 언어로서 사용되었으나, 내전의 결과 각 공화국의 언어들로 개정되어 철자와 관용어들의 차이를 가져왔다. 둘간의 차이점은 세르비아어는 키릴문자로, 크로아티아어는 로마문자로 표기한 다는 점일 것이다.

기후
크로아티아는 2종류의 기후를 띄고 있다. 달마치야와 이스트라는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내륙 안쪽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일조량이 많고, 연간 얼음이 어는 날은 2일 정도이다. 대륙성 기후지역은 기온의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고 강수량이 적으며, 상대적으로 습도가 낮은 기후를 보인다.

지리
헝가리의 영토였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오스트리아에 속하였던 달마치야 및 이스트라 등의 지역이 있다. 크로아티아 국토는 사바, 드라바, 다뉴브 강 사이의 지역인 슬라보니아의 파노니아 평원을 시작으로 이스트라 반도를 거쳐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달마티아 남쪽까지 부메랑 모양의 곡선 모양으로 이루어져 울퉁불퉁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해변의 길이는 약 600km이며, 크로아티아 앞 바다에 있는 섬들은 1185개정도이고, 그 가운데 북쪽에 위치한 섬은 츠레스, 크륵, 로쉬니, 파그, 랍 등이며, 남쪽에 브라치, 흐바르, 코르출라, 믈례트, 비스 등이 위치한다. 중부에는 두기 오토크가 있다. 북동부 지역은 자그레브 주위의 완만한 구릉지와 동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이루어져 땅이 비옥하여 농업하기에 적당한 지형이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HVALA : 흐발라
의 미 : 감사합니다

현지어 : KAKO STE 카코 스테
의 미 : 처음 봤을 때 인사(안녕하세요).

현지어 : DOVIDJENJA 도비젠야
의 미 : 헤어질 때 인사(잘가).

현지어 : HVALA 흐발라
의 미 : 감사합니다.

역사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크로아티아인들은 7세기에 이 곳에 정착하였다. 북부 달마치야에서 판노니아까지 진출한 크로아티아인들은 동맹을 맺었다가 803년 사를마뉴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크로아티아인들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믿음은 정교회를 믿고 있는 이웃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지속시켰다.
10세기 크로아티아 왕국이 수립, 1091년 헝가리의 라슬로 1세가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 크로아티아는 8세기 동안 헝가리에 합병된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와 합병하는 기간에도 자체의 의회인 사보르를 유지, 법률상 독립 왕국의 지위를 인정했다. 1526년 헝가리 모하치 전투에 오스만 제국에게 패하면서 크로아티아 지역은 투르크로 넘어가 1699년까지 투르크의 통치를 받았고, 그 외 지역은 통치자 없이 유지되다가 1527년 사보르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선정,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지역을 군사적 국경지로 삼았고, 터키와의 전쟁 때 국경 주민으로 징용된 세르비아인들을 식민지화하였다.
1809-1813년 일리리아 지역은 나폴레옹의 통치를 받는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지고, 달마치야와 이스트라는 비엔나의 지배를 받는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1849년 오스트리아의 한 주가 된 후 1868년 헝가리의 속주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으로 전환된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한 후 크로아티아는 다른 남슬라브족 영토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이룬다. 하지만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군주들 간의 사이는 원만치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들에게 점령, 분할 당하자 1941년 4월 10일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국가임을 선언한 후 4일 후에 독일과 이태리의 승인을 얻는다.
이 국가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달마치야의 일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하였고, 파시스트 테러 조직인 우스타샤의 중심세력인 안테 파벨리치의 통치를 받는다. 파벨리치는 "인종정화"을 내세워 수십만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 반파시스트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산세력이 이끈 파르티잔들이 통치권을 확보한 지역에 지역위원회를 조직, 그 외 지역은 민족해방평의회를 결성한다. 1945년 파르티잔들이 자그레브를 점령, 평의회는 인민정부로 전환하고 크로아티아 인민공화국으로 유고슬라비아와 합병된다. 사회주의 아래 크로아티아는 미발전을 거듭한다. 하지만 연방 내에서 자치권을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고, 사회주의가 붕괴되어 비공산주의계 정부가 탄생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한다.

유용한전화번호
경찰서 92,
소방서 93,
병 원 94,
전화번호안내 981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을 사용하고 있다.

치안
크로아티아의 치안상태는 경찰력으로 인하여 양호한 편이나, 총기나 무기 소지는 불법이나 전쟁 이후 총기를 소지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시내의 야간 외출은 불편이 없으나 구유고 난민의 유입으로 밤에는 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세르비아와의 국경지인 동 슬라보니아 지역은 아직도 많은 지뢰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으로 여행시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통화
통화단위는 쿠나(Kuna)이고, 공식명칭은 HRK이다. 하위단위로는 리파(Lipa)로 1HRK=100Lipa이다. 1997년 말 기준 1USD=6.21kune이다.

주의사항
<비자신청시 유의사항>
크로아티아에 입국시에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고, 체재기간은 3개월 이내이다. 3개월 이상 체재할 경우 여권, 여권사진 3매, 신원증 및 체류사유서 등의 비자 서류가 필요하다.

<출입국시 유의사항>
입국시 자신의 여권과 출입국카드를 소지한 후 여권을 제시하고, 출입국카드를 제출한 후 출국카드는 절취선을 잘라서 되 돌려 받은 후 수하물 지역에 가서 자신의 짐을 찾은 후 세관검사대에서 세관신고서를 제출한 후 약간의 검색을 한다. 그후 자신의 소지품들을 챙긴 후 공항으로 나오면 된다.
출국시에는 72시간 전에 자신이 타고 갈 항공카운터에 전화를 하여 재확인한 후,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을 밟는다. 항공권을 제출하고, 탑승카드를 받은 후 입국수속의 역순으로 수속을 한 후 항공시간이 될 때까지 면세점, 대기실에서 기다린 후 시간이 되면 탑승하면 된다.

<검역관련 사항>
특별한 검역은 필요치 않다.

<세관관련 사항(면세범위 등)>
2000쿠나 이상의 현금을 소지할 경우 은행의 승인을 받은 후 반입이 가능하나 외환 소지에 대해서는 제한 두지 않는다.

<환전관련 사항>
공항ㆍ은행ㆍ환전소에서 화전이 가능하다. 환율은 변동환율제를 실시하고 있기에 장소, 지역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 금기사항>
특별한 금기사항은 없으나 크로아티아를 발칸 반도 국가와 유사한 지역으로 지칭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 많으며, 정부에서 중앙유럽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중앙유럽의 일국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발칸반도가 종교적 분쟁(무슬림, 그리스정교, 가톨릭)으로 인한 분할되었다는 점을 인식하여 가급적이면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크로아티아는 2종류의 기후를 띄고 있다. 달마치야와 이스트라는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내륙 안쪽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일조량이 많고, 연간 얼음이 어는 날은 2일 정도이다. 대륙성 기후지역은 기온의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고 강수량이 적으며, 상대적으로 습도가 낮은 기후를 보인다.

시차 : -7시간




▶ 드브로브닉

유럽 중남부 발칸반도에 있으며 아드리드해 동부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에는 슬로베니아, 북쪽은 헝가리, 동쪽은 세르비아 공화국, 남쪽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와 접해 있는 나라의 남쪽 알프스 산맥 자락과 아드리안 해안이 만나는 장소에 드브로브닉은 위치해있다.크로아티아는 헝가리의 영토였던 슬라보니아와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던 달마치야 및 이스트라 등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364km의 넓이로 동쪽으로 두보카 류타 고르케 에서 서쪽으로 이모티차를 포함하는 53Km 의 길이이다. 인구밀도는 152명/km2 이다.

높은 잿빛 알프스 산이 해안으로 펼쳐져 내리고, 에메랄드 빛 바다에 간간이 파도가 일면 하얀 파도자락이 암벽에 부스러지는 정말 시인의 눈을 기다리는 아드리아의 진주 이곳이 바로 드브로브닉이다. 잿빛 돌산 알프스는 해안으로 내려오면서 해송이 덮인 숲을 이루고, 시가지는 그 숲속에 깔끔하게 자리를 잡았다. 붉은 지붕으 한 고풍 천연한 건물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구시가지는 해안 쪽으로 들어서 있고, 성곽에 쌓여 있다. 이 구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나가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돌출된 바위 지형에 드브로브니크 시(주)가 생겨난 것은 7세기의 일이었다. 전쟁등의 역사적 격정을 거치고 때론 여러 나라들과 타협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에서 유일하게 내내 값진 독립을 유지했던 지역이다. 일찌기 바다를 이용한 해양산업에 진출하여 시의 문명화가 이루어졌다. 초기 단계부터 드브로브니크의 붉은 깃발은 모든 해양을 누비는 출항선박의 돛대 위에서 휘날렸고 이 배들은 풍성한 포획물을 싣고 귀항하였다. 대내외적인 도시의 특성은 이 시기의 번영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는 강한 방위벽으로 둘러 쌓여있고 관공서와 광장, 좁은 중세거리의 주택들은 로마와 고딕시대 스타일을 띄고 있다. 많은 법률들이 시민들의 고매한 인간성을 대변해주는데 그 예로 유럽에서 처음 제정된 노예 매매 금지법(1416)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과학을 비롯, 모든 분야의 학문과 예술이 이 작은 도시에서 번영하여, 아드리아해상에 빛났다. 이 곳의 학자들은 세계 여러 나라로 가서 이 지역의 높은 학문수준과 유럽 문화를 전파하였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시의 출중한 문화수준은 현대에도 이어져 매년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리는 여름 축제는 각종 show와 이벤트로 삶의 풍요를 더해주고 있다.
지형적으로 자연스럽게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알프스가 내륙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경계를 이루고 있어. 내륙과 해안 도시의 특색이 구분되어 나타나는 이 아름다운 아드리안 해안 남부에 자리한 중세도시 드브로브닉은 많은 역사적 기념물들을 간직한 천년이 넘은 고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해안은 91년 발발한 내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내전 전에는 인구의 80%가 관광업에 종사할 만큼 화려했던 곳이였다. 다행히 점점 많이 복구되고 있어 구시가지느 엣 모습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호텔들은 탄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대부분은 난민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드브로브닉 여름축제는 "libertas"라는 국기 아래 매년 7월 둘째 주부터 8월 셋쩨까지 이어지는데, 이 축제는 유럽 축제 협회의 일원으로 널리 알여져 있다. 매년 2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성 블라이세 축제가 진행된다. 또 학생 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시의 문화, 과학의 발자취는 마린 드르지츠극장, 두브로브닉 심포니 오케스트르라, 드브로브닉 미술관들에게서 그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체육시설로는 육지에는 각종 운동 오락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여름바다에는 맑은 바다 위를 질주하는 형형색색의 보트들이 한층 풍치를 더해준다. 국제 체육행사도 물론 이곳에서 개최된다.
드브로브닉과 그 연안 도시들은 몰예트 국립공원과 8군데 특별 자연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찾는 이드로 하여금 자연미를 느기게 한다.

산업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같이 관광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고 있다. 내전 전에는 주민의 80%정도가 관광산업에 종사하였으나, 지금은 내전으로 많이 파괴되어 많으 줄어든 추세이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지역으로 연평균 가수량은 1250mm이고 연평균 기온은 16.7'c, 여름 평균기온은 21'c 인 기후를 가지고 있어 전형적인 지중해식 풍경을 관광할 수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랩은 남쪽으로는 메드베드니차 산맥이 자리하고 있고, 또 사바 강변에 위치한 인구 100만의 도시이며, 1557년 부터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되어 발전되었다. 역사 깊은 두 개의 언덕인 그라덱Gradec 과 캅톨Kaptol 부근에 세워져서 역사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자그레브은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수도로써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유럽의 오래된 도시이다. 자그레브는 1094년에 주교구로서 유럽 지도상에 출현했다. 사바강 평원에 자리잡았던 이 도시는 20세기 후반에는 강 건너편까지 확대되었고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오늘날, 자그레브는 마치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세 개의 도시을 포함하고 있는 듯 하다. 상부 도시(Upper town)는 지난 시절의 평화와 고요가 매혹적인 곳이고 하부 도시 (Lower town)는 유럽의 거대 상업도시에 비길 만큼 활기찬 지역이다. 그리고 신 자그레브(New Zagreb)라고 불리는 지역은 현대 건축과 도시화의 전시장을 연상케 하는 모던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현대 이 도시는 구시가지인 상부와 그 밑으로 발달한 하부, 그리고 신도시로 행정상 구분이 되어 있고, 30여 곳이 넘는 박물관을 비롯하여 많은 미술관, 연주홀, 극장들을 가지고 있는 문화의 도시이며, 출판의 도시이기도 하다. 종교적, 비 종교적 기념물과 거리,광장, 공원들의 디자인에서 역사의 매 시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하고 매력적인, 정신문화와 예술의 도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 문화와 과학, 경제,정치에 걸쳐 크로아티아의 중심을 차지하는 자그레브가 이제 세계의 방문객과 여행자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자그렙을 구분하는 한 지역중에 구시가지는 기차역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걸린다. 구시가지로 가는 길은 역 정문에서 기마상 쪽으로 나있는 프라셔카 거리를 따라가면 토미슬라보브 광장, 미술관 그리고 스트로스마예로브 광장 ,즈리니스코가 광좡을 지나게 된다. 이들 광장 주변으로는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가가로스로 심어져 있다. 고고학 박물관을 지나,계속해서 프라셔카 거리에 접어들면, 이 거리 끝 지점부터 바나 엘라취차라는 중앙 광장이 있다. 광장 주위는 깨끗하게 단장된건물들이 들러서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을 메우고 있다. 상가가 들어서 있는 번화가는 바로 이 광장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다. 광장의 트램이 다니는 길에서 기마상 쪽으로 보고 섰을때 광장의 오른쪽 끝으로 나있는 약간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카프톨지구의중심이 되었던 성 스테판 사원이 쌍둥이 첨탑을 하고 우뚝 서 있어, 관광할때 방향을 잡기가 편하다. 이지역이 바로 바나 엘라취차 중앙광장 뒤 언덕 위에 자리한 구시가지이다.
상부인 구시가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하부도시 지구에서는 바나 엘라취차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는 상가 지역과 곳곳에 있는 박물관,미술관 들을 두러볼 수 있다.상가 지역은 보고비체바,테슬리나,마자리코바,바르샤브스카 거리들을 말하는데 나마 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에 책방, 여행사, 은행, 고급 호텔들이 있다. 상가 지역에서 다시 마자리코바 거리를 따라가면 박물관들이 있다. 여기서 보타니츠키 브르트(식물원)로 가서 미하노비체바 거리를 따라 에스플라나데 호텔 쪽으로 가면 중앙역이 나온다. 역 정문에서 우체국 반대쪽 끝에 지하통로가 있는데, 지하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하상가를 지나 파로믈린스카 거리를 따라 라디차 광장에 이르면 시청이 있고, 부근에 연주홀 리신스키가 있다.

대륙성 기후인 자그렙은 북위46',동경 16', 해발 165m 연평균 습도 84%, 연평균 강우량 890mm이다. 7월의 기온이 21'c, 1월은 0'c 이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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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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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부에 있는 나라로 정식 명칭은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이다. 원래 체코슬로바키아 란 국가로 있다가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면서 생겼다.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는 오스트리아의 빈 보다 서쪽에 있어 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가장 서구화 된 곳이며 경제적으로도 다른 동유럽 국가에 비해 안정적이며 생활 수준도 높은 편이다. 체코는 초원과 호수등의 자연미와 오랜 역사에서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스타일의 고성이 여행하는데 큰 볼거리를 준다. 더구나 2004년 5월부터는 대한항공이 프라하로 취항할 예정이어서 더욱 관심이 많이 가는 곳으로 동유럽 여행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체코는 예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나라로 영화, 사진, 애니메이션, 미술, 조각등 다양한 방면으로 발달하였으며 교육을 위한 기관들이 많다.
하지만 체코가 그리고 프라하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아무래도 영화 '프라하의 봄' 그리고 원작인 밀란 쿤테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때문이 아닌가 한다. 단순한 사랑놀음이 아닌 이 영화를 통해 당시 체코의 정치적인 상황과 격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980년대 말 소련의 고르바초프에 의한 개혁과 자유의 바람이 체코슬로바키아에도 불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결국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비 공산주의자 대통령의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 그후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였다.

항공
항공편을 이용하는 경우 프라하를 통해 체코에 입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직항편은 없지만 2004년 5월 대한항공이 프라하로 취항할 예정이다. 그 전까지는 프랑크푸르트나 파리 등을 경유해 입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면적 : 78,864km2

수도 : 프라하

종교 : 공산국 당시 종교의 자유는 제한적이었으나 역사적으로 꾸준히 기독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50% 이상이 종교를 갖고 있었다. 현재 로마 카토릭을 믿는 신자가 약 40% 정도 되고 약간의 신교도가 있다.

주요민족 : 체코인이 인구의 90% 이상이며 슬로바키아인이 약 5%정도 되고 약간의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국경지대에 살고 있다.

주요언어 : 체코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며 체코어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외국어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이 많은 곳에서는 영어가 통용되며 그 밖에 독일어가 소통되기도 한다.

기후
4계절이있는 온대기후로 해양성과 대륙성의 혼합형으로 온화한 겨울과 무덥지 않은 여름을 지닌 지역이다. 프라하는 북위 50', 동경 14', 해발 210m , 연강수량 485mm, 연평균기온은 1월의 최저온도 -2'c, 7월의 최고온도 20'c 이다.

지리
유럽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체코 공화국은 북쪽으로는 폴란드(792㎞),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466㎞), 서쪽으로는 독일(810㎞),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266㎞)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내륙 국가이다. 그리고 북위 48도에서 51도, 동경 12도에서 19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체코 공화국은 국경 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이 그다지 높지 않은 고원과 나지막한 구릉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높은 산은 폴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한 크르코노셰(Krkonose)산의 스녜쉬까(Snezka)봉으로서 해발 1602m이다.
보헤미아는 바바리아 경계지의 소미바 산맥과 독일 경계선의 오레 산맥 동쪽으로 폴란드 경계선을 따라 편쳐진 크라크노제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Dobry den (도브리덴)
의 미 : 안녕하십니까

현지어 : Dekuji (제꾸이)
의 미 : 감사합니다

현지어 : Prominte (쁘로민떼)
의 미 : 미안합니다

현지어 : Prosim (쁘로씸)
의 미 : 여보세요

현지어 : Kolik to stoji? (꼴릭 또 스또이)
의 미 : 이것은 얼마입니까

역사
B.C 5세기 켈트인이 최초로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 거주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후 AD 1세기경 부터 게르만인과 로마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켈트인들을 축출하고, 이 지역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4세기 말부터 시작된 민족의 대이동으로 자신들의 원거주지인 드네프르 강과 비스와 강 사이의 스텝 지역을 떠나기 시작한 체코인들은 6세기에 접어들면서 오늘날의 체코 땅에 집단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7세기의 사모 제국, 9세기의 대모라비아 제국을 거쳐 10세기에 체코 공국으로, 12세기 이후에는 체코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13세기에 들어 와서 체코 왕국의 왕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제국 내 일곱 선제후 중의 하나가 됨으로써 체코 왕국은 중부 유럽의 강자로 부상하였으며, 14세기에 들어와서는 체코 왕인 카렐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됨으로써 체코 왕국은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이 당시 체코는 여러 영웅과 같은 군주들이 지배하면서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주변의 제후령을 왕국 영토에 편입시키는 등의 영토확장과 경제적인 발전, 문화 부흥등이 이루어진 시기다. 또한 수도인 프라하에 유럽최초의 대학을 창설하였으며 프라하 내의 여러 유명한 건축물이 건설되어 명실상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중흥기의 까렐 4세가 죽은 14세기 말 부터는 왕권을 둘러싼 귀족의 알력과 교회와의 불화, 전염병등으로 혼란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특히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컸으며 개혁의 요구가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시기다. 종교개혁으로 체코는 신교국이 되면서 로마 굥황청으로부터 격리되면서 더욱 쇠퇴하기에 이른다.

16세기에 들어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체코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대공을 왕으로 추대 오스트리아 왕조의 통치를 받는다. 귀족이 선출한 왕이기 때문에 체코 왕국에 전권을 가질 수 없는 왕이었지만 카토릭교도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교인 체코를 카토릭 국가화 하려하자 귀족들이 봉기하였고 1620년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결국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지배를 받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로 카토릭 국가가 된 체코는 체코어를 말살하고 귀족들을 제거하려는 오스트리아에 맞서면서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타고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8세기 부터 시작된 유럽의 민족주의 운동은 1차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적이었으며 이런 와중에 오스트리아에서도 각 민족이 봉기하였다. 1859년 이탈리아와의 전투와 1867년 프러시아와 전쟁에서도 패한 오스트리아는 이후 1차대전에서 패함으로써 시민 궐기로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독립하게 되었다. 두 민족이 만든 체코슬로바키아는 이후 2차대전 전까지 동유럽에서 유일한 민주국가로 안정적인 성장을 하였다. 2차대전 후 공산정권을 거치고 1991년 소련군이 완전히 물러난 후, 다시 민주정권이 세워지고 1993년 슬로바키아와 분리하기에 이른다.

전압 및 주파수
220V 50Hz를 사용한다.

치안
체코의 관광명소인 프라하는 여행객을 노린 소매치기 범죄가 악명높다.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어 방심한 틈을 노리거나 혹은 여행객의 시선을 끈 후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자주 있으므로 주의한다. 드문일이긴 하지만 간혹 사복 경찰이라고 속여 소지품과 신분증 검사를 요구하면서 돈이나 물건을 훔쳐가는 일도 있다고 하니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때문에 정부에서도 관광지 곳곳에 경찰을 배치하여 치안에 힘쓰고 있지만 우선은 본인이 잘 관리해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통화
화폐단위는 크라운(Crown. Kc로 표시)으로 2004년 2월 현재 미화 1달러는 25크라운이다.

비자
체코는 비자없이 우리나라의 유효한 여권만으로 입국이 가능하며 최대한 90일까지 체류할 수 있다. 다만 90일 이상 체류할 경우엔 입국 목적에 맞는 장기 체류 비자를 취득해야 한다.

철도
체코에서 이용할 수 있는 철도 패스는 몇가지가 있으므로 자신의 일정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여행하도록 한다.
• 체코 플랙시 패스
패스는 15일 이내에 3일동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1등석은 $68, 2등석은 $48이며 하루씩 연장할 때마다 1등석은 $9, 2등석은 $6의 추가요금을 내면된다. (2004년 3월 현재) 최대 5일을 더 연장할 수 있다.
12세미만의 어린이는 성인요금의 50%를 적용받으며 사용하지 않은 패스에 한해서 1년 이내에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받을 수 있다.

• 프라하 패스
체코의 국경에서 수도인 프라하까지 왕복이 가능한 프라하 패스가 있다. 경제적이지만 반드시 유레일 패스나 내셔널 패스와 같이 구입해야 한다. 7일이내 왕복시 2등석 성인요금이 $40이며 26세미만은 $35이다. 좌석 예약은 별도로 패스 구입과 상관없이 별도로 해야 한다.

• 동유럽 패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의 철도 시스템을 1개월 동안 정해진 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1등석과 2등석으로구분되며 5일권이 기본이며 여기에 하루씩 최대 5일을 추가할 수 있다.
1등석 5일권은 $226, 2등석은 $160이며 하루 연장할 때마다 1등석은 $26, 2등석으 $19을 추가로 지불한다. (가격은 2004년. 미국 달러 기준)

4계절이있는 온대기후로 해양성과 대륙성의 혼합형으로 온화한 겨울과 무덥지 않은 여름을 지닌 지역이다. 프라하는 북위 50', 동경 14', 해발 210m , 연강수량 485mm, 연평균기온은 1월의 최저온도 -2'c, 7월의 최고온도 20'c 이다.

시차 : -8시간



▶ 부르노 [Brno]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지(체크어로는 체스코모라프스카 비소치나)의 동쪽 기슭, 스브라트카 강과 스비타바 강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체크에서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며 모라비아 지방의 전통적인 중심지이다. 시 북쪽에 동굴·석굴·협곡으로 유명한 모라비아 카르스트가 있다. 고대 무역상들의 교차로로 수세기에 걸쳐 남북 유럽인들이 섞여 살게 된 브르노는 다뉴브 강 유역의 일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과 많은 역사적인 연관이 있으며 전후 브르노의 인구위 1/4인 게르만 민족이 빈으로 보내졌었다. 체코의 제 2 의 도시로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프라하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를 잇는 간선을 따라 발달한 도시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브르노는 과거 모라비아의 수도였으며, 체코 제 2의 도시이자 체코 동부 지방, 모라비아의 중심 도시이다. 뒤늦게 개발되어 1766년에 최초의 섬유공장이 지어졌지만 19세기 말에는 모라비아의 중심지가되었다. 여러 번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문화 도시로 번창하여 수많은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대학 등이 있다. 고대 무역상들의 교차로로 수세기에 걸쳐 남북 유럽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브르노는 다뉴브 강유역의 일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과 많은 역사적인 연관이 있으며 지리적인 이유로 브르노의 기후는 매우 온화하고 활동하기에 적당하다. 번화가인 마사리코바(Masarykova) 거리는 자갈길과 이곳 저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각 방면으로 달리는 시가 전차로 인해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정신이 없는 곳이다.

교육
문화, 학문의 중심지인 브르노는 푸르키네 대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산업
브르노는 뒤늦게 개발되어 1766년에 최초의 섬유공장이 지어졌지만 19세기 말에는 모라비아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육(푸르키네대학교, 1919 설립) 및 공업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국제무역박람회로 유명하다. 공업으로는 직물제조업과 야금업이 있다. ZB라고 하는 유명한 총(후에 브렌 기관총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엔필드사에서 제작)이 브르노에서 개발되었다.

대륙성 기후와 서안해양성 기후의 중간지대로, 연평균 기온은 8도에서 10도 1월 평균 기온은 -2도에서 4도, 7월은 18도에서 31도이다. 연간 평균 강수량은 모라비아의 브르노가 525mm이다.




▶ 프라하 [Praha]

동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는 나라가 체코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흔히 '백 탑의 도시', '유럽의 음악학원', '북쪽의 로마'등으로 불리어지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진 프라하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은 9세기말부터 천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신비의 고도이다. 작은 골목 하나 하나에도 중세의 향기가 베어있어 프라하를 여행하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오랜 역사는 도시 전체를 아름다운 건축물로 채우고 있다. 사실 프라하만큼 다양한 건축물을 볼 수 있는 도시도 드물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아루누보 등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제각기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어 도시 전체가 박물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적인 건물과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은백색 고대 건축물이 웅장하게 자태를 드러내며 넓은 광장으로 이어질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황금빛 돔과 유럽의 건축, 미술사를 대표할 만큼 프라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시내 중심을 구비구비 흐르는 블타바 강은 우뚝 솟은 프라하 성과 맞은편으로 펼쳐진 구시가와 대비를 더욱 강조해 준다. 구시가는 198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좁은 골목이 거미줄 처럼 얽혀 있고, 이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카를 다리가 있다. 블타바강과 어우러져 다리위에서 프라하 성쪽을 바라보는 풍경은 프라하 도시의 절정에 달하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에도 슬픈 역사가 있었다. 후스전쟁(15세게 초엽 종교개혁자인 후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황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 30년 전쟁,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불려지는 개혁운동 당시의 구소련,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입, 그리고 89년 구 체코슬로바키아 체제 전환인 '벨벳 혁명' 까지 프라하는 수많은 역사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 온 강인성이야말로 오늘날 프라하를 세계 관광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되게하는 것이다.

프라하는 한해 1억명 외국인이 찾아드는 세계 6대 관광도시로 2000년「유럽 문화도시」중 하나이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 특히 배낭여행자들이 사랑하는 도시가 프라하이다. 오스트리아의 빈과 더불어 관광수익으로 국가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1993년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분리 이후 개방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맥도날드, 버거킹, 밀카, 하겐다즈등으로 가득찬 시내는 온통 서구화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서방의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베트로가 다니지 않는 변두리로 나가보면 프라하의 또다른 얼굴, 사회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교육
체코에는 3개의 종합대학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프라하 찰스 종합대학교(Charles University of Praha)가 이 곳 프라하에 자리잡고 있다.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학으로 1348년 룩셈부르크가의 카를 4세가 설립한 것으로, 설립 당시에는 파리대학을 모방하여 신학, 법학, 의학, 철학의 4분 과제를 채용하였으며, 보헤미아·바이에른, 폴란드, 작센에서 모인 교사조합을 중심으로 한 4개의 국민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1409년에 일어난 후스파 전쟁의 여파로 독일인 교사와 학생 일부가 라이프치히로 옮겨 감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 1882년 체코대학과 독일대학으로 분리, 1920년 체코대학이 챨스대학으로 개칭되었으며, 나치스 지배 때에 폐쇄되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분할되면서 독일대학은 폐지되었다. 이후 16개 학부와 13개소의 부설 연구소를 두고 있는 중부 유럽 최대의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프라하 시내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이 대학교 건물은 650년 전의 건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체코의 주요한 문화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학교에는 4백여 만 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고, 중앙도서관과 학부도서관 등 469개 도서관, 연간 4백여 종의 연구서적을 출판하는 부설 출판 부, 내·외국인의 어학지도를 위한 어학 연구소 등이 개설되어 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이 대학에 한국어 과도 있다는 것이다. 1, 3, 5학년 총 30여명의 외국 학생들이 우리 한국어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수학하고 있다. 이들도 입학시험에서 한국에 대한 역사, 정치, 지리 등의 기초 테스트를 통해 입학한다. 프라하에는 챨스 종합대학교 외에도 프라하 경제대학교, 프라하 화학 공과대학교, 프라하 미술대학교, 프라하 음악, 연극, 영화대학교가 있다.

산업
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가 된 프라하는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공업도시로서의 프라하에는 100여개의 기업이 있고 전국 공업생산의 10%가량을 생산한다. 주요한 것은 기계공업으로, 국영기업의 CKD(전기기관차 등)와 테슬라(모터, 방송관제) 등이며 인쇄 공업도 중요하다. 식품 공업으로는 스미호프의 맥주, 프라하 햄이 유명하고, 그 밖에 의복, 제지, 화학(주로 타이어) 공업등이 영위되고 있다. 농업은 프라하 북쪽 엘베 강 유역과 블타바 강 유역 및 모라바 강 저지에서 가장 활발하다.
주요 작물로는 사탕무, 밀, 보리, 감자, 귀리, 호밀, 아마, 채소 및 사료용 옥수수이다. 보헤이마 북부는 홉으로 유명하며, 남서쪽의 구릉지대, 북동부 지역에서는 임업도 활발하다. 돼지, 소, 양, 가금류 등이 사육된다. 프라하의 특산물로는 크리스털 제품(보헤미안 크리스털)과 맥주가 손꼽히고 있다.

프라하는 또한 90년대 중반부터 관광대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해 1억 여명의 외국인이 드나들고 있다. 95년 체코 국경을 넘은 외국인 9,800만명 가운데 관광객은 1,550만명. 85 ∼ 97년 관광수입은 연평균 29억달러.(약 3조 3,000억원) 체코의 총 수출 대비 17%, GDP의 6.3%이다. 99년 1 ∼9월 관광수입은 25억달러. 98년 동기 대비 9%가량 줄어, 총수출의 12.8%, GDP의 6%를 차지한다. 세계 6대 관광도시로서 체코의 관광산업은 앞으로도 더욱 밝아질 전망이다.


기후는 복잡하지만 대체적으로 온화한 해양성 기후이고,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습도가 낮은 편이며 동쪽으로 갈수록 거친 대륙성 기후가 강하게 나타난다.
프라하의 겨울은 온화하여 1월 평균 기온이 -3℃이며 눈이 많이 내린다. 여름에는 따뜻하여 7, 8월 평균기온이 약 18℃ 정도이다. 프라하의 봄 축제가 열리는 5월이 여행의 최적이기다. 산악 지방이 많아서 평균 고도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높은 450m에 이른다. 연평균강수량은 500 ∼ 700㎜이다. 큰 면적을 차지하는 원시림이 목재 수요와 경작 때문에 훼손되어 왔지만 삼림지대는 여전히 체코 공화국 지형의 특징을 이룬다.


공항안내
프라하에는 루지니에 Ruzyne 국제 공항이 있다. 프라하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공항이다. 출발 및 도착 홀이 있는 1층에는 관광안내소, 환전, 렌터카, 항공 회사 등의 카운터가 늘어서 있으며 키오스크나 꽃가게, 여행사, 신용카드의 현급 지급기도 있다. 2층에는 레스토랑과 카페테리아, 선물 가게가 있으며 화장실은 2층과 지하에 있다. 지하에는 샤워 시설도 갖추고 있다.
모든 국제항공편은 루지니에 공항에서만 착륙을 하는데 전 세계 20여개의 항공사들과 취항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프라하까지 직항 편은 없지만 2004년 5월 대한항공이 프라하를 취항할 예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프랑크푸르트나 파리, 암스테르담등을 경유하여 이용한다.

공항에서 시내로의 교통수단은 시내버스, 공항버스, 택시등 3가지를 이용할 수 있다. 119번 버스가 터미널 빌딩 정면을 출발하여 시내의 데이빅카Dejvicka 지하철 역 사이를 운행하는데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데이빅카는 A라인의 종점으로 이곳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프라하 중심지로 향하면 된다. 버스-메트로 구간이 도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며 도심에서 공항을 갈때도 반대로 하면 된다.
공항버스는 구 체코슬로바키아 항공에서 운영하는 CAS이다. 터미널 빌딩 정면에서 출발하여 데이빅카를 경유하여 슈페르마 다리를 지나 레볼루치니 거리에 위치한 CSA의 터미널 블타바 터미널까지 운행하고 있다. 터미널 앞에서 시가전차로 갈아탄 뒤 처음 정류장이 공화국 광장이다. 매일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30분정도 소요된다.
택시는 터미널 빌딩 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으나 외국인에게 부당한 요금을 요구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버스
버스와 트램은 프라하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된다. 우선 버스는 지하철이나 트램이 가지 않는 곳까지 운행하고 있으며 승차권은 지하철 자동 판매기나, 담배 판매소, 신문 판매대에서 판매하고 있다. 프라하 시내는 도로 폭이 좁을 뿐만 아니라 배기 가스로 인한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시가지 중심부로 향하는 버스가 없다. 따라서 교외로 이동하지 않는 한 버스를 이용할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버스의 발착지는 대부분 지하철이나 시가 전차역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교외로 나갈 때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체코에서는 버스가 버스 터미날에 도착했다고 해서 모두 올라 타지 않는다. 시간을 맞추어 운전사가 승차 위치에 버스를 이동했을 때 올라타면 된다. 버스와 트램이 같은 티켓을 사용할 수 있다.

프라하 시내를 종횡을 달리는 교통 수단 중 하나가 트램이다. 시가전차의 정류장에는 정류장의 이름과 그곳을 통과하는 시가 전차의 노선번호, 노선도, 시각표가 적혀있다. 노선도에는 정류장 이름이 모두 기재되어 있으며 현재 위치에는 언더 라인이 그어져 있다. 노선에 따라서는 하차할 때 체코어로 정류장 안내 방송을 하지만 지도나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 트램도 티켓에 펀칭을 해야하는데 시가전차나 버스 모두 차 안에 설치되어 있는 개찰기를 이용한다. 트램은 3~4분 간격으로 지하철과 교차가 되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다.

프라하로 입국하는 버스 편은 유럽 여러 도시에서 출발하고 있다. 암스텔담은 EURO LINES에서 운행하는 국제선 버스로 19시간 걸리고 파리는 17시간정도 걸린다. 운행 간격은 시즌에 따라 다르다.

전철
프라하의 시내 지하철은 주요 관광지에 잘 연결되어 있다. A 녹색, B 노랑색, C 빨간색, 세가지의 노선이 있고, 05:00 ∼ 24:00 사이에 운행된다. 노선도나 역 출입구 표시 등도 색깔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금방 구별할 수 있다. 지하철의 출구는 Vystup, 갈아타는 곳은 Prestup이다.
플래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몇 개의 기둥이 서 있는데 허리 높이에 붙어 있는 노란색의 작은 상자가 개찰기의 역할을 한다. 정면의 틈새를 통해 표를 수평으로 넣으면 소리가 나면서 사용 개시 시각이 새겨지는 형태이다. 사용개시 시각으로부터 60분이 유효 시간으로 그 시간 동안에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승하차할 수 있다. 1회 승차에 표 1장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며, 같은 표로 지하철에서 시가전차나 버스로 갈아타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의해야 할 것은 구 시가지 주변의 역인데 도로 폭이 좁은데다가 자연경관을 鰻≠?않으려는 배려에서 역 출입구가 건물의 1층 부분에 있어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지하철 마크가 있는 간판을 보고 이용해야 한다.

철도
체코는 유레일 패스가 통용되지 않는다. 대신 체코 안에서 사용되는 체코 플렉시 패스와 체코 국경부터 프라하까지 왕복으로 이용할 수 있는 프라하 패스(Prague Excursion Pass)가 있다.
프라하까지 올 수 있는 프라하 패스는 7일이내 왕복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1등석은 성인이 $55, 2등석은 $40이며 26세 미미만은 1등석은 $45, 2등석은 $35이다. 12세 미만의 어린이는 성인 요금의 50%를 적용받으며 사용하지 않은 티켓만 6개월내에 환불이 가능하다. (2004년 3월기준)

택시
관광명소만을 이동하는 것이라면 지하철이나 트램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택시를 이용하게 될 경우가 있다면 유명 관광지나 공항 등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는 바가지 요금을 씌우는 일이 많으므로 주의한다. 택시는 미터제로 요금을 내기도 하고 장거리의 경우 장소를 말하고 흥정을 하기도 한다.

기타
프라하는 지하철Metro, 트램Tramvaj, 버스Autobus등이 시내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어느 교통수단을 이용하든지 요금은 동일하며 표도 공통으로 사용된다. 시내의 신문 가판대, 키오스크, 자동 판매기, 호텔안내 창구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프라하성을 제외한 주요 관광지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티켓은 지하철, 트램 등을 타기 전에 반드시 펀칭을 해야 하는데 시가 전차나 버스의 경우에는 차 안의 손잡이에 설치되어 있는 개찰기를 이용한다. 지하철의 경우에는 플래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몇 개의 기둥이 서 있는데 허리 높이에 붙어 있는 노란색의 작은 상자가 개찰기의 역할을 한다.
티켓 검사는 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데 이때 무임승차로 적발되면 벌금을 내야 한다. 특히 역 출구에서 실시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표는 출구를 나올 때까지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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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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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여자, 예술, 역사가 아름다운 곳이며, 많은 매력으로 우리들을 유혹한다. 이탈리아 작가 루이지 바르찌니는 이탈리아 매력을 '이탈리아는 욕망이 없는 사람에게 욕망을, 스스로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는 삶의 진정한 양식은 진지한 목표를 세워놓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라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아프리카대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지중해를 향해 남동 방향으로 1,200km로 뻗어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을 포함한 남부유럽의 반도국가로서 정식 명칭은 이탈리아 공화국(Republic of Italy)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상업을 중심으로 도시 문명이 발달하였다. 옛날의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했던 로마시대의 번영을 기억하게 한다. 북쪽으로는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가 이웃나라이다. 동쪽으로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발칸 반도와 남쪽에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와 마주하고 있다. 많은 섬과 이탈리아의 아펜니노 산맥이 뻗어 형성된 장화 모양의 반도와 섬으로 구성된다.

항공
우리나라에 이탈리아로 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항공편으로 현재 인천-로마 구간을 대한항공이 직항으로 운항하고 있다. 그 외 유럽 대도시를 경유하여 로마나 밀라노등으로 여행할 수 있다.

훼리
터키나 그리스등에서는 페리를 이용하여 입국할 수도 있다. 유레일 패스 소지자는 할인 받거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구간이 있으니 잘 확인하고 이용한다. 소요시간이 길게 걸리는 구간이기는 하다.

면적 : 301,323㎢로 한반도의 1.4배

수도 : 로마

인구 : 58,147,733 (2007년 기준)

정치형태 : 공화제

종교 : 로마 가톨릭교 76.3%, 이슬람교 6.3%, 개신교 2.9%, 기타 14.5%으로 구성.

주요민족 : 이탈리아인 99.3%, 비 이탈리아인 0.7%, 그중 유럽인 0.3%, 아프리카인 0.2%, 아시아인 0.1%, 기타 0.1%로 구성된다.

주요언어 : 이탈리아어 94.1%, 사르데냐어 2.7%, 라이티아어 1.3%, 기타 1.9%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광지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

경제
이탈리아는 2차대전 전까지 농업에 기반을 두어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 발전이 늦었다. 1950년대 후에 급속한 발전으로 현재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4%에 불과하다. 주요 농장물로는 밀, 사탕무, 옥수수, 감자, 올리브, 와인 등이다. 이탈리아는 공업의 중심지로 황금의 사각지대라고 불리는 밀라노, 트라노, 제노바 일대의 북부지대에 밀집하여 있다. 철, 금속, 섬유, 화학, 전자, 자동차, 섬유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것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시칠리아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로 주요 에너지원으로 석유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구조로 인하여 북부와 남부의 경제수준 차이을 보여 남부에 수조의 리라을 지원하고 있는 형편이다.이탈리아는 1980년 이후에 급격한 경제성장을 보여 세계에서 5번째이다.

기후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반도국으로 남과 북의 차이를 보인다. 여름은 두 지역 모두 덥지만 남부는 덥고 건조한편이다. 북부는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중남부와 섬은 해양성 기후를 보이고 있는데, 여름에는 강우량의 양이 거의 없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다. 겨울에는 북부지역이 상당히 춥고, 남부와 시칠리아, 사르디냐는 북부와는 달리 온화하다. 북부는 알프스산맥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남부는 지중해와 접하고 리구리아 해안은 산맥의 영향으로 따뜻한 기후를 보인다. 시칠리아 섬은 아프리카 바람의 영향을 받아서 아열대 기후로 여름철은 덥다.

강수량은 연평균 600-1,000mm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증가한다. 강수일수는 계절적으로 편중되지는 않았으나 주로 가을에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햇볕이 강렬하나 습기가 없어 지낼만하다. 로마의 경우 우리 나라의 서울의 기후와 비슷하지만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은 보다 더 온화한 편이다.


간단한 현지어
현지어 : Ciao 챠오
의 미 : 안녕하세요.

현지어 : Grazie mille 그라지에 밀레
의 미 : 대단히 고맙습니다.

현지어 : Scusi 스쿠지
의 미 :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

현지어 : Di niente 디 니엔때
의 미 : 잘 모르겠습니다.

현지어 : Non fa niente 논 파 니엔때
의 미 : 괜찮습니다

방문적기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는 3-5월과 9-10월로, 이 때의 날씨는 온화하고 비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좋은 기온을 보인다. 이시기에는 우리나라 봄옷과 가을옷을 준비하여 가져간다. 여름에는 기온이 높기 때문에 여름옷인 반 소매, 반바지를 준비하고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는 긴 소매도 한 벌 정도 가져가고, 선글라스, 모자 등도 준비하도록 한다.
겨울에는 중북부 지방의 기온이 떨어지고, 햇빛도 나지 않고, 비와 눈이 내리기 때문에 두터온 스웨터, 재킷같은 긴 소매를 준비하고 우비나 우산 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주의 할 것은 교회에 들어 갈 때에는 노출이 심하지 않은 옷을 입어야 한다.


역사
180년에 로마 제국이 탄생하면서 브리타니아로부터 아프리카와 유프라테스 강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거대해진 몸집으로 395년에 동ㆍ서로 분열되었다. 4-5세기 이민족의 침략으로 서로마 제국은 붕괴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뒤 이탈리아는 동로마 황제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면서 비잔틴 제국이 되었으나 롬바르드족ㆍ프랑크족ㆍ사라센족ㆍ게르만족에게 침입으로 중앙권력이 상실되었고, 프랑크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반도는 소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탈리아는 수세기 정치적인 분열을 이루었지만 13-16세기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에서 상업도시를 이루면서 서구의 문화적 중심지를 이룬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는 뛰어난 예술성을 보였고, 현재까지 그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 당시 도시국가의 군주들은 정치적 대결의식을 자제하였고 학자와 예술가들은 르네상스문화의 발전을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5세기말에 프랑스의 침입을 받은 후 155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당한다. 카를의 손을 거쳐 이탈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가 18세기 초에 이탈리아 북부를 대부분 장악할 때까지 지배하였다. 그밖에 지역은 자치권을 유지하였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이탈리아의 신흥시민계급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1831년 복고체제를 맞서기 위하여 카르보나리당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이탈리아의 독립을 향한 운동을 펼친다. 이러한 운동은 오스트리아의 무력개입으로 진압되지만 마차니가 이끄는 청년 이탈리아당의 모태가 된다. 19세기에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군주인 사보이 가문의 노력으로 이탈리아 통합운동이 일어났고, 프랑스의 지원으로 피에몬테인들은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통치로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은 통합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1866년에 베네치아, 1870년 로마 교황령이 합병되면서 하나의 통일 국가를 달성한다. 통일 후 이탈리아는 온건개혁노선의 우파와 급진공화주의자 마치니의 계보를 있는 좌파간의 싸움을 일으킨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제1차 세게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 빼앗겼던 옛 영토를 되찾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경제적 불안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으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1922년 왕의 명령에 따라 내각을 조직한 무솔리니는 사회당과 공산당을 배제시켰고 왕과 대자본가의 지지를 배경으로 독재체재를 이룬다.
1922년 무솔리니는 왕의 명령에 의하여 내각을 조직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을 배제시키고 왕과 대자본가의 지지를 배경으로 독재채제를 구축한다. 1936년에 로마-베를린 동맹을 맺었다. 1937년 국제동맹의 탈퇴와 동시에 독일ㆍ일본과 방공협정을 맺는다. 이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자리 매김 한다. 그러나 군비가 잘 갖추어진 상태로 지중해상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패전을 거듭한다. 1943년 7월 친정세력의 쿠테타에 의해 붕괴되었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합류하여 독일군과 싸웠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의 명예를 떨쳐버리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해에 국민투표를 실시하면서 왕제를 폐지하고 1947년에 소집된 제헌의회가 신헌법을 채택함으로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공휴일/축제
1월6일- 주현절

2월말-3월초
카니발(Carnevale) 재의 수요일 전 10일 동안 많은 도시에서 카니발이 펼쳐진다. 베네치아 카니발이 제일 유명하지만, 토스카나의 비아레죠, 토리노 근교의 이브레아 등 다른 지방에서도 개최된다.

월요일 3월/4월- 부활절

4월
성주일(Settimana Santa) 이 기간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중요한 축제가 열린다. 특히 시칠리아에서는 화려하면서도 음울한 전통축제가 열린다. 아씨지의 성주일 의식에는 수천명의 순례자들이 모인다.

4월25일- 해방 기념일

5월1일- 노동절

8월15일- 성모 마리아 승천일

11월1일- 만성절

12월8일- 성모수태일

12월25일
크리스마스(Natale) 크리스마스 전 몇 주 동안에는 여러 가지 퍼레이드와 종교행사가 많이 열린다. 교회마다 정교하고 아름답게 예수 탄생 장면을 꾸미는데, 특히 나폴리 교회의 화려한 장식이 유명하다.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축일

국제전화
이탈리아 공중 전화 부스는 SIP며, 주황색은 동전 정용이며 카드, 동전, 카드 겸용 전화도 있는데 카드 전용전화기는 점점 늘고 있다.
00+82(한국 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수신자 요금 부담을 이용할 때에는 172-1182을 이용한다.

유용한전화번호
▣ 한국 대사관 (로마)

주소 Via Barnaba Oriani 30, 00197, Roma, Italy

전화번호 : 06-808-8820/1, 06-808-8875 Fax: 8068-7794


▣ 긴급연락처

경찰: 113

민간, 군인경찰: 112

소방서 : 115

구급차: 118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을 사용하고 있으나 오래된 건물이나 지방에서는 125V을 사용하는 지역도 있으므로 전기 제품을 사용할 경우 전압을 확인한 후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치안
이탈리아는 소매치기와 도둑이 많다. 중북부의 작은 도시에서는 소매치기를 찾아 볼 수 없으나,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등에서는 범죄 발생률이 빈번하게 발생되기 때문에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 또한 이탈리아의 악명 높은 집시들은 관광객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집시들 주위에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역에서는 소매치기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현금을 보이거나 가방을 뒤로 매는 것은 범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도록 한다.

통화
유로화 사용.

현지로 전화
- 이탈리아 국가번호 39
*시내전화를 걸 때도 지역번호를 눌러야 한다.

- 주요도시 지역번호

제노바(Genova) 10
밀라노(Milano) 2
나폴리(Napoli) 81
로마(Rome) 6
소렌토(Sorrento) 81
베니스(Venezia) 41


철도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이탈리아 철도패스는 이탈리아 내에서 정해진 기간동안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그리스까지 가는 배를 이용할 때도 할인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다
이탈리아 철도패스는 2개월 동안 4일 사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성인이 1등석은 $239, 2등석은 $191 이며 26세 미만은 $160에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 하루씩 최대 6일 더 추가할 수 있으며 추가시 1일당 1등석은 $24, 2등석은 $19을 더 내야 한다. 만일 2명~5명이 같은 일정으로 여행하면 일반 요금보다 할인된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2004년 3월 현재)

패스는 철도 이용시 요금과 좌석등급에 관한 사항이며 열차에 따라서는 반드시 예약이 필요한 구간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구간이라 해도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시즌에는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패스는 발권 후 6개월 이내에 사용해야하고 1년 이내에 사용하지 않은 패스에 한하여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이 가능하다.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반도국으로 남과 북의 차이를 보인다. 여름은 두 지역 모두 덥지만 남부는 덥고 건조한편이다. 북부는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중남부와 섬은 해양성 기후를 보이고 있는데, 여름에는 강우량의 양이 거의 없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다. 겨울에는 북부지역이 상당히 춥고, 남부와 시칠리아, 사르디냐는 북부와는 달리 온화하다. 북부는 알프스산맥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남부는 지중해와 접하고 리구리아 해안은 산맥의 영향으로 따뜻한 기후를 보인다. 시칠리아 섬은 아프리카 바람의 영향을 받아서 아열대 기후로 여름철은 덥다.

강수량은 연평균 600-1,000mm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증가한다. 강수일수는 계절적으로 편중되지는 않았으나 주로 가을에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햇볕이 강렬하나 습기가 없어 지낼만하다. 로마의 경우 우리 나라의 서울의 기후와 비슷하지만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은 보다 더 온화한 편이다.


시차 : -8시간



▶ 나폴리 [Indianapolis]

나폴리는 그리스어로 '신도시'라는 뜻이며 기원전 7세기경에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에 매료된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왔다. 고대 로마의 황제르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정열과 감동이 서린 땅이다. 이탈리아 캄파니아주의 주도로서 로마, 밀라노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만 안쪽에 위치하는 천연의 양항으로, 배후는 베수비오 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시가는 동쪽으로 차차 높아지는 경사지에 입지하고, 토양은 비옥한 화산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아열대산인 오렌지의 가로수가 끝없이 연속되는 모래 해안은 배후의 베수비오 화산과 더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 예로부터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유명한 속담이 전해올 만큼 세계적인 관광도시 중 하나이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서, 최저 평균 기온이 8℃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연교차가 적은 점에서도 이탈리아의 도시 중 기후가 가장 좋다. 여름은 건조하나 사실상의 건기는 1개월 미만으로 농업용수 문제도 다른 도시에 비해 절실하지 않다. 아주 드물게 눈이 내리는 일도 있으나. 연중 온난하여 주변 일대에는 오렌지, 올리브, 토마토 등 과실이 많이 산출된다




▶ 로마 [Rome]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는 테베레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 우며 로마시대에는 일찍이 고대 세계의 중심지였고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긴 시간 동안 유럽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여러 왕국과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대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로마에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전설이 있다. 이것은 BC 753년 로마의 건설자 로물루스와 쌍둥이 형제 레무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레아 실비아와 전쟁신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나 티베르강에 버려졌는데 이들을 늑대가 데려다 길렸다고 한다. 이 들은 암늑대의 젓을 먹고 자라났으며 그 후에 누가 이 도시를 통치할지를 두고 싸우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물르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왕이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그 후 역사속에서 로마인은 궁지에 몰리면 야수처럼 저항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암늑대의 이야기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그 후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계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가 되어 고대 로마 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이 곳은 카미돌리오 언덕, 첼리오 언덕, 아벤티노 언덕, 에스퀼리노 언덕, 퀴리날레 언덕, 비미나레 언덕으로 처음 집단이 이주하게 되면서 테베레강의 왼쪽에 있는 일곱언덕이 로마의 중심 거주지가 되었다. 로마인의 도시건설은 우선 공공 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를 벽돌로 벽을 쌓고 교회당과 대하수도를 둘러싼다. 또한 로마 유적의 특징은 완벽한 복원이라든가 화련한 치장을 하지 않고 시간이 흐름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신적, 물질적 중심지로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겼으며, 인류의 예술 및 지성사에 커다란 금자탑을 쌓아올린 도시이다. 현재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로마는 1,000년 이상 유럽의 모든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제국의 영토 축소, 경제의 마비, 정치적, 군사적 무력 등으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 세력으로서의 힘을 잃었지만 입법, 교육, 건축 도시로서 전 유럽에 계속 빛을 발했다. 6-15세기에 교황들의 입지는 때로 위태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전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킨 도시로서 영광을 누렸고, 궁극적으로는 부와 힘을 되찾았으며 또다시 미, 지혜,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

영원의 도시, "로마" 신화 속의 신들을 보낸 다음 유일신의 대리인이 살던 도시, 또한 그 신과 대립했던 르네상스의 도시, 로마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하나의 낱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이 교차하는 로마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도시이다.

산업
로마의 공업은 대부분이 교외부에 있는 중소규모의 공장이 주축이 되어 지역적 수요를 채우기 우한 정유 시설 이외에는 중화학 공업은 없다. 로마시에는 상당히 많은 농지가 있으나 대도시 근교치고는 조방적인 방목지가 많으며 다만 피우미치노의 간척지에서 집약적인 원예농업이 이루어지는 데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기능은 북이탈리아에 집중되고, 전국적 규모의 은행, 회사 등은 수도 로마가 아니라 밀라노에 본사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정치적, 행정적 기능은 로마에 집중되어 정부 및 반 정부기관에 관계하는 방대한 제 3차 산업 인구를 주도하고 있다.

또 로마의 주요 산업으로는 엔지니어링, 전자, 화학, 인쇄, 의류, 식품가공업 등이 있다. 고용을 창출하는 주요산업은 건설업, 관광업, 영화제작업으로, 영화제작소들은 로마에서 몇 Km 외곽에 떨어져 있는 치네치타(영화의 도시)에 몰려 있다. 관광업으로 연간 1,000만 이상의 관광객이 밀려들어 호텔, 상점 기타 관광관련 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로마의 여름은 종종 24℃가 넘는 무덥고 건조한 날씨를 보이나, 포넨티노(24Km 떨어진 테레니아 해에서 불어오는 서풍) 때문에 오후에는 서늘해지는 경우가 많다. 연중 강우량은 약 840mm이며, 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평균 기온은 약 7℃로 온화한 편인 겨울은 가끔씩 서리와 가벼운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를 보이기도 하고 트라몬타나(거센 북풍)가 자주 분다.

여행계획
로마는 현대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이며, 또 그 오랜 역사를 반영하여 고대로 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오페라극장, 국립도서관 외에 콜로세움, 카라칼라 황제 목욕탕 등 유적이 많다. 이 밖에 베네치아 광장, 바티칸 광장, 포폴로 광장, 베르베리니 광장으로 둘러싸인 지대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에 걸친 도시계획에 의하여 건설된 지역으로 이곳에는 많은 역사적 건조물이 집중되어 있다.

또, 나보라 광장, 에스파냐 광장 등의 관광 할 곳도 많다. 근대미술관, 보르게세미술관, 로마국립박물관, 카피톨리노 박물관등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고 이 밖에 성당과 옛 건조물에는 많은 미술품이 보존되어 있다. 고대로마 유적은 카피톨리노, 팔라티노, 카일리오, 아벤티노, 에스퀼리노, 비미날레, 퀴리날레 등 7개 구릉지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곳에 포룸 로마눔이 있다. 또한 로마는 교회, 궁전, 옛 유물들만큼이나 분수로 유명한데 300개 이상의 역사적 분수들로 더욱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로마의 강변지대 또한 유명한데 이 곳에는 캥거루 코처럼 생긴 2.4Km의 테베레 강 유역에는 테베레 강 평원의 모든 역사적인 지역들이 모여 있다. 테베레 강 좌안에는 캄푸스 마르티우스,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포룸 보아리움, 포룸 홀리토리움이 있고, 테베레 강 우안에는 팔라초 디 주스티치아, 산탄젤로 성,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묘, 바티칸시티의 출입로, 트라스테베레 등이 있다. 캥거루 코의 아래에는 테베레 섬이 있다




▶ 밀라노 [Milan]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산업 도시 밀라노는 예술과 학문에 많은 역점을 두었던 피렌체나 볼로냐와는 달리 예로부터 산업이 발달했다. 룸바르디아 지방 밀라노 주의 도시이자 주도이다. 이 곳은 부유하고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파리를 제치고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인정받은 밀라노의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에 비해 부지런하고 꼼꼼하며 말수도 적다. 프랑스와 스위스 등 다른 나라와 가깝고, 이탈리아 남부와도 교통이 원활하게 연결되어 일찍부터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였다.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밀라노 시민들은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밀라노가 수도로 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밀라노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경제 중심도시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통일국가 성립 이후 경제, 문화, 사상의 분야에서 선두적 역활을 했다. 이외에도 밀라노 시민들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지역주의에 근거하여, 또한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특성을 들어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데에는 로마의 역사적, 신화적 상징적,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 통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산업
밀라노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경제 중심도시이다. 근대공업은 19세기 후반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섬유공업의 바탕 위에, 1880년대에는 알프스 산록의 수력발전을 기초로 하여, 금속공업, 화학공업, 기계공업 등의 중화학공업이 발달함으로써,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공업지대는 시의 북부, 그리고 북부교외에서 서부, 동부교외로 발전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공업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특히 화학, 섬유, 기계공업이 두드러 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폭격의 피해를 입었으나, 중앙역을 중심으로 한 지대는 근래 고층건물이 줄을 지은 오피스가로 변모되고, 지하철도 정비되어,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인 상공업도시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상업도시로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개인소득이 높은 도시이며 세계 패션의 중심지이다. 이러한 것들이 밀라노에서의 생활을 아주 비싸게 하고 있다. 의류, 가구, 가정용품등은 고급품일수록 지나칠 정도로 비싼 것이 많고 가격이 싼 것을 찾으면 품질이 형편없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 베네치아 [Venezia]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지방과 베네치아 주의 행정 중심지이자 주요해항지로서 한때 지중해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해상공화국의 요지였고, 오늘날에는 주로 운하, 예술, 건축과 독특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알려져 있고 또한 프랑스의 파리와 더불어 유럽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도시로 꼽히고 있다.

유서 깊은 베네치아 시는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 약 51Km로 뻗은 초승달 모양의 석호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베네치아에 있는 많은 운하는 118개 섬 사이를 이어주는 수로 역활을 한다. 이 섬들 사이로 중심 수로인 그란데 운하가 2개의 넓은 만곡부 주위를 흘러 도시를 통과한다. 그란데 운하 주위에는 많은 대저택, 교회, 해상주유소 등이 있다

산업
베네치아는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의 경제의 중심인 북부평야를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항은 서부의 철도역에 인접한 스타지오네 마리티마이나, 20세기에 들어와 대안에 공업항으로 마르게라가 건설됨으로써, 마르게라, 메스트레 등 대안 지역이 근대공업지대로 발전하였다. 대안부의 공업은 화학, 기계공업이 중심이며, 공업항을 포함한 베네치아항의 취급물량은 이탈리아 제3위를 차지한다. 또한 베네치아 주민의 대다수가 관광업과 유리, 레이스, 직물 생산 같은 관광 관련 산업에 종사한다.




▶ 볼로냐 [Bologna]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볼로냐현의 조도이며 부유하고 우아하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도시이다. 아펜니노산맥 북쪽 기슭에 있으며 로마시대부터 있는 에밀리아 가도에 있으며 정치적인 중심지로서 위상도 높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도시이다.
또한 이 곳은 중세 이래 이탈리아 중북부의 문화와 사상을 이끌어 왓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한 도시이다. 귀족적인 피렌체와 경제적으로 발달한 밀라노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져 도시 전체가 붉은색이며 조하를 이룬 건축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볼로냐 대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요리로 유명하다.

교육
볼로냐 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있는 국립 종합대학이다. 11세기에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설립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도고 유명한 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12-13세기에 로마 법과 교회법 연구의 본산이엇으며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특별한 학교부지나 학생기숙사가 없었기 대문에 같은 국가 출신의 학자들은 자유단체, 즉 길드를 조직하여 시민으로서 주장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받으려 했다. 볼로냐에서 생긴 조직은 근대 대학의 모델이 되었다. 1158년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볼로냐의 학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곧 모든 이탈리아 대학교들에 확산되엇다. 볼로냐의 학생들은 대부분 성인이었다.
처음에는 로마법과 교회법만을 학문으로 여겼기 때문에 교회나 국가의 각 부서에서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 즉 부주교, 학교장, 성당 참사회원 및 공무원들이 모여들었다. 1200년경에 의학, 철학(자유과) 학부가 생겼다. 17세기에 들어서 과학학부가 생겼으며, 18세기에는 여자들의 입학이 허락되었고 여자교수도 등장했다. 한동안 쇠퇴하다가 1860년 재조직되어 이탈리아의 주요대학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오늘날은 법학, 정치학, 문학, 철학, 의학, 공학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산업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은 주로 주변의 비옥한 평야에 기반을 둔 농업에 의존했다. 지금도 중요한 농산물시장이자 식품가공 중심지이면서 한편으로는 중요한 공업요지로 발전해왔다. 주요공산품으로는 농기계, 전기 모터, 오토바이, 철도장비, 화학약품, 신발 등이 있다. 이 지역은 공산주의 운동세력이 강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계속해서 공산주의자들이 지방행정을 장악해왔다.




▶ 소렌토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에 있는 도시로 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하고, 배후에 오렌지, 레몬 등의 과수원이 펼쳐진 산지를 등진 경승지로서, '돌아오라 소렌토' 등의 나폴리 민요로 알려진 곳이다. 거리의 중심은 타소 광장이며, 이 고장 출신의 시인 T. 타소의 기념비가 있다.
시내에는 15세기에 재건된 성당이 있고, 박물관에는 고고학 관계 및 17, 18세기 나폴리파 미술 관계 소장품이 풍부하다. 나폴리와 소렌토의 사이에는 열차 및 연락선이 왕래하고, 나폴리만의 또 하나의 관광지인 카프리섬과도 연락선이 왕래된다. 거리 주변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다. 그 밖에 포도주, 올리브유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산업
소렌토는 수공예 목조품과 치즈, 올리브유, 리몬첼로라 불리는 지방 특산품을 제외하고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 시칠리

시칠리아는 "흰 대리석"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이다. 주변의 작은 섬과 함께 이탈리아의 한 주를 형성하며, 주도는 팔레르모이고, 북동단은 메시나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 남단에 접한다. 이 곳의 지형은 아펜니노산맥의 연장인 펠로리타니, 네브로디, 마도니에의 3개의 산지가 북쪽에 줄지어 있고 동쪽에는 이탈리아 최고봉인 에트나화신(3.295m)이 솟아 있다. 에트나산에는 늦은 봄까지 눈이 남아 있어 이것을 이용해 세계에서 최고로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지와 구릉지대의 대부분은 에느타산을 제외하고는 석회암질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식물생장을 보기 어렵다. 비옥한 충적평야는 시메토강 유역의 칸탈리나평야와 '황금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팔레르모 주변에 한정된다.

산업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정부는 남부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시칠리아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여 농지개혁에 따른 대토지소유의 농민에 대한 배분과 토지개량, 공장유치, 석유산업의 개발, 도로 정비 등을 시행하였다. 그 성과로서 젤라에는 석유화학단지가 건설되고,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에는 공장 지대가 형성되었으나, 농업에서는 감귤류, 포도의 재배 외에는 생산성이 매우 낮다. 이탈리아 본토와는 메시나해협의 페리보트, 팔레르모-나폴리의 항로, 팔레르모 및 카타니아-밀라노, 로마의 공로에 의해서 연결되며, 섬 안에도 철도망, 도로망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세제스타, 세리순테 등의 그리스 유적, 팔레르모등의 여러 도시, 에트나산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과 독일, 이탈리아군의 전쟁터가 되어 많은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다. 또, 메시나를 비롯하여 시칠리아 각지는 역사상 몇 번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기록이 있다.




▶ 제노바

이탈리아 최고의 항만시설을 가지고 있는 제노바(Genoa/Genova)는 시의 뒤편에 산이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미로를 연상시키는 좁은 도로가 교차하는 구시가가 있으며, 아름답고 멋있는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항구의 동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관광객들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서인지 관광객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지도를 보고 있거나 길을 물어보면 항상 친절하게 다가가고 길을 알려주는 따뜻하고 열려있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예전 강대한 해운국으로 유명했던 국가의 후손들은 항구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탈리아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곳 제노바는 조선업이 주요공업이며 그밖에 석유·섬유·철·강철·자동차·종이·설탕·시멘트·화학제품·비료·전기제품·철도장비·선박장치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 지기도 하며, 이탈리아의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는 북부 이탈리아 고등교육의 중심지인 스투디디제노바대학교(1471 설립)를 비롯해 여러 상과대학과 항해학교가 있다.




▶ 폼페이

이탈리아 나폴리만 연안에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루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된 고대도시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잇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나, 제정 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있다. 오늘날의 폼페이 시는 고대 도시의 동쪽에 있으며, 순례요지인 산타마리아델로사리오 바실리카가 있다.




▶ 피렌체 [Florence]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의 주도이다. 영어로는 플로렌스라고도 한다. 이 곳은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강의 양안,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근교의 아르노강 연변의 저지는 신흥공업지대로 상공업의 중심을 이루며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한다.
또한 이 시는 공화국,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다. BC 1 세기경 로마의 군사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으로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금융·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다. 이곳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했던 천재들을 통해 이 시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을 들 수 있다.


산업
피렌체는 포강 유역, 로마냐 지방, 움브리아 지방, 남부 토스카나 지방에 이르는 무역의 중심도시로서 서비스 부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과거부터 지속된 은행, 금융업이 계속해서 발전을 이루고 있으며, 관광업이 시 경제활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품인 유리제품과 도자기, 귀금속제품, 가죽제품, 예술 복제품, 연철 및 짚 제품, 고급 의류와 구두 등의 제조업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도시 자체가 제조업의 중심지는 아니며, 대부분의 공업활동은 교외에서 이루어진다.

도심은 지금도 로마 시대 자치도시의 구조에 따라 세워져 있다. 옛 상업 중심지에는 현대 시민생활의 핵심부인 레푸블리카 광장이 들어섰다. 이제는 공예품이 시 전역에서 유통되고 있으나 지금도 전통적인 장터가 남아 기능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그 중 하나인 폰테 베키오(오래된 다리)는 금·은 세공인, 보석상들이 모여 있는 상업 요지이다. 피렌체는 활발한 문화의 중심도시로서, 정기적인 전시회와 예술제 등을 개최한다. 산업의 대부분을 중소기업이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정밀기계, 출판업, 화학산업, 텍스타일, 제약업, 제련 등에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여행상식
▣ 여행상식 1
피렌체에는 여행 안내소가 세 곳이 있다. 기차역에 있는 여행안내소(☎ 212 245, FAX 238 12 26)는 16번 플랫폼 맞은편에 있으며 지도와 간단한 시내 안내 지도를 얻을 수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하며 일요일은 오후 6시 30분까지 한다. 여행안내소 주사무소는 Via Cavour 1/r에 있으며 (☎ 290 832, FAX 230 20 33)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근무한다. 마지막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여행안내소는 (☎ 230 21 24, FAX 230 20 33) 피렌체 시의회서 운영하며 피렌체 시내 관광 안내와 토스카나 지방의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여행상식 2
두오모 광장과 공화국 광장, 기차역 주변 등에는 집시풍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소지품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복잡한 버스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고, 벼룩 시장 주변에서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야바위꾼이나 춤추는 종이인형 장사가 많은데 대부분 눈속임이므로 사지 않도록 한다. 한밤중이나 사람이 없는 거리를 여성 혼자서 걷는 일은 삼가야 한다.

▣ 즐길거리/활동거리 1
일년 내내 Corso Italia 16에 있는 코뮤날레극장(Teatro Comunale)에서는 콘서트, 오페라, 무용공연이 펼쳐진다. 공연 시즌은 9월에서 12월, 1월에서 4월이다. 문의는 극장의 예매 창구해서 하면 된다. (☎277 92 36)이다. 산타 크로체 부근의 산시모네 광장 Astro Cinema에서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밤 영어로 된 영화를 상영한다. 아르노 남쪽 카르미네광장 내 나이트 클럽 La Dolce Vita는 외국인, 이탈리아인 모두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 피사 [Pisa]

피사는 토스카나 지방 피사 주의 주도로서 리구리아 해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아르노 강을 끼고 있으며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피사는 피렌체와 제노바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고, 13세기 제네바에 패한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였다. 중세에는 해양도시 국가로 군사적, 상업적 입지가 강력했지만 1509년이래 피렌체에 정복되고 나서는 아주 소박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피사는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국제고딕양식의 대표적 미술가인 일 피사넬로(1395-1455), 이탈리아 최고의 고딕조각가 조반니 피사노(1250-1314) 등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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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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